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해서 [여의도]는 정말 형편없는 영화다. 희대의 졸작까지는 아니더라도 올해 나온 영화 중에서는 단연 돋보이는 졸작이다. 아무리 노력해봤자 단 하나의 장점도 찾기가 힘들 정도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이 작품은 누구나 인정하는 걸작보다 오히려 더 희소한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어중간하게 나쁜 영화는 분노와 짜증을 유발하지만 철저하게 나쁜 영화는 나름의 쾌감을 선사한다. 물론 마음을 완벽하게 열어야 한다. 일말의 기대를 버린 채 ‘설마 설마’ 하는 심정으로 영화의 전개를 지켜보라. 당신의 예상이 그대로 들어 맞으면 그 자체를 즐겨야 한다. 절대로 화를 내서는 안된다!

 

황우진 과장(김태우)은 곤경에 처해있다. 회사에서는 잘리기 일보 직전이고 사채업자들은 집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린다. 아버지는 병상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 그런 그에게 어릴 적 친구 정훈(박성웅)이 찾아온다. 슈퍼맨을 좋아했던 두 사람은 추억에 잠기고 황과장은 정훈에게 괴로운 심정을 털어놓는다. 이 후 정훈을 괴롭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잔인하게 살해된다.

 

줄거리만으로 이 영화를 오해해서는 안된다. 물론 이야기 자체도 나쁘지만 그것만으로 이 영화의 희소성을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는 줄거리를 제외하고 나서도 수많은 요소들이 필요하다. 이 영화를 통해 평범한 작품을 만드는 것도 사실은 많은 노력과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느낄 수 있다.

 

학생 단편 영화를 보는 듯한 밋밋한 촬영이 먼저 눈에 띈다. 과거 회상장면을 너무나도 회상장면처럼 찍어 놓은 건 애교로 넘어가자. 압권은 황과장이 사람들 앞에서 조부장(고세원)을 잔인하게 살인하는 장면이다. 갑자기 형광등이 깜빡이고 난데없이 조악한 붉은 조명이 공간을 지배한다. 혹시 그게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 뜨악함은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모른다. 

 

명장면(?)은 그것만이 아니다. 연기 면에 있어서는 특히 명장면이 즐비한데 그 중에서도 배우 김태우의 화장실 오열신은 특별히 언급할 만하다. 아역들의 연기는 ‘손발이 오그라든다’는 말을 쓰지 않고는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어 보인다. 사채업자로 나오는 연기자가 느끼한 연기의 신기원을 이룩하는 동안, 배우 황수정은 의욕을 상실한 것처럼 무기력해 보인다.

 

캐릭터와 대사도 심하게 나쁘다. 진짜로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캐릭터가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뱉어 내는 대사들 역시 직접적이고 설명적이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를 너무 잘 알겠다. 문제는 캐릭터가 아니라 ‘감독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를 알겠다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영화가 스릴러를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서스펜스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없이 늘어지는 리듬과 무성의한 장면들 사이의 배치는 그렇다고 치지만 이 영화가 내세우는 반전은 정말이지 충격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반전이 충격적인게 아니고, 그걸 반전이라고 집어 넣은 감독의 용기가 충격적이다. 영화 중반만 지나도 모든 걸 예측할 수 있는데, 영화 속 캐릭터들은 런닝타임이 끝나갈 때까지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

 

이 영화는 자본주의의 탐욕을 비판하는가. 과연 그렇다. 그런데 왜 비판을 영화로 하는걸까. 글로 쓰거나, 말로 하거나 차라리 길거리에 나가서 시위를 하는 건 어떨까? 어떤 생각을 영화로 만들 때에는 그것이 굳이 예술로서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가져야 하는 것 아닐까? 송정우 감독의 영화 [여의도]는 별로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아마도 2010년 대한민국의 일반 관객들에게는 절대 추천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영화팬들과 영화학도들에게 조심스럽게 권하고 싶다. 이것은 매우 훌륭한, 그래서 교육적인, 그리고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 될 ‘나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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