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영웅본색

2010.12.25 23:28

곽재식 조회 수:3806

1986년작 "영웅본색"은 80년대 후반을 수놓은 홍콩 느와르 영화의 본격적인 개시작입니다. 또한, 이 영화는 많은 팬들을 거느린 무척 호평 받는 걸작으로 불리우는 영화 입니다. 홍콩 암흑가를 배경으로 좀 비현실적인 총질을 하고, 대체로 비장한 정서를 깔거나 비극적인 결말을 갖고 있는 것들이 이 부류로 불리우는 영화들의 공통된 특성 입니다. 이 영화 "영웅본색"의 줄거리는 암흑조직에서 일하는 적룡과 주윤발이 있는데, 범죄자인 적룡의 동생인 장국영이 경찰이 되려고 하는 바람에, 적룡은 동생 앞길 막을 수 없어 손을 씻으려 합니다. 그러나, 악당들로 둘러쌓인 암흑가를 떠나는 것이 쉽지 않아 여러 사건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일 단 이 영화에서 먼저 이야기해 보고 싶은 것은, 저는 이 영화가 재미있고 멋진 까닭은 일단 "홍콩 느와르" 영화로서 뛰어난 점 보다는, 그냥 보통 영화로서 뛰어나기 때문이라는 점이라고 느꼈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 영화는 "홍콩 느와르"라는 영화의 상징으로 군림하고 있는 데다가, 홍콩은 물론이요 한국과 일본에서도 수많은 아류작들을 양산한 영화인 까닭에 꼭 "홍콩 느와르"의 틀 속에서 언급되는 일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만, 이 영화는 홍콩 느와르 영화들이 봇물터지며 쏟아져 나온 시기의 초창기 영화라서 그런지, 아직 홍콩 느와르 영화의 전형적인 요소들이 그렇게 강하게 나타나는 편은 아닙니다. 홍콩 느와르 영화에서 가장 눈에 팍 뛰는 요소라면 역시 권총에서 무한히 총알이 쏟아지는 것이나, 주인공은 총알을 한 두발 맞아도 안죽고 버티는데, 악당은 대충 갈겨도 한 방에 다 전멸하는, 특유의 총격전 장면일 것입니다. 사실적인 느낌이나 현실성을 살리기 보다는, 총격전 장면 자체의 파괴감을 짜릿하게 전달하는 것이라거나, 극중 인물의 폼잡기라는 극적인 효과, 아름다운 장면 연출을 위해서 상상력과 극적 허용을 가미해서 다소간 과장해서 그려내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그런 형태의 총격전 장면은 적은 편입니다. 물론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위해서 총격전을 "짜고 하는" 형식으로 보이는 장면들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런 것들은 "홍콩 영화의 끝없이 총알이 나가는 권총" 보다는 그냥 보통 영화 속 주인공들의 총격전 장면 쪽에 가까운 수준입니다. 거기다가 범죄자들을 낭만적으로 그려내는 요소와 같은 것들도 상당히 적은 편입니다. 비극적으로 꼬인 인간 관계 자체가 장중한 극적인 운율을 만들어내는 극적 구조 자체도 강렬한 편은 아닙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애석한 운명이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 전체를 쥐고 흔드는데 비하면, 이 영화, "영웅본색"의 이야기가 꼭 "형은 범죄자 동생은 경찰"이라는 구도 속에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고 할만합니다.

무 슨 이야기인고 하니, 이 영화 "영웅본색"이 멋진 영화인 까닭에 대해, 저는 이 영화가 그런 어떤 액션 영화 종류로서 특징적인 요소보다, 오히려 현실주의와 사실주의에 가깝게 인간의 감성을 그려내는 보통 영화의 멋이 더 중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서 주윤발의 총싸움 장면과, 적룡이 비장한 표정으로 읊조리는 대사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만, 그보다는 정말로 한번 조직폭력의 세계에 빠진 사람이 손씻고 한 번 성실하게 살려고 하는 것이, 어지러운 도시에서 얼마나 어려운지 쓸쓸하게 그려내는 그 진중한 맛이 더 잘 나타나 있고, 더 뛰어나게 표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웅본색"이 총싸움 장면이 있는 액션 영화이기는 해도, 이 영화의 재미거리는 "슛 뎀 업"이나 "데스페라도"보다는 오히려 "좋은 친구들"이나 "초록물고기"쪽에 가깝다는 이야기 입니다.

특히 몇몇 장면의 연출은 그야말로 심금을 울립니다. 출소한 적룡이 마음 잡고 살기 위해 택시 운전을 해보려고 어색하고 쑥스럽고 조심스러워하며 삭막한 도시에 다시 발걸음을 내딛는 장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라든가, 차차 자리잡아 가는 적룡의 모습을 배경 음악과 함께 다만 몇 십초 정도의 건너가는 화면 편집으로 알려주는 장면 등등은 구성이 더할나위 없이 훌륭합니다. 영화사에서 사회 문제를 조명한다면서 거창한 대접을 받는 몇몇 "교훈적인 영화"들 속 비슷한 장면들을 간단히 초월해 버립니다. 배우의 연기는 진한 공감을 자아내고, 화면에 담겨 있는 사연은 구구한 설명 없이도 정확하게 벌어지는 일들을 전달해주며, 음악과 화면전환의 경쾌한 리듬감은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게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칭송하는 명장면으로 알려져 있는 적룡과 주윤발이 다시 만나는 대목 역시도 전통적인 연출 효과가 아주 극에 달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 장면을 다시 보면서, "밥먹으면서 우는 장면을 집어 넣으면 참 사람이 많이 불쌍해 보이는구나" 싶었습니다.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야 겠으니까 밥은 우겨넣어 먹고 있는데, 그 와중에도 서러움을 감출길이 없어 울음이 터져나오는 모습, 혹은 도저히 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 잠시 감정을 풀어 놓고 울만한 여유도 없는 팍팍한 상황이라서 밥을 먹으면서 울어야하는 상황이라는 것. 이런 심정이 더 상황을 구슬프게 만든다 싶었습니다. 이게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모른다"는 말의 뜻이로구나 싶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 래서 저는 바로 이 영화 "영웅본색"이 이렇게 월등히 특출나게 재미난 영화가 된 이유가 바로 이런 침침하고 서글픈 사실주의적인 진지한 이야기와 시적이고 극적인 "영화 같은" 요소가 잘 이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범죄 조직에서 기다가 손 씻고 똑바로 살아보려고 해도 잘 안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 알맹이를 담아가면서도, 시적이고 멋드러지게 꾸며 놓는 좋은 수단들을 잘 찾아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구구하고 구질구질할 수 밖에 없는 배경의 이야기를 하고, 그런 사실을 숨기지도 않고 드러내서 소재로 삼으면서도, 영화를 본 10년 청소년들과 10대로 돌아간, 철없는 어른들이 자꾸만 흉내내고 싶을 만큼 멋진 장면으로도 엮어 놓은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절묘한 위치 선정에는 "홍콩 느와르"를 상징하는 배우인 주윤발의 인물이 짊어지고 있는 위치가 막대 합니다.

이 영화에서 줄거리상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적룡의 인물은 감정이 단순하고 선한 동기와 꿋꿋한 의리로 똘똘하게 뭉쳐진 인물입니다. 직업만 내용상 범법자일 뿐이지, 구식 서부영화 남자 주인공처럼, 정의의 사자, 의로운 영웅에 가까울 정도로 단순 무쌍한 형식입니다. 게다가 적룡의 연기 자체도, 적룡이 오랜세월 동안 익숙하게 해 온 무협물의 영웅 주인공을 따라가는 단순무쌍하고 직선적인 구석이 있습니다. 감정 표현은 단순하게 과장되어 연극적으로 펼쳐질 때가 많습니다. 이런 인물만 갖고는 연기가 좀 모자란듯한 "범죄는 나쁜 것이에요, 어린이 여러분"이라고 말하는 답답한 교훈극을 만들 수 있거나, 그저그런 사회 고발적인 사실주의 영화를 꾸며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다소간 환상적이고, 허무주의적인 낭만이 넘치는 인물인 주윤발을 끼워 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주윤발이 참 절묘하게 연기를 해 내고 있고, 충실하게 연구해서 짭짤하게 주요 지점을 짚어나가는 각본이 잘 들어 맞고 있습니다. 전과자를 배척하는 사회에서 전과자들이 개심하려고 해도 더 어렵다는 진지한 문제를 홍콩 택시 업계와 조폭들과의 연계와 섞어서 이야기하는 내용이 흘러가는데, 그런 영화에서 위조지폐이기 때문에 지폐에다가 불을 붙여 담뱃불을 붙이는 이 한 시대의 상징과도 같은 시적인 장면도 같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실직을 걱정하고, 어제 산 주식 값이 내일 어떻게 될 지 마음 졸이고, 대출이자를 겁내지 말고 집을 살까 말까, 직장 상사 눈치를 어떻게 볼까 걱정을 합니다. 그런데, 마음에 안드는 놈은 실실 웃으며 권총을 꺼내어 바로 없애 버릴 수 있고, 출근시간도 없고 퇴근시간도 없이 어슬렁어슬렁 그럴듯한 옷을 입고 떠돌다가 느긋하게 폼잡고 담배나 피우고 있으면서, 죽일테면 까짓거 죽여보라고 시원하게 이죽거리며 무시무시한 악당들에게도 헛농담이나 해대는 이 막나가는 인간을, 애정이 가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인간이 멋있게 보이고, 그럴싸하게 보이는 것도 당연 합니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이 인간이 얽혀 있는 이야기 속에서 그 속에 감춰진 우울과 밑도 끝도 없이 막막한 암담함도 숨기지 않고 있는 겁니다. 주윤발을 다리로 해서, 진지하고 사실적인 이야기와 극적이고 시적인 이야기들이 잘 모여 있는 것이 바로 이 영화의 절묘한 점이라고 저는 느꼈습니다. 홍콩 느와르 영화는 범죄자들을 동경하게 하고, 조폭들을 낭만적으로 묘사한다고 합니다만, 이 영화는 대표적인 홍콩 느와르 영화이면서도 조폭의 세계가 얼마나 암담하고 한번 걸려들면 대책이 없는지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있고, 그런 내용을 잘 보여주면서도, 폼잡기와 그럴싸한 낭만주의를 더 울려퍼지게 한다는 점이 바로, 이 영화의 멋이라고 생각합니다.

여 러 매체에서 농담처럼 많이 다뤘기에 널리 회자되는 것이 영웅본색 2편의 주제곡입니다만, 역시 이 영화, 영웅본색 1편의 배경음악이야말로 그것을 초월하는 명곡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 형태로 편곡되어 영화 속에 흐르는 음악은 아주 적절하며, 80년대 후반에 어울리는 전자 음악의 음색이 과하지 않으면서 전통적인 영화음악의 힘이 충실한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빠 른 화면전환과 음악으로 바쁘게 살아가는 적룡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차분하게 느릿느릿 화면을 넘어가게 해서 망중한의 느낌을 살리고 동시에 관객들의 주의도 잔뜩 집중 시켜 놓은 뒤에, 주제곡을 아스라히 깔아대면서, 멀리서 적룡이 주윤발을 발견하는 극적인 장면으로 부드럽게 움직여 나가는 대목은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잘 되어 있는 장면입니다. 관객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드럽게, 바로 그 적룡의 시각, 적룡의 마음으로, 영화 속 적룡에게 보이는 대로 주윤발을 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홍콩의 각박한 빌딩 숲과 숨막히는 인구밀도를 보여주는 수평-수직 구도를 잘 살리고 있는 정석 그대로의 화면 구도 촬영이라든가, 비중이 높은 편은 아닙니다만, 제 몫을 깔끔하게 잘 해내고 있는 장국영의 모습, 가끔 배우의 연극적인 개인기를 발휘할 기회를 흠뻑 주는 긴긴 서사시 같은 대사들이 "억지로 꾸민 명대사" 따위의 유치함 없이 잘 꾸며져 있는 대목 등등이 모두 모여 힘을 발휘하는 영화 입니다.

그 래서 언젠가 보다보면, 이 영화의 인물들이 다소 공허하게 읊조리는 "우애" 같은 내용도 문득문득 아주 깊이 와닿을 때가 있습니다. 누구 하나 진실된 사람 없는 것 같은 그저 쌀쌀하기만한 이 도시의 세상살이 속에서, 호기롭게 취해서 큰소리치며 술자리에서 점수 따려고 2차, 3차 까지 늦은시간까지 가짜 웃음을 얼굴에 띄우고 따라다니는 따위보다, 옛친구와 오랫만에 사심 없이 돌아보는 그저 같이 생각없이 놀던 우정이나, 함께 힘을 합쳐 꿋꿋이 일했던 지난 옛동료와의 따뜻한 익숙함이 얼마나 귀중한 지, 그런게 별것 아닌것 같아도 정말 "의리"라고 할만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밖에...

영 웅본색1편이 극적이기 보다는 사실주의 영화 요소가 풍부하고, 액션 중심이라기보다는 사회고발 중심이라는 점은 영웅본색 2편과 비교해보면 아주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젊어서 공산주의에 관심이 없다면 열정이 없는 사람이고, 나이 들어서도 공산주의에 관심이 있다면 두뇌가 없는 사람이라는 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비슷한 운율로 어려서는 영웅본색 2편을 높이치고, 나이가 들 수록 영웅본색 1편을 더 높이치게 되는 것이 또 보통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홍콩 느와르 영화들로 인하여 결국 거장 반열에 올라선 오우삼이 감독을 맡은 영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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