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골트 (Das Rheingold)]


리하르트 바그너, 음악, 대본

프라이아: 웬디 브린 파머
프리카: 슈테파니 블라이스
에르다: 파트리샤 바돈
로게: 리처드 크로프트
미메: 게르하르트 시겔
보탄: 브린 터펠
알베리히: 에릭 오웬스
파졸트: 프란츠-요제프 젤릭
파프너: 한스-페터 쾨니히

제작: 로베르 르파지
제작 보조: 나일슨 비뇰라
무대 디자인: 칼 필리옹
의상 디자인: 프랑스와 상-오뱅
조명 디자인: 에티엔 부셰
비디오 이미지: 보리스 피르케

지휘: 제임스 레바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합창단


2010년 10월 9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 뉴욕




지난 30여년 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아이콘과도 같았던 오토 솅크의 [니벨룽의 반지]는 지지난 해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메트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정말 굉장한 역사였죠. 이 프로덕션을 통해서 메트 무대에 섰던 가수들의 이름만으로도 그 시대의 대표적인 바그네리안들의 리스트가 완성됩니다. 공영 방송에서 역사상 최초로 [반지]의 전곡이 방영되었던 것도 이 프로덕션을 통해서였죠. (머레이 애이브레헴이 소개를 맡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마도 미국인들에게는 [아마데우스]와 연결되어서 기억되는 배우이기 때문이었겠죠. 근데 이 분은 요즘은 뭐 하시나요? 꽤 훌륭한 배우인데 말이죠) DG에서 나온 영상물과 레코딩은 아마도 요즘도 레퍼런스로 자주 추천되고 하는 것으로 압니다. 특히 아이러니컬하게도 유럽에서 출시되는 대부분의 영상물들은 바그너의 원래 의도와는 거의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초심자들에게 [반지]를 소개하기 위해서는 가장 적절한 영상물인 경우가 많죠. 레코딩의 경우는 사실 영상물보다는 좀 인기가 없습니다만. 사실 여러 가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제임스 레바인의 다이내믹 처리와 템포는 문제가 많았었습니다. 영상으로 보완되지 않은 레코딩에서는 그러한 점들이 더 두드러질 수 밖에 없는 것이었겠죠. 90년대 바이로이트에서 본 키르슈너 연출의 [반지]에서도 레바인의 지휘는 많은 논란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프로덕션은 [신들의 황혼] 만이 DG DVD로 출시되어 있죠.

지난 주에 보스턴 심퍼니의 공연 감상문에서도 언급했지만, 레바인의 바그너 해석은 두드러지게 좋아지고 있습니다. 이번 공연에서도 가장 만족스러운 부분은 여기였습니다. 제가 실황으로 들어 본 [라인골트] 중에서도 최고의 공연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녹음을 통틀어서도 아마 이 연주에 필적할 만한 레코딩은 바렌보임의 바이로이트 공연 정도가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가장 칭찬할 만한 것은 현악 파트였습니다. [라인골트]의 현악은 다른 삼부작들에 비교해서도 만만치 않게 어려운 부분들이 많죠. 특히 자연의 경이를 묘사하는 신비로운 음향을 표현해 내는 데 현악기들의 엄청나게 어려운 기교를 요구합니다. 니벨하임으로 보탄과 로게가 내려가는 장면, 처음 발할 성이 등장하는 부분에서 저현의 묵직하면서도 황홀한 트레몰로 등등 정말 대단한 장면들이 많았죠. 레바인은 특히 가장 문제되었던 템포와 다이내믹에서 장족의 발전을 보였습니다. 훨씬 납득이 가는 논리적인 템포에, 복잡다단한 오케스트레이션을 들었다 놨다 하는 다이내믹이 현존하는 최고의 바그너 지휘자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었습니다. 허리 문제 때문에 공연을 취소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는데, 이러한 염려를 완전히 잠재워 주는 공연이었습니다. 다음 작품인 [발퀴레]가 무대에 올라가는 내년 5월까지는 충분히 휴식을 취하셨으면 좋겠습니다만.

가수들 역시 지극히 만족스러웠죠. 젊고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와 연기의 보탄 역이 역시 최고였습니다. 지난 주 보스턴 공연과는 달리 모든 패시지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분명했죠. 뭐 이 공연이 음반과 영상물로 출시되어 영원히 기록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었겠습니다만. 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시적으로 아름다우면서도 섬세한 해석을 들려준 로게 역의 리처드 크로프트였습니다. 이 역은 사실 테너 레제로가 맡는 것이 정석입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크로프트의 목소리는 사실 이 역에 주로 등장했던 가수들 – 가령 그레이엄 클라크나 하인츠 체드닉 – 과는 확연히 다르죠. 가장 가까운 예는 페터 슈라이어겠습니다만, 그보다도 훨씬 부드럽고 아름다운 목소리입니다. 몬테베르디의 [포페아의 대관]에서의 네로 역이나 [이도메네오]의 타이틀 롤을 소화해 낼 수 있는 테너이니까요. 성역이 작은 것은 좀 불만이었습니다만, 크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커튼 콜에서는 야유를 받더군요. 이건 좀 충격이었습니다.

에릭 오웬스의 알베리히는 외모상으로는 납득이 가는데 사실 음색은 지나치게 고귀하고 진중한 편이었죠. 이런 목소리로는 보탄을 부른다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이 점은 확실히 아쉬웠고요…돈너와 로게를 맡은 가수들은 외모와 목소리 모두 잘 어울렸습니다. 프라이아 역의 웬디 브린 하머도 그랬고요. 프리카는 제가 보통 좋아하는 한나 슈바르츠나 랑디 슈테네 등보다는 좀 무겁고 딱딱한 목소리였습니다만, 그런대로 들어줄 만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파졸트 역을 맡았던 프란츠-요제프 젤릭 역시 굉장히 좋았죠. 라인의 처녀들 역시 만족스러웠고요. 참, 미메 역의 게르하르트 시겔을 빼 놓으면 안 되겠죠.

전반적으로 한 두 가지 사소한 점들을 제외하면 가수들 역시 대단히 만족스러웠다는 것인데, 이것도 아마 영상물 출시를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메트로폴리탄에서 마음만 먹으면 이 정도의 수준을 달성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죠.



자 이제 논란의 핵심이 되는 로베르 르파지의 프로덕션에 대해서 언급할 차례죠. 오토 솅크와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는 극단적인 연출이 될 것이라는 기대 내지는 우려가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고요, 개인적으로는 그보다는 르파지의 이전 프로덕션들에서 이 사람이 과연 오페라라는 무대 예술 장르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가 심히 의심스러웠다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사실 테크놀로지는 전혀 부차적인 문제죠. 가령 카스퍼 벡-홀텐의 [지크프리트] 같은 경우는 무대 테크놀로지만으로 보자면 굉장히 복잡한 장치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그는 최소한 오페라 무대가 어떻게 작동하는 지에 대해서 기본기를 갖추고 있는 연출가라 생각합니다. 윌리엄 켄드리지 같은 경우는 위태위태하기는 한데, 그래도 [코] 같은 경우는 굉장히 효과가 좋았죠. [마술 피리]는 절반의 성공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르파지 자신도 이러한 염려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니벨룽의 반지]의 경우에는 이게 굉장한 심리적 압박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르겠고요. 그러니까 가령 [파우트스의 저주] 같은 작품을 일회성으로 올리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니까요. 게다가 그의 프로덕션은 겁나게 비쌀 것이 분명하고요.

그래서 나온 결과물은 뭐랄까, 어떻게 생각하면 굉장히 전통적인 연출입니다. 라인의 처녀들은 인어의 형상을 하고 있고, 실제로 물 속에서 헤엄치면서 등장합니다 (사실 이 장면의 시각적 효과는 굉장히 좋았죠.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근데 나중에 영상물에서는 이 박수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보탄과 로게가 니벨하임으로 내려가는 장면 역시 충실하게 무대 위에서 그걸 보여주려고 노력합니다.


 


문제는 여전히 그가 무대 생리를 잘 이해 못하고 있다는 것이죠. 가장 심각한 것은 여러 명의 등장 인물들이 무대 위에 서 있는 부분들인데 – 가령 거인들이 등장한 이후 로게가 반지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하는 곳 – 여기서 가수들은 거의 연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어떻게 생각하면 19세기, 심지어 20세기 초 중반까지 오페라라는 것은 이런 식이었겠죠. 그러나 레기테아터에 익숙해져 있는 21세기의 오페라 관객들에게 이건 좀 많이 곤란합니다. 라인의 처녀들에게 주어져 있는 연기 과제는 실제로 연기라기보다는 안무에 가깝고, 이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라인골트]는 실제로 연출가의 역량이 굉장히 중요한 작품입니다. 바그너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무대에 상당히 많은 인물들이 오랫동안 같이 등장하는 장면들이 많거든요. (아마도 이에 필적할 작품이라면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정도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탄호이저]의 노래 경연 장면은 사실 그다지 연출이 복잡해질 필요가 없죠) 르파지는 아마도 오페라 연출가보다는 무대 디자이너에 더 가까운 듯 합니다. 

그러나 그럼 그의 무대 디자인은 어떠한가? 앞에서 언급한 [파우스트] 같은 작품들을 예로 들어 보자면, 그의 아이디어는 아마도 종이 위에서는 굉장히 훌륭하게 보일 듯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대가 3차원의 공간이지 2차원의 투사 화면이 아니라는 것이죠. 르파지는 무대가 높이와 넓이를 갖고 있다는 것은 이해하고, 특히 높이의 경우는 수직적 움직임으로 일종의 충격 효과를 주려고 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그는 무대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라인골트]의 무대는 얇고 길다란 널판지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 장치를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장치들은 360도로 움직이긴 합니다만, 이게 무대를 완전히 가로막고 깊이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긴 하죠. 겁나게 비싸고 복잡한 것은 분명합니다만, 이게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부분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초반에 라인의 처녀들이 등장하는 부분, 그리고 보탄이 로게와 니벨하임으로 내려가는 장면, 마지막으로 발할 성으로 신들이 입성하는 종결 등에서는 분명 굉장히 시각적으로 즐거운 경험이긴 합니다. 그러나 만약 이 장치들은 [반지]의 다른 작품들에까지 계속 사용할 것이라면 –그러할 것이 아주 분명합니다만 – 아마도 [발퀴레] 중반쯤에서 지루하게 생각될 것이 분명합니다.



근데 말이죠, 이게 아마도 영상물에서는 훨씬 더 잘 먹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각도를 계속 달리하면서 이 무대 장치 위로 투사되는 화면들을 보여주면, 굉장히 근사한 영화적 효과를 달성할 수도 있겠다는 거죠. 만약 피터 겔브와 로베르 르파지가 원래부터 노리는 것이 이것이었다면, 실황에서 무대를 감상한 사람의 평가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겔브가 총감독이 된 이후에 가장 성공적인 프로젝트 중의 하나는 그의 HD Live 였으니까요. 그래서 아마도 극장에서 앙코르 공연을 할 때 감상을 다시 해 봐야 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일회적으로 실제 공연에 참석한 사람들은 사실 기껏해야 몇 천 명이니까요. 그러나 영상물은 수 만, 많게는 수십만의 사람들에게 공개됩니다. 르파지의 연출 방향은 이러한 경향과는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것이죠. 우리는 오페라에서도 이제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저도 어쩌면 보스턴에서 뉴욕까지 꾸역꾸역 가서 비싼 돈 내고 실황을 보느니 로컬 극장에서 영상물로 감상하는 쪽이 합리적인 선택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몇 가지 부수적인 이야기들을 해 보죠. 제가 본 공연이 바로 HD Live 로 방송되는 공연이었습니다. 전 다시 무대 감독 바로 옆 박스석에서 봤는데, 피터 겔브가 새 프로덕션의 소개를 방송하고 있으시더군요. 나중에 영상물로 출시될 때 이 부분도 포함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혹시 나중에 영상물에서 피터 겔브 뒤로 옆 박스 석에 멍하게 앉아 있는 아시아계 인간을 보신다면, 그게 바로 접니다 ;;) 보스턴에서와 마찬가지로 관객들의 레바인에 대한 반응은 굉장히 따뜻하고 열광적이었습니다. 나중에 커튼콜에서 보니 여전히 많이 불편하신 듯 보였습니다. 관객들 중에 의외로 젊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르파지의 무대 ‘디자인’에 관심이 많은 젊은 예술 학도들이 아닌가 싶더군요.

뉴욕으로 공연을 보러 다니는 건 의외로 힘들더군요. 일단 주말에는 길이 너무 막힙니다. 그나마 이날은 날씨가 무지 좋아서 드라이빙이 그렇게까지 끔찍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다음으로는 10월 말에 [보리스 고두노프]를 봅니다. 르네 파페가 타이틀 롤로 등장하는 아주 흥미진진한 공연이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발퀴레]는 내년 5월에 올라갑니다. 데보라 보이트가 브륀힐데로 데뷔하고 – 좀 염려스럽죠 – 요나스 카우프만이 지크문트로 나옵니다 (기대 만발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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