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라이딩 (Red Riding, 2009) ☆☆☆1/2

 

 처음엔 한 연쇄살인 사건수사의 미로와 같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작년 영국 채널 4에서 제작한 3부작 텔레비전 영화인 [레드 라이딩]을 따라가 더 깊숙이 들어가서 여러 주인공들과 함께 헤매다보면 우린 그곳이 추악하기도 하면서 그보다 더욱 더 거대하기 짝이 없는 미로임을 발견하면서 두려움에 빠집니다. 자신들이 평범한 시민들이 보호하고 봉사해야 할 곳에서 끔찍한 일들이 연달아 벌어졌음에도 불구, 그곳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안위와 사리사욕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고 그걸 위해 기꺼이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드넓고 평온한 영국 북부지방은 더 이상 평범한 곳으로 보이지 않고, 부패와 타락이 이곳저곳으로 뿌리를 뻗쳐 박아 놓은 풍경은 우리를 치 떨리게 만듭니다.

 

 원작은 ‘Red Riding Quartet'로 불리는 데이빗 피스의 4부작 소설인데(예산 사정상 세 편들만 각색되었습니다) 이는 과거에 실제 일어났던 한 악명 높은 연쇄살인을 소재로 해서 쓰여 졌습니다.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요크셔 리퍼'란 별명이 붙은 연쇄살인자는 영국 요크셔에서 13명의 여성이 둔기로 잔혹하게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그 외 여러 피해자들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혔었습니다. 언론과 그곳 주민들은 요크셔 경찰에게 조속히 이 잔혹한 살인마를 체포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고, 그러다가 5년 만에 진범을 잡아냄으로써 연쇄살인극은 막을 내렸지만 요크셔 경찰의 수사진행 방식에 대한 상당히 비판이 따르기도 했었습니다. 물론 실제 사건에 모티브를 두었지만 소설과 각색물 모두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만큼이나 엄연한 픽션이고 영화 속 연쇄살인마뿐만 아니라 많은 것들은 허구이긴 하지만, 사건 수사 문제보다 더 거대하고 심각한 사회문제를 상당히 흡인력 있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레드 라이딩]의 이야기는 위력을 발휘합니다.

 

영화의 1부는 1974년을 배경으로 외부인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펼쳐나갑니다. 한 어린 소녀의 실종사건이 터지고 이에 요크셔 경찰은 사건 해결을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다고 하는 가운데, 막 이 사건을 취재하는 일을 맡은 요크셔 포스트의 젊은 기자 에드워드 던포드(앤드류 가필드)는 이런 일이 처음 일어나는 일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평소엔 그냥 널널하게 지내던 그였지만 던포드는 이 사건에 골몰하기 시작하면서 경찰 당국에게 연쇄극의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요크셔 경찰의 고위관직자인 빌 몰로이(워렌 클라크)는 그의 의견을 강압적으로 묵살해 버리고 경찰과 가능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던포드의 상사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한편, 던포드의 동료기자 배리 개넌(앤소니 플래너건)는 지역 내 부패와 관련된 다른 기삿감을 추적하고 있었는데 던포드는 자신의 사건이 동료가 조사하고 있는 것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을 감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한 일이 터지는 걸 시작으로 해서 그의 상황은 그냥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게 아니게 되어버립니다. 그리 현명치 않게 이리 저리 쑤셔대고 건드려대다가 그는 그런 그를 달갑지 않아 하는 세력에 의해서 매우 험악한 일들을 당합니다. 본 작품의 폭력들은 유혈낭자하지는 않지만 어두운 공간 속에서 날뛰는 야만적인 잔혹함은 보는 사람을 매번 강타하곤 합니다.

 

전체 이야기에 시동 거는 역할이기 때문에 페이스는 느린 편이고 덜컹거리는 면들이 없지 않지만, 1부는 이야기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는 역할을 잘 수행합니다. 단순한 아동 유괴 사건이 더 이상 단순하게 보이지 않으면서 한 악랄한 행위가 계속 이어지고 있어왔다는 끔찍한 사실도 드러나는 가운데, 그걸 감싸고 있는 더 거대한 사악함의 일각이 보여 지면서 다음 이야기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킵니다. 이러니 자신이 계란에 바위치기를 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는 와중에, 던포드는 사건 취재 도중 만나게 되었던 실종된 소녀들 중 한 명의 어머니 폴라 갈란드(레베카 홀)와 친밀해지고 둘 간의 감정이 싹틉니다. 하지만 사악한 분위기가 영국 지방 풍경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이 느와르 풍 이야기에서의 그녀의 역할은 모호하고 그들의 미래도 불확실합니다.

2부는 6년 후인 1980년으로 넘어가면서 요크셔 리퍼 사건으로 시끌벅적한 그 동네의 상황으로 우릴 인도합니다. 정말 요크셔 리퍼가 보냈는지도 확실치 않은 카세트테이프 등 여러 자잘한 것들 외엔 별 뾰족한 단서들도 없으니 이미지도 안 좋아져 가니 요크셔 경찰은 난관을 겪고 있고, 여기에 멘체스터 경찰인 피터 헌터(패디 콘시다인)가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요크셔에 옵니다. 그는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인 존 놀란(토니 핏츠)와 헬렌 토마스(맥신 피크)를 팀으로 한 특별 수사대를 구성하고 언론의 관심을 끌지 않는 동안 경찰서의 한 작은 방에서 그만의 수사를 개시합니다.

 

 헌터는 새로운 시각에서 사건을 조명함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려고 하고 그에 따라 지난 5년 간 일어났던 요크셔 리퍼가 저지른 사건들을 재검토하기 시작하는데, 그 와중에서 그는 여기에 상당히 수상쩍은 게 구석에 존재함을 직감합니다. 하지만, 그가 경찰이긴 해도 요크셔 경찰에 소속된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그를 도와 줄 생각이 없고 그 사건에 관해 입을 열어 줄 생각조차도 없습니다. 요크셔 경찰엔 깨끗한 사람은커녕 헌터가 믿을 만한 사람도 찾기 힘듭니다. 이러니 그는 가면 갈수록 구석으로 몰려져 가고 그의 직책이 뭐든 간에 그가 맞대결하는 세력은 얼마든지 막 갈 수 있는 재량이 있습니다.

 

 1부에서 준비된 발판을 통해 2부는 보이지 않은 긴장감이 팽팽한 수사 드라마를 굴려 들어갑니다. 1부의 막을 열었던 사건처럼, 2부의 막을 여는 연쇄살인사건은 이야기 흐름에 따라 뒤로 물러나가고 사건 수사는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우린 그걸 휘감고 있는 요크셔 경찰 내의 부패 실상을 내부인인 헌터의 시선을 통해 1부에서보다 더 확연하게 접해갑니다. 1부에서 일어났던 일 직후 여러 의문들로 가득한 사건 현장을 수사했었던 헌터를 통해 1부와 2부는 연결되어지고 그리하여 어느 덧 3부작의 거대하고 무서운 그림이 거의 다 완성되어 갑니다. 이러니 우리뿐만 아니라 헌터도 던포드처럼 그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무력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지요.

3년 후인 1983년을 무대로 하는 3부는 또 다른 이야기라기보다는 큰 그림의 마무리 작업으로 볼 수 있습니다. 1부와 2부에서 이리저리 던져졌던 의문들 혹은 떡밥들이 하나씩 대답되는 동안 우리는 마침내 이 부패한 시스템에서의 핵심 멤버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모습도 봅니다. 자신들만이 은밀하게 모인 사적 공간에서 그들은 "북부를 위하여! 원하면 뭐든 지 할 수 있는 곳을 위해!"라고 하면서 축배를 듭니다. 전편들을 보는 동안 그들이 정말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걸 우린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칼자루를 쥔 자신들의 위치를 마음껏 오용하는 걸 즐기는 그들 모습은 섬뜩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이걸 막을 수 없을 거란 생각까지 드니 암담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 사악함 속에서도 서서히 양심은 고개를 들기 시작하고, 3부는 이 이너 서클에 줄곧 속해 오면서 묵묵히 일해 온 모리스 좁슨(데이빗 모리시)의 관점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해갑니다. 1부에서의 9년 전처럼 또다시 한 소녀가 누군가에 의해 유괴당하는 사건이 생기고 그에 이어 부모의 간절 어린 호소 그리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경찰의 형식적 기자 회견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좁슨만 아니라 다른 많은 고위 관직 경찰들은 누가 범인이었는지 알고 있고 그가 또다시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범인이 밝혀지면 그에 따라 지금까지의 자신들의 치부가 전부 다 까발려질 수 있으니, 그들은 이에 대해 침묵하고 은폐하려고 했고 이에 관심을 가진 자들을 윽박질러 왔습니다.

 

좁슨의 반대쪽에서는 동네 변호사 존 피곳(마크 애디)가 있습니다. 1부에서 보여 진 것처럼 9년 전 경찰은 한 정신적 장애가 있는 젊은이를 강요하고 유도해서 범인으로 포장했고 그에 따라 그를 감옥에 보냈습니다. 한데 또다시 사건이 터지니 그 억울하게 갇힌 젊은이의 가족은 피곳에게 의뢰를 하지만 그는 여러 사정들을 검토해 본 결과 별다른 조치를 취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경찰이 터진 사건을 모방 범죄라고 치부하면서 체포한 사람의 변호를 맡기로 결심하면서 피곳은 사건에 관여하고 그러다가 그는 자신의 동네에 잠재해 온 평범한 얼굴을 가진 흉칙한 악과 대면합니다.

그리하여 5시간에 가까운 여정 끝에 우리가 도착하게 되는 종착점은 대단원과는 거리가 멀지만, 3부는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운 인상을 남깁니다. 지금까지 그려진 큰 그림의 자잘한 부분들을 상당한 플래시백을 통해 다듬느라 늘어진 인상이 들고 좁슨과 연관된 다른 서브플롯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는 게 넘어가기 힘든 단점이지만, 지금까지 서두르지 않고 꾸준히 쌓아둔 것들이 있기 때문에 이야기에 대한 몰입감은 그리 많이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전편들만큼이나 3부는 큰 그림으로써의 일부로써 흥미진진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모여서 만들어진 큰 그림의 시너지를 자아내는 데에도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이 큰 캔버스 안에서 유명하지 않지만 익숙한 실력 있는 배우들은 맡겨진 역할을 성실히 해나갑니다. 앤드류 가필드, 패디 콘시다인, 마크 에디, 그리고 조용히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해 가는 데이빗 모리시는 각자의 이야기를 잘 이끌어가고, 그 주변에서 아주 험악한 인상을 강하는 남기는 워렌 클라크(아마 몇몇 분들은 그의 얼굴에서 그 옛날 [시계태엽 오렌지]의 주인공 일당들 중 한 명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피터 뮬란, 로버트 시한, 숀 빈 등이 계속 등장하곤 합니다. 레베카 홀은 1974년에서만 등장하기 하지만 그녀 캐릭터의 딸이 언급될 때마나 연상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여운이 남습니다.

 

[레드 라이딩] 3부작은 거의 동시에 만들어졌고 이 일은 세 명의 좋은 실력을 갖춘 감독들에게 분담되어 맡겨졌는데, 그들은 단순히 고용 감독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1부를맡은 [비커밍 제인]과 [킨키 부츠]의 감독 줄리언 재롤드는 16mm로 촬영한 후 나중에 이를 35mm로 블로우업을 함을 통해 1.85:1의 화면에서 거친 느낌을 만들었습니다. 반면에 최근 국내 개봉한 다큐멘터리 [맨 온 와이어]의 제임스 마쉬는 2부에서 35mm로 촬영한 2.35:1 와이드 스크린에서 어두운 분위기를 살렸습니다. 그리고 3부에서 [힐러리와 재키]의 감독인 아난드 터커는 레드 원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한 와이드 스크린에서 전편들과 구별되는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이와 같이 각각만의 개성을 지닌 가운데 이들은 이야기의 어두움을 강조하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진행 중에 간간히 화면에 등장하곤 하는 저 멀리 들판 위에 굳건하게 높이 세워진 6개의 발전소 냉각탑은 흐린 하늘과 함께 주인공들을 바라다보는듯하고 이는 가면 갈수록 음험하게 느껴져 갑니다. 그들만큼이나 아주 굳건할 뿐만 아니라, 모든 걸 다 보고 아는 동안 앞으로도 계속 자리를 지켜올 가차 없는 거대한 시스템이 이 이미지와 겹쳐지니 분위기는 더욱 음산해집니다.

 

인간의 어두운 본성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생기는 여파들을 족족 덮어버리면서 많을 사람들을 기만하려는 사람들의 철면피 수준으로 악랄한 모습들 때문에 [레드 라이딩]은 담담하지만 무척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시스템 안에서는 누구나 결백할 수는 없고 이를 뒤엎기는커녕 바꾸기에도 규모가 너무나 큽니다. 그러니 그에 비해 너무나 무력한 개인들의 노력들은 번번이 허탕을 치곤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현실 속에서도 무엇이 옳은 일인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항상 있기 마련이고 그들은 노력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 와중엔 조그만 승리가 있기도 합니다.

 

P.S.

미국에선 본 작품을 중간 휴식 두 번 합쳐서 약 6시간 상영으로 극장에서 최근 개봉했는데,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나 [엣지 오브 다크니스]처럼 이것도 리메이크될 예정이더군요. 리들리 스코트가 감독할 예정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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