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라노;연애조작단]은 세 번 다시 시작한다.


# 첫 번째 시작


화장실 변기에 앉아 짝사랑하는 선아(류현경)에 대한 마음을 읊조리던 현곤(송새벽)에게 철빈(박철민)이 명함을 건낸다. ‘시라노’라는 정체 불명의 단체. 이들은 연애에 서투른 쑥맥들에게는 구원과도 같은 일명 ‘연애조작단’이다. 현곤은 그들이 써준 대본이 조금 어색하지만, 충실히 연습하고 실행에 옮긴다. 이 가짜 로맨스를 위해 조연급 배우(엑스트라가 아니다!)와 살수차가 동원될 정도니 성공은 불을 보듯 뻔한 법. 


그 과정을 다루는 초반 30분은 미끄러울 정도로 리드미컬하고 자빠질 정도로 웃긴다. 보통의 로맨틱 코미디가 두 시간에 걸쳐 보여주는 로맨스와 코미디의 구조와 공식이 송새벽의 완벽한 캐릭터 연기를 통해 30분 안에 농축되어 구현된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정말로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를 철저히 연구한 사람만 제출할 수 있는 일종의 ‘장르 보고서’일지도 모르겠다.


# 두 번째 시작


또 다른 의뢰인 상용(최다니엘)이 ‘시라노’의 아지트로 걸어 내려온다. 상용은 희중(이민정)을 사랑한다. 그리고 희중은 ‘시라노’의 리더인 병훈(엄태웅)의 옛 여자친구다. 이제 이 영화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지가 좀 더 명확해진다. 이것은 ‘로맨틱 코미디’를 만드는 방법, 그 자체에 대한 은유인 것이다.


병훈은 ‘로맨틱 코미디’를 만드는 연출자다. 철빈은 작가이며, 민영(박신혜)은 돈을 다루는 프로듀서에 가깝다. 이들이 궁극적으로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연극이고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은 극단이다. 이 팀은 적어도 이 장르에서는 철저히 성공적이었는데, 그것은 이들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 장르를 철저히 연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성공한 구조와 공식도 반복되면 지루해진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뻔한 것’과 ‘뻔하지 않은 것’ 사이의 균형감각. 대부분의 능숙한 작가들은 뻔한 공식을 드러나지 않게 잘 운용하면서도 이 이야기가 가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호소하려 한다. 문제는 진짜를 강조하면 할수록 작품과 창작자 사이의 거리 조절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이 바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병훈-희중-상용의 삼각관계다. 병훈은 대상에 대한 애착이 과도한 창작자에 가깝다. 그가 만들어가는 상용이라는 캐릭터는 병훈에게는 애증의 대상이지만, 희중에게는 철저히 성공적이다. 너무 당연한 결과다. 병훈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쥐어 짜내 자신의 페르소나를 만드는 중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신의 ‘경험’이 주는 아픔이 작가의 통제를 벗어나는 순간이다.


혹은 아직 치유되지 못한 아픔이 결국 작품 안에서 고스란히 질문으로 돌아오는 순간, 창작자는 난감해진다. 병훈이 겪었던 문제는 상용에게도 고스란히 전가되는데, 재밌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그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바로 병훈이라는 점이다. 병훈이 문제를 푸는 방식은 결국 작품의 마지막 장을 쓰는 것, 그 자체였다.


상용이 희중에게 고백하는 마지막 장면은 철저하게 통제된 일종의 오픈세트에서 진행된다. 그리고 상용은 각기 다른 세 가지 고백을 연기한다. 작가가 미리 써준 대사, 병훈이 즉석에서 토해내는 대사, 상용이 직접 생각해낸 대사. 뻔한 것과 뻔하지 않은 것, 공식과 경험, 연기와 진심 사이를 오가는 상용의 고백은 결국 희중의 키스를 이끌어 낸다. 이 로맨틱 코미디(혹은 작업), 성공적이다. 물론 병훈은 차마 그 성공을 볼 수 없지만.


# 세 번째 시작 


작품은 거기서 끝나도 충분했지만 기어이 또 다른 엔딩을 시작한다. 이미 충분히 알고 있거나 관객의 상상에 맡겨도 되는 것들이 동어반복처럼 길게 이어진다. 그 내용은 ‘로맨틱 코미디’의 약속된 공식에 좀 더 충실한 것들로 이루어져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확실한건 이러한 엔딩을 통해 이 영화가 결국 ‘로맨틱 코미디’였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명확하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김현석 감독은 좀 더 나아갈 수 있는 지점에서 멈춘다. 혹은 작품의 시작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것이 연구자가 장르를 대하는 겸손함인지, 작가가 되기를 두려워하는 나약함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이번이 마지막 ‘로맨틱 코미디’가 될 것이라는 김현석 감독의 다음 답안지를 기다려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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