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드라 
바이퍼케이션
이우혁 (지은이) | 해냄 | 2010-08-10 
각 권 : 12,000원



그리스 신화와 『바이퍼케이션』


『퇴마록』을 읽을 당시 이런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세계의 온갖 신화가 다 나오고 심지어 삼국지에 나오는 무기까지 등장하는 이 소설에서 어째서 ‘그리스 신화’는 전혀 나오지 않을까?
이집트 신화를 다루면서 ‘세크메트의 눈’ 같은 아이템이 등장해서 자주 사용되고, 인도 신화의 주술이 나오고, 아더왕의 전설, 켈트 신화 등이 나오는 이 소설에서 ‘그리스 신화’는 왜 배제된 것일까?
이런 의문이 더욱 강해진 것은 『퇴마록』과 비슷한 오컬트 소설인 『신비소설 무』에서 ‘헤르메스의 지팡이’ 같은 그리스 신화의 아티팩트가 등장할 때였다. 훗날, 나는 이런 의문의 해답을 알게 된다. 바로 작가가 『퇴마록』을 구상할 시기부터 함께 구상한 한 작품에서 그리스 신화를 중심으로 놓았기 때문에 『퇴마록』에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마침내 15년의 시간이 지난 뒤에 드디어 작가가 오랜 기간 구상을 한 작품이 실제로 활자화되었다. 하나의 작품을 이토록 길게 구상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물론 전심전력을 다해서 그 시간 동안 구상하고 자료 조사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오랜 시간 계속 소재를 머릿속에서 굴리고 새롭게 구성하고 자료를 꾸준히 찾아서 읽는 노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이 소설은 특별한 모습을 갖추고 세상에 나타났다.
작가가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작품을 준비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전에 850만부가 넘게 팔린 『퇴마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퇴마록』은 당시 수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힌 책이었다.
개인적으로 책이란 게 이렇게 재미있는 것이구나,를 처음 일깨워주고 독서의 재미를 붙이게 만든 책이기도 하다. 이 『퇴마록』의 성공이 있었기에 지금의 『바이퍼케이션』이 나올 수 있었다. 즉, 『퇴마록』을 포함한 작가의 전 작품은 천 만권이 넘게 팔렸는데, 이 천만의 힘이 있었기에 『바이퍼케이션』이 나올 수 있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이 중, 이우혁 작가의 글을 한 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바로 『바이퍼케이션』의 탄생에 일조를 한 셈이다.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독특하고 공통적인 재미를 보일 만한 뛰어난 장르소설에 말이다.

『바이퍼케이션 - 하이드라』

PC통신 시절, ‘하이드라’라는 제목으로 잠시 공개되었던 텍스트본과는 하나도 일치하는 것이 없는 완벽하게 다른 작품이 되어서 나타났다. ‘바이퍼케이션’이라는 낯선 단어는 수학 용어로 불확실적인 결과(이방성)를 뜻하는 것이다. 도저히 판단할 수 없는 현상을 지칭하는 단어. 이 작품의 주인공 중 한 명인 헤라 헤이워드는 바로 그 바이퍼케이션이라는 단어에 걸맞는 현상을 경험하고 모든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된다. 작가가 니콜 키드먼을 연상하고 썼다고 하는 헤라 헤이워드는 소설의 핵심이며,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다. 그녀가 바로 모든 사건의 열쇠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그리스 신화, 범죄심리학, 이능 등이 결합된 복잡한 구조를 취하고 있는 소설이지만, 결코 어렵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작가는 『퇴마록』 시절부터 ‘재미’를 최상에 놓고 쓰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단연 재미있다. 국내에서 몇 안 되는 이름만으로도 믿고 살 수 있는 작가 중 한명으로, 항상 뛰어난 재미를 보장하는 소설을 써온 작가가 현재 자신의 최고작을 써낸 것이다. 홈페이지에 작가 본인이 지금까지 쓴 글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다고 할 정도로, 가장 완성도가 높다. 안정적인 문체, 적절한 복선과 암시가 깔린 치밀한 구성, 독특한 소재, 새로운 이야기, 뛰어난 캐릭터성, 분위기, 주제의식까지 모두 제대로 쓰인 작품이다. 우발적으로 시작된 『퇴마록』이나 이후 급하게 집필한 다른 작품들과는 궤를 달리 한다. 오랜 시간 구상을 했고, 한국에서 미국으로 배경을 바꾸면서 초고를 모두 버리는 등, 끊임없이 갈고 닦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의 변화를 알아볼 생각도 없이 고정관념만으로 판단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읽은 것만으로 판단하는 경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간단히 과거 작품과 문체 비교를 하여 어떤 변화가 있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퇴마록과 바이퍼케이션의 문체

* 주의 : 이후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우혁 작가의 신작 『바이퍼케이션』의 본문은 마우스르 드래그를 해야만 읽을 수 있게 가려두었습니다. 스포일러를 봐도 상관없는 분들만 참고하세요.

불기둥과 빛줄기들이 한 곳에 모이더니 요란한 소리와 함께 폭발해버렸다. 그러나 이제 박신부와 허허자는 포위망 밖으로 나와 있었다. 허허자는 온 힘을 다해 최강의 주술을 사용했고, 박신부를 바깥으로 꺼내 주었다. 심한 화상을 입기는 했지만, 허허자는 아직도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숨은 이제 꺼져가고 있었다. 지나치게 많은 힘을 썼던 것이다. 그 옆에서 준후가 서럽게 울고 있었다.
“아저씨, 미안해요, 미안……”
“아니야, 이건 네탓이 아니다……신부님!”
“예, 허허자님! 정신을 차리세요!”
박신부는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허허자의 상처를 치료하려 했으나, 허허자는 외상 때문에 죽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 수법은 스스로의 생명을 태워서 뭇 신들에게서 최강의 힘을 끌어내는 술수였던 것이다. 허허자는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 퇴마록 국내편 1권 「하늘이 불타던 날」 중에서


이반 교수가 윌리엄스 신부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또 다른 늑대가 이반 교수에게 덮쳐들었다. 이반 교수가 힘껏 십자가로 그놈의 양 미간 사이를 찌르자 그 늑대는 길게 끄는 고함 소리와 함께 이반 교수의 앞가슴 부분을 발톱으로 움켜쥐면서 땅으로 떨어져내렸다. 이반교수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윌리엄스 신부를 놔둔 채 초원 지대를 벗어나기 위해 마구 줄달음질쳤다. 숨이 턱에 닿을 듯했지만 지금 그것을 돌볼 때가 아니었다. 뒤에서 늑대 몇 마리가 따라오는 듯했으나 휘파람 같은 소리가 들리자 더 이상 늑대들은 이반 교수를 쫓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반 교수는 그 자리에 펄썩 주저앉아 한동안 숨을 돌렸다. 좀처럼 자신이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흡혈귀를 추적하던 자기 자신이 도리어 흡혈귀에게 이렇게 쫓겨본 적은 처음이었다. 한동안 호흡을 고르던 중 갑자기 윌리엄스 신부 생각이 이반 교수의 머리에 떠올랐다. 이반 교수는 벌떡 일어나 지금 자기가 달려온 초원지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초원에는 더 이상 아무런 흡혈귀도 늑대들의 자취도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저만치 높은 곳에서 드라큘라 성만이 그 을씨년스러운 자태를 밤하늘에 드리우고 있을 뿐이었다.

-퇴마록 세계편 3권 「왈라키아의 밤」 중에서


겨울인데도 겨울답지 않게 따스한 날씨가 계속 되고 있었다. 미국에서 부상을 모두 치료하고 나서 끈질기게 달라붙는 기자들을 뿌리치느라 신분을 감추고 어렵사리 한국으로 돌아온 퇴마사 일행은 그다지 특별한 일 없이 오래간만에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난 다음에도 뉴욕에서 벌어진 알 수 없는 활극에 대해 냄새를 맡은 몇몇 끈질긴 기자들은 지칠 줄도 모르고 단서를 잡기에 골몰했다. 뉴욕의 경찰당국에서는 ‘알 수 없는 일’로 치부하여 나름대로 단속을 하려 안간힘을 썼지만 블랙써클과의 마지막 대결을 치르고 난 폐허와 부스러진 썩은 시체들 (좀비들), 넘쳐날 듯 흘러내리는 피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원인조차 알기 어려운, 거기다가 신원마저도 전혀 밝힐 수 없는 마스터의 시체, 그리고 전쟁을 방불케 하도록 안이 엉망이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화약이나 총기를 사용한 흔적이 ― 한곳을 빼고는 ― 전혀 없는 점 등은 사건이 수습된 후 그곳에 뛰어 들어간 보도진 뿐만이 아니라 영문을 잘 모르고 있던 일반 경찰 들까지도 당황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가던 퇴마사 일행의 모습이 누군가에 의해 먼 발치에서 사진으로 찍혀서 ― 얼굴까지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동양인들이었고 나이나 체구등은 식별이 가능했다. ― 보도진들이 벌떼같이 달라 붙은 것이다.

- 퇴마록 혼세편 1권 「와불이 일어나면」 중에서


예전 문체는 사람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은유나 묘사가 적은 건조한 설명조의 문장에, 비문이나 읽기에 거슬리는 문장들이 상당히 많은 탓이었다. 몇몇 부분만 인용을 해보아도 문장이 자연스럽지 못한고 성기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바이퍼케이션』은 다르다. 작가의 문체 변화가 먼저 눈에 띄는 작품이다.

다시 한 번 칼날을 살폈다. 날을 눈망울 바로 앞에 수평으로 세워 비틀림이나 굴곡이 있는지 확인한다. 리온은 약간의 근시가 있지만 코앞의 사물은 망막에 필름을 박는 것만큼이나 잘 볼 수 있다. 날은 잘 세워졌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야 자신도 모르게 흘린 이마의 땀을 소매 깃으로 슬쩍 닦아낸다. 그가 일하고 있는 냉동 창고의 온도는 얼어붙을 정도로 춥지는 않지만 그래도 쌀쌀했다. 그런데도 땀이 흐른다. 이제야 아까부터 틀어놓았던 음악 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시끄러운 데스 메탈(Death Metal)이다.

『바이퍼케이션 - 하이드라』 1권, 10쪽 중에서


그러니 더욱 자신이 힘을 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사건도 견디기 어려운데, 이런 완전히 미친놈들까지 나와서 설치는 판이다. 잠시 돌이켜보니 사건은 많았다. 지금 자선병원에 가서 만나야 하는 아이언은 누군가가 설치한 폭발물에 사고를 당했다. 방금 보고 나온 리온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끔찍한 범죄자였고 그 이상으로 엽기적인 방법으로 죽었다. 흡혈귀라는 놈은 이미 미국 전역을 돌면서 최소 13명의 여자들을 끔찍한 방법으로 죽였고, 이제는 가르시아가 관할하는 이 도시 근처에까지 희생자의 시체를 늘어놓고 있다. 꼭 살인마가 아니더라도 알렉스라는 멀쩡한 남자가 별다른 이유도 없이 머리에 글록 권총을 자동으로 긁어 머리를 날려버렸고, 차를 몰고 스스로 벽에 돌진하는 미친놈에다가, 거리 여기저기에서는 강도들이 증거 하나 없이 사람들을 죽이고 다닌다. 가르시아의 관할 안에서만도 그런데 미국 전체, 세계 전체로 보면 어떨까?
‘제기랄, 이놈의 세상.’
마크 박사가 말한 대로 이 세상은 살면 살수록 알 수 없고 파악할 수 없는 혼돈 같았다. 따뜻한 커피와 맥주를 권하는 훈훈한 사람들의 세계와 피냄새 나는 미친놈들의 세계가 겹쳐 있는…… 그리고 자신은 그 중간에서 줄타기하는 광대이고.
‘염병할.’
마음이 무거워진 가르시아는 거칠게 키를 돌렸다. 으르렁거리는 엔진 소리가 괴물의 포효 같았다.

『바이퍼케이션 - 하이드라』 1권, 53~54쪽 중에서


이와 같이 기존 작품들과 비교해서 훨씬 자연스러운 문체로 작품이 쓰여졌다. 더 이상 이 작가의 문체는 보기 힘들다는 선입견을 갖고 작품을 대할 수 없는 것이다. 블리자드사를 평가할 때, 과거의 워크래프트1을 갖고 그래픽이나 게임성을 논하는 사람은 없다. 가장 발전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나 스타크래프트2를 갖고 이야기한다. 작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언제까지 처녀작을 갖고 그 작가의 문체나, 작품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작가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매 작품마다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이는 작가들은 상당히 많다. 작가의 변신은 무죄다. 이우혁의 장편소설 『바이퍼케이션』은 띠지에 있는 말처럼 이우혁 문학의 신기원이다. 『바이퍼케이션』의 출간으로 인해, 이우혁은 자신이 가진 틀을 깨고 한 단계 발전한 모습을 선보였다. 이제 『바이퍼케이션』을 읽지 않고는, 이우혁을 논할 수 없다.

사이코패스와 광기를 넘어선 또 다른 힘

이 소설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색다른 재미를 줄 수 없다. 작가의 상상력은 인간의 인식 밖으로 나아간다. 해리성정체장애와 함께 인간의 인지를 벗어난 능력이 주요 소재 중 하나이다. 이제는 어디서나 쉽게 등장하는 클리셰 같은 초능력과는 다르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이능은 인간의 인지를 벗어난 육감도 아닌, 제7이나 제8의 감각 같은, 혹은 신의 감각 같은 초월적인 감각이 등장한다. 러브크래프트 신화에 나오는 외계의 신들은 인간에게는 없는 수 십가지의 감각들이 존재할 것이다. 인간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하지 못하는 것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처럼 이 소설에 나오는 초감각은 이 세계에 중첩된 다른 세계를 인지하고 보고 조작할 수 있는 것처럼 나온다. 이 능력의 강력함을 대사 속에서 독자에게 충격을 주는 부분은, 그래픽노블 등에 등장하는 히어로들이 만약 실재한다면 가볍게 수족으로 부려서 편했을 것이라는 식의 대화다.
이런 능력은 기존 소설에서 보기 힘든 참신한 설정이기 때문에, 독자를 납득시키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작가는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의 이론을 바탕으로 설정을 대화나 서술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놓았다.

“아까 아니마, 아니무스 이야기를 했었죠? 말하다가 중단되었습니다만.”
“그게 왜?”
“그걸 심리학적으로 규정한 사람이 바로 융입니다. 칼 구스타프 융. 여기 이 책의 내용에 그 부분도 분명 있죠. 이건 융의 저서는 아니지만 그의 저서들을 교양적으로 축약하여 집대성한 평전 같은 것이니까요.”
가르시아는 조금 표정을 굳혔다. 에이들은 계속 말했다.
“그리고 융은 말년에 심리학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는 동양에서의 ‘인과’의 개념을 받아들여 인과 원리(das Kauslprinzip)와 동시성 원리(das Synchronizitätsprinzip)를 주장했는데, 그 내용이 경험적이거나 기존의 과학체계와는 많이 달라서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한 거죠. 물론 실증적으로 증명하지 못했으며 아직까지도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만…….”
“난 못 알아듣겠어. 왜 갑자기 독일어를 하는 거야?”
“아…… 그게…… 적절한 영어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요. 융은 독일 사람이었거든요. 글도 독일어로 썼고…….”
“그게 대체 뭔데?”
에이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굳이 간단히 설명하자면 우리가 사는 세계에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세계가 겹쳐 있다는 주장입니다. 정신과 물질 어느 쪽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다른 힘과 다른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결코 직접적으로 인지할 수 없지만 간접적으로 현실과 정신과 물질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다른 뭔가의 세계 말입니다.”

- 『바이퍼케이션 - 하이드라』 2권, 184~185쪽 중에서


해리성정체장애를 보이는 인간이 초월적인 감각까지 획득할 경우, 그녀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예측불가능한 사태가 연이어 일어나면서 독자는 이 이야기가 어디로 이를지 알 수 없이 정신없이 책에 빨려든다. 앞에서 말했듯이 또한 퍼즐을 맞추듯 구성이 3권이나 되는 분량의 책이 구성이 정교하게 짜여져 있기 때문에, 한 번 읽고 나서 재독을 하면 3권에서 밝혀진 사실들 때문에 1권이 완전히 새롭게 보인다. 1권에서 그냥 스쳐지나가듯 등장했던, 인물들이 모두 어떤 역할을 하고 움직이고 있는지 새롭게 파악되기 때문이다. 대사 속에서 한 두마디로 등장했던 이름들까지도 3권에서는 중요하게 나타나서 활동한다. 암시와 복선을 어떻게 써야 제대로 된 스토리텔링이 되는지 알 수 있는 사례다.

작품의 이해를 돕는 인상적인 인용구들

『바이퍼케이션』은 각 장마다 인용구가 들어가 있다. 이는 작품 내용의 이해를 돕는 적절한 주석 같은 역할을 하며 독자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전달해준다.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일조하기도 하고, 여기에 인용된 책들을 또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그만큼 인상적인 인용구들이 많았다. 그리스 신화, 학술적인 내용, 실제 연쇄살인범들이 한 말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되어서 재미있었다. 여기에 다시 몇 가지만 재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500명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아이들을 100명만 죽이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에 그 선을 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 때문에 우셨다. 나는 100명의 어머니들이 자기 자식 때문에 울게 하고 싶었다.” ─ 지베드 이크빌*

* 100명의 아이들을 살해하고 경찰에 자수한 뒤 감옥에서 자살한 파키스탄의 살인마.


“제일 먼저 아이의 옷을 벗겼지. 조그만 것이 발길질을 해대고 물고 긁어대고 난리를 치더군. 결국 아이를 질식시켜 죽이고, 살덩이를 작게 잘라서 고기를 발라냈어. 요리해서 먹으려고 말이지. 오븐에 구운 작은 엉덩이가 얼마나 달콤하고 부드럽던지. 아이 고기를 다 먹는데 9일이 걸렸어.”
─ 앨버트 피쉬*, 법정 진술 중에서

* 70대의 노인으로 어린 아동을 전문적으로 살해, 식인 행위를 한 살인마.


“나는 다른 사람들의 삶, 그들의 생사를 결정했다. 생명을 좌우하는 힘을 지녔던 것이다. 처음 15명을 죽이고 나서 아무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내 권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나 자신을 재판관, 검사, 배심원에 임명했다. 그렇게 나는 신의 역할을 했다.”
─ 도널드 하비*, 52건의 살인을 저지른 것에 대해 설명하면서

* 의료센터에서 일한 살인광.


연쇄살인범들이 선망하는 직업 중에 경찰관이 포함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경찰관은 권력이 있으며 일반인의 존경을 받는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악인을 벌할 권한이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번 조사를 통해서 경찰관 중에서 타락하거나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는 이는 드문 반면, 연쇄적인 범행을 저지른 이들이 경찰에 지원했다가 낙방하고, 그래서 관련된 분야 가령 보안이나 경비직종에 종사한 경우가 빈번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존 더글러스, 『마인드 헌터』에서


헤라클레스는 그의 엄청난 힘으로 인해 남성성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그런 헤라클레스가 아마존에 갔을 때 여장을 하고 여인들의 후궁에 파묻혀도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는 많은 고대 영웅들에게 공통되는 주제로 양성성 혹은 완벽한 인간성에 대한 과거의 인식이 드러나는 요소이다. 그의 무적이 힘이 정말 물리적인 것뿐이었을까?


헤라클레스를 상대하는 천재형 인간, 에이들

『퇴마록』의 성공 비결 중 하나는 바로 캐릭터성일 것이다. 지금도 『퇴마록』을 읽은 독자라면, 현암, 준후, 승희, 박신부 이 네 명의 이름과 모습, 특징들을 명확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어떤 소설들은 다 읽고 나서도 인물들이 흐릿하고 별 개성이 없는 경우도 많지만, 『퇴마록』은 십 년이 훌쩍 지나도 캐릭터만큼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다.
『바이퍼케이션』은 3권이라는 분량 상 많은 인물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헤라 헤이워드를 비롯해서 여기에 가르시아 반장과 FBI 프로파일러인 에이들이 등장한다. 특히 에이들은 왜소한 신체에 별다른 특이한 능력이 없는데도, 오로지 천재적인 두뇌만으로 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캐릭터이다. 두뇌만으로 온갖 기이한 사건들과 연쇄살인범들이 날뛰는 소도시에서 모든 사건을 파악하고,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개인적으로 에이들 같은 캐릭터를 좋아한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적이나 능력, 현상에 인간의 힘만으로 맞서는 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퇴마록에서도 비교적 현암이나 준후 같은 캐릭터를 좋아했고, 만화에서 『뱀프2/1』이나 『나루토』, 『원피스』 등에서도 초인들이 난무하는 곳에서 오로지 수련을 통해 인간의 능력을 최상으로 올려 대등하게 싸우는 캐릭터들에 열광했다. 나리타 료우고의 『바카노』에서도 레일 트레이서를 좋아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불사인들이 난무하는 무대에서 순수한 인간이 최강의 무력과 존재감을 선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매력적이었다.
에이들 역시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는 천재다. 불우한 사건을 겪고 해리성정체장애를 겪으며 스스로를 헤라클레스라고 믿고, 또한 그만큼 초감각을 지닌 막강한 존재에 지략으로 맞서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일을, 에이들을 해낸다. 에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 소설이 더욱 재미있어진건 두말할 것도 없다. 캐릭터 조형도 입체적으로 잘 되었다. 단순히 천재다, 뛰어나다, 이런 속성만이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없다. 그 캐릭터가 유니크하고 스스로만의 아우라를 가지려면, 복잡한 성장과정의 설정과 그것을 어떤 식으로 내비치면서 성격을 부여할 것인지에 대한 감각이 필요하다. 이 소설에서는 처음에는 사고와 행동으로 인물을 선보인다음, 가르시아 반장과의 대화를 통해 과거를 언급하면서 캐릭터의 내면을 드러낸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그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상처도 언급이 되는데 이는 범죄로 인해 죽은 누이다. 에이들이라는 캐릭터에서 바로 죽은 누이가 연상될 정도로 작가는 깊은 인상을 심어주는데 성공했다. 특히 읽으면서 인상깊었던 장면은, 에이들이 자신이 어떻게 모든 것을 빠짐없이 기억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장면이다. 에이들은 매순간 기억을 이중으로 구성한다. 마치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백업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이상이 생기자, 이 모든 사건의 불가사의한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다.

“제 백업 방법을 알려드릴까요? 제 누이에 대해 말씀 드렸죠? 제가 그곳으로 갑니다. 누이가 물에 반쯤 잠겨서…… 구멍만 뚫린 눈으로 저를 지켜보죠. 반가워 에이들, 반가워 누나. 저는 누이 앞으로 가죠. 그리고 누이 앞에 놓여져 있는 책을 폅니다. 펴면 아주 커지고 아주 넓어지는 페이지가 있어요. 항상 펼 때마다 비어 있죠. 저는 그 책에 글자를 새겨 넣어요. 아주 빨리 써지기 때문에 쓴다기보다는 새긴다고 해야 옳을 겁니다. 붉은 글자들이 꽃처럼 피어오르죠. 일에 대한 것, 사건에 대한 것, 새로운 지식, 그리고 제가 살면서 겪는 중요한 일들…… 모두 적습니다…… 다 적고 나면, 누이의 몸으로 그 책이 들어가죠. 사실 그 책이란 게 누이의 옷자락이었어요. 피부였는지도 모르죠. 그리고 누이가 말하죠. 그랬구나, 에이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에이들…….”
에이들은 양손으로 얼굴 전체를 감싸쥔 채 천천히 말을 맺었다. 가르시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에이들은 갑자기 손을 내렸다. 얼굴이 약간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눈에는 눈물 자국이 은은히 번져 있었다. 그러나 에이들의 목소리는 평상시처럼 조용했다.
“제 중요한 기억들은 바로 이렇게 써집니다. 사실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어요. 매번 이런 상상을 보는 건 아니지만 최면으로 이 상상과 기억을 연결시켰습니다. 그러니 이건 절대적인 반복이죠. 제가 만든 상상이고…… 견디기 쉽지는 않습니다만…… 제 백업은 누이에 대한 기억과 이어집니다. 제가 그렇게 이었어요. 무척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해냈죠. 그러니 제가 백업을 잃는 것은 누이에 대한 기억을 잃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어요. 반장님, 그게 가능할 것 같습니까? 제가 누이에 대한 기억을 잊는 게 가능한가요?”
“모르겠네, 에이들. 난 정말 모르겠어…….”
“누군가가 건드렸습니다. 기억 몇 부분이 일치하지 않아요. 누이가 입을 벌려 말해 주지 않아요.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바이퍼케이션 - 하이드라』 2권, 44~45쪽 중에서


단상을 마치며

이 외에도 해라 헤이워드의 해리성정체장애로 나타난 헤라클레스의 존재에 대해서 카도노 코우헤이의 『부기팝은 웃지 않는다』의 ‘부기팝’과 비교해보면 탄생 과정은 한 쪽은 상당한 상세하고 복잡한 연유가 있고 다른 한쪽은 원인이 불분명하여 신비한 면이 있으나, 능력 면에서는 한쪽은 인간을 초월했고 한쪽은 물리적으로 가능할 것 같은 지점에서 능력을 사용한다는 면에서 비교되는 등 몇 가지 흥미로운 생각할 거리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헤라클레스의 존재에 대한 것은 이 소설의 주제와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므로, 그에 관한 생각들은 추후에 제대로 재독을 하고 나서 감상문을 쓸 수 있을 때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그저 일단 정독도 아니라 가볍게 훑은 정도에서 기존 작품에서 변화된 점, 이 작품에서 인상적인 점들을 몇 개만 꼽아서 단상으로 적어보았다.
아직 작품을 구매할지 말지, 도대체 어떤 작품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하는 까닭에서다.
분명한 것은 한국에서 이런 유의 소설은 매우 드문 편이고, 퀄리티 또한 높다는 것이다. 미국을 배경으로 한국인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흡인력과 재미를 갖추고 있다. 즉, 3권을 다 구입해서 읽어도 전혀 후회하지 않을 만한 책이다. 독서의 즐거움, 장르소설의 매력을 온전히 담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서술이나 대사 모두 자연스럽고 미국을 배경으로 한 탓에, 스티븐 킹이나 딘 쿤츠, 토마스 해리스의 작품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머릿속에 영상으로도 잘 떠올라서 마치 미드나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보는 듯하기도 하다. 특히 3권에서 결말로 치닫을 수록 몰아치는 속도는 머릿속이 기분 좋게 전율을 느낄 정도로 카타르시스를 준다.
책을 통해서 재미를 얻고 싶은 사람이라면, 바로 여기에 『바이퍼케이션』이 있다. 15년의 시간을 지나 마침내 책으로 출간된 이야기. 인간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찾는다. 매일 드라마를 보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다. 여기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추가되었다. 『바이퍼케이션』은 항상 새로운 이야기를 갈구하는 인간에게 즐거운 지적 유희를 선사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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