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인걸: 측천무후의 비밀"은 당나라의 측천무후가 황제 즉위를 준비하는 기간 동안 벌어진 의문의 살인사건을 쫓겨난 왕년의 신하인 적인걸이 수사하는 내용을 줄거리로 하고 있습니다. 측천무후의 충신이자 호위병 역할을 하고 있는 궁녀, 혈기왕성하고 날카로운 감찰관이 서로 다른 개성을 갖고 일행을 이루어서 같이 수사를 해 나가는데, 도대체 누구를 어디까지 믿어야할지, 이 모든게 측천무후의 자작극은 아닌지 궁금증을 돋구는 내용인데, 뛰어다니고 날아다니고 싸우면서 펼쳐갑니다.


(진상은 무엇?)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일종의 "스팀펑크" 분위기 입니다. 무협물 중에는 소위 "기관"이라는 것을 언급하면서, 옛 시대를 배경으로 예스러우면서도 기괴하게 복잡하여, SF스러운 신묘한 기능을 하는 기계 장치나 말이 될듯말듯한 오묘한 기술을 선보이는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톱니바퀴와 도르래를 복잡하게 연결해서 만든 로봇 같은 자동 장치라든가, 중세, 고대 양식을 따르고 있으되 어마어마한 규모의 건축물, 기념물 따위 같은 것들입니다.

이 영화에서도 바로 처음부터 흥미를 돋구는 것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시작되자마자 등장하는 것이자, 영화에서 꽤 중요한 소재로 계속 언급되는 것이 측천무후가 세운 거대한 불상입니다. 이 불상은 "자유의 여신상" 이상의 매우 거대한 크기로 고층 건물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규모가 일종의 "세계 7대 불가사의" 같은 환상적인 감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후로, 기괴한 독약이나, 오묘한 장치, 기묘한 이론 같은 것들이 자꾸 등장하면서 말이 될듯말듯한 맛으로 재미를 돋굽니다.


(거대 불상)

대표적인 것으로 꼽을 만한 것이 바로, 유덕화가 연기하는 주인공 적인걸의 무기 입니다. 어마어마하고 기괴한 것들이 워낙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눈길을 끌만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격은 뚜렷합니다. 이 무기란 것은 뱅뱅 돌리면 윙윙거리면서 울리는 소리가 나고, 그걸 다른 무기에 건드리면 절묘한 설계 때문에 정확하게 때린 무기의 균열과 공명이 맞는 주파수로 떨리도록 되어 있답니다. 그래서, 이 무기의 웅웅거리는 소리를 이용하면, 다른 무기의 고유 진동과 공명 현상을 이용해서 손쉽게 다른 무기를 박살낼 수 있다는 겁니다.

현대의 첨단의 정밀한 비파괴 계측 장비와 기술 좋은 진동장치를 사용해도 아무 물건이나 쉽게 균열을 찾아내고 더군다나 간단히 부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겁니다. 하지만, 음파와 공명 진동을 이용해서 쉽게 물건을 파괴한다는 것이 이론상 가능하긴 하지않습니까? 그러니, 이 영화에서는 그걸 마치 검처럼 생긴 무기로 꾸며서 주인공이 휙휙 뛰어다니면서 막 휘둘러도 절묘하게 맞추어 낼 수 있다는 식으로 과장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말은 안되지만, 또 나름대로 이론은 있는 걸 보여주자는 겁니다.


(유덕화)

이런 것들이 이 영화에서는 구경거리로 화면을 장식해 주었습니다. 실크로드 동서교류의 정점에 달했던 전성기 당나라의 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아랍상인과 페르시아 융단을 비롯한 각종 중동 문물들을 이국적으로 등장시키기도 하고, 비잔틴 제국과의 교류나 당시 유입된 기독교(혹은 경교) 문화까지 은근슬쩍 끄집어 내면서, 당나라 문화의 국제성과 화려함을 과장해서 펼쳐대는 대목도 어울어집니다. 소재는 다양하고 화면은 현란하며 장식은 늘어 났습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 영화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당나라 라기 보다는 중세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베낀 느낌이 많이 납니다. 측천무후가 원래 "장안의 명물"하면 생각나는 "장안" 대신에 새롭게 당나라의 도성처럼 활용했던 낙양이 배경인데, 이 영화만 보면 무슨 낙양이 꼭 이스탄불 같은 바닷가의 항구도시처럼 생겼습니다. 바다에 가득한 배들의 모습이나, 돔 형태로 되어 있는 궁전의 모양도 중세 비잔틴 양식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기도 합니다.

동서교류의 국제성을 드러내는 바가 있으니, 아주 얼토당토 않은 것은 아닌데, 좀 더 진짜 "당나라" 같은 걸 보여주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베네치아식 갤리선처럼 생긴 범선들과 그 범선들이 오가는 "황금뿔" 같이 생긴 항구의 풍경은 도무지 "낙양성"처럼 보이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비슷하게, 그럴듯한 "동양적인 모양"을 꾸미기 위해 일본풍을 많이 도입한 면도 있습니다. 아마도 중국인들이 매우 친숙한 명나라, 청나라 시기의 문물과는 다른 당나라 느낌이라는 차이를 준다고 하다가 그렇게 되었지 싶은데, 딱 떨어지는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비잔티움의 이레네?)

화려한 문물들과 스팀펑크스러운 소재들이 가장 눈에 뜨인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사실 이 영화에 이런 내용들이 정말로 제대로 감동적으로 표현 되었느냐 한다면 그렇지는 않다는 게 제 감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눈에 띄는 소재가 화려한 실크로드식 스팀 펑크이기는 하되, 그게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일단 앞서 밝힌대로, 소재 선정과 꾸민 방식 자체가 독특한 아이디어와 고유한 전통을 잘 파 놓았다기 보다는, 엉뚱하게 다른 나라 소재를 끌어다 붙인 것이라서 좀 겉도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상당히 치명적인 것이, 이 영화에서 이런 것들을 묘사하기 위해 대거 퍼부어 놓은 특수효과가 그 질이 거슬릴 정도로 떨어지는 편입니다. 밝은 대낮에 화려한 도시의 정경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묘사하는 것이 물론 쉬운 기술은 아니겠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등장하는 컴퓨터 그래픽 정경들은 너무나 "컴퓨터 그래픽"스럽게 생겼습니다. 더군다나 그야말로 컴퓨터스럽게 어째 복사/붙이기로 만들어 놓은 정경들이 많은 듯하여, 정형화되고 반복되는 그림들이 많이 나와버려서 구도나 배치에서부터 부족해 보이는 느낌도 강했습니다. 그런즉, 세부묘사도 부실하고 구도도 엉성했습니다.


(낙양의 그래픽 디자이너 인건비는 누가 올리나?)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정말로 가장 좋은 점은 무엇이었느냐 하고 꼽아 본다면, 역시 무협물의 정통을 아주 콕 집어 꿰뚫고 있는 인물 구도와 그 연기를 꼽아 볼만할 것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고 정의를 따르려 하기에 어려움을 겪지만, 여유만만하고 예의를 다하는 태도를 갖고 있는, 그야말로 주인공다운 주인공 유덕화는 튼튼한 중심입니다. 여황제 같은 위엄을 갖고 있는 측천무후는 무당파 총두목 같은 진중한 느낌을 그대로 이어 갑니다. 60, 70년대에 왕우(왕유)나 강대위(깡따위) 같은 배우들이 잘 연기하던 피 끓으며 날뛰는 애송이 칼잡이 동료도 아주 딱 그대로 입니다.

무엇보다 이빙빙이 연기한 정아의 역할은 아주 정통 중에 정통입니다. 전형적인 무협물의 여자 협객. 여협 그대로 입니다. 너무 정통이라서 말로 서술하자면 지긋지긋한 맛도 있고, 무슨 대사를 하면서 어떻게 행동할지 너무 뻔히 보여서 의외의 맛이 부족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귀엽고 아름다운 얼굴이지만 위풍당당함이 있고, 그러면서 방방 날뛰고, 남자 주인공과 티격태격 하기도 하고, 비련에 가슴아파하기도 하는, 그 모습은 아주 제대로 명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협영화의 만개를 알린 "대취협"(방랑의 결투) http://gerecter.egloos.com/2987678 시절 정패패에서부터, 우리나라에서 홍콩 무협 영화의 정점을 기록했던 "동방불패"의 임청하까지 그 계보를 이어 내려오는 정통을 제대로 짚어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60년대 정패패를 연상케 하는 2010년대의 이빙빙)

그래서 서로 어울리면 재미날 것 같은 인물들끼리, 말그대로 재미나게 맞아 들어서, 이야기가 술술 잘 풀려나가는 맛이 있었습니다. 배우들이 워낙 연기를 잘하고 있으니, 이 사람들이 같이 범죄수사도 하고, 서로를 의심도 하는 그 형국이 꽤 와닿게 느껴집니다. 줄거리 자체도 틀은 멀쩡히 잡혀 있습니다. 워낙에 측천무후의 음흉함이 진상을 숨긴다는 복선을 잘 퍼뜨리고 있기에, 정말 오리무중, 도대체 진상은 무엇일까 하는 호기심을 이야기 내내 끌고 다닐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틀을 잡고 성실하게 정공법을 따라 연기하는 인물 덕택에, 이야기가 궁금해지고, 흡인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남장여자는 이바닥의 기본)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렇게 흥미롭게 진행해서 궁금증을 자아내는데 까지는 썩 좋지만 드러나는 결론과 밝혀지는 진상은 꽤 많이 싱겁다는 겁니다. "출연료는 명탐정" 법칙을 이용하면 어느 영화건 범인은 대강 골라낼 수 있기 마련입니다만, 그 중에서도 이 영화의 범인은 너무나 심하게 뻔하고, 진상은 이 영화의 황당한 기술들의 범위 안에서 적당히 황당한 수준으로 나타납니다. 큰 충격도 없고, 대단한 감흥도 없게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막판 결전을 앞두고 유덕화의 1:1 활약을 시키기 위해서, 유덕화 옆에서 활약했던 두 주인공을 무대 밖으로 끌어내립니다. 이 부분은 가장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그 연출이 아주 급작스럽고 무성의하다는 것은 치명적이었습니다. 거의 주인공급으로 활약했던 인물들을 이야기 밖으로 내 보내는데, 아무 감정의 중후한 흐름도 절정의 아찔함도 없이, 맹랑하고 헛헛하게 슥삭 잘라내 버리는 겁니다.


(비중 높았던 인물)

부족한 부분들이 있는 영화 입니다만, 꽤나 화려한 구경거리에, 훌륭한 배우들이 무협물의 ABC를 차례대로 짚어 보이는 모습 때문에 신나게 두 시간 따라 가 볼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말에 다가갈수혹 갑자기 허무해진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그래도 이 영화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맨끝을 그래도 허무해지지 않게 꾸미기 위해, 막판에는 화려한 "대폭발" 장면을 좀 집어 넣고, "블록 버스팅"도 많이 하고 해서, 구색을 갖추려고 열심히 힘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극"적인 영감님을 보았나...)

90년대 초중반에 보았던 "육지금마"라든가, "선학신침" 같은 영화들이 떠오르는 면이 있습니다. 화면 위에서 화려한 옛이야기 속의 풍경과 공상적인 협객들의 술법이 눈앞에 펼쳐지는 그 구경을 시켜주면서, 멋진 배우들이 읊조리는 무협 대사들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때 보다 기술과 경제가 발전했으니, 음악과 영화에 투입된 물량은 훨씬 더 화려하므로, 조금 진부한 면이 있어도 이래저래 남는 게 없지는 않지 싶습니다.

예를 들어서, 원색 의상과 화려한 군중의 모습들은 장예모가 감독을 맡은 영화들의 영향이 커보입니다만, 그래도 암살자들이 날린 쏟아지는 화살의 위력을 화면에 담아내는 기술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박력있는 연출의 경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게다가 머리를 풀고 남자주인공 위로 다가오는 여자주인공의 아름다운 모습은 예전 "천녀유혼"의 명장면 연출법을 아직도 조금만 변형하면 깔끔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내는 듯 했습니다.


그 밖에...

집권 과정은 불법이고, 선전 전략과 협잡을 이용해서 권력을 공고히 하지만, 그래도 나라의 유지와 안보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집권 기간 동안 국정을 안정시켰고 경제를 발전시켰으며, 적어도 물러날 때는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해 주었습니다. 이게 이 영화에서 말하는 "독재자이지만 어쩔 수 없는 면도 좀 있으니 이해해 줄만도 하다"는 측천무후의 "업적"이라는 겁니다. 이게 당나라 때 무측천 이야기인지, 아니면... 뭐, 꼭 나라 다스리던 사람이 절에 들어갔나 나왔다 하는 이야기도 공교롭게 엮여 있어서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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