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자신 안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영화의 미스G가 그런 사람이에요. 하지만 외따로 떨어진 여자 기숙사에서 소우주의 여왕님 놀이를 하며 살아가는 그녀는 운이 좋은 셈입니다. 모든 소녀들은 그녀를 숭배하다시피하고, 그녀 자신도 숭배자들의 시선에 취해있으니까요. 연극일지언정, 하루하루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삶의 비루함을 견디는 방책이긴 합니다.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으로만 자신을 보려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많이 보아 왔잖아요. 물론 그 외면의 댓가를 언젠가 받게 될 수도, 징벌 앞에서 자살 등의 방식으로 회피할 수도 있지만, 상처를 까발겨 보여주며 동정을 구하는 사람들보다 연극을 하는 사람이 낫지 않은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 정도로 영화의 미스G는 아름답습니다. 적어도 '진짜 아름다움'을 지닌 피아마가 전학오기 전까지는요.

 

 '미스G'가 되기 전 소녀다운 실제 이름으로 불렸을 그녀는 학생시절 기숙학교 안에서 여러 가지 험한 일을 겪었을 거에요. 내포하고 있던 성격적 문제와 기숙사라는 억압적 환경(편지를 검열하는 곳이더군요)의 복합적 요인으로 그녀는 공황장애와 대인기피 등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녀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기숙학교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미스 G의 '분장에 가까운 스모키 메이크업'이라던가, 여학교 특유의 잔혹한 분위기와 같이 묘하게 호러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설정, 학벽에 걸린 미스G의 여학생 시절 사진 덕에 종종 '여고괴담'을 떠올리게 됩니다. 


아무튼 '치유'의 과정에는 급행이나 지름길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영역이 존재하는데, 이 영화에 미스 G는 그런 영역은 외면하고 날마다 가면무도회을 열듯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택했어요. 영화 내내 미스 G의 비주얼은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아요. 짙은 눈화장과 아프리카 여행지에서 걸치다 가져온 듯한 에스닉한 숄, 기다란 실루엣을 돋보이게 하는 실크 재질의 블라우스 등은 학생들을 홀리죠. 여왕님이에요. 그림자 여왕님.


그녀는 학생들을 매혹시킬 수 있는 일이라면 모조리 다 합니다.  맡은 수업은 다이빙인데, 학생들에게 "너희는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순간을, 찰나를 만나는 거야. 그 무엇도 너희를 구속할 수 없지"라고 말하죠. 물론 그녀의 공황장애 덕에 단 한번도 외부 대회에는 나가본 적 없이 죽어라 연습만 하고 있는 팀입니다.

 

 미스 G의 비밀을 눈치챈 후에 그녀의 허황되고 이상적인 말들이 아프게 들리기 보다는 가증스러웠던 이유는 자기기만과 위선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사람들에게 제가  과다하게 혐오를 느끼는 사람이기 때문일거에요. 영화 보는 내내 저의 편견이랄까, 하는 것 때문에 잡념이 많이 끼어들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많이 접해 본 저는, 태생적으로 '연기를 하듯'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관심과 흥미, 혹은 매혹을 느껴왔었고 때로  미스 G 추종자인 DI와 같은 일들을 당할 뻔했죠. 좀 더 성장한 후에는 미스G 류의 사람들이 저에게 정서적 착취를 일삼는 바람에 괴로웠고요. 아마도 그들은 저를 극중 피아마 같은 존재로 보고 애증을 느낀것일테고요.  다행히 제가 사는 곳은 기숙사가 아닌지라 영화나 음악, 문학 등의 안온한 품으로 용케 도망쳤지만.


아무튼 미스 G는 밤늦게 자는 아이들을 깨워 달밤에 나체 수영을 하며 해방감을 느끼게 해주는가 하면, '밤늦게 먹기' 놀이를 용인해 줘요. ('쌍둥이 시리즈'등의 소녀 기숙사물을 보신 분들은 재밌으실 거에요. 한밤중에 기숙사에서 파자마 차림으로 모여 소세지나 파이 등을 먹고 춤을 추며 노는 건데 이 아이들은 대담하게도 술까지 마시더군요) 또 아이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겪은 각종 모험에 대해 늘어놓는데, 어느날 피아마가 미스 G가 말할 다음 부분을 말해버리죠. 그도 그럴것이 미스G의 모험은 모두 간접경험이거든요. 마침 그 부분이 피아마가 책에서 읽은 구절이었고요.


미스G는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존재인 피아마에게 '당연하게도' 매혹돼 버려요. 반 아이들의 애들물놀이같은 수준과 비교도 되지 않을 고난도의 다이빙을 하고, 많은 여행을 했으며 어린나이에 연애 경험도 있는데다 매혹적인 이야기꾼이며 백작부인과 소작농의 아이라는 출생의 비밀까지 지닌 피아마는 그야말로 환상 속의 공주죠. 현실의 무엇도 경험해 보지 못하고 거짓의 너울만 뒤집어 쓰고 있는 미스G는 자신이 꿈꿔온 모든 것을 지닌 피아마에게 사랑을 갈구합니다. 친구가 되자고 쫓아다니지만 피아마 입장에서는 그 모든 행동이 곤란하고 혐오스럽기까지 하죠.


결국 어찌저찌하여 미스G는 피아마를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천식이 있는 피아마가 호흡기를 쥐지 못하도록 그녀의 손을 지긋이 잡고 있는 형태로요. 새파랗게 질려서 숨을 헐떡거리는 피아마 위에 앉아있는 에바 그린은 정말이지 한 마리 뱀파이어같더군요.

 

속편에서 미스 G가 끔찍한 비밀과 남루한 현실을 견디는 얼굴을 보고 싶다면 너무 잔인할까요. 이 영화의 매끈하고 그럴싸한 외양은 꽤나 마음에 들지만, 감독이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부분만 건드린 건 좀 아쉬워요. 에바 그린이 피아마에게 바칠 공물인 크림롤과 파이를 사러 시내에 나갔을 때 몹시 불안해 하는 모습이라던가 기숙학교에서 쫓겨나 홀로 좁고 더러운 방에 앉아 있을 때 일그러진 표정들은 정말  근사했거든요.

 

에바 그린은 초기작인  '몽상가들' 부터 한결같이 완벽한 스타일링을 보여주는 데 그게 가끔 위장으로 보인단 말이죠. 텅 비어보여요. 연기 스타일도 그렇고요. 본인이 원래 스모키 글램 스타일에 중독된 사람이라면 할 말없지만, 혹 자연인 에바그린이 겁많은 성격이 아닐까 상상해 보곤 합니다. 너무 잘난 부모를 둔 신인배우가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한 전략이 아니었을까 ....  아무튼 성스럽고 아름다운 공주 역할을 하면 좀 지루하고, 정신이든 육체든 한 부분이 일그러진 역을 하면 빛이 나는 미모에요.

 

 


*미스 G의 사랑을 독차지한 전학생 피아마를 괴롭히던 반장 DI, 미스 G. 둘다 이니셜인데요. 무슨 뜻일지 궁금합니다.


*영화 말미에 읽혀지는 편지의 주인공은 미스G일거란 예상을 깨고 친구들의 과자(!)를 가지고 기숙사를 나와 배를 타고 외부 세계로 떠나는 반장 DI입니다. 결국 주인공은 피아마도, 미스 G도 아닌 DI였나. 하는 생각이 드는 엔딩이었어요. 일종의 '성장'을 해냈다고 볼 수 있겠군요. 미스 G의 비밀을 알아채고 저항을 꾀하죠. 연애의 일방적 피해자 노릇을 집어치웁니다. 연적은 죽이고, 연인은 몰락시키는 방식으로. 쓰고 보니 얘 무섭네요.

 

*이자벨 아자니 류의 '아름답게 미친 여자' 연기 한번 제대로 해 줬으면 좋겠어요. 세월이 좀 흐른 후에요. 에바그린은 여전히 소녀같고, 조금 뻣뻣해요.

 

*정식리뷰는 아닙니다. 분석하며 보기에는 너무 감정이입이 되는 영화라서일까요. 소녀들의 역학관계는  언제나 매혹의 대상이면서 공포 그 자체에요. 어떤 분들에게는 100번을 돌려봐도 새록새록한 영화가 되실 듯합니다. '여고괴담2'나 '천상의 피조물'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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