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님께서 〈요짐보〉(用心棒, 1961)에 대한 감상문을 올려주셨으니 저는 계속해서 〈요짐보〉의 비공식적인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쓰바키 산주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 작품은 원래는 쿠로사와 감독이 좋아했던 소설가 야마모토 슈고로의 『日々平安』(매일매일 평안히? 뭐 그렇게 번역이 되나요? 제가 일본어를 몰라서. 영어 제목으로는 대개 “Peaceful Days”로 옮겨지는 모양입니다.)을 각색하는 기획이었다고 합니다. 원작의 현재의 산주로 캐릭터와는 달리 무예에 젬병인 사무라이가 오로지 꾀에만 의존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사무라이였지요. 그러나 〈요짐보〉의 대히트 이후 스튜디오에서 속편을 만들어달라고 했고, 그래서 지금과 같은 형태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쿠로사와는 데뷔작 〈스가타 산시로〉(姿三四郎, 1943)의 성공으로 인해 억지로 〈속 스가타 산시로〉(續姿三四郎, 1945)를 만든 뒤 속편 기획 자체를 기피하게 되었지만 이 경우에는 〈요짐보〉를 답습하지 않는 완전히 다른 영화로 만들 자신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실제로 두 영화는 주인공 캐릭터와, 그가 한 마을의 분쟁을 해결해 준다는 큰 구도 정도를 제외하면 보기 보다 다른 점이 많고, 반드시 〈요짐보〉를 먼저 본 다음 〈쓰바키 산주로〉를 봐야할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먼저 보고 보면 좋지만 캐릭터의 전사(前史)가 플롯에 영향을 미친다든지 하는 식은 아닙니다.)

 잠시 〈요짐보〉를 돌아보죠, 〈요짐보〉는 빼곡하게 들어찬 웃음과 명랑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결국 음울한 뒷맛을 남기는 영화입니다. 매춘 사업, 술 사업, 비단 사업 등등 경제권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부호들과 그들 밑에서 일하는 깡패들이 마을을 지배하고, 관료들은 이미 매수당했거나 알아서 기며, 돈 되는 장사는 관 짜는 장사뿐입니다. 이름 없는 사무라이의 무력만이 이들을 격파할 수 있는데 그마저도 죽을 각오를 해야 하지요. 사실 영화 후반부에 산주로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관에서 나오는 대목부터는, 폼 잡는 비평적 해석을 가해 본다면, 주인공은 이미 “유령”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현실 논리로는 이미 죽었어야 마땅하고 이야기는 이대로 끝나야하겠지만 장르적 관습/초인성에 의지하여 사태를 종결하기 위해 돌아온 존재랄까요. 리 마빈 주연의 〈포인트 블랭크〉(Point Blank, 1967)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첫 서부극 연출작 〈고원의 방랑자〉(High Plain Drifter, 1971. 메인 게시판에서 Wolverine 님 말씀 들으니 이 작품은 EBS에서 8월 14일에 세계의 명화 프로그램을 통해 방영해 주더군요.)에서 보듯이 이건 “남성적 영웅”을 중심으로 하는 장르 영화에서 종종 만나게 되는 요소죠. “유령화”된 주인공의 복수극이라는 측면에서 〈요짐보〉를 그 바로 앞에 만든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悪い奴ほどよく眠る, 1960)의 리메이크로 보는 견해도 있던데, 설득력 있는 주장입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의외로 그 비극성에 서늘해지는 순간들이 많지요. 특히 〈요짐보〉의 결말은 암담합니다. 대결 장면까지는 활력이 넘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비참한 코다를 보고 있노라면 이게 과연 해피엔딩인가, 저 마을은 이제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산주로가 “그럼 잘 있으라구.”라고 말한 뒤 어깨를 들썩이며 미련 둘 것 없다는 듯 걸어 나가고 작곡가 사토 마사루의 듣기만 해도 절로 신이 나는 음악이 깔리지 않았더라면, 〈요짐보〉는 팬들의 기억 속에 지금보다 더 어두운 분위기의 영화로 남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산주로가 마을을 떠난 다음 거기서 계속 살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이 어두운 비전에 한 몫 합니다. 영화 중반부 에도에서 감찰관이 오는 대목에서 이 마을의 평범한 주민들이 몇 초 동안 등장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짧은 등장마저도 깡패들의 강압에 의해 이뤄졌고, 그 뒤로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마을 사람들을 볼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들이 몰살당했다는 이야기는 없으니 아마 산주로가 떠난 뒤 다시 집 밖으로 나와 살 거라고 상상해 줄 수는 있겠으나 그냥 논리적인 추론에 불과할 뿐, 영화 상영시간 내내 제대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고 심지어 그 부재에 대해 생각해 볼 이유조차 없었던 마을 사람들의 존재감은 희박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보다는 ‘이제 저 마을에는 술집 주인과 관 짜던 목수와 얍삽한 관리 세 사람만 남았구나.’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살 날이 살아온 날보다 길지 않을 늙은이 둘과 권력자 앞에 손바닥 비비며 살아온 겁쟁이 한 사람이 시체로 가득한 마을에 남았을 때 그들 앞에 펼쳐진 전망이 근사해봐야 뭐 얼마나 근사하겠습니까. 〈요짐보〉의 통쾌함은 바이러스와 스파이웨어로 가득 찬 컴퓨터를 마침내 포맷해 버렸을 때의 통쾌함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일단 포맷을 하고 보니 프로그램을 재설치하는 데에 필요한 프로그램 CD가 하나도 없고 인터넷도 끊겼는데 도움을 청할 사람이 안 보인다는 거고요.



〈요짐보〉

 〈쓰바키 산주로〉는 다음 세대, 혹은 남겨진 사람들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요짐보〉에 화답합니다. 〈쓰바키 산주로〉의 구도는 음침한 우화와도 같은 〈요짐보〉에 비해서, 뭐랄까요, 좀 더 “현실적”입니다. 적당히 능구렁이 같은 한편 적당히 겁 많은 면도 있는 중/노년남들이 권력을 손에 넣으려고 하고, 그런 이들을 깔보면서도 거기에 영합하여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는 뱀과 같은 자가 있고, 불의 앞에 분연히 나서고자 하는 기개는 있으되 경험이 없어 번번이 착오를 저지르는 젊은이들이 있고, 이 모든 사태를 관망하고 이해할 수는 있으나 젊은이들만큼 신속히 반응하기에는 너무 점잖거나 너무 신중하거나 너무 나이 들어 버린 어른들도 있습니다. 이 사이에 산주로가 끼어듭니다. 산주로는 전편에서와 마찬가지로 “괴물”이라고까지 불리는 초인적인 영웅으로, 지략과 무력을 통해 사건을 해결합니다. 하지만 이때 산주로가 제시하는 가치나 삶의 방식은 〈요짐보〉에서처럼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떨어진 채 홀로 오롯이 우뚝 선 무엇이 아니라 더 큰 세계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예를 들어 산주로가 구해낸 집정관의 부인과 딸은 처음에는 그저 바삐 움직여대는 사무라이들 사이에 느릿하고 천하태평인 여인네를 끼워 넣어 웃음을 유도하기 위한 장치처럼 보입니다. 아직 적의 소굴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주제에 헛간의 짚단에 드러누워 “짚 냄새가 참으로 좋군요~”라고 할 때 극장은 웃음바다가 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모녀의 조곤조곤한 말씨와 행동거지가 산주로와 젊은 사무라이들로서는 체화하지 못한 또 다른 삶의 방식을 대변한다는 점이 이내 분명해집니다. 목격자를 살인멸구하자는 산주로의 제안을 나무라는 부인의 말까지 마냥 웃어넘길 수는 없습니다. (여인들의 행동거지에 반응하는 장면에서 미후네 토시로의 연기는 특히 탁월합니다. ‘저 여자 때문에 속 터져서 못 살겠다’는 느낌은 배제하되 상대방의 말이 옳음을 충분히 알고 있고 그 때문에 상대를 존중하고자 하지만 또한 자신은 그런 식으로 살아갈 수가 없다는 점도 알고 있기에 부끄러움과 난처함이 교차하는 마음을 얼굴 표정과 작은 몸짓만으로 완벽하게 전달하지요.) 한편 대사헌 밑에서 일하는 악당 무로토 한베이는 〈요짐보〉에서 나카다이 타츠야가 연기한 우노스케에 비해 훨씬 더 산주로와 자신의 동질성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둘의 마지막 대결에는 세상에 남은 몇 안 되는 동족을 죽여야만 하는 사람들의 비감이 서려 있지요. 심지어 마냥 어려 보이는 젊은 사무라이들도 나중에는 산주로를 어느 정도 이해합니다. 잠시 큰 육체적 고난을 겪기는 하지만 결국 다른 사람들 머리 위에 선 초인적인 존재인 〈요짐보〉의 산주로와 달리, 〈쓰바키 산주로〉의 산주로는 다른 사람들과 공명하면서 가르침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고, 경외의 대상인가 하면 쓸쓸한 작별의 말을 건네고픈 대상이기도 합니다.


 이런 복합다잡한 인간관계 안에서, 산주로의 인생 방식은 지혜롭고 존경할 만하지만 점차 복잡해지고 또 개인을 규격화 해 가는 사회 속에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거칠거나 낡은 태도로 묘사됩니다. 무엇보다도 눈물을 글썽이지 않고는 볼 수 없는 결말부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나지요. 여기엔 마치 서부의 최후를 다루는 서부극을 볼 때와 비슷한 뭉클함이 있어요. 산주로가 떠날 때 이 남겨진 관객은 뒤에 남은 청년 사무라이들처럼 멀어져 가는 스승님의 등을 바라보면서 하다못해 “쿠오바디스?” 한 마디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됩니다. 〈요짐보〉의 산주로가 소돔과 고모라 같던 마을을 싹 청소했기에 떠난다면, 〈쓰바키 산주로〉의 산주로는 남아 있을 자리가 있고 그와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들과 결국 맞지 않으리라는 점을 알고 있기에 스스로 떠나는, 서부극 속 나이 든 총잡이 같은 비감을 자아냅니다. 여기에 쿠로사와 감독의 모습을 겹쳐 놓을 수도 있겠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1962년. 물론 쿠로사와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다음 세대의 일본 영화인들이 “뉴웨이브”의 기운을 머금은 채 치고 올라오면서 종종 쿠로사와를 “아버지 세대”로 취급하며 비판하고 부정하기도 하는 그런 시기입니다. 이런 때에 혁명의 기운으로 똘똘 뭉쳐 있는 젊은이들의 혈기만 앞선 모습을 경계하고, 그들을 염려하고 이끌면서도 종국에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나머지는 너희들이 직접 살아가야 해. 그럼, 잘해 보라구.’라는 듯 성큼성큼 떠나는 산주로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 작품은 마치 쿠로사와가 미리 써 놓은 유언처럼 다가옵니다.


 그렇다고 〈쓰바키 산주로〉가 슬프고 처연한 영화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쿠로사와 감독의 전 작품 중에서도 가장 웃기는 영화에 속하지요. 보통 가장 웃기는 쿠로사와 영화로 〈숨겨진 요새의 세 악인〉(隠し砦の三悪人, 1958)이 꼽히는데, 〈쓰바키 산주로〉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웃음을 끌어내는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핵심은 산주로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대비입니다. 산주로의 일견 열의 없이 어슬렁거리는 듯한 행동거지는 사회적 지위/관습에 맞추어 품행을 갖추는 다른 인물들과 대조되며, 쿠로사와는 배우들의 연기뿐만 아니라 이들을 화면에 배치하는 방식을 통해서 둘 사이의 거리감을 한층 더 키웁니다. 젊은 사무라이들이 붕어빵 틀로 찍어내기라도 한 듯 비슷한 태도로 무리지어 산주로를 넋 놓고 바라보고, 산주로는 그들과 다소 동떨어진 위치에서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을 쓱 한 번 짓기만 해도 젊은이들의 진지한 미숙함이 확 와 닿고 슬며시 웃음을 머금게 돼요. 이건 작정하고 관객을 웃겨 보려고 웃기는 짓을 만들어서 하는 코미디와는 다릅니다. 심지어 (굳이 말하자면) 일종의 코믹 릴리프라고도 할 수 있는 “벽장남”조차 단순한 웃음 유발용 캐릭터는 아닙니다. 그는 진실을 충분히 알지 못한 채 대사헌 편을 들었다가 잡혀 와 벽장 안에 갇힌 포로로서, 공간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젊은 사무라이들과는 거리를 둔 채로, 산주로의 외양은 보지 못한 채 그가 하는 말을 통해서만 상황을 파악하는 인물이죠. 포로인 주제에 적절한 순간에 튀어 나와 옳은 소리 한 마디씩 하고 들어가는 대목은 배꼽을 틀어쥐게 하면서도 또한 행색과 어투에 현혹되지 않고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산주로의 가르침을 상기시킵니다. 이렇게 각 캐릭터가 영화 속 관계망을 통해 수행하고 있는 역할을 시각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절로 웃음을 유발하고, 또 관객이 그렇게 웃음을 통해서 절로 등장인물들의 관계와 서로에 대한 태도를 체화하게 하니, 코미디로서 〈쓰바키 산주로〉가 보이는 솜씨도 결코 만만하게 볼 게 아닙니다.


 기왕 집단(?) 간의 대조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 만큼 연기지도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싶습니다. Q 님께서 〈요짐보〉 리뷰를 통해 쿠로사와 영화 속 배우 연기의 “민주성”, 즉 주역/조역/단역 가리지 않고 모든 배역이 저마다의 캐릭터를 가지고 강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성질에 대해 언급하셨는데요, 역설적이게도 이 점은 그만큼 감독이 배우들의 연기 하나하나를 통제하고 있다는 의미도 되지요. 쿠로사와 영화를 보면 대충 “이 장면 내용은 이렇고 당신은 이런 배역이니까 최대한 자유롭게 뭐든 해보세요.”라고만 말해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배우들이 이 자리에서 반드시 이쪽을 바라보다가 몇 초 후에는 정확히 저 지점까지 몸을 움직여 주지 않으면 화면의 구도가 망가지는 순간이 수두룩합니다. 숨어 있던 젊은 사무라이들이 두더지 잡기 기계 속 두더지들 마냥 뿅뿅 튀어 나오는 비교적 간단한 장면에서부터, 산주로가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집정관 구출 계획을 세우고, 젊은 사무라이들은 그의 뒤에 몰려선 채 함께 방 구석구석을 오가면서 계획에 대해 코멘트를 던지고, 그러다가 갑자기 화면에는 보이지 않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산주로와 젊은 사무라이들 모두가 좌우로 쫙 갈라서면, 알고 보니 같은 방 안에 집정관의 부인과 딸도 함께 앉아 계획 세우는 걸 듣고 있었음이 밝혀지는 부분처럼 복잡한 장면에 이르기까지요. 보고 있으면 ‘저렇게 요구하는 게 많아서야 배우가 “연기”를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는 아마도 쿠로사와가 한 편의 영화를 찍기 전에 기나긴 리허설을 요구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종종 언급하는 일화지만, 〈천국과 지옥〉(天国と地獄, 1963)에서 특별수사반이 조사 보고 회의를 하는 장면 하나를 찍기 위해 단역 배우들을 몽땅 모아 놓고 한 달 동안 리허설을 했을 정도라니까요.


 하지만 이를 가지고 단순히 감독이 배우들을 꼭두각시처럼 통제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혼을 실어 대사를 토해 내는 “연기” 이전에 그런 작은 제스처들의 정확함 자체가 배우들의 배역을 살리고 연기를 돋보이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죠. 저는 특히 “배우가 그 인물이 된다”는 메소드 연기의 신화가 자리 잡은 이후로 영화배우의 연기가 점점 더 미묘한 얼굴 표정이나 발성 방식, 대사의 내용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능력을 중심으로 평가되어 왔고 영화들도 점차 클로즈업에 몰두하면서 위와 같은 요소들에 주목하기를 우선하게 됐다고 생각하곤 하는데요, 그런 요소들도 좋기는 합니다만 “활동사진” 속 연기에서 “활동”이 잊혀 간다는 사실은 안타깝습니다. 쿠로사와의 영화는 그처럼 잊혀 가는 영화의 유산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보고입니다. 칼 휘두르고 달려 다니는 “액션”말고 그냥 한 방의 전경과 후경을 따로 차지한 채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지극히 정적이고 별로 “연기”할 구석이 없어 보이는 순간조차도 영상 자체가 등장인물들의 관계에 대해 무언가를 전달하고 있고, 관객은 그들을 더 잘 이해하게 되지요. 배우가 배우로서 몸을 이용해서 영화 속의 한 부분을 차지한 채 배역이 지닌 의미를 충실히 전달해 낸다면 그야 말로 좋은 연기 아닐까요?

 (여담이지만 저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악명 높은 “배우 가축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싸이코〉(Psycho, 1960)의 메이킹 다큐멘터리에서 자넷 리가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히치콕과 상관없는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끼워 넣자니 민망할 정도로 길지만, 쿠로사와의 작업 방식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만한 여지가 있을 듯하여 인용해 보겠습니다: “감독님께서 말씀하셨죠. ‘카메라 초점을 맞춰야 하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통제가 필요해요. 다시 말해서, 내 카메라가 움직일 때면 당신도 따라 움직여 줘야 해요. 만약 그렇게 움직이기가 어렵다면, 내가 어느 지점까지 움직여야 할 동기를 제공해 줄게요.’ 히치콕 감독님과 작업한 여러 배우들이 스타일에 가로막히거나 짓눌린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사실은 저도 알고 있어요. 반드시 어디로 움직여 달라는 지시를 받으니까 말이죠. 하지만 저는 그걸 도전으로 받아들였지요. ‘그게 제 할 일인 걸요. 말씀은 고맙지만 제 동기는 제가 알아서 찾을 게요.’ 감독님께서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해서 스스로 동기를 생각해 찾아낸다는 점이 제게는 배우로서 도전이었던 거죠. 저는 그런 식으로 받아들였어요. 그리고 감독님께서 하신 말씀도 그런 의미였다고 봅니다. 배우를 방해하거나 가로막자고 하신 말씀이 아니었어요. 일종의 도전 과제를 제공하신 거죠. ‘나는 내 일을 할 테니까 당신은 당신 일을 해줘요.’하는 식으로요. 그렇게 배우가 자신이 움직여야 할 이유를 찾아내기를 바라셨고, 만약 배우가 그걸 못하겠다 싶으면 감독으로서 자신이 옆에서 도와주겠다는 의미였어요. 그래서 저로서는 감독님과 다른 배우들 사이의 대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니,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제 경우엔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그냥 “이 영화는 한량없이 재밌습니다.”라고 말하면 될 영화를 가지고 긴 소리 주절주절 늘어놓으니 손가락 보기 민망하네요. 특히 쿠로사와가 50년대 말부터 60년대 중반까지 만든 흑백 토호스코프 영화들이 그렇습니다. 영화의 모든 요소가 누가 봐도 감탄스럽다 싶을 정도로 우수해서 그 영화가 왜 근사한지 말하고 있으면 스스로가 바보가 되는 느낌이 들죠.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설령 잠시 바보가 될지라도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고 또 한 사람이라도 더 보았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너무나 재미있고 멋진 영화이니. 주인공 캐릭터를 공유한 일종의 속편이라는 이유 때문인지 〈요짐보〉에 비하면 그 명성을 한 수 접고 들어가는 느낌이 있는 작품인데, 너무 속편이라는 개념에만 연연하지 마시고 일단 기회가 닿는 대로 보시길 추천 드리고 싶습니다.






 그나저나... 영화 말미에 나오는 전설적인 결투 장면은 볼 때마다 신비롭습니다. 크라이테리언에서 리마스터링해서 다시 내놓은 〈쓰바키 산주로〉 DVD(와 블루레이)에 수록된 다큐멘터리를 보면 이 결투 장면에서 두 배우가 각각 어떤 방식으로 검을 이용했는지가 느린 동작으로 소개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 동작을 머릿속에 넣어 놓고 영화를 보아도 막상 결투가 벌어지면 그 동작이 도무지 안 보이더라고요. 어린 시절에 이소룡 영화 보면서 아버지께서 “이소룡은 발이 너무 빨라서 안 보여.”라고 하시면 사실은 보이는 것 같은데도 어린 마음에 ‘와, 이소룡은 발이 너무 빨라서 안 보이는구나.’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사실 그처럼 이소룡이나 성룡이나 이연걸 같은 난다 긴다 하는 액션 스타 내지 무술 고수들도 영화에서 보면 그 동작이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빨라서 그렇지 일단 눈에는 웬만큼 다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카메라가 덜컹거리지도 않고 격한 편집이 가해지지도 않은 〈쓰바키 산주로〉의 결투 장면은 안 보이더라고요. 그 비결 비스무레한 걸 저는 최근에야 알았어요. 이번에 극장에서 그렇게 큰 스크린으로 보는 데도 안 보여서 참 신기하다, 하고 집으로 돌아와 딱 그 대목만 DVD로 발췌해서 보았는데 그제야 둘이 뭘 하고 있는지가 보였습니다. 비밀은 동작을 취하는 속도가 아니라 그 앞의 기나긴 기다림에 있었지요. 시간이 멎은 것 마냥, 이거 혹시 같은 프레임을 복사해서 붙인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하염없이 길게 이어지는 정지 이미지에 눈이 익숙해져 있다가 갑자기 무시무시하게 빠른 동작이 나오니 관객으로서 타이밍을 빼앗기고 발도술에 당하듯 그렇게 당하고 만 겁니다. 가설을 세워 놓고 보니까 간단한 원리이건만, 그래도 여전히 볼 때마다 걸려듭니다. 역시 영화란 마술인가 봅니다.



 또 그나저나... 이번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상영해 주기 전까지 이 영화를 한 번도 한국어 자막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DVD의 영어 자막으로 보았지요. 그래서 “chamberlain”과 “superintendent”로 번역된 관직명이 원래는 뭐였을까 궁금했습니다. 영상자료원 자막에서는 각각 “집정관”과 “대사헌”으로 옮기기에 일단 그렇게 썼습니다만 아마 이것도 일본 관직명은 아니겠죠. 영어 자막으로 일본 (혹은 중화권) 영화를 보면 이렇게 한국식으로 한자를 독음해서 쓰면 오히려 무슨 의미인지 확 와 닿을 듯한 어휘를 영미권 실정에 맞게 의역한 부분들이 걸리더군요. 일본 시대극의 경우에는 특히 관직명하고 검술 유파 이름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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