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녀(2010)

2010.07.31 17:05

brunette 조회 수:4594

 

분류 : 에로물의 틀을 빌린 사회극. 106분
감독 : 임상수
출연 : 윤여정, 전도연, 이정재, 박지영, 서우
키워드 : 불...나방?

 

'하녀'라는 단어는 더 이상 현대 한국사회에 익숙치 않지만,
'가난한 젊고 예쁜 여성'으로 그 단어를 치환해서 생각해봅시다.
매력적이고 부유한 남편과 만삭의 아내가 있는 가정에 그 하녀가 입주도우미로 들어갔을 때, 발생할만한 줄거리를요.
저라면 '팽창한 성욕과 섹시한 육체가 야기하는 격렬한...' 따위의 뻔한 스토리만 떠오르는데요,
그래서 전도연이 하녀역에 낙점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갸우뚱했어요.
다이너마이트가 되기에 전도연은 좀 약한 거 아닌가 싶어서요.

 

애초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드라마의 여왕 김수현 작가님께 갔었다고 하지요.
김수현의 시나리오가 임상수에 의해 완전히 다른 얘기로 각색되었고,
그 뒤에 벌어진 노작가의 분노의 일갈과 임상수 감독의 사과는 언론에도 노출이 되었구요.
위의 설정으로 김수현이라면 인물들의 심리가 촘촘히 묘사된 그럴듯한 멜로물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을 겁니다.
가족구성원 간의 갈등과 미묘한 균열, 외도와 질투, 그리고 결국엔 파국에 이르는 남녀군상을 설득력있게 묘사해내었을지 모르죠.

 

하지만 임상수의 <하녀>는 사뭇 다릅니다.
그의 관심은, 호르몬냄새 진동하는 육체의 향연도, 갈등과 심리묘사에 뛰어난 드라마도 아닙니다.
비유를 하자면, 그가 묘사하는 것은 왕과 여왕, 하녀, 집사 등이 사는 실제 있을법한 세계가 아니라
왕, 여왕, 하녀, 집사 등의 기.호.들이 나열된 구조물입니다.

일종의 체스판 혹은 트럼프 카드판 같은 세계를 공들여 구현한달까요.
 
이런 기호들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극의 완결성이나 사실성보다는, 전형성과 상징성일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공간과 인물들은 단순하다 싶으리만큼 극단적으로 묘사됩니다.
부자는 엄청나게 부유하고, 속물은 지독하게 속물적이고, 약자는 끝까지 약자에요.
이게 과연 있을법한 일인지, 그래도 되는 건지, 저런 인물들이 실존하는지 진지하게 물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탈바가지 뒤집어쓰고 한바탕 사회를 씹어대는 마당극 같은 영화니까요.
깐느에서 상영되었을 때 외국인들에게 한 편의 '블랙코미디'로 받아들여 졌다더니만, 과연 그럴만합니다.

 

이런 영화에서 배우의 연기력은 어쩌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감독의 에고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극 속의 인형처럼 연기하기도 고된 일이겠으나 

한 배우의 연기력이 몸서리쳐지게 느껴지는 그런 식의 연기가 필요한 영화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감독의 머릿 속엔 이미 이 영화를 가지고 하려는 말이 딱 짜여져있었던 것 같고,
그래서 배우의 연기력이나 자의적인 해석을 그닦 허용치 않았을 듯한 느낌이에요.
어느 인터뷰에선가 전도연이 말하기를, 하녀 캐릭터를 놓고 임상수 감독과 아무리 여러번 리허설을 거쳐도
서로의 갭을 좁힐 수가 없어 답답했는데, 감독이 준비해온 하녀 의상, 초미니스커트를 보고서야 감을 잡았고
그 이후론 문제가 없었다구요. 영화를 보고나니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좀 알겠어요.

 

저는 처음에 서우가 주요인물로, 그것도 부잣집 마나님 역으로 캐스팅되었다는 얘기에 놀랐는데, 그런 면에서 보면 이해가 가죠.
감독은 서우의 연기력이 아니라 성형수술티 물씬 나는 얼굴과 실리콘가슴을 캐스팅한 겁니다.
그 사치스럽고 속물적인 어린 여자애 이미지를요. 이정재도 마찬가지죠.
물론 이정재는 연기를 잘했어요. 하지만 그건 외려 부수적인 거고, 이 영화에서 그를 필요로 했던 부분은
조각같은 몸, 그럴듯한 외모와 더불어 이제껏 필모를 통해 쌓아온 묘하게 속빈 강정 느낌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정재는 실제로 와인과 고급패션에 취미가 있다고 하니, 허영의 왕국을 연기할 배우로 더할나위 없지요.
보너스로 그에게는 하필 삼성가 이재용의 전부인과 스캔들까지 있습니다.

 

전도연이 연기한 은이가 안쓰러운 까닭은, 그토록 도식적이고 정형화된 기호들의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인간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녀는 다분히 이해가능한 범위 안에서 사고하고 행동합니다.
또한 일반인들의 상식선 안에서 반응하고 선택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녀가 발을 들여놓은 궁전같은 집은 그러한 상식이나 합리로 돌아가는 구조가 아니라는 것이
그녀의 큰 비극인 거죠.

 

이 영화의 원작인 김기영 감독의 <하녀>가 발표된 60년대만 하더라도,
남편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은 아내의 지위를 위협하는 존재였고,
외도를 저지른 남편은 가정이 붕괴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21세기 한국에서 상류층의 아이를 임신한 하류층 여인의 운명은 불나방에 다름없지요.
저에게 마지막 장면의 불타는 은이는 복수의 상징이 아니라, 불나방의 은유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강하고 격렬한 클라이맥스가 될 수도 있었을 이 영화의 결말이 그토록 엉성하고 짧게 연출된 것마저,
왠지 불나방처럼 산화한 은이의 허망함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극장문을 나서며 씁쓸했습니다.
허나, 불나방의 입장에서는 또 화려한 불빛을 만나면 뜨거운 줄 모르고 달려들 수밖에 없는,
본능에 가까운 욕망이란 게 있겠지요. 그렇겠지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회원 리뷰엔 사진이 필요합니다. [32] DJUNA 2010.06.28 82685
141 [영화] [초능력자] [페스티발] [이층의 악당] [1] [21] taijae 2010.11.17 5901
140 [영화] 베로니카 게린 [2] 무비스타 2010.11.16 4155
139 [소설] 누가 큐피드의 동생을 쏘았는가 - 데이비드 헌트 [1] 보쿠리코 2010.11.09 3801
138 [미드] E.R 8시즌 [11] [12] 브랫 2010.11.08 6811
137 [영화] 레드 RED [6] [1] 곽재식 2010.11.07 5023
136 [책] 독재자: "평형추"와 "낙하산"을 중심으로 [4] [208] 곽재식 2010.11.07 5344
135 [만화] 셀프 - 사쿠 유키조 [5] [18] 보쿠리코 2010.11.05 14275
134 [영화] OO7 뷰투어 킬 [3] [18] 무비스타 2010.11.04 5321
133 [영화]히치콕劇場 - 현기증(Vertigo1958년작) [2] [2] 무비스타 2010.11.03 6563
132 [영화] 부당거래(2010) [1] [22] 푸른새벽 2010.11.02 5504
131 [영화] 짝패, 신나거나 혹은 식상하거나 [2] [1] 푸른새벽 2010.11.02 4166
130 [영화] 영화인의 시네마천국 - 낭뜨의 자꼬 [1] 무비스타 2010.11.01 2983
129 [영화] 아네스 바르다의 행복 [2] 무비스타 2010.11.01 4445
128 [영화] 부당거래, 모두가 나쁜 사람들 [15] lonegunman 2010.10.28 6078
127 [영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영화 [대지진] [1] taijae 2010.10.27 4986
126 [영화] 로고스 없는 파토스, [심야의 FM] [8] [9] taijae 2010.10.13 5646
125 [영화] 적인걸: 측천무후의 비밀 通天帝國之狄仁傑 [7] [2] 곽재식 2010.10.13 4782
124 [드라마] 동이 감동 2010.10.12 3926
123 [영화] 탈주자 (The One That Got Away, 1957) : 도망은 힘들어야 제 맛 [1] [11] oldies 2010.10.11 4509
122 [영화] 회색 벨벳위의 네마리 파리 Four Flies on Grey Velvet <유로호러-지알로 콜렉션> [6] Q 2010.10.11 624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