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소 폭력적인 이미지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그리 사실적인 표현은 아닙니다만, 혹여 불편해 하실 분이 계실까 싶어 언급해둡니다.



 《자식 딸린 늑대》는 코이케 카즈오와 코지마 고세키가 1970년부터 선보이기 시작하여 총 28권으로 완간된 베스트셀러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일본 시대극 칼싸움 영화(찬바라) 시리즈물입니다. 원작의 경우 정밀한 시대적 고증과 일본 전통 회화의 기법을 응용한 연출로 명망이 높다고 하는데, 저는 찾아보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현재 네이트의 서비스를 통해 “분노의 늑대”라는 제목으로 볼 수 있는 모양입니다. 차라리 책으로 나왔으면 한 권쯤 사봤음직도 한데 인터넷에서 돈 주고 만화 서비스 받는 건 왜 이리 어색하고 하기 싫은지 모르겠습니다.

 찬바라 영화라고 하면 저는 쿠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여러 영화들을 필두로 코바야시 마사키, 오카모토 키하치, 고샤 히데오 등등 위명 쟁쟁한 감독들이 주로 60년대에 내놓은 걸작을 우선 떠올리게 됩니다만 이 《자식 딸린 늑대》 연작은 그런 역작들(성취도를 따지기 이전에 일단 영화의 모든 요소에 힘을 빡 주고 만들었음이 보인다는 의미에서)보다는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을 가지고 빠르게 만들어 내놓았던 70년대의 일본식 착취 영화와 함께 놓고 생각하는 편이 더 적절할 듯도 합니다. 과도한 신체 훼손 및 성애 묘사를 내세우는 한편 전체 만듦새는 헐거운 면도 적지 않은 영화들 말이지요.

 물론 완성도에서 우러나오는 풍격과는 별개로 이런 일본 착취 영화들의 문화적 영향력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쿠엔틴 타란티노가 〈킬 빌〉 연작을 통해 〈슈라유키히메〉(修羅雪姫, 1972) 같은 작품에 경의를 표한다든지, 아니면 직접적인 오마주나 인용은 없더라도 요새도 계속해서 〈닌자 어쌔신〉(Ninja Assassin, 2009) 같은 작품이 나오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박진감 넘치는 액션 외에도 시대적 분위기를 포착하거나 인간 군상의 드라마를 풀어놓는 데에 게으르지 않았던 영화사적 명작들보다는 오히려 헐렁한 부분이 있더라도 한순간 막 나가버림으로써 머릿속에 인상을 확 박아놓는 이쪽 작품들이 (오리엔탈리즘의 혐의를 떼려야 뗄 수 없는) 일본 문화에 대한 매혹에 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당장 《자식 딸린 늑대》만 보더라도 원작 만화가 미국에 소개되던 당시 표지 그림을 그린 사람 중 하나가 프랭크 밀러라는 사실은 퍽 시사적인 데가 있지 않습니까? “Deadly little Miho.”가 나오는 『씬 시티』도 그렇지만 밀러의 『로닌』을 보니 도입부에서부터 《자식 딸린 늑대》에 대한 인용─광주리(?)를 머리에 뒤집어 쓴 자객들─이 나오더라고요.




 기본 설정은 간단합니다. 때는 토쿠가와 막부 시절, 쇼군의 처형 집행인(코기 카이샤쿠닌: 원래 할복하는 사람 옆에 서 있다가 당사자가 배를 다 그으면 목을 쳐 마무리를 해주는 사람을 카이샤쿠닌이라고 합니다만, 이 코기 카이샤쿠닌이라는 직책 자체는 작자의 허구입니다.)으로 명망 높은 사내 오가미 잇토는 처형 집행인 자리를 넘보는 그림자 야규 가(야규 가는 전면에서 이미 쇼군의 수족으로 활약하고 있고, 그 이면의 실세로 그림자 야규 가라는 집단이 따로 있다는 설정.)의 모략에 휘말려 아내를 잃고 아직 젖먹이인 아들 다이고로와 함께 방랑길에 나섭니다. 오가미는 다이고로를 태운 유모차를 끌고 다니면서 한 건에 500료씩 받아먹는 자객, 이름 하여 “자식 딸린 늑대”로 명성을 쌓아 나갑니다. 그리고 복수의 염을 불태우며 명부마도를 걷겠노라 선언한 이 사내에게 수장 렛츠도를 중심으로 한 야규 가의 견제가 계속됩니다.

 장편 영화 여섯 편을 만들기에 과연 적합할까 약간 의심스러운 데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거대 가문에 대한 복수라는 최종 목표를 세운 채로 방랑하는 자객이라는 설정은 스물여덟 권짜리 장편 만화를 끌고 가기에는 퍽 편리한 설정입니다. 명확한 대립 구도를 마련한 상황에서 때에 따라 적당히 곁가지 에피소드를 첨가하기도 편하겠지요. 하지만 여섯 편의 장편 영화, 그것도 매 편이 거의 독립된 완결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 하나의 연작으로 묶이는 구성을 취하는 여섯 편의 장편 영화로 옮기기에는 불편합니다. 《반지의 제왕》처럼 처음부터 전체의 구조를 튼튼히 짜 놓고 만들기 시작했다기보다는 원작의 인기를 업고 적당히 만들 수 있는 만큼 만들어 보자는 식으로 나온 기획이니 더 그렇지요. 야규 가와의 대결에만 집중하자니 내용이 좀 빈약하고, 그렇다고 매 편을 독립적인 의뢰 이야기로만 끌고 가기도 마뜩찮습니다. 자식을 유모차에 태워 가지고 다니면서 칼부림을 벌이는 사내가 주인공이니, 아무래도 속사정을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결국 양자를 다 취하면서 어떻게든 매 편 적당한 완결성까지 갖추어야 하는데, 쉽지 않은 일입니다.

 결국 72년에서 74년에 걸쳐 공개된 여섯 편의 영화는 모두 어정쩡한 이야기 구조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대체로 오가미가 맡게 된 의뢰가 각 작품의 중심에 놓여 있기는 하지만 중간 중간 야규 가와 충돌이 벌어지기도 하고, 심지어 의뢰나 야규 가 양쪽과 모두 상관없는, 아마도 원작에서 퍽 인상적으로 다뤄졌기 때문에 첨가했을 법한 독립적인 일화까지 끼어들기도 합니다. 더 큰 문제는 각각의 사건들이 한 편의 영화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대동소이하다는 사실입니다. 야규 가와의 원한이 드러나는 사건이든, 의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든, 아니면 그냥 캐릭터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든 모두 비슷한 시간을 할애하여 인상적으로 담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내용이 없어서, 가 아니라 내용이 너무 많아서 ‘그런데 이 영화의 내용이 뭐였더라.’ 싶습니다.


 한편 오가미와 맞붙게 되는 적들은 한 편의 작품 안에서도 그 종류가 다양하게 쏟아지는 가운데 하나 같이 흥미진진한 특성이 가미되어 있는 반면, 오가미는 누구랑 붙어도 표정 변화 없이 공평하게 다 썰어주시는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그렇다 보니 영화의 도입부에 벌어지는 싸움과 결말부에 벌어지는 싸움,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 벌이는 싸움과 야규 가와의 싸움, 그리고 졸자들과 붙는 싸움과 대장들과 붙는 싸움이 모두 그 인상이나 긴장감이 비슷한 편입니다. 결과적으로 여섯 편을 내리 보아도 이야기가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로 가서 어디서 끝나고 있다기보다는 그냥 기나긴 장편의 일부를 발췌 감상했을 뿐이라는 느낌이 더 강합니다.

 굳이 이처럼 고르지 못하게 뒤섞인 여러 사건을 한데 모아주는 요소를 찾아보자면 첫째로는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낯빛 한 번 바꾸지 않고 대응하는 오가미의 태도, 둘째로는 막부 정치 하에서 벌어지는 잔혹상에 대한 의식이 있습니다만, 사실 둘 모두 시늉만 내는 정도이지 영화가 전개됨에 따라서 깊이를 더해주거나 긴장을 배가하는 효과를 거두지는 못합니다. 일단 오가미의 가치관은 에피소드에 따라 들쭉날쭉해서 한데 모아 놓고 보면 종잡을 수 없습니다. 말로는 인간의 가치관에서 벗어나 명부마도를 걷는다고 주장을 하는데, 찬찬히 살펴보면 일본 만화에서 곧잘 나오는 멋있는 츤데레 캐릭터처럼 약한 사람들의 사정을 봐주는 면이 제법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내면은 따뜻하지만 복수를 위해 스스로를 억누르는 부류의 사람인가 하고 보면 그건 또 아닙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터무니없이 사람을 죽여 버리기도 하고, 자식이 죽을 위기에 처해도 그냥 어쩔 수 없으려니 합니다. 한 에피소드에서는 성에 끌려가 키워졌다가 강간당한 뒤 복수에 나서는 여인과 오가미가 맞서는데, 그는 무려 당신 마음은 이해하겠으나 당신의 복수로 인해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 받고 복수를 결심하겠는가, 따위의 말을 늘어놓으면서 여인을 죽이려 듭니다. 아니, 자기부터 복수 대마왕인 주제에 대체 무슨 소리야? 이런 식으로 이 사람의 명부마도란 진지하게 이입하여 따라가 주기에는 너무 제 맘대로라 우스운 구석이 있습니다.

 한편 일본 봉건제의 억압적인 성향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코바야시 감독의 〈할복〉(切腹, 1962), 〈반역: 삼가 아내를 받다〉(上意討ち 拝領妻始末, 1967) 등을 비롯하여 많은 시대극 걸작들이 잘 다뤄준 바 있지만 《자식 딸린 늑대》에서는 역시 구색 맞추기 정도에 불과합니다. 사무라이며 닌자의 이미지에 심취했다는 티가 팍팍 나는 작품들이 많이들 그렇듯, 이런 ‘반항하는 주인공 이야기’의 이면에는 보수적인 태도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오가미가 전직 처형 집행인으로서의 명성을 거부하지 않은 채 여전히 다른 이들의 ‘근사한 자살’을 도와준다는 사실만 봐도 그렇습니다. 반드시 죽음을 통해서만 조직 내에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거나 스스로의 신념을 완성한다는 의식이 여섯 편에 걸쳐 팽배해 있고, 그 중 상당수가 순종적인 죽음, 기꺼이 받아들이고 싶은 죽음의 형태로 찾아오며, 더구나 주인공이 그 죽음을 선사해줍니다. 막부와 맞서는 척 하는 에피소드는 곧잘 등장하지만 그래봐야 실제로 행동하는 인물들은 모두 봉건적 가치 체계에서 벗어나지 않고, 영화도 그들의 심리와 거리를 두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폭력의 미학에 심취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이런 착취 영화들의 진정한 의의는 적당히 폼을 잡는 와중에 뒤통수를 후려갈기듯 과감한 묘사를 통해 좀 더 건실한 영화들은 안 주거나 못 주는 쾌락을 제공하는 데에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자식 딸린 늑대》 연작은 퍽 매력적인 향취가 있습니다. 일단 액션을 볼작시면, 단순히 잔혹한 묘사를 반복적으로 나열하기보다는 오히려 액션의 다양성에 매달리는 모습을 높이 살 만합니다. 물론 사지가 절단되는 모습을 통해 액션에 방점을 찍어주는, 쿠로사와 감독이 〈요짐보〉(用心棒, 1961)를 통해 도입했던 연출 방식은 여기서도 빈번하게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어떤 복장의 적들이 어떤 무기를 가지고 어떤 타이밍에 어떤 방식으로 공격을 해오며 오가미는 또 어떤 무기로 그들에게 대응하는가, 하는 점이야말로 《자식 딸린 늑대》의 핵심입니다. 이 시리즈보다 약간 먼저 이탈리아에서 나왔던 리 반 클리프 및 율 브린너 주연의 서부극 《사바타》 연작이 떠오르는데요, 태양을 마주보는 불리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지극히 고전적인 상황에서부터, 길 가던 아낙들이 무를 던져 공격한다거나 닌자가 옷에서 몸을 쏙 빼내 축지법으로 도망가는 따위의 일견 캠피하기까지 한 묘사, 그리고 이탈리아 서부극이나 제임스 본드 영화의 영향이 물씬 느껴지는 기관총 대량 학살이나 스키 액션까지, 그 가짓수만으로도 충분히 눈과 귀를 만족시켜주는 설정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더불어 이야기의 논리적인 구성은 헐겁더라도 장면장면을 끌고 가는 리듬이 좋습니다. 7~80년대의 저예산 착취형 장르 영화들을 보면 대체로 인상적인 장면이 듬성듬성 배치된 가운데 그 사이를 메우는 장면들은 지루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쿠엔틴 타란티노나 로버트 로드리게즈 영화를 보고는 “우와, B무비란 이런 거로군!”하면서 내친김에 진짜 미국식 동시상영관 영화를 찾아보신 분들이라면 공감하실 거예요. 하지만 《자식 딸린 늑대》는 대체로 지루한 부분 없이 장면장면을 웬만큼 흥미진진하게 끌고 갑니다. 불필요한 시간 끌기를 최대한 없애려는 듯 듬성듬성 시간을 툭툭 쳐내는 편집도 좋고, 대사에만 의존하는 일을 가능한 배제하고자 하는 자세도 한 몫 합니다. 어떻게 보면 평균적인 소년 모험 만화 수준의 깊이를 가졌다는 점이 이런 대목에서는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어차피 말로 구구절절 늘어놓고 배우들에게 연기할 자리를 한껏 마련해줘 봐야 대단한 게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럴 바에는 입을 좀 다물고 신기하거나 웃긴 상황을 하나라도 더 보여주자는 식입니다. 그래서 사연 있는 여자가 오가미와 같은 온천에 들어와서 무슨 말을 한참 늘어놓는 대신 그냥 다이고로가 헐벗은 여인네의 젖가슴을 만지작거리면서 긴장을 만들어 내고, 지난한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 쓸데없이 자세하고 기괴하며 잔인한 할복 장면이 첨가되기도 합니다. 이미 언급했듯 전체 영화의 흐름과 구조를 덜컹거리게 하는 요소이긴 하지만 일단 당장 눈앞의 장면을 재미나게 따라가기에는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게 제 눈에는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정확히 알고 있는 영화의 태도로 보여서 마음에 듭니다. 좀 덜컹거려도 하고 싶은 건 하는 영화가 좋지요.

 그럼, 시리즈 전체에 대한 총평은 이쯤 하고 여섯 작품을 가볍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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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딸린 늑대: 아이와 솜씨 빌려드립니다〉(子連れ狼 子を貸し腕貸しつかまつる, 1972)


 〈아이와 솜씨 빌려드립니다〉는 시리즈의 첫 작품답게 일단 주인공의 전사를 설명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 순서대로 사건을 배열하며 느긋한 전개를 보이거나 혹은 인물의 입을 통해 구구절절 사연을 읊고 속편이나 준비하지는 않습니다. 특유의 속도감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쭉쭉 나가면서 폼 잡기며 칼부림이며 세미 누드 등등 볼거리는 다 보여주고 가겠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지요. 도입부에서 오가미는 이미 다이고로와 함께 방랑의 길을 걸으며 일거리를 찾고 있는 상황이고, 이후 영화는 그가 어느 지방 관료로부터 영주를 시해하고자 하는 역도들을 막아달라는 의뢰를 받고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과 그 사이사이 오가미가 회상하는 과거의 사건을 오가며 전개됩니다. 이 두 축은 감정선을 보나 플롯을 보나 별 상관이 없습니다만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솜씨가 좋아 그리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가미의 과거는 논리 정연한 회상을 통해 전개되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사고의 편린처럼 제시됩니다. 일단 플래시백이 끼어드는 방식부터가 그렇습니다. “실은 이 몸의 내력은…”하는 식으로 청자를 상정한 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공놀이 하는 소녀들, 물웅덩이에 반사된 햇빛, 칼날의 반짝임처럼 다이고로와 함께 길을 가다가 마주하게 되는 자잘한 사물이나 사건의 이미지가 오가미의 기억을 건드리면서 그와 유사한 과거의 이미지로 넘어가고, 또 과거에 보았던 어떤 이미지가 현재 오가미가 보고 있는 이미지와 겹치면서 다시 현재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더욱이 이때 시간의 흐름을 생략하면서 대결이나 죽음과 같은 큼직한 사건을 뚝뚝 떼어 배치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가 파편적인 기억으로 제시된다는 느낌은 더욱 강해집니다.

 대사를 자제하고 영상과 소리로만 상황을 전달하려고 하는 접근법도 위와 같은 수법에 잘 어울립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소리의 사용이 인상적입니다. 《자식 딸린 늑대》 시리즈는 마치 전체를 무성으로 촬영한 다음 후시 녹음으로 모든 소리를 입히기라도 한 듯 극도로 인위적인 음향 설계를 선보일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들려야 할 소리가 안 들린다거나, 어떤 소리가 두드러지게 크게 들리는 식입니다. 그런 인위적인 음향 설계가 특히 〈아이와 솜씨 빌려드립니다〉의 회상 장면에서 효과적입니다. 첫 번째 회상이 시작되는 대목에서는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정작 빗소리는 하나도 안 들립니다. 집에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발소리도 안 들립니다. 일부러 무음처리를 했나 싶을 때쯤 오가미가 아내와 대화를 나누는데 대사는 또렷하게 들립니다. 이와 같은 명백한 시청각적 불균형 때문에 관객은 오가미의 기억이라는 필터를 통해서 과거의 사건에 다가간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스티븐 킹도 말한 바 있습니다만 플래시백이란 근본적으로 앞으로 나가고 있던 이야기를 멈추게 만드는 장치라서 과거의 내용이 아무리 흥미로워도 감상자가 지루해하거나 조급해하는 수가 많습니다. 인물이나 사건의 의미가 깊어지는 건 알겠지만 그래서 우리가 잠시 내버려두고 온 주인공들은 그 뒤로 어떻게 됐냐고 소리 지르고 싶어질 때가 있지요.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어차피 대단히 복잡하고 심오한 과거사가 있지도 않으니 액션이나 팍팍 넣으면서 과거를 짧은 인상처럼 처리하자는 식으로 밀고 가는 이 영화의 태도는 괜히 깊이를 더하려다가 오락물로서의 자세까지 흩트리는 일 없이 그저 시원스럽게 본분을 다하는 데에만 몰두해주니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그 외의 대목은 대체로 평범한 편입니다. 떠돌이 낭인이 간신들의 역모 계획을 막는다는 이야기는 〈쓰바키 산주로〉(椿三十郎, 1962)를 떠올리게 하지만 여기서는 그냥 오가미가 숨죽이고 있다가 때를 보아 모조리 쓸어버리는 정도로 간단하게 마무리 됩니다. 액션도 이후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작렬하는 갖가지 기이한 장치나 과격한 묘사와 비교해 보면 얌전한 편이고요. 그러나 이 작품에서도 이미 적의 우두머리가 등장하여 오가미와 자기네 부하의 대결을 지켜보면서 “물속으로 들어가면 저 녀석의 검을 당해낼 수 없는 법이거늘… 앗, 저것은 무슨무슨 검법!”하는 식으로 도와주지는 않고 해설이나 한다든지, 아니면 해를 마주보고 불리한 결투를 벌이는 와중에 어떤 예상치 못한 술책을 써서 상대의 우세를 빼앗는다든지 하는 식으로 소년액션만화를 떠올리게 하는 시리즈 특유의 매력은 웬만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식 딸린 늑대: 삼도천의 유모차〉(子連れ狼 三途の川の乳母車, 1972)


 〈삼도천의 유모차〉는 《자식 딸린 늑대》 팬들 사이에서 종종 시리즈 최고작으로 거론되는 작품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복잡한 이야기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문답무용! 액션이나 한가득 보여주고 갑시다! 하는 태도를 마음껏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말도 안 되는 추리를 하거나 개그를 시도하는 대목은 최소한으로 해놓고 유려한 살인 장면만 열 몇 개쯤 집어넣은 다리오 아르젠토 영화가 있다고 치면(혹시 진짜 있나요?), 물론 ‘그래도 영화가 내용이 있어야지 그게 뭐여.’ 할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래도 아르젠토 스타일의 쾌락에 홀라당 넘어간 팬으로서는 마음이 동하는 데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삼도천의 유모차〉가 이야기의 논리는 안드로메다 어디쯤 내다 버리고 죽어라고 싸움질만 하는 얼빠진 영화는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다른 작품에 비해 딱히 빈약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리즈는 사실 악당 설정만 적당히 잘 해줘도 반은 먹고 갑니다. 야규 가에 복수한다는 오가미의 목표는 이미 확실한데, 그렇다고 특별한 복수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정처 없이 떠돌면서 칼 닿는 대로 나쁜 놈들 다 죽이겠다는 식 아닙니까. 피투성이 폭력 묘사를 장기로 하는 편당 90분 안쪽의 액션 영화가 너무 머리를 굴려 플롯을 짜다가는 오히려 시간 내에 할 일 다 못하고 어중간해질 수도 있습니다. 기왕 소년액션만화처럼 나가는 작품인데, 중간 보스 하나씩 잡아간다는 기분만으로 한 편 한 편 만들어도 그리 나쁘지는 않지요. 그렇게 볼 때 〈삼도천의 유모차〉는 가장 당연하고 안전한 길을 택한 속편입니다.

 구조는 전편과 비슷합니다. 한쪽에서는 야규 가와의 충돌이 계속 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오가미의 칼솜씨를 사려는 의뢰인이 찾아옵니다. 두 이야기는 함께 진행됩니다. 〈아이와 솜씨 빌려드립니다〉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야규 가와의 대결도 과거가 아니라 현재 시점으로 전개된다는 정도? 조금만 야심이 있는 각본가라면 당연히 야규 가의 적들과 의뢰로 인해 맞서게 된 적들이 같은 공간에 모여서 일이 꼬인다든지 아니면 양쪽에서 손을 잡고 함께 오가미를 친다든지 하는 식으로 일을 꾸미겠습니다만 그런 정도의 통합에도 무심했다는 점이 좀 아쉽기는 합니다. 다행히 전작과 마찬가지로 전개 속도나 리듬은 적절한 편이어서 별 불만은 없습니다.

 〈삼도천의 유모차〉의 강점은 물론 다채로운 액션 장면에 있습니다. 갖가지 살해 방식, 비기, 암기, 이채로운 전투 장소 등등이 쏟아지면서 피를 갈구하는 관객의 눈과 귀를 만족시켜줍니다. 심지어 영화 중반부쯤에는 아무런 설명 없이 네 장면 연속으로 여러 무리의 적들이 차례차례 덤비고 죽어나가는 대목도 있는데 이쯤 되면 거의 유튜브에서 주요 액션 장면만 발췌 감상하는 기분마저 듭니다. 하지만 개개의 액션 장면은 핵심만 딱딱 짚은 뒤 간결하게 끝나고 또 바로 이어서 새로운 유형의 액션이 나오고 하는 식으로 영화를 전개하고 있어서 따분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대목은 여성 묘사입니다. 《자식 딸린 늑대》에는 매 편 인상적인 여성 캐릭터가 하나씩 등장합니다. 성격은 다 똑같아요. 남자 못지않게, 혹은 남자 이상으로 다부지고 강인하며 무사의 풍격을 지녔으며 처음에는 오가미와 대적하게 되지만 이내 그의 “요즘 세상에는 보기 드문” 진정한 무사다운 성격에 매료되어 눈망울이 흔들리는, 헤테로 남성들이 종종 선망하곤 하는 ‘멋있는 여성’ 역할입니다. 유치하다면 유치하겠지만 이들이 오가미에게 품는 미묘한 연정이 만들어내는 감흥이 또 있는데, 그게 가장 잘 살아나는 작품이 이 〈삼도천의 유모차〉입니다. 재밌는 게, 이 작품에서 그런 여인상을 맡은 야규 가의 여식 사야카는 처음 등장할 때만 세게 나올 뿐 이후 오가미와 여러 번 대면함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멀찍이서 바라보고 방관하는 태도를 취하건만, 공교롭게도 그처럼 오가미에게 맞서서 무언가를 한다기보다는 오가미의 행동에 대해 반응하는 데에만 주력하는 역할로 남은 덕분에 오히려 작품의 결말부에서 둘의 관계가 정리되는 대목이 나름의 잔향을 남깁니다. 처음부터 세게 나오면서 말을 주고받는다든가 결투로 끝장을 보는 이후 작품의 여성 캐릭터보다 인상이 더 강할 정도지요. 물론 편집이나 등장 비중의 차이도 있겠지마는 그래도 새삼 이 시리즈의 남성향 팬터지가 지향하는 바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식 딸린 늑대: 죽음의 바람으로 향하는 유모차〉(子連れ狼 死に風に向う乳母車, 1972)


 다채로운 액션의 향연은 〈삼도천의 유모차〉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죽음의 바람으로 향하는 유모차〉는 이제 조금 더 “주제”에 신경을 쓰려고 듭니다. 그 주제가 무엇인고 하니, ‘진정한 무사도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통한 봉건 지배 체제의 허상’ 되겠습니다. 영화는 크게 두 가지 이야기를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합니다. 하나는 위기 상황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행함으로써 주군을 구해냈음에도 불구하고 주군의 곁을 비웠다는 이유로 버림받고 고용 칼잡이가 된 젊은 무사의 이야기, 그리고 다른 하나는 광증에 시달리는 주군을 모시다가 주군이 막부에 고발당해 할복“당한” 뒤로 야쿠자 생활을 하고 있는 충신의 이야기입니다. 이 둘은 끝에 가면 살짝 얽히기는 하지만 거의 시늉 수준이고, 실제로는 전과 마찬가지로 그냥 따로따로 진행됩니다.

 일단 젊은 무사의 이야기는 나름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위험을 무릅쓰는 선택까지 하며 주군을 구했는데 엄격한 규율로 인해 버림받았으니, 사람은 생각 않고 체제의 외형 유지에만 신경을 쓰는 봉건 사회에 대한 질타가 될 법하지요.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는 태도가 좀 이상합니다. 이 젊은 무사는 자신의 사정과 고민을 말하기 전에 일단 결투 신청부터 해요. 진정한 무사에게 인정받고 싶다나? 그런 다음 배에 칼이 꽂힌 채로 죽어가면서 (스포일러일까요? 하지만 이 시리즈 전체에서 오가미와 칼을 겨루고 살아남는 사람은… 한 명? 두 명? 그 정도란 말입니다.) 그제야 자기 과거를 털어놓기 시작합니다. 본인은 그 칼부림이 자신의 결기를 드러내줄 거라고 생각했는지 몰라도 옆에서 보기엔 하염없이 허망한 죽음입니다. 더구나 오가미가 기꺼이 젊은 무사의 말을 긍정해 버리니 기분은 더 묘해집니다. “나도 자네 입장이었으면 마찬가지 행동을 했을 걸세.”라니, 그럼 정말로 이 젊은 무사는 왜 죽는 거야! 양쪽 다 똑같이 옳다고 믿는 신념을 그저 말로 다시금 확인받기 위해서 누군가 한 사람이 죽어야 하는 이런 과잉성 비장미로 인해 봉건 질서에 대한 비판 따위는 저 멀리로 날아갑니다. 이 두 사람이 내비치는 그 “진정한 무사도”에 대한 집착이야말로 제일 억압적이에요.

 그럼 충신 쪽은 어떤가 하면 아예 사정부터가 좀 애매합니다. 얘기를 들어본즉 그가 모시던 주군은 어느 날부턴가 광증에 시달리며 가신들을 죽이기에 이르렀고, 남은 가신들은 이 사실을 숨겨보려고 하지만 그 중 하나가 이를 고발하여 결국 쇼군이 영주를 처단한 뒤 영토를 몰수, 직할지로 삼게 됩니다. 고발자는 그 직할지의 관료가 되어 잘 살고 있고요. 그러니 이 고발자를 죽여 달라는 건데… 물론 고발자가 처음부터 자신의 잇속을 노리고 고발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영 찝찝합니다. 딱히 무슨 대책도 없이 미친 주군에게 시달리고 있었으면서, 더구나 자기도 그 주군 때문에 피해를 입었으면서, 주군의 영지가 몰수된 원한에만 그렇게 매달리다니. 본래 의도는 지방 영주들에 대한 막부의 압제를 드러내는 쪽이었겠지만 오히려 자기 몸조차 돌보지 않은 채 나름 열심히 살고 있는 딸까지 동원해서 한참 전에 미쳐 죽은 주군의 복수를 하려 드는 그 충절이 오히려 더 무섭습니다.

 재미있게도 이런 혼란은 영화에도 반영이 돼 있어서, 고발자와 그 수하들을 묘사하는 부분이 의외로 별로 악랄하지 않고 제법 정감이 가게 그려져 있습니다. 심지어 고발자가 실제로 고발하는 모습을 플래시백으로 넣어주는데, 비열한 맛은 별로 없고 오히려 저 정도면 나름 고민을 하고 내린 결단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오가미에게 걸렸으니 별 말 없이 썰려 죽는 수밖에요. 그런 뒤 이 논의는 그냥 “아, 저 사내는 인간이 아닙니다. 괴물입니다.”라는 정도로 흐지부지 됩니다.

 이처럼 안 하던 짓을 하다가 도리어 다소 지지부진한 작품이 되고 말았지만 역시 플롯 외의 묘미는 제법 살아있습니다. 그 중에도 야쿠자 두목 토리조와 오가미의 대면이 가장 근사합니다. 토리조는 위에 언급한 전형적인 《자식 딸린 늑대》식 여성 캐릭터이고, 첫 만남 이후로는 비중이 급격하게 줄면서 결말부에 오가미를 쫓아가려는 듯한 모습을 보일 때면 ‘쟤 갑자기 왜 저러나’ 싶을 지경이 되지만, 적어도 이 첫 만남은 멋집니다. 둘은 야쿠자 쪽이 소유한 매춘부를 오가미가 내주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옥신각신 토론을 하는데, 토리조 역을 맡은 하마다 유코의 자신만만한 자태와 표정, 말투가 너무나도 강렬해서 이 시리즈에서는 보기 드물게 말의 오고감만으로 팽팽한 긴장이 생겨요. “진정한 무사”인 오가미로서는 자기 보호를 청하는 아가씨를 내어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 대가도 없이 강짜를 부리기도 곤란하고, 야쿠자들로서는 오가미 무서운 줄은 알아서 공손하게 대하고는 있지만 그냥 물러서기에는 체면이 있고, 이래서 양쪽 모두 쉬이 물러설 수 없는 대치 상황을 그럴듯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한편 이후의 작품들에서도 계속되는 ‘최종 결전’의 꼴이 바로 이 작품에서 확립되었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합니다. 물론 앞의 두 작품에서도 마지막에 벌어지는 싸움은 대개 대규모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몇 십 대 일, 때로는 백 단위까지로 올라가는 적들 앞에 유모차 한 대 끌고 서 있는 오가미의 이미지는 〈죽음의 바람으로 향하는 유모차〉에서 완성됩니다. 그렇다고 일 대 다수의 집단전이 기가 막히게 잘 연출이 되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꼭 이 작품만이 아니더라도, 《자식 딸린 늑대》 연작은 액션을 연출함에 있어 짧은 편집과 클로즈업으로 특수효과의 폭발적인 위력을 과시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고 있지 여러 인물이 한 화면 안에 어우러져 동선을 교차해 가면서 박력을 선사하는 데에는 능숙하지 않습니다. 롱 쇼트에서는 엑스트라들이 적당히 주변에 둘러선 가운데 (카메라는 대개 눈높이여서 구도의 맛은 잘 살지 않습니다.) 두세 명 정도가 합을 짜서 와카야마 토미사부로의 몸놀림을 돋보이게 해주다가, 적당한 시점에 피분수를 뿜는다든지 팔다리가 잘린다든지 하는 모습을 담은 클로즈업으로 컷하면서 거센 효과음을 넣는 식입니다. 허나 그 정도로도 제법 자극적이고, 또 어차피 이런 장면의 진정한 즐거움은 싸움이 벌어지기 직전 수많은 상대를 앞에 두고 선 주인공의 모습 혹은 싸움이 일단락 된 뒤 사방팔방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광경을 목도하는 데에 있으니, 이 정도로도 나쁘진 않습니다.




〈자식 딸린 늑대: 부모의 마음, 자식의 마음〉(子連れ狼 親の心子の心, 1972)


 시리즈 네 번째 작품 〈부모의 마음, 자식의 마음〉의 도입부는 박력이 넘칩니다. 괴기스러운 문신을 한 상반신을 드러낸 오유키라는 이름의 여인이 자신을 처단하러 온 무사들을 가볍게 쓰러뜨립니다.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오가미는 오유키를 죽여 달라는 청부를 받습니다. 오프닝 크레딧이 끝나고 나면, 오가미는 오유키에게 문신을 해준 문신술사를 만나 그녀의 과거 행적에 관해 듣습니다. 이토록 간결하면서도 짜임새 있고 이후의 전개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도입부를 만날 줄이야! 상대는 이미 정해졌고, 그 상대는 또 다른 자신만의 목표를 위해 무언가 하는 듯하고, 오가미는 그런 상대를 추적해가면서 대체 무슨 사연이 숨어 있는지 서서히 알아나가야 합니다. 문신술사가 증언한 오유키의 행동거지를 보면 결코 자기 욕심 채우려고 사람 죽일 이는 아니고, 무언가 억울한 일이 있으리라 짐작하게 됩니다. 성폭행을 당한 뒤 성폭행범을 직접 처단하러 나선 여인을 쫓는 과정에서 그녀에게 공감하게 되고 나아가 그녀를 일정 부분 돕게 되기까지 하는 형사의 이야기를 다룬 〈더티 해리 4: 써든 임팩트〉(Sudden Impact, 1983)가 떠오르죠. 과연 오가미가 자신과 비슷한 입장에 선 타인과의 깊은 정서적 교류를 이루어 낼 수 있을까요? 흥미진진합니다.

 그러나 역시 시리즈의 전통은 전통. 3편의 미미한 비중을 만회하기라도 하려는 듯, 갑자기 야규 가의 이야기가 끼어듭니다. 그것도 아주 느릿느릿 우회하는 길을 택해서요. 오가미가 오유키의 과거를 알아나가는 동안 심심해진 다이고로는 혼자 길거리 공연 보면서 정신 팔려 돌아다니다가 아버지랑 떨어지게 됩니다. 홀로 아버지를 찾아다니던 다이고로는 어느 무사의 눈에 띄게 되는데, 이 무사는 다이고로의 범상치 않은 기운에 흥미를 느낍니다. 그러고 나서 알고 보니 또 이 무사는 먼 옛날 오가미와 원한 관계에 놓였던 야규 가의 사람이었고… 하는 식입니다. 덕분에 문신술사와의 만남 이후 몇 십 분 동안 오유키 쪽 이야기는 말 그대로 정지해 버리고, 플롯은 흐느적거립니다. 아마 오가미와 떨어진 다이고로의 상황을 오유키 쪽 플롯과 감정적으로 연계하면서 “부모의 마음, 자식의 마음”이라는 제목을 부각시키고 싶었던 게 아닐까 추측해 보지만 물론 택도 없습니다.

 더구나 오유키와의 대면은 영화의 3분의 2 지점에서 이루어져 끝나버리고, 이후는 그녀를 어느 정도 존중하게 된 오가미가 스스로 오유키의 적들과 맞서는 식으로 나갑니다. 하지만 이쯤 되면 다들 짐작하시겠죠, 오가미의 싸이코패스를 방불케 하는 제멋대로 가치 판단 때문에 감정선 연결이 잘 안 됩니다. 그냥 더 많은 사람 죽일 핑계를 찾았다고 생각할 밖에. 더구나 오유키의 적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어느 순간 야규 가의 무리가 물리적으로 대체하면서 이야기는 더 허술해지고, 그저 전편보다 더욱 처절해진 최종 일 대 다수 대결만이 남습니다. 어차피 많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도입부가 괜찮고 오유키라는 인물의 설정도 매력이 있는 터라 더 아깝습니다. 근사한 거 하나 보여준 다음 흐지부지되는 게 착취 영화 조연들의 숙명이라면 숙명이겠으나…….

 앞의 세 작품을 감독했던 미스미 켄지 감독 대신 사이토 부이치 감독이 연출을 맡은 작품입니다만 스타일상으로 큰 차이는 없습니다. 마지막 대결 장면에서 바위 틈새를 내달리는 오가미를 쫓아가는 핸드헬드 카메라가 도입됐다는 점이 아마 가장 큰 파격이겠으나 감독의 성향보다는 싸움터의 지형상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이 지형은 액션 연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허허벌판에서 칼부림을 하던 전편과 달리 사람 한두 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간신히 지나갈 만한 정도의 좁은 바위 틈새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지기 때문에, 아무리 전체 숫자가 많아 봐야 막상 한 화면에 등장할 수 있는 사람 수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덕분에 동선이 간명해지고 액션에 힘이 실리며, 화면 구성도 다채로워지죠. 그런 점에서 3편과 비교해 보면 이 시리즈가 액션을 다룸에 있어 좀 더 잘 하는 부분이 어디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거리를 제공해주는 대목입니다.




〈자식 딸린 늑대: 명부마도〉(子連れ狼 冥府魔道, 1973)


 이번 이야기의 시작은 전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황당합니다. 방랑 중이던 오가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무사를 만납니다. 그는 맡길 일거리가 있지만 먼저 오가미의 실력을 시험해 봐야한다며 덤비고, 당연히 치명상을 입습니다. 무사는 그제야 마지막 숨을 헐떡이며 사정을 늘어놓습니다. 자신은 모 지역 영주의 가신으로, 다른 네 동료와 더불어 오가미를 찾아 다녔는데, 이제 100료와 더불어 의뢰 내용의 일부를 알려줄 테니 앞으로 나머지 동료들도 찾아 싸워 이겨서 각자에게서 100료씩을 챙기고 나머지 이야기도 들으라는 겁니다. 고객을 존중하는 오가미는 나머지 네 명을 하나씩 찾아 상대하고, 넷은 모두 죽음을 눈앞에 둔 채로 사정을 설명해 나갑니다.

 어디서부터 꼬투리를 잡아야 할지 망설여지는 설정입니다. 하지만 애초에 이 시리즈의 “만화적 과장성”을 가지고 시비를 걸어봐야 의미 없는 노릇입니다. 사실 말이 안 된다는 점만 눈감을 수 있다면, 죽어가는 자들이 내뱉는 말 조각을 모아 의뢰를 완성한다는 구성 자체는 제법 흥미를 끌지요. 일관성도 있고, 매번 다음 무사는 어떤 식으로 오가미를 시험하려들지 기대도 됩니다. 바로 이 도입부가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 〈명부마도〉의 성격을 잘 말해 줍니다. 〈죽음의 바람으로 향하는 유모차〉와 〈부모의 마음, 자식의 마음〉이 묵직해 보이려고 애쓰는 주제와 구성의 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과도기적 작품이었다면 〈명부마도〉는 한편으로는 플롯을 곧게 가다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시리즈 특유의 과잉성을 부끄러움 없이 드러내며 내달리는 원숙기의 작품입니다. 어디까지나 《자식 딸린 늑대》스러운 원숙함입니다만.

 의뢰에서 느껴지는 정서는 전작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의뢰인이 속한 영지에는 모종의 치부가 있고, 오가미는 그 치부가 에도의 중앙 정부에 알려지는 일을 막은 뒤(물론 여기에는 야규 가가 개입합니다.), 나아가 치부 자체를 정리해야 합니다. 〈죽음의 바람으로 향하는 유모차〉에서 주군을 잃은 충신이 하는 의뢰를 연상시키지요.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뒷정리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문제를 다룬다는 점, 따라서 아직 손쓸 방법이 있다는 점이 많은 차이를 가져옵니다. 무엇보다도 문제의 내용과 그 해결 방법이 간결하면서도 모두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이치에 맞습니다. 해묵은 감정을 토로하고 해소하고 할 필요 없이 그냥 지금 행동에 나서서 일을 해결하면 그만이니까요. 이런 점에서는 확실히 사연에 집착했던 3, 4편보다는 당장 무언가를 해달라는 의뢰를 맡았던 1, 2편을 모델로 삼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이렇듯 이야기의 기본 논리가 곧게 서자, 이전까지는 말만 번드르르했지 때에 따라 멋대로 행동하는 듯했던 오가미의 성격과 역할도 깔끔하게 잡힙니다. 그는 여기서는 의뢰인의 의지에 공감하며 맡은 일을 끝까지 해내는 건실한 암살자입니다. 더불어 복잡한 과거지사와 은원관계 따위를 배제한 채 오로지 한 가문을 구하고자 하는 가신들의 노력에만 초점을 맞추자 3, 4편에서 갈팡질팡하던 정치적 태도도 단순해집니다. 〈명부마도〉는 시리즈 중 가장 고색창연한 봉건적 가치에 매달리는 작품이지만, 정신을 다른 데에 팔거나 겉으로만 반항적인 척 하는 일 없이 한 길로만 죽 달려가니 그 안에서 제법 비장한 맛이 살아납니다.

 심지어 액션 연출조차도 자극을 좀 자제하면서 상황 자체가 주는 정서에 주목하는 바가 없지 않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오가미 혼자 다 쓸어버렸음직한 수의 적과 싸울 때도 원군이 개입하면서 상황이 종료되는 경우가 몇 차례 등장하는데, 이는 첫째로는 오가미가 홀로 굉장히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다는 인상을 주고 둘째로는 한창 진행 중이던 액션을 중단시킬 수 있는 핑계를 마련해줍니다. 최후의 결전에 이르면 액션 연출 방식 또한 이런 태도에 적극 개입해서, 카메라가 신체 훼손의 쾌감에 집중하기보다는 종종 피사체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싸우는 사람들을 주변 풍경 안에 가두는 전략을 취합니다. 아주 극단적인 경우에는 바닥에 가깝게 설치한 카메라 앞에 칸막이까지 두어 누구의 것인지 모를 발이 좌우로 오가는 모습만 잡히기도 합니다. 이런 스타일 때문에 액션의 즉물적인 쾌감은 줄어들고 못난 가문의 위신 하나 때문에 저 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아웅다웅하고 있구나, 하는 초연한 쓸쓸함이 배가됩니다. 어떤 면에서는 차라리 이 작품이 대놓고 봉건 체제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는 듯했던 다른 작품들보다 더 비판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명부마도〉에서 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항은 중간에 삽입되는, 의뢰와는 전혀 상관없는 에피소드입니다. 나름대로 가닥을 잘 잡은 이 작품에서조차 플롯을 가지치기 하려는 시도는 계속되는 거죠. 다만 이전 작품들이 플롯을 다원화한 다음 대충 얽어놓는 과정에서 영화의 완성도를 망친 반면 〈명부마도〉는 그보다는 더 낫습니다. 이유인즉슨, 애초에 메인플롯과 이 서브플롯 사이의 연관성을 포기하고 나가기 때문입니다. 두 플롯은 한데 뒤섞이지 않습니다. 메인플롯이 전개되다가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서브플롯이 끼어든 다음 곧장 끝을 보고, 다시 메인플롯으로 돌아옵니다. 더구나 이 서브플롯은 의뢰와도, 야규 가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심지어 오가미와도 거의 관계가 없고 다이고로와 어느 소매치기가 주인공으로 나섭니다. 다이고로가 중심이 된다는 점도, 메인플롯을 정지시킨다는 점도 모두 〈부모의 마음, 자식의 마음〉에 등장했던 야규 가의 무사 에피소드를 떠올리게 하는데, 아마 4편에서 어중간하게 시도된 요소를 더 밀고 나간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대목이 거의 독립된 에피소드처럼 다뤄지며, 다이고로가 오가미의 그늘에서 벗어나 완연한 주연 자리로 나서고 있고, 또 메인플롯을 끊고 들어오는 시점이 그래도 제법 합리적이기 때문에, 이런 전개는 효과적이랄 것까지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 헐렁함으로 관객을 괴롭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또 넓은 관점에서 보자면 1편에서는 젖먹이로 등장했던 다이고로가 편 수를 거듭할수록 점점 오가미로부터 떨어져 성장해 가는 과정을 제시함으로써 마지막 편에서 더욱 강화될 부자 사이의 관계를 예비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고요.




〈자식 딸린 늑대: 지옥으로 가자! 다이고로〉(子連れ狼 地獄へ行くぞ! 大五郎, 1974)


 시리즈 마지막 편 〈지옥으로 가자! 다이고로〉는 더없이 간단한 구도를 취합니다. 더 이상 자객 “자식 딸린 늑대”에게 주어지는 의뢰 따위는 없습니다. 그동안 오가미를 번번이 놓친 바람에 막부의 신임을 잃을 위기에 처한 야규 가의 마지막 반격만 남았습니다. 물론 제 버릇은 남 못주기 때문에 이번에는 야규 가 내부의 부모 자식 관계가 불거지면서 오가미를 향한 공격의 주체는 여전히 다원화되고 있습니다만 결국 오가미를 찾아와 죽는 순서에 차이가 있을 뿐이고 그 이면의 정서나 동기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먼 길을 돌아와 다시 〈삼도천의 유모차〉가 지녔던 순수함으로 돌아왔다고나 할까요.

 시리즈의 마지막인 만큼 그 어느 편에 견주어도 부끄럽지 않을 수준의 기기묘묘한 장치들이 난무하리라는 점은 쉬이 예상할 수 있습니다. 영화는 그런 예상에도 불구하고 입을 딱 벌리게 할 만한 막가파 정신으로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고요. DVD 패키지에 적힌 설명에 따르면 오가미는 이 마지막 작품에서만 150명의 목숨을 앗아간다고 합니다. “지옥의 하얀 하늘”(White Heaven in Hell)이라는 영어판 제목을 가능케 한 최후의 설원 결전 장면을 돌이켜보면 그리 놀라운 숫자는 아닙니다. 장소나 탑승 수단, 그리고 음악을 통해 짐작컨대 아마 제임스 본드 영화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은 이 결전 장면은 그 규모만으로도 능히 〈지옥으로 가자! 다이고로〉를 시리즈 최고작으로 꼽고 싶도록 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어차피 백문이 불여일견, 액션의 그로테스크한 장엄함이야 아무리 말해봐야 소용이 없을 터이니 다른 이야기나 할까요. 여섯 편을 끌어 온 시리즈임을 고려하면 당혹스러운 일이지만, 〈지옥으로 가자! 다이고로〉는 오가미와 다이고로 부자의 일상생활에 주의를 기울인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입니다. 이전까지 다이고로의 역할은 대체로 유모차의 비밀무기를 이용한 전투 보조, 혹은 모성애를 자극하여 여심 흔들기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4편, 5편에 이르면 오가미로부터 떨어져 홀로 한 에피소드를 끌고 가기도 하지만 그 경우도 다이고로를 그토록 단호한 아이로 만들어 낸 오가미의 성격을 환기시키는 역할에 가까웠습니다. 요컨대 다이고로는 오가미의 명부마도 행을 표현하는 표현 수단이었지요. 하지만 이 작품에서 두 부자는 죽은 아내의 묘를 청소하기도 하고, 남의 제사상에서 쌀을 훔치기도 하고, 눈을 녹여 무국을 끓이기도 하는 등 보다 일상적인 애환을 드러냅니다. 의뢰 때마다 꼬박꼬박 받은 500료는 어디다 썼나 싶기도 하지만, 유모차 개조 및 비밀무기 탑재에 많은 돈을 들였으리라 생각해줘야지요.

 칼부림에 피바다를 연출하는 걸 제1목표로 삼는 영화인데 그런 삽화 몇 개 끼워 넣은들 뭐 얼마나 감정이 생기랴마는, 그래도 이 마지막 작품에서 엿보이는 두 부자의 관계는 묘하게 마음 언저리를 건드리는 데가 있습니다. 유모차에 탈 수밖에 없었던 젖먹이가 영화 찍는 3년 사이에 어느새 제법 커서 저렇게 혼자 서서 돌아다니는구나, 하는 영화 외적인 감흥일수도 있고, 아니면 의뢰도 곁가지 에피소드도 없어진 상황에서 남은 거라곤 적들뿐인 두 사람의 외로운 싸움에 대한 감흥인지도 모르지요. 따지고 보면 싸이코패스 아버지가 아동인권을 유린하는 이야기의 완결판임에도 불구하고 결말부에 다이고로의 이름을 외치는 오가미의 모습에 내심 가슴이 짠해지는 걸 보면 제가 생각보다 훨씬 감상적인 사람인가 봅니다. 어쨌든 덕분에 이 완결편은 〈명부마도〉 못지 않은 감정적 울림을 담고 있어서, 시리즈 전체가 처음부터 이 방향으로 좀 더 나갔어도 좋았을 텐데 그랬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러고 보니 샘 멘데스의 갱스터 영화 〈지옥으로 가는 길〉(Road to Perdition, 2002)이 《자식 딸린 늑대》의 영향을 받았다던데, 이쪽에서 아쉽다고 여겼던 부분을 강화하고자 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결말에 대해 잠깐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시리즈의 마지막임에도 불구하고 〈지옥으로 가자! 다이고로〉는 오가미와 야규 가의 원한을 완전히 끝내지 않습니다. 영화는 여전히 적을 남겨둔 채, 다른 다섯 편과 마찬가지로 어디론가 향해 또 길을 떠나는 오가미, 다이고로 부자의 모습을 끝으로 마무리 됩니다. 막 영화가 끝났을 때는 여섯 편을 내리 쫓아왔는데 제대로 된 결말이 안 나오니까 잠시 정신이 멍해지더군요. 마치 최후의 결전인 양 분위기는 다 잡아왔는데 말입니다. 어쩌면 처음 기획 단계에서는 이걸로 끝낸다는 마음가짐으로 나갔다가 촬영 도중, 혹은 후반 작업 중에 마음을 바꿔 시리즈를 이어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고자 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되돌아보니 그런 결말도 나름 어울렸다 싶습니다. 어차피 구조가 꽉 짜인 이야기는 아니었고, 야규 가와의 다툼만을 핵심으로 보기에는 이미 너무 여러 가지를 건드려 놓았으니 만큼 야규 가 하나 끝장냈다고 시리즈의 종지부를 찍기도 그렇죠. 아니, 이런 거 저런 거 다 떠나서 이 부자가 복수를 마무리한 다음의 모습을 상상하기 힘듭니다. 다시 인간 사회에 편입될 수 있을 리 만무하고, 아무래도 야규 가가 있건 없건 간에 계속해서 자객행이나 하면서 사람 죽이고 다니지 않을까요. 그렇담 적당히 미래의 문젯거리를 살짝 남겨두고 이쯤에서 적당히 작별하는 편이 명부마도에 들어선 자들의 이미지를 유지한 채 이야기를 끝내는 방법일 겁니다.




〈쇼군 어쌔신〉(Shogun Assassin, 1980)


 〈쇼군 어쌔신〉은 시리즈의 새로운 작품이 아니라 80년에 동시상영관을 통해 배급된 미국용 재편집 판본입니다. 편집은 〈삼도천의 유모차〉를 중심으로 하고 〈아이와 솜씨 빌려드립니다〉의 일부를 집어넣었습니다. 당연히 영어 더빙이 얹어졌는데 그냥 원판의 대사를 그대로 가져가지 않고 내용을 꽤 바꾸었으며 다이고로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까지 첨가되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제목의 “쇼군”이 가리키는 대상이 다름 아닌 야규 가의 레츠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음악도 새로 작곡해 입혔습니다. 원판을 본 입장에서 보자면 참 허름하고 특히 더빙의 수준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이 버전은 영미권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습니다. 심지어 원판을 쉽게 구해 볼 수 있는 지금도 이 영화는 향수의 대상인 듯합니다. 바로 올해 8월에 AnimEigo에서 출시한 30주년 기념판 블루레이를 보면 그 애정의 크기를 알 수 있습니다. 당장 《자식 딸린 늑대》는 DVD로만 존재하는데 이 짜깁기 판본의 블루레이가 존재한다는 사실부터가 시사적입니다만 이 블루레이를 제작하기 위해 들인 노력은 실로 경악스럽습니다. AnimEigo에서는 그냥 잔존해 있는 〈쇼군 어쌔신〉의 필름을 구해다가 닦아서 블루레이로 만드는 대신에 원본 《자식 딸린 늑대》의 복원판 필름을 구해다가 1980년에 나온 〈쇼군 어쌔신〉 필름과 똑같이 다시 짜깁기 편집을 해서 비디오 소스를 만들었습니다. 덕분에 화질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좋습니다. 거기다가 음성해설을 두 개나 첨가했고, 이 시리즈의 팬이라는 새뮤얼 L. 잭슨의 인터뷰까지 땄지요. 21세기 들어서야 해외에서 DVD 주문해서 본 저 같은 한국인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인기가 있었으려니 하고 짐작할 밖에. 그러고 보니 〈삼도천의 유모차〉가 시리즈 최고작으로 꼽히는 이유 역시 〈쇼군 어쌔신〉 팬들의 지지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 *



 우리나라에도 “아들을 동반한 검객”이라는 상당히 얌전한 제목으로 립핑판 DVD가 출시된 바 있습니다만 (시리즈 중 앞의 세 편만 수록) 저는 립핑판 DVD는 몹시 싫어하고 별로 찾아서 질을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도 안 들기 때문에 생략하고, 비교적 쉽게 손댈 수 있는 DVD로는 북미의 AnimEigo 사에서 낸 “Lone Wolf and Cub” 판본과 영국의 Eureka! 사에서 낸 “Lone Wolf & Cub” 판본이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Eureka! 쪽이 더 좋습니다. AnimEigo 판본보다 색감도 더 선명하게 잘 나왔고, AnimEigo 특유의 노란색-초록색 자막과 비교하면 Eureka!의 흰색 자막이 훨씬 깔끔하지요. 번역 자체는 대동소이합니다만 1편의 몇몇 장면을 비교해 보니 대사 사이의 호흡을 감안해서 싱크를 맞추고 문장부호를 집어 넣는 솜씨를 보면 이 또한 Eureka! 쪽이 더 낫습니다. 더구나 쌈마이스러운 맛이 있는 AnimEigo 판본에 비하면 Eureka!의 패키지 디자인은 고풍스러운 맛이 있습니다. 자체 제작한 듯한 표지 이미지도 좋고, 슬림케이스 안쪽에는 오리지널 포스터와 일본영화학자 톰 메스의 소개글이 매 편마다 실려 있습니다. 별로 볼 일은 없을 듯하지만, 원판 여섯 작품만 수록한 AnimEigo 박스세트와는 달리 Eureka! 쪽에는 〈쇼군 어쌔신〉도 포함되어 있는데(여기에는 영어 자막은 미수록) 가격은 훨씬 저렴합니다. 무엇보다도, 영국에서 출시된 DVD임에도 이 제품은 NTSC 방식이어서 코드프리만 한다면 우리나라에서 재생하는데 불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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