예년에 비하면 다소 늦은 시점에서 지난 한 해의 영화를 결산하고 있습니다. 한 해 한 해 지날 때마다 참으로 다사다난했다는 말이 습관적으로 나오기는 합니다만 2010년은 제게 특히나 격동의 한 해였습니다. 틀림없이 좋은 일도 많이 있었겠지만 (예를 들어 쿠로사와 아키라 감독 100주년 기념 회고전 덕분에 배우 나카다이 타츠야 선생님을 실제로 뵐 수 있었다든가.) 지금 뒤돌아보노라니 당장 제 인생에 큰 파문을 일으켰구나 싶은 사건은 대체로 울적하거나 한심한 일입니다. 부디 올해는 제가 좀 괜찮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삶이 흔들리거나 할 때면 놓기 쉬운 것 중 하나가 취미생활입니다만, 제게 영화는 이미 취미의 영역을 벗어났는지, 오히려 한 해 동안 저를 꾸준히 지탱해준 유일한 대상이 바로 영화였습니다. 사는 게 힘들다고 해서 영화 보기를 멀리한 적은 없는데, 그게 때로는 약간의 죄책감을 낳기도 했지만 (그러나 영화를 벗 삼아 살다 보면 그런 죄책감에도 익숙해지기 마련입니다.) 결국에는 제 삶에 항상성을 마련해준 고마운 존재가 되어주었지요.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을꼬. 글 써서 갚고, 관객 하나라도 더 꾀어내서 갚고, 그래도 다 못 갚겠지만 그렇게라도 갚아봐야겠다고 다시금 다짐해봅니다. 실은 지금 이 목록을 두 번 지우고 다시 쓰고 있는데, 어떤 영화를 선정해야 하나 고민해서가 아니라 각 영화에 대한 단상이 지나치게 길어져서 그렇습니다. 최근 몇 달 동안 워낙에 영화감상문을 안 쓰다 보니 속에 쌓인 말이 많아서인지 매 작품에다가 영화감상문 하나씩을 달아놓고 있더군요. 그것도 나름대로 묘미는 있겠으나 연말정산의 도리는 아니다 싶어서, 정 그렇게 할 말이 많으면 따로 감상문을 쓰자, 해놓고 좀 더 짧게 다시 쓰고 있습니다. 모쪼록 그 수다가 나중에 감상문 쓸 때도 이어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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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해 영화 결산은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해오던 일입니다만 듀게에는 정기적으로 올린 적이 없으니 약간의 설명을 덧붙여야 할 듯합니다. 저는 동시대 영화를 열심히 찾아보는 관객이 아닙니다. 나는 극장에 안 가, 뭐 그런 식으로 살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옛 영화에서 얻는 감흥이 훨씬 크더라고요. 더구나 극장에 드나들면서 영화를 좋아하게 되지도 않았기 때문인지, 저는 일반 극장에서 개봉하는 작품이든, 시네마테크나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작품이든, DVD나 블루레이로 본 작품이든 딱히 구분하지 않습니다. 아, 물론 극장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필름으로 본다는 것의 체험이 각별하다는 점 자체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서울아트시네마나 한국영상자료원 단골손님… 2010년에는 별로 안 갔으니 그런 말도 못하겠습니다만, 아무튼 시네마테크 가는 일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특히 자연스러운 태도 아닐까요?) 하지만 DVD나 블루레이로 본다고 해서 집에서 TV 혹은 컴퓨터로 보는 상황은 아니고, 운 좋게도 제법 번듯한 상영실에서 스크린에 프로젝터로 영사해서 보고 있는 처지인지라 제게는 극장 감상과 홈비디오 감상 사이에 엄청나게 큰 차이는 없습니다. 간절히 보고 싶은 옛 영화를 국외판 타이틀을 통해 처음 만나게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인 입장에서는 홈비디오 체험이 극장 체험보다 중요하고 가치 있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걸 부정하기도 어렵고요.

 그런 까닭에 이 목록은 그 해에 한국에 개봉되었거나 홈비디오 시장에 출시된 타이틀로만 한정하지 않고 그냥 제가 한 해 동안 본 영화를 몽땅 모아놓고 경합을 벌여 선정한 목록입니다. 유일한 제한이라면 이전에도 본 적이 있으나 다시 본 영화는 해당이 안 된다는 것. 이 제한 때문에 종종 맛보곤 하는 재발견의 기쁨을 풀어놓을 수 없다는 점은 아쉽지만, 베스트 목록이란 언제나 제한 조건과의 타협에서 나오기 마련이니까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요.

 그리고 저는 영화를 열여섯 편을 꼽습니다. 열 편은 너무 적은 데다 닫힌 느낌이 들어서, 11부터 20까지의 숫자를 하나씩 놓고 보니까 다른 건 다 날렵하거나 상징성이 강하거나 한데 16은 어쩐지 둔탁하고 재미가 없어 보이는 게 그 중 가장 인기가 없을 듯한 숫자여서 골랐습니다. 언젠가는 열여섯 편을 다 못 채우는 해가 찾아올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그런 적이 없었고, 적어도 2010년은 아니었으니까 일단은 계속 그렇게 할 참입니다.

 베스트 목록의 기준은, 그래 봐야 사적이고 모호한 기준이겠지만, 저는 예전에는 제가 영화라는 예술을 받아들이는 데에 영향을 미친 작품을 중심으로 꼽곤 했습니다. 말이 쉬워서 베스트지 사실 거칠게 나누자면 그 베스트라는 게 “훌륭한 영화”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좋아하는 영화”를 가리키는지에 따라 성격이 판이하게 갈릴 수 있는데, 저는 그중에서 “훌륭한 영화”를 선택하는 편이었다는 거죠. 다행히 제 경우에는 “훌륭한 영화”와 “좋아하는 영화”가 겹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그래도 한 해에 한두 편 정도는 딱히 애정이 생기고 자주 보고 싶어지지는 않더라도 하여튼 그 성취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영화가 들어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몇 해 전부터는 “좋아하는 영화” 쪽 사정도 많이 봐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거꾸로 딱히 훌륭하다거나 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정이 가는 작품을 넣는 비율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2010년 같은 경우는 서두에 언급했듯이 인생에 파고가 좀 많았던 터라 은근히 “좋아하는 영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곤 하더군요. 그렇다고는 해도 영화가 전반적으로 엉망인데 몇몇 부분이 특별히 내게 소중한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데가 있어서 마음에 남았다, 하는 정도로까지 사적인 경우는 단언컨대 없습니다. 그 정도로까지 저 자신을 봐주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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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서는 순위가 아니라 저와 만난 순서대로입니다.

 캡처는 제가 소장하고 있는 DVD로 직접 했습니다. 캡처 대신 스틸 사진이나 예고편 동영상을 올린 건 블루레이로 가지고 있어서 캡처는 못하거나 (블루레이 드라이브가 없거든요.) DVD 혹은 블루레이를 손에 넣지 못한 경우입니다.







스파이 (Spione, 1928)

 제게 2010년의 영화인을 단 한 명만 꼽으라면 바로 프리츠 랑입니다. 랑의 영화는 예전부터 종종 봤는데 항상 인상적인 장면은 있어도 전반적으로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죠. 장르적 요소는 많은데 장르적 재미에는 소홀한 느낌이었습니다. 심지어 〈M〉(1931)을 보고도 시큰둥했습니다. 그러다가 작년에 〈프랭크 제임스의 귀환〉(The Return of Frank James, 1940)과 〈한밤의 충돌〉(Clash by Night, 1952)을 보고서야 이 사람은 표면적인 서사 밑에 깔아놓은 구조를 중심으로 영화를 만들었던 거구나 하는 일말의 이해가 생겼고, 2010년에 마침내 이전에 보지 못했던 여러 작품을 챙겨보고 또 예전에 무시했던 작품들을 다시 본 끝에 대역전, 지금은 열렬히 좋아하는 감독이 되었습니다. 모르던 영화 세계를 알게 된 정도가 아니라 전에는 보고도 몰라놓고는 깎아내리기만 했던 세계를 뒤늦게 재발견했다는 점에서 극히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영화감상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영화에 대한 최종적인 선고를 피하고 끊임없이 감상자로서의 자신을 의심하는 태도라는 점을 새삼 되새겨봅니다.

 그런 랑 재발견의 선두주자가 바로 〈스파이〉입니다. 〈스파이〉는 인터넷 등지를 뒤져보면 대체로 제임스 본드 류 첩보 액션 영웅 영화의 원형이라고 언급되는 작품입니다. 잘 생긴 남자 스파이 주인공, 그를 유혹하는 여자 스파이, 비밀 기지를 가진 악당 두목, 신기한 소도구, 암살, 추격전, 실용성은 떨어져도 볼거리는 있는 살해 방법 등이 골고루 쏟아져 나오는 첩보영화니까요. 하지만 〈스파이〉는 1인 주인공 내지 ‘우리 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단선적인 첩보영화의 틀을 훌쩍 뛰어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다양한 스파이 집단이 서로 정보를 전달/지연/방해하면서 만들어내는 망 자체거든요. 모두가 모두를 자신이 설계해 놓은 망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하고, 또 망의 구조를 역추적해서 상대를 분쇄하려고 하는데, 그 첩보와 방첩의 연쇄를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면 거의 ‘벡터의 영화’라고 부르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랑은 겹겹이 쌓인 협잡 너머로 ‘대체 이 네트워크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 혹은 그런 존재가 있기나 한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첩보 영화이고, 현대 사회의 “소셜 네트워크”에 관한 우화이고, 나아가 관객이 영화와 관계 맺는 방식 자체를 스스로 되짚어보는 영화에 대한 영화입니다. 그 성취가 (어쨌거나 최고작 대접을 해줄 수밖에 없는) 〈M〉을 능가한다고 말할 수는 없더라도, 그에 부끄럽지 않은 깊이를 지닌 동시에 한층 오락적인 즐거움도 놓치지 않으니, 기꺼이 몇 번이고 다시 보면서 찬탄을 거듭할 따름입니다.






웨건 마스터 (Wagon Master, 1950)

 설마 〈역마차〉(Stagecoach, 1939)와 〈내 사랑 클레멘타인〉(My Darling Clementine, 1946)을 몰아내고 ‘최고의 존 포드 서부극’ 자리를 차지하는 작품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웨건 마스터〉는 포드가 여타 작품과 달리 사적인 마음가짐으로, 만들고 싶어서 만든 작품인데, 흔히 영화감독이 흥행 걱정 없이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었다고 하면 주제나 소재 면에서 야심으로 가득 찬 결과물을 예상하기 마련이지만 포드는 도리어 그 어느 때보다도 간결하고 순수한 서부극을 내놓았습니다. 핍박을 피해 두 카우보이의 인도하에 황야를 건너 새로운 땅으로 가는 모르몬교도 일행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플롯을 의도적으로 희미하게 만든 채 거의 다큐멘터리 같은 태도로 사람들의 여정을 따라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생의 감각은 그 어떤 포드 영화보다도 진실하고 감동적입니다. 그냥 서부 공동체가 정답게 살아간다는 차원이 아니라, 상황이 어떻고 심정이 어떻든 무슨 일이 있든 간에 하여튼 지금 우리는 이 자리에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거의 뤼미에르 형제 영화가 처음 나온 시절에나 느꼈음 직한, 카메라 앞에서 생동하는 대상 자체가 주는 경이가 모든 장면에 스며 있습니다. 영화의 이런 속성이 바로 모든 비평을 무력하게 만들고 또한 영화를 마법 혹은 마약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일 테죠. 포드는 원래 그런 마법을 잘 끌어내는 감독이기는 하지만 〈웨건 마스터〉는 그중에서도 정말 경이로 가득한 마법이었습니다.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 (華岡靑洲の妻, 1967)

 마침내 말로만 듣던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의 영화를 서울아트시네마의 특별전을 통해 만나고 나니 어째서 그 숱한 일본의 명감독 명단 안에서 이 사람의 이름이 언급되는 경우가 그렇게 드물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영작 열 편을 다 보고 나서 쿠로사와 아키라와 데이빗 크로넨버그와 이마무라 쇼헤이와 김기영과 D. H. 로렌스를 합쳐 놓은 듯한 작품을 빚어내는 괴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후 한국영상자료원을 통해 다시 감상한 뒤에도, 그리고 지금 다시 되새겨보아도, 이 무지막지한 수사를 수정해야 할 필요를 못 느낍니다. 논쟁적인 요소로 가득한 상황의 한복판으로 성큼 들어가서 모든 사회적 관념과 규범을 벗겨 내고 벌거벗은 인간 자체를 찾아내고야 마는 그 집요하고 냉철한 시선이라니.

 마스무라는 그 어떤 장르, 그 어떤 소재를 택하더라도 배우의 연기, 화면의 구도, 편집 방식, 음악의 사용 등 영화의 모든 요소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조율해서 ‘마스무라의 영화’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범주 안에 넣어버리는 한편, 같은 시선을 끊임없이 변주해 쌓아가면서 깊이를 더하는 부류의 감독이기 때문에 어느 한 작품만 꼽는 것은 그리 적절한 태도는 아닙니다. 오즈 야스지로나 홍상수에 대해 그렇게들 말하듯, 한 편 한 편이 좋기는 하지만 여러 편을 함께 놓고 볼 때 새삼 거대함을 깨닫게 되는 예술가랄까. 하지만, 굳이 하나를 꼽자면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로 하렵니다. 일단 명문 의가(醫家)에 시집 온 며느리가 명망 높은 의사인 남편의 의술 발전을 돕는다는 명목하에 시어머니와 암투를 벌이며 점차 질식해간다는 설정이 마치 쿠로사와의 〈붉은 수염〉(赤ひげ, 1965)에 대한 마스무라의 대답처럼 느껴져서, 두 세대의 감독이 하나의 대상을 두고 문답을 벌이는 듯한 감흥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회적 관념에서 벗어나 내밀한 속내를 드러낼 풀어낼 최소한의 공간을 마련해두는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이 작품은 언제나 외부의 시선을 개입시키면서 개인의 정념 따위는 말라비틀어지게 하는 압도적인 폐쇄성을 제시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마스무라 영화의 한 극단 같아요. 정반대로 개인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과격한 해방을 꿈꾸는 〈눈먼 짐승〉(盲獸, 1969)과 같은 극단도 있지만, 아무래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되새기게 되는 쪽은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가 보여준, 사회에 완전히 파묻혀 아예 자기 손으로 자신을 지워내기까지 하는 개인의 모습입니다.






인간 사냥 (Man Hunt, 1941)

 실은 2010년에 본 프리츠 랑 영화를 죄다 하나씩 목록에 올릴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선택과 집중을 요하는 베스트 목록이다 보니, 독일시절 영화 하나, 미국시절 영화 하나를 넣는 정도로 만족해야겠습니다. 미안해요, 〈도박사 마부제 박사〉(Dr Mabuse, der Spieler, 1922), 〈메트로폴리스〉(Metropolis, 1927), 〈진홍의 거리〉(Scarlet Street, 1945). 그래도 다들 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베스트 목록에 올라가 있을 법한 영화니까.

 〈인간 사냥〉은 랑이 미국에서 만든 첫 번째 반 나치/참전 독려 영화입니다. 나치는 인류의 자유를 침해하는 사악한 놈들이니까 우리가 박멸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펴는 일종의 선전영화라고 할 수 있겠고 DVD에 수록된 부가 영상을 보거나 이런저런 평을 읽어봐도 대체로 그런 맥락에서 받아들여지는 모양입니다. 뭐, 나치는 문화적으로 공인된 인류의 적이고 (다짜고짜 미워해도 죄책감이 안 생기니 참 편리합니다.) 랑 자신도 이 문제를 중요하게 여겼으니 그럴 법도 한데, 그렇지만 실제 결과물은 그렇게 간단하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에 영국인 대위가 히틀러를 저격하려다 붙잡힌다는 설정부터가 문제적이고, (정확히는 그가 정말로 저격을 의도했는가 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됩니다.) 여기서 시작된 기나긴 추격전을 도덕적 대결이 아니라 사냥꾼-사냥감의 구도를 통해 보는 랑의 태도는 대립하는 양자를 차이보다는 공통점이 많은 존재처럼 다룹니다. 이 구도 안에서 인간은 위장과 위선, 거짓을 통해 서로 이해하고 관계 맺는다는 아이러니가 드러나는 한편, 또 그로 말미암아 진심을 감추고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는 슬픔이 가슴 속을 절절하게 파고듭니다. 물론 이런 거 저런 거 다 빼놓고 그냥 보아도 긴박감 자체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좋은 스릴러이기도 합니다. 도입부의 히틀러 저격 장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하면 과장일까요. 음, 아니에요, 전혀 과장 아닙니다.






영체 (The Entity, 1981)

 영화광 마틴 스콜세지는 언제나 믿을 만합니다. 그가 2009년에 The Daily Beast의 지면을 통해 선정한 열한 편의 가장 무서운 공포영화 목록에 들어 있던 이 작품은 2010년의 가장 근사한 공포영화 체험을 제공해주었습니다. 오프닝 크레딧이 지나가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공에게 갑자기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벌어지고, 이후 두 시간 동안 영화는 주인공이 자신을 괴롭히는 미지의 존재로부터 도망치거나, 그것과 타협하거나, 그것의 정체를 알아내어 맞서 싸우려고 하는 시도만으로 버티고 나갑니다. 섣불리 규모를 키우거나 새로운 국면을 제시하는 대신 이미 숱한 공포 소설 및 영화에서 단물을 다 빨아 먹었다 싶은 소재를 붙들고 냅다 들이 파는 집요함이 있고, 또 그 집요함을 풍부한 아이디어가 받쳐주고 있습니다. 괜찮아 보이는 아이디어 하나에 의지해서 시작했다가 금세 밑천을 드러내고 조루하는 공포영화들은 이 영화에게 배우시라! 시드니 J. 퓨리 감독은 대표작 〈입크리스 파일〉(The Ipcress File, 1965)에서와 마찬가지로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율을 최대한 활용하는 한편 카메라를 기괴한 각도로 기울여 찍는 일을 주저하지 않으면서 손쉬운 깜짝쇼로 일관하는 대신 공간 자체에 으스스한 기분을 부여합니다. 게다가 80년대 특유의 근사한 아날로그 특수 분장 및 효과까지 넘쳐흐르니 저로서는 그저 감읍할 뿐이었습니다. 묵직한 사회비판을 가하는 공포영화도 좋고 실존적인 공포가 화면에 넘실대는 공포영화도 좋은데, 그런 작품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와중에 가끔 이렇게 너무나 담백하고 순수해서 아름답기까지 한 공포영화를 만날 때면 이거야말로! 싶습니다.






성난 불사조 (จีจ้า ดื้อ สวย ดุ, 2009)

 2010년에도 한편에서는 거대한 규모로 전국 상영관을 휩쓰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편에서는 형식적으로 마지못해 소수 극장에 내걸렸다가 개봉 소식이 귀에 들어올 즈음에는 이미 사라진 영화들이 많았습니다. 시네큐브나 스폰지하우스, 아트하우스 모모, 시네마테크 부산, 광주극장 등을 통해 소개되는 작은 영화들, 예컨대 〈전생을 기억하는 분미 아저씨〉(ลุงบุญมีระลึกชาติ, 2010), 〈예언자〉(Un prophète, 2009), 〈옥희의 영화〉(2010)처럼 그래도 나름대로 팬도 있고 비평도 있는 등 작은 행복을 누렸던 영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일반 극장에서도 소위 예술영화전용관이라고 하는 곳에서도(이 표현은 그저 “예술영화전용관”이라는 표현이 별로라서 쓴 것이지 해당하는 극장들에는 어떠한 억하심정도 없습니다.) 환영받지 못했고 소수 열혈팬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경우조차 드물었고 주간지인 『씨네21』도 미처 다루지 못했으며 사실은 애초에 배급사에서도 내놓은 자식 취급을 한 거나 다름없는 영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대체로 오늘날 한국 관객들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아시아 국가의 액션 영화들이 이런 수모를 쉬이 겪는 듯합니다. 대충 걸었다가 내리고 DVD나 풀자는 식인 듯한데 사실 DVD 시장도 이미 죽은 거나 다름이 없으니 대체 어쩌다가 수입이나 되었는지 궁금하기까지 합니다. 어쨌든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됐으면 인기작 취급을 받았을 텐데, 어이하여 이런 수모를 겪고 있니, 하고 보듬어 주고 싶은 이런 영화의 대표적인 예로 태국 권격 액션 영화 〈성난 불사조〉가 있습니다.

 물론 소수영화의 권익 보호와 균등한 기회 제공 차원에서 나온 선정은 전혀 아닙니다. 개봉 첫 주에 서울의 단 한 개 상영관(그게 또 이상하게 시너스 명동.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통계를 보면 무려 전국 31개 관에서 상영되었고 1921명이나 보았다는데,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 영화 극장에서 보신 분들 번개라도 쳐보고 싶은 심정입니다.)에서 점심시간 아니면 심야로 하루 두 번 상영이라는 악랄한 조건을 헤치고 가서 친구들과 더불어 거의 전세 낸 듯한 기분으로 상영관을 차지한 채 〈성난 불사조〉를 본 경험은 제게 2010년 최고의 영화 감상 체험 중 하나였습니다. 토니 자 데뷔 이래로 태국 권격 액션 영화가 맞으면 죽을 것만 같은 생짜 액션을 뇌리에 각인시켰기 때문인지, 오히려 좀 더 화려한 기교를 뽐내는가 하면 종종 와이어도 쓰는 〈성난 불사조〉 같은 액션영화는 주연배우 지자 야닌의 데뷔작 〈초콜릿〉(ช็อคโกแลต, 2008)에 비하면 신통찮은 반응을 얻은 듯합니다만, 저는 액션 연출 아이디어의 다채로움과 리듬에서 이쪽을 더 높게 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각본이 좋습니다. ‘뭐? 여자들을 납치해서 그 고통의 체취를 채취하여 마약을 만들어 파는 악의 무리를 취권으로 응징하는 전직 밴드 드러머 소녀가 나오는 영화의 각본이 좋다고?’라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성난 불사조〉는 그 말도 안 되는 설정 안에 자기 완결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액션과 긴밀히 연결함으로써 단순히 화려한 동작을 구경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정말로 액션 저변에 깔린 논리와 심리에 몰입하게 합니다. 장르 영화로서 자기만의 논리가 잘 구축된 소우주를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한 거죠. 그건 진짜로 용감한 장르 영화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밀크 (Milk, 2008)

 〈밀크〉는 분명히 개봉 당시에는 긍정적인 반응이 제법 있었는데 연말이 되고 보니 다들 어째선지 이 영화가 2010년에 소개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린 듯한데다 비평적 결과물도 거의 남아 있질 않더군요. 착하고 입바른 소리를 하는 뻔한 미국식 전기 영화니까 거스 반 산트가 최근 만든 “예술 영화”와는 달리 별로 할 말도 없다는 거냐! 하면서 괜히 혼자 열 내고 있습니다. (아니면 예쁘거나 서글픈 로맨스 영화가 아니라 대놓고 부르짖는 동성애 정치영화라서 별 인기가 없었다는 가설도 있지만, 그쪽은 너무 냉소적이니까…….) 〈밀크〉처럼 문제를 개념화, 단순화하지 않고 오히려 하염없이 복잡하면서 생기 넘치는 현실을 담아냄으로써 강력한 정치적 발언을 해내는 영화를 만나기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그리고 저는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어떻게 마이클 만이나 데이빗 핀처의 디지털 영화들처럼 그 자리에서 직접 함께하며 찍었다는 실재감을 얻어냈는지 의문입니다. 이미 화면의 질감부터가 70년대 샌프란시스코 동성애 공동체의 약동하는 분위기 안으로 들어서 있는 듯한 기분을 주거든요. 디지털의 도래 이후 특히 미국영화계에서는 〈씬 시티〉(Sin City, 2005)와 〈아바타〉(Avatar, 2009)처럼 이미지를 ‘그리는 영화’가 득세하는 가운데 그 반대급부로 다시 뤼미에르 시절로 돌아간 듯 영화의 즉물성을 회복하는 영화들도 도래하고 있는데, 〈밀크〉는 필름으로 찍었음에도 그런 기분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정말로 카메라는 그냥 앞에 있는 사물뿐만 아니라 문화적 공기라는 것까지도 담을 수 있는 요물인 걸까요? 그것도 동시대가 아닌,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를 다시 불러들여서? 그게 가능해 보였기에, 하비 밀크가 보여준 희망을 지금 다시 믿고 따르는 일 또한 가능해 보였습니다.






화성 탐사 (Mission to Mars, 2000)

 설마 인제 와서 브라이언 드 팔마 영화를, 그것도 이름난 대표작도 아니고 (그런 영화들은 이미 다 봤죠.) 그가 만든 작품 중 상대적으로 시시하다고 평가받는 〈화성 탐사〉를 이 목록에 올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드 팔마 팬으로서 의무방어전을 치르듯 DVD를 구해놓기는 했는데 정작 보는 건 별로 내키지 않아 진열장에서 1, 2년은 묵히고 있었을 정도니까요. 그야말로 별 기대 없이, 그저 좋은 장면 한두 개 건지면 만족이라는 생각으로 보았다가 제대로 두들겨 맞고 혼난 경우입니다.

 드 팔마 특유의 서스펜스 스릴러나 SF영화로만 놓고 보면 〈화성 탐사〉는 썩 훌륭한 작품은 아닙니다. 물론 좋은 서스펜스 장면도 있고 우주 공간에 대한 묘사도 배경만 우주였지 사람들이 지구나 다름 없이 쏘다니는 여타 SF영화에 비하면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뿐이라면 더 나은 예도 얼마든지 있지요. 좀 이상한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 영화를 서부극 팬으로서 경애합니다. 저는 서부극의 위대함은 몇몇 작품이 실제 미국 서부 개척의 역사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가하고 있다든가, 아니면 서부라는 신화적 공간 안에 인간의 질서를 세워지면서 발생하는 조화와 균열을 다룬다든가 하는 거창한 주제의식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다만 아직 인간의 문제가 관념 안에 편입되기 이전의 어떤 원초적인 시공간 속에서 자기 인생을 자기가 직접 부딪쳐 살아가는 모습을 담을 수 있다는 데에서 나온다고 믿는 편입니다. “서부”라는 영화적 시공 자체가 위대하달까요. 이런 맥락에서 보면 매체를 통해 간접 전달되는 이미지와 실체 사이의 차이에 주목하곤 했던 드 팔마의 영화는 현대 사회에서 서부극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루는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화성 탐사〉는 불현듯 그 제약을 벗어던지고 지구 밖으로 나가 우주를 탐구하고 개척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원초적인 기원으로 되돌려 놓으면서 영화의 움직임, 인물의 움직임을 우주의 리듬에 맞추어 펼쳐냅니다. 그러더니 급기야 서부 사나이가 종국에는 저 서부를 향해 떠나듯/돌아가듯 우주 속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건 정말 위대한 서부극에서나 맛볼 수 있는 감흥이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드 팔마의 다른 대표작들이 주는 쾌락을 좋아하지만 〈화성 탐사〉야말로 그가 만든 가장 묵직한 걸작이지 싶습니다.






우게츠 이야기 (雨月物語, 1953)

 이런 목록에 올리기에는 참 새삼스러울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지만 저는 2010년에 처음 보았습니다. 이 영화를 본 건 한창 친구들과 더불어 스티븐 프린스의 The Warrior's Camera: The Cinema of Akira Kurosawa를 교과서 삼아 쿠로사와 아키라 영화를 몰아보며 공부하던 즈음이었는데요, 프린스는 저서를 통해 흔히들 “미국적” 내지 “할리우드적”이라고 깎아내리는 쿠로사와 영화의 양식이 얼마나 미국영화의 규범을 적극적으로 위반하고 있으며 일본 고유의 문화적 전통 연장 선상에 놓여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논증했고, 저는 그 주장에 설득당했습니다. 하지만 〈우게츠 이야기〉는 제게 바로 이 문제를 한 번 더 생각해 보도록 해주었습니다. 쿠로사와의 영화 스타일이 미국영화의 규범을 전제로 한 다음 그것을 적극적으로 위반하거나 변주하는 데에서 나왔다면 미조구치 켄지의 스타일은 기왕의 영화적 규범과는 아예 다른 새로운 방식이었고, 자동으로 “일본적”이라는 표현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가끔 영화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 자체가 만든 사람이 몸담은 문화적 정서를 기반으로 한다는 느낌이 드는 영화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종종 이 장면은 왜 이렇게 찍었으며 저 배우 연기는 왜 저런 방식인지, 나아가 애초에 사건에 대한 캐릭터의 반응이 왜 그런지 자체가 낯설어지고 심할 때는 아예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지요. (제게는 특히 장 르누아르 영화가 그렇습니다.) 〈우게츠 이야기〉는 그 정도로 낯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까운 문화권이기 때문일까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예상치 못한 정서를 끌어들이는, 그 정수가 제 앎의 바깥에 자리 잡고 있음을 직감케 하는 영화였습니다. 이를테면 약탈을 피해 산으로 달아난 마을 사람들, 혹은 새로 맞이한 남편 앞에서 춤을 추는 미지의 여인 주변을 부유하는 크레인 카메라가 주는 오싹한 아름다움을 표현해낼 언어나 지식, 또는 문화적 배경이 제게는 없습니다. 오로지 그런 순간이 제 뇌리에 꽉 박혀버렸다는 사실만이 확실할 뿐. 따라서 이 목록에 〈우게츠 이야기〉가 있는 것은 앞으로의 숙제를 되새기기 위한 선정이기도 합니다.






옴 샨띠 옴 (Om Shanti Om, 2007)

 2009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둠 2〉(Dhoom 2, 2006)를 통해 처음 인도 맛살라 영화(이 용어가 낯선 분들을 위해 아주 대강 설명하자면, 북인도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장르 혼합형 뮤지컬 영화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를 만나고 천지개벽 수준의 충격을 받은 뒤 맛살라 영화에 대한 매혹은 꾸준히 계속되었습니다. 〈옴 샨띠 옴〉은 우리나라에서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되면서 큰 인기를 끌었고 지금도 인도영화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권해지는 유명한 작품이라 새삼스러운 감이 있지만 그래도 명불허전인 영화에는 명불허전에 합당한 대우를 해줘야지요. ‘어떻게 내가 시시하고 얄팍한 연출이라고 생각하는 짓거리를 몽땅 하고 있는데 이토록 생기가 넘치고 진심이 가득할 수 있지?’ 하는 의문이 드는 영화라는 점은 〈둠 2〉와 마찬가지입니다만 (아마 앞으로 만나게 될 거의 모든 맛살라 영화가 마찬가지이리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단순하고 헐거운 액션 로맨스였던 〈둠 2〉에 비하면 윤회설을 끌어들여 만든 자기 지시적인 구조가 각본을 튼실하게 받쳐주면서 일종의 깊이와 품격마저 획득하고 있습니다. 또한 〈옴 샨띠 옴〉에는 일종의 영화 만들기에 대한 영화로서 인도영화에 대해 스스로 보내는 찬사가 가득한데, 이게 얄밉거나 꼴불견이기는커녕 맛살라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진심으로 영화 만들기를 즐기고 있는지가 확 와 닿아서 감동적이기만 합니다. 예를 들어 중간에 아예 인도영화계의 내로라하는 명배우들이 우르르 나와서 10분 가까이 “하늘의 별들이 지상에 내려왔구나.” 하면서 노래 부르고 춤추는 장면이 있는데, 영화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물론 이 모든 활력의 중심에는 두 주연배우 샤룩 칸과 디피카 파두콘이 있습니다. 둘은 연기자로서의 실력도 탁월합니다만 (특히 칸은…… 처음에는 그냥 과장된 코미디 연기를 하나 싶다가 차츰 연기폭을 넓혀가면서 정말 뭐든지 다 진실하게 표현할 수 있는 무서운 배우임을 증명합니다.) 무엇보다도 카메라가 두 사람의 얼굴을 잡는 순간이 나올 때마다 모든 심리적 거리감이 무너지고 무장해제 되는 기분이 듭니다. 단순히 배우들의 외모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물론 두 사람 모두 아름답고, 특히 파두콘은 여신 강림 수준입니다.) 그 얼굴이 하나같이 진심을 담고 있음을 확신케 하는 얼굴이라서 그렇습니다.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움직이게 하는, D. W. 그리피스가 만들어낸 클로즈업의 마법이 오늘날까지도 가장 잘 전승 되고 있는 곳은 인도인 모양입니다.






인간의 조건 (人間の條件, 1959-1961)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정갈하게 짜인 “웰메이드”를 기준으로 한다면 〈인간의 조건〉을 코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할복〉(切腹, 1962)이나 〈반역: 삼가 아내를 받다〉(上意討ち 拝領妻始末, 1967) 같은 작품보다 못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고미카와 준페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9시간 34분짜리 영화는 장편영화라기보다는 대하소설처럼 진행됩니다. 너무나도 긴 시간 동안 너무나도 많은 중요한 사건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는데, ‘이 정도로 힘을 줘서 치고 올라왔으니 슬슬 영화가 끝나겠구나.’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건만 그 뒤로도 영화가 계속 이어집니다. 400m 달리기 경주를 보러왔는데 갑자기 한 선수가 400m 달리기에 적합한 속도로 마라톤을 해버릴 때의 황망함이라고나 할까요. 워낙에 긴 영화라서 개봉 당시 3부작으로 나누어 3년에 걸쳐 공개되었고 저도 하루에 한 부씩 사흘 동안 나누어 보았습니다만, 그래도 클라이맥스다운 장면이 워낙 많다 보니 《반지의 제왕》 3부작처럼 중심 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에도 각 부가 저마다 기승전결 곡선을 정갈히 유지하고 있다는 기분은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건 그냥 사실 전달에 불과한 소리고, 실제로 그런 점을 들어 〈인간의 조건〉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관객이 있을지는 의심스럽습니다. 만에 하나 정말 그런 관객이 있으면 어떻게 인간으로서 그럴 수가 있느냐고 따져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보다 더 간절히 “휴머니즘”(이 얼마나 구닥다리 같은 단어입니까마는.)을 위해 만든 영화를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하염없이 장대한 규모, 그 안에서 단 한 번 흐트러지는 일 없이 옹골찬 연출, 차라리 군대에 다시 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몸을 내던지면서 연기한다기보다는 용케도 살아남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배우들, 그리고 애초에 이런 기획에 뛰어들어서 촬영을 준비하고 기어이 시나리오의 마지막 장면까지 필름에 담아서 편집하고 극장에 내걸고야 만 카메라 뒤의 사람들. 이 모든 요소가 9시간 34분 내내 눈앞에 “보입니다.” 그걸 보고 나면 이건 만들고 싶어서 만든 영화가 아니라 만들어야만 한다는 믿음으로 만든 영화임을 확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의 만주에서 살아가는 좌파 이상주의자 일본 청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식민지 노동 착취의 현장과 만주군과 소련군을 통과하면서 휴머니즘을 외치는 일본 영화, 그것도 전쟁 끝난 지 아직 15년도 안 된 상황에서 그 규모 때문에라도 대자본을 업고 만들 수밖에 없었을 일본 영화가, 과연 자신의 과거에 면죄부를 제공하는 수준을 넘어 일제에 침략당한 역사를 지닌 국가의 관객이 보아도 존중할 수 있는 발언을 하는 게 가능하겠느냐는 의문이 생기는 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지닌 신념은 기어이 그 의문을 넘어서고야 맙니다. 가장 순수한 선의마저도 오해하고 증오하게 할 수 있는 모든 정치적 이념 이전에 존재하는 인간을 위해 살아가자는, 너무나도 순진하고 고결해서 실제로는 없을 것만 같은 믿음을 살려내기 위해 만든 영화가 바로 〈인간의 조건〉입니다.






인셉션 (Inception, 2010)

 〈인셉션〉 이야기는 잘못 건드리면 또 왕창 길어질 수가 있으니 (이를테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그 뛰어난 기량을 갖추었음에도 “거장” 급으로 불러주기에는 언제나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거나 그의 영화에 대해 과대평가라든가 머리로만 영화를 만들었다든가 하는 식의 비판이 쉽게 나오고 있는 이유에 관한 이야기는 한 번 꺼내기 시작하면 끝이 없죠. 박찬욱 감독도 그렇고 더 멀리 가면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도 마찬가지 시비가 걸리는데, 이거는 그냥 ‘걔들은 인생을 모르고 기교만 알아서 깊이가 없다.’ 따위의 말로 넘어갈 문제는 아니고 이 사람들이 영화 만드는 방식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로 봐야……. 그것 보세요. 또 길어지니까 여기서 그만.) 조심해야겠습니다만 이번에 블루레이로 다시 보면서 보니 이 영화에 대한 제 애정은 크게 세 단계에서 작동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이게 근사한 강탈영화라는 거. 범죄자 무리가 저마다 특기를 살려서 스위스 시계처럼 맞아떨어지는 작전을 통해 목표를 쓱싹하고 나가는 상쾌함을 주는 영화 만나기가 참 쉽지 않은데, 바로 그 재미가 가득하다는 점이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한 단계 아래로 내려가면, 주인공들의 작전을 따라가는 과정과 영화의 조성 방식을 인지하는 과정이 일치하게끔 짜여 있기 때문에, 영화 속 이야기를 관객으로서 구경하는 대신 저 자신이 직접 인지하고 조합해서 만들어낸 자각몽처럼 받아들이게 된다는 황홀함이 있습니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일 수밖에 없지만 〈인셉션〉의 진짜 “인셉션” 목표는 관객인데, 그렇게 인셉션을 당한 관객은 피셔가 그러했듯 그 과정을 어디까지나 자신의 능동적인 판단으로 인지하게 된다는 거죠. 〈인셉션〉의 대단함은 “꿈 속의 꿈” 같은 컨셉이 아니라 그걸 스크린 밖으로까지 확장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제가 프리츠 랑에 빠진 나머지 지나치게 랑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여기서 놀란의 영화는 랑 영화의 구성 방식과 상당히 흡사하다는 첨언을 해두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저는 한순간의 판단으로 남에게 평생 남을 변화를 가져온 뒤 그 판단에 대해 괴로워하지만, 후회에만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선택을 받아들인 다음 아픔을 안고 계속 나아가는 주인공 코브의 이야기 자체에 감동합니다. 이 감동이 〈인셉션〉의 구조를 체화화는 과정에서 생겨난 감흥인지 아니면 제 사적인 체험과 결부된 감상일 뿐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영화의 결말이 보여주듯 그 또한 상관없는 일입니다. 이 영화를 체험한 이상 그건 제 감정이 되고 말았으니까요.






검우 (劍雨, 2010)

 영화의 팬 혹은 무협영화의 팬이라기보다도 무협소설의 팬으로서 이 영화를 꼽고 있습니다. 물론 영화로서는 별로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같은 시기에 개봉한 서극의 〈적인걸지통천제국〉(狄仁傑之通天帝國, 2010)과 많이 비교당했고 흥행성적은 서극 작품 쪽이 더 나았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각본의 짜임새, 배우 캐스팅과 연기, 무술 안무와 액션 연출, 음향 설계 등 모든 면에서 〈검우〉 쪽이 더 훌륭한 영화라고 봅니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원래 화면비인 2.35:1 대신 좌우가 잘린 1.85:1로 상영돼서 특히 액션 장면에서 다소 손해를 보았음에도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원래 화면비로는 이 영화를 본 적이 없네요. 유튜브에서 클립만 몇 개 보았을 뿐.) 하지만 만듦새만 놓고 보면 적당한 웰메이드 수준이라고 해도 무방할 〈검우〉를 2010년을 기리는 영화 중 한 편으로 꼽고 싶게 만드는 요인은 역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무협의 풍미를 다시 찾아주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웅〉(英雄, 2002) 이후 중화권의 소위 무협영화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대의와 국가와 스펙터클과 기타 등등 하여간 크면 좋다는 “갓질라”식 태도로 일관하는 통에 정과 의, 이기심과 질투가 들끓고 그것이 초식과 내공을 통해 표현되는 무림이라는 세계를 잊고 있었는데, 〈검우〉가 용케 그 세계를 되살려냈습니다. 창과 칼을 섞는 모습만으로도 모든 감정을 이야기하는 〈와호장룡〉(臥虎藏龍, 2000)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무협 장르의 전통적인 요소를 유지하면서도 인물 간의 감정을 더욱 섬세히 세속화하는 한편 택배, 은행 강도, 성형수술 등의 요인을 튀지 않게 옛 시대의 삶 속에 녹여내면서 일종의 수정주의적 접근을 가한 점 또한 효과적이었습니다.

 끝으로 한국에서 이 영화와 관련하여 부당하게 폄하당한 두 사람을 언급해두고 싶습니다. 한 사람은 공동 감독인 소조빈 감독. 한국에서는 연출보다는 제작에 더 많이 참여한 오우삼의 이름만이 강조되는 바람에 (심지어 엔딩 크레딧에 멀쩡히 공동감독이라고 뜨는데 한국어 자막에는 “감독 - 오우삼”이라고만 나왔죠.) 묻히고 말았습니다. 모쪼록 근사한 다음 작품으로 자기 몫의 명예를 찾으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한국어 자막 번역자인 홍주희 씨. 이분의 악명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고, 〈검우〉의 경우 중화권 영화를 영어 자막을 토대로 중역했다는 사실에 대한 불만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후자는 홍주희 씨의 문제가 아니라 외국영화의 번역에 충분히 신경 쓰지 않는 한국 수입배급업계의 관행을 문제 삼아야 할 것이고, 번역의 질만 놓고 보면 홍주희 씨는 영어 자막을 토대로 했음에도 한자 문화권을 충분히 의식하고 반영하여 좋은 번역을 선보였습니다. 개선할 대목이 없지는 않더라도 그 정도면 충분히 존중할 만한 결과물이었습니다.






호우시절 (2009)

 저는 사적인 감흥에 의지해서 영화를 판단하는 태도를 꺼리는 편입니다. 내가 이런 걸 좋아하는데 그게 이 영화에 나오니까 이 영화는 좋은 영화, 또는 이 영화랑 아주 비슷한 일이 나한테 있었는데 그게 떠올라서 좋은 영화, 뭐 그런 식의 태도 말입니다. 물론 영화 감상은 감상자의 주관이 개입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더라도 영화와 감상자 양쪽이 모두 주체가 되어 나누는 대화가 되어야지 영화가 감상자를 받아주는 시녀 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간단히 말해서 ‘내가 돈을 내고 본다고 해서 내 XX멍을 핥아주는 영화는 필요 없다.’ 혹은 ‘내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고 해서 좋은 영화는 아니다.’라고 하겠습니다.

 〈호우시절〉은 그런 제가 영화 베스트 목록을 꼽아본 이래 처음으로 사적인 경험과 연관지어 선택한 작품입니다. 그 사적인 경험을 풀어놓을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제 경험과는 별개로 만듦새 자체도 말끔했습니다만 아직은 제게 너무 가까이 있는 영화인지라 그에 관한 판단은 보류하는 편이 옳겠습니다. 그런 영화라면 이런 공개적인 목록에 포함시키지 말고 그냥 혼자 간직하고 있으면 될 게 아닌가 하는 고민도 해보았지만 속에 담아두고만 있기에는 워낙 마음에 들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즉, 그냥 이 목록을 영화 열여섯 편 목록이라기보다는 열다섯 편 더하기 한 편 목록으로 생각하셔도 되겠습니다.






번개 (稲妻, 1952)

 정리해놓고 보니 일본영화가 다른 때보다 특히 강성했던 한 해였습니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영화는 몇 년 전에 대표작인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女が階段を上る時, 1960)를 본 적이 있고 그것도 무척 좋았지만 〈번개〉를 보고서야 이 사람 장난 아니구나, 앞으로 좀 더 많은 작품을 찾아봐야겠다, 는 결심을 했습니다. 가족들이 둘러앉아서 메밀국수 먹는 장면이 명장면인 가족드라마다 어쩐다 하는 소갯글을 읽고 간 터라 적당히 잔잔하고 따스하게 나가는 영화이겠거니 했는데 정말 혹독하기 짝이 없지 뭡니까. 선 볼 상대가 마음에 안 드는 딸, 바람난 배우자, 그럭저럭 먹고 살기는 하지만 "근근이" 먹고 산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싶은 정도의 살림살이, 취직 못 하고 쏘다니는 아들, 어른의 연륜과 지혜 대신 근시안적 사고만 간신히 유지한 채 그저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사는 듯 보이는 부모, 사람이 너무 좋은 언니와 너무 약아서 아마 누구도 좋아해 주지 않을 법한 언니 등 일일 연속극에서 볼 법한 가족 구성원을 한데 모아 끌고 가는 드라마인데, 온갖 갈등 요인을 지지고 볶고 끄집어내서 난리를 치기는커녕 싸움이 났어도 세 번은 났을 상황마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조용히 다룬 다음 가만히 응시하면서 차츰 가족 사이에서 문제가 곪아가는 과정을 이해하게 하는 시선이 놀랍습니다. 가족 사이에 다툼이 벌어질 때를 가만 보면 문득 실은 다툼의 원인이 된 문제는 진짜 원인이 아니며 그 밑에 수 년 혹은 수십 년 간 쌓여온 상대와의 관계가 들끓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 너무 가깝고 너무 익숙해서 ‘저 녀석은 원래 저러니까’, ‘가족끼린데 뭐 이런 것쯤은’ 하는 식으로 살아와 버렸기 때문에 도리어 균열이 생겨도 어떻게 해결할 방도가 없고 문제의 근원조차 볼 수 없는 가족이라는 존재의 불편함을 이토록 뼈저리게 보여주는 영화가 또 있을까요. 게다가 그것을 자극적인 사건의 개입이나 배우의 “열연” 혹은 지혜가 담긴 대사가 아니라 다만 끊임없이 같은 공간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통해서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알아차렸을 때는 정말이지 벼락을 맞은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참, 세상에는 많은 영화가 있고 화법도 참으로 다양합니다.






골방 (The Small Back Room, 1949)

 영국의 명감독 마이클 파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 콤비가 가장 창작력이 왕성하던 40년대, 43년부터 48년까지 무려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The Death of Colonel Blimp, 1943), 〈캔터베리 이야기〉(A Canterbury Tale, 1944), 〈내가 가는 길은 내가 알아!〉(I Know Where I'm Going!, 1945), 〈삶과 죽음의 문제〉(A Matter of Life and Death, 1946), 〈검은 수선화〉(Black Narcissus, 1947), 〈빨간 구두〉(The Red Shoes, 1948)를 연달아 내놓고 난 다음 해에 발표한 영화가 바로 〈골방〉입니다. (열거하고 보니 새삼 살 떨리는 경력입니다.) 독일군의 공습이 계속되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영국을 무대로, 솜씨는 뛰어나지만 어두운 과거에서 기인한 열패감과 알콜 중독으로 괴로워하며 자기 안으로 침잠해가는 폭발물 해체 전문가의 이야기를 그려내는데요, 전작들의 화려한 색감 및 낭만과 생기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당대에는 환영받지 못했고 오늘날에도 둘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축에 속하는 작품이지만, 재평가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칩니다. 배우들의 호연, 관객의 지성을 존중하는 각본, 화면 곳곳에 축축한 음침함을 드리우는 흑백 촬영, 영국식 유머, 파웰 특유의 대담한 실험정신, 그리고 서스펜스까지 없는 게 없습니다. 이런 경지에 이른 영화는 차마 소품이라고 부르기도 미안해지죠. 그중에서도 우울의 극을 달리는 남자와 그를 보살피는 여자의 답답하고 찌질해지기 십상인 구도가 데이빗 파라와 캐슬린 바이론의 명연 및 프레스버거의 어른스러운 대사를 통해 한껏 보듬어주고 싶은 모습으로 빚어지는 걸 보면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는 결국 이처럼 나 외의 다른 사람을 되돌아보고 새로이 발견하여 이해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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