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녀 (2010)

2010.06.10 00:06

개소리월월 조회 수:4964

같은 시간에 도착한 두 영화 ‘하녀’ 와 ‘시’의 키워드는,

‘죽음’ 보다는 ‘체험’이라고 생각한다.

 

미자는 현실에서의 시(혹은 이창동의 말처럼 예술로 바뀌어도 상관없을 것이다)의 위치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기억을 잃어가야 하고,

은이는 상류층의 삶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체험하기 위해서 ‘백치’가 되어야 한다.

 

인물 의식의 무(無)화.

영화 성립을 위해 중심인물의 의식을 왜 무(無)화 시켜야 하는 걸까,

또한 이것은 어떤 징후일까? 같은 시기에 도착한 이 두 영화는 영화의 주제를 넘어 우리 삶의 전반을 시사하는 것 같다.

 

이 글은 ‘하녀’에 관한 글이므로,

하녀가 은이를 보편적 상식에서 벗어나 의식을 무(無)화 시킨 ‘백치’로 만들면서까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했는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은이가 백치가 된 까닭.

 

영화에 묘사된 은이의 배경은, 대학을 다녔으며 유아교육을 전공했고, 결혼한 적이 있으며, 평택에 아파트가 있다.

임상수는 씨네21의 인터뷰에서 ‘사실은 은이는 전형적인 30대 여성’이라고 했다.

 

나는 영화초반부까지는 이 말에 어느 정도 동의 할 수 있다.

영화초반의 경우 일하는 은이는 휙휙 여기저기 둘러다보는 카메라에 담긴 일하는 여자들과 동일시 되기 때문이다.(참고로 여기서 일하는 여자들은 나이가 어느정도 있지만, 소비하는 여자들은 다 젊다. 하지만,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휙휙 돌아다니는 카메라 때문에 노동과 소비가 벌어지는 어느 번화가 저녁의 일상으로 보인다.)

 

이어 한 여자가 난간에서 뛰어내리고 노동과 소비를 하던 사람들은 그 자살사건에 집중을 하게 된다. 은이도 자살사건에 대해 듣게 되고 ‘구경하러 가자’고 선배를 꼬드기며 호기심을 보인다.

 

은이가 찾은 사건현장에는, 그날 밤 사이 사람들의 흔적(노동과 소비)들이 여기저기 지저분하게 널려있다. 사람형상의 흰색 표식과 핏자국만 남아있을뿐 휑한 장소는 초라하기 짝이 없고 은이는 물끄러미 표식을 쳐다본 뒤, 하늘을 쳐다보고 의미심장한 배경음악이 깔리면서 숏이 마무리 된다.

 

좁은 고시원방에서 선배의 배를 배고 자던 은이는 일어나 가만히 앉아 있는데 이때까지 배경음악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병식이 면접을 보기 위해 은이를 찾아오는데, 은이는 지난밤의 자살사건이 있었지만 천진난만하게 고시원 옥상에서 음악을 들으며 껌을 씹고 있다.

 

굳이 사건현장을 찾아와 물끄러미 보던 은이의 숏 후에, 천진난만한 은이와 면접에 관한 숏으로 진행되면서 이유 모를 자살을 한 여자의 사건은 은이의 지속된 관심사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어진 배경음악과 침대에 앉아 있는 은이를 담은 카메라로 지난밤 여자의 죽음에 대한 연민이라던가 의구심을 가진다고 설명하긴 부족하다. 하지만 전형적인 한국 사회의 사람이라는 보편성을 획득한다고 할 수는 있을 것 같다.(씨네21 754호 안시환의 글에서 ‘연민이 과잉된 현재, 연민은 대상이 타자일때만(나와 직접된 연루가 없을경우에만) 이뤄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의 글에 임상수는 한번 더 의구심을 가진다.(혹은 연민자체를 의심한다. 연민의 대상이 저명인사거나 매체 혹은 보도를 통한 보편적 게시가 부재할 때 우린 정말 연민이라는 것을 가질까?)

 

그런데 은이가 대저택에 들어감에 따라 ‘사실은 전형적인 30대 여자’라는 말에 공감을 할 수 없는 것은 갑자기 ‘백치’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혹은 백치인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상류층 대저택에 일하는 병식은 집안식구들 행동 하나하나에 불만을 터트리는 반면 은이는 그 집안에서 일하는것에 대해 별 생각이 없다.

 

남이의 쓸데없는 부탁과 어린아이와 어울리지 않는 말투와 행동(아빠가 그러는데, 다른 사람을 올려주면 자신이 더 올라가는 거랬어요)도 그저 귀엽게 본다. 유아교육학과 출신인 은이에게 이보다 끔찍한 이야기가 있을까?

 

그리고 해라와의 섹스에 실패 후 성욕구해소를 위해 은이를 찾은 훈에게 은이는 참 친절하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훈의 요구에 순응할뿐더러, 섹스가 있기 전부터 아침에 피아노를 치는 훈을 응시하며 아침식사를 놓아둔뒤 경쾌한 발걸음을 보이는건 훈(혹은 대저택의 삶)에 대한 호감으로 보인다.

 

추운겨울 별장안에 있는 욕실에 훈과 해라,남이가 있고 은이는 밖에 남겨져도 천진난만하게 물로 뛰어들뿐이다. 그 외에도 ‘백치’의 이유는 많다.

 

그런데 은이는 일을 하고 있고(따라서 수입이 있고), 직장을 싫어하지도 않으며, 마음맞는 선배랑 단란히 살고 있으며 평택에 집도 있는데, 왜 상류층 대저택의 하녀가 되어야 하는걸까?

 

초반부 카메라는 일상을 담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지만, 은이의 면접 후 대저택 입성까지는 숏들이 아주 일사천리로 스윽 넘어가버리는 것을 생각해야한다.

 

어느 번화가의 저녁 어느 여자의 이유 모를 자살-> 그것을 굳이 찾아와 바라보던 은이가 대저택에 들어감.

 

이유 모를 자살과 그것을 바라보던 은이가 대저택에 들어가는 것은 무슨 관련이 있는걸까?

 

나는 은이와 동일시 되었던 관객을 대신해, 그 여인의 죽음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은이가 동원된다고 본다.

 

그런데 그 (자살에 대한 설명을 위한)동원을 위해 은이는 ‘백치’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대저택에는 그나마 우리의 성향과 비슷한(뼈속까지 하녀인 것을 제외한다면) 병식이 이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누군가 노동을 하기 때문에 소비가 있음을 알고 있으며, 더 가진자 때문에 내가 덜 가졌으며 타자의 죽음에 그리 안타까워하지 않고, 체제에 불만을 가득 안고도, 변화시킬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다,

즉, 이 영화의 자본에 따른 철저한 권력질서속에서, 이미 ‘그러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다시 보기 위해서 은이는 누구라도 불쾌해 할 이 최하급 하녀 살이에 ‘백치’가 되어 동원되어야 하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노동과 소비의 아수라장속에서 여자의 자살은 잠시의 이목집중 이외에 사람들의 감흥을 일으키지 못하지만, 아수라장이 끝난 후 노동과 소비가 남긴 지저분한 잔재들과 다를바 없이 흰색 표식외에는 의미가 되지 못하는 죽음을 ‘다시보게’ 하는 존재는 은이인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선글라스를 끼고 어떤 사물을 판단하려면 더 밝은 빛이 필요하거나 썬팅이 덜된 선글라스로 바꿔 써야하듯이)은이는 다시보기 위해 우리를 위해 동원된 존재이다.

 

물론 하녀라는 영화 속 ‘백치’라는 의미는. 은이가 비록 ‘하녀’로 일하지만, 그것은 온전히 부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현대사회에서의 시민으로서 타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위해 소모되는 것, 즉 평등의식이라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주체성의 부재이지, 인간의 기본적 욕망의 주체성이 없는 것으로 오인되어서는 안 된다.

 

이성(훈)에 대한 호감(성적욕망)도 있으며,

(피아노 치는 훈->은이->훈의 정면숏 으로 순서로 찍혔으며 은이의 숏에서 은이는 훈을 빤히 쳐다본다. 돌아가는 은이는 미소를 머금고 발걸음은 경쾌하다. 두 번째 피아노씬은 두번의 섹스 이후 빨간색 진한 립스틱을 바른 은이가 첫 피아노씬에서의 조심스런 움직임과 달리 당당하게 훈쪽으로 걸어간다. 피아노 치는 훈의 옆모습과 은이의 정면숏 -> 돈을 받은 후 불쾌해하는 은이의 원숏 -> 여전히 옆에서 잡은 훈의 피아노 치는 모습. 그런데 여기서 카메라는 사선으로 잡혀있다. 마음의 균열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계급의식에 대한 감정 표출 또한 있다.첫 섹스 이후 해라방에서 나오는 은이에게 해라가 ‘고마워요’라고 말한다. 은이는 처음에는 웃지만 곧 얼굴이 굳어지고 만다. (여기서 영화 전체에 걸쳐 한번뿐인 단정한 하얀옷과 머리삔을 한 해라가 등장하는데, 손에는 ‘제 2의 성’이라는 책이 들려있다. 남편에게 금전적으로 의존한 삶을 사는 해라가 패니미즘 필독서인 이 책을 읽는 것은 참 아이러니이다. 하지만 부를 갖춘 해라만이 독립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고 해라의 속옷까지 빨아야하는 은이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모성본능(자신의 태아만이 아니라, 남이를 비롯해 해라의 복중쌍둥이에게도 큰 관심을 가진지며 낙태에 관한 타협의 시도를 거절한다)도 있고,

자신의 외모에 대한 자각도 있다.(선배에게 ‘언니는 낙태 해 본 적 있어?’ 라고 물을 때, 선배의 표정이 굳어지며 등장하는 배경음악은 ‘언니는 남자랑 해 본 적은 있어?’ 라고 묻는 것 같기 때문이다.)

 

즉, (기본적 욕구에 부에 대한 욕망이 있다는걸 완전 부정할 순 없지만)

덜 탐욕적인 존재(기본적 욕망에 기초를 둔 은이)가 들어설 때,

더 탐욕적인 우리(‘부’라는 사회적 욕망을 가진)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 비현실적인 백치같은 은이의 존재이유이며, 하녀의 의도이다.

 

 

하녀가 질문하는 법

 

하녀의 진행방식중 주목 할 부분이 있는데, 은이를 제외한 대저택의 식구들(관객들)이 공유된 사실을(임신) 은이는 한참 후에야 알게 하도록 배열한 것이다.

물론 앞에서의 설명처럼 ‘백치’니까 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앞서 말한 ‘평등의식이라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주체성의 부재’로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임신은 신체적 변화이기 때문이다.(김치를 그렇게 먹었는데, 지금은 손도 안댄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모른다는 병식의 증언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건 결국 은이가 임신을 한것이 사실로 밝혀지는 것 보다는, 병식의 추측이 해라모와 해라에게 공유될때, 그들의 감정변화와 행동들에 왜 많은 장면이 할애되면서 임신사실의 확인이 뒤로 밀려지는지 묻는게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에 대한 직접적 물음이다.

해라는 훈의 부가 세습될 ‘출산’을 담보로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데, 그것을 ‘은이’가 대신할 수도 있다면.

혹은 병식은 오랜 시간 하녀로 일하여 아들을 검사로 만들었지만 대저택을 떠날 수 없는 처지이다.(자본에 의한 절대적 권력질서의 세상에서는 법보다 돈이 위이기 때문이다) 온갖 ‘아더매치’ 한 상황을 버티어 여기까지 왔는데, 백치같은 신참이 자신이 도달 할 수 없는 위치를 넘볼 수도 있다면(병식은 훈과 은이가 섹스를 했을 때는 행동하지 않지만, 은이의 임신을 확신하고 나자 재빨리 보고를 한 것을 환기해주길 바란다),

 

즉, ‘너의 위치가 위협받는다면 너는 어떻게 할래?’

해라와 해라모는 우리안에 있을지도 모를 이상의 모습으로, 병식은 우리의 현재의 모습으로 대변되며 우리는 저 질문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한다.

 

하녀가 가볍게 느껴지는 이유

 

그 과감한 질문법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녀가 매우 가볍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나치게 인물의 성향과 배경의 구조가 도식적이기 떄문이다.

자본에 근거한 철저한 권력질서,

일하는 여자들, 소비하는 여자들, 성적 능력의 값어치, 혹은 외모의 조건(은이의 선배는 왜 그리도 못났으며, 불친절한 세상을 왜 대신 사과해야할까?)으로 그어진 정확한 질서들. 그리고 최상위에 군림하는 남자. 여자들끼리의 치열한 자본에 근거한 계급투쟁들.

끝까지 일관적인 인물들의 성향들,

훈은 아침을 피아노로 클래식을 치며 맞이하며 고급 포도주를 마시는 귀족적 모습을 보이지만, 자식이외에는 거의 관심이 없고 해라와 은이를 성욕구해소 혹은 출산을 하기 위한 도구쯤으로 생각한다. 영화내내 그는 모든 사람을 내려다보며, 카메라는 그를 아래에서 잡아 우러러 보이게끔 찍혔다.(해라가 오럴섹스를 해줄 때와, 쌍둥이를 맞이하기 위해 비서 둘과 공항을 걸어갈 때, 마지막 해라의 분신자살, 단 세 씬을 제외하면 그렇다) 자본의 질서 최상위층인 인물로 대변되나 그는 거의 괴물에 가깝다.

해라와 해라모는 절대적 부를 갖춘 훈에게 의지한 채, 안락한 생활을 영위해간다. 그나마 해라는 불륜에 대해 감정 표출을 하긴 하지만, ‘내 빤스 빠는 년이랑 어떻게’ 라는 계급적 위협에 오히려 민감하게 반응한다. 해라모는 딸이 훈에 대한 분노로 고민을 할 때, 무덤덤한 태도로 일관하며 딸의 고충에는 관심이 없고 안락한 생활을 유지시키는데 급급하다.(‘잘난 남편 봐줘야 하지 않을까?’,‘결국 니가 원하던게 이런거 아니야?’)

병식 또한 은이의 ‘백치’같은 행동에 신분적 위협을 느끼기도 혹은 연민을 느끼기도 하지만, 핵심적 사건에서 병식은 끝내 자본에 굴복하고 만다.(결국 대저택을 떠남으로서 하녀일을 그만두지만, 힘없이 ‘은이야, 하지마’ 말 한마디를 남길 뿐이다)

 

생략된 설명(숏)들, 여자의 이유 모를 죽음을 붕괴된 중상층과 자본주의의 흐름에 몸을 맡긴 우리라는 식의 편집부터 공감이 힘들다.

물론 큰 이유중의 하나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 죽음을 대변할  수는 없다. 비아냥과 비현실적 공간이 만나 만들어내는 이 극단적 도식적 환원은 거짓에 가깝기 때문에 하녀의 메시지를 소통하기 위해서는 복잡다변해진 세상의 문제들을 우리는 무(無)화 시켜야 하고, 초반부 현실적 장면들은 기하학적으로 환원된 허구속에 종속되어야한다. (허구속의 허구, 허구의 위계질서, 관객의 ‘백치’화)

 

혹 우리가 이 자본질서의 흐름에 극단적인 긍정을 한다해도 우리 대부분은 ‘검사’아들을 둔 병식이 되지 못할뿐더러,

병식과 우리사이의 간극을 확신할 수 있다면,

차라리 우리는 가진자들이 저런 괴물스런 행동을 하길 바라는게 아닐까? 그들은 부에 대한 탐욕밖에는 없어서 그들을 편하게 ‘악’으로 규정하고 싶은건 아닐까? 라고 질문하는게 훨씬 생산적이다.(말하자면 임상수와 홍상수, 두 상수 사이의 차이)

 

디지털시대에 일기장처럼 주어진 카메라들, 그곳에 담기는 영상들. 지극한 추상이지만 카메라만 걷어내면 현실이 남겨진다는 점, 그 다양한 감각의 학습, 우린 분명 영화를 봄에 따라 더 현실과 가까운 그 무엇을 원하고 있다. 현실을 건드릴 그 유기적인 감각들, 그것이 시대에 대한 고발이 되었든 비아냥이 되었든, 변화하는 세상의 직접성을 다루는 체험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던한 요구들에서 빗겨나 도식화된 기호들과 복잡다변한 문제들을 하나로 통합시키려할때 그로 인해 영화의 존재의 이유 '소통'에 장애를 일으킨다.

결국 세상과의 결속이 느슨해질 때 끈질김이 부족할 때 영화는 가벼워진다.

 

진퇴양난의 결말

 

은이가 분명 우리 자신을 다시보게 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라면, 그러기 위해 백치가 되고 끝내 목을 매단 체 분신자살을 해버린다면, 우리를 위해 동원된 은이를 우리는 연민을 해야 하는 걸까? 아니 차라리 그 연민이 가능한가?

사실 은이의 분신자살에 대한 임상수의 의도는 알 것 같기도 하지만(그의 말 ‘고결함’, 병식은 자본의 위계질서를 탈피한다. 그런데 죽을 이유도 없고 죽을 수도 없다. 병식이 죽으면 우리도 죽어야 한다. 우리를 위해 동원된 존재인 은이(덜 탐욕적인)를 죽여야만 ‘고결함’이 성립된다. )

임상수의 의도를 어느정도 긍정하면 동원된 존재에 대한 윤리적 문제에 봉착하고,반대로 부정하면 남다은의 말대로 ‘결단을 위한 결단’, 텅빈 행위가 되면서 스펙터클에 봉사하게 되는 것이다.(그 갑작스런 죽음은 왠지 ‘바람난 가족’에서의 갑작스런 아이의 던져짐과 닮아 있다.) 결국 어느 쪽으로도 진퇴양난에 빠지고 만다.

  

질문은 다시 우리에게로

 

처음에 언급했듯이, 은이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영화 성립을 위해 인물의식을 무(無)화 시켜야만 하는 이유를 물어야 한다.

은이의 죽음을, 동원된 인물을 다루는 방식의 윤리적 문제도 중요하지만,

‘왜 무(無)화 되어 동원되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면 더 많은 사람이 동원되고 죽는걸 봐야할지도 모른다.

 

일상명언이 되어버린 그 말,

‘태풍의 중심에 있을 때는 그 위력을 알지 못 한다.’

 

사실, 영화의 존재의 이유 중 하나는 현실 속 일상이라는 ‘태풍의 중심’에 있는 우리가 허구(지만 재현된)의 세상에서 태풍을 다시 바라보는 체험의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죽음을 이야기하려면 누군가 죽어야 하고, 나의 자아를 다시보기 위해서 누군가는 자아를 잃거나 끊임없이 방황해야 한다.

 

최근 영화가 성립하려면,

시작부터 텅빈 기호이거나(예언자), 기억을 잃어가는 병에 걸리거나(시), 백치가 되야한다.(하녀)

혹은 관조의 시선으로 현상을 제시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거나(경계도시2,클래스), 끊임없는 회피와 보류를 해야한다(시리어스맨)

 

이 불안한 ‘증후기호’들.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은 ‘더이상의 죽음은 안돼!’ 이에 다름 아니지 않은가?

하녀에서는 세상이라는 실재에 대한 총체적 인식의 귀차니즘, 도식화를 못 봤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아냥이라는 말로 그것을 긍정하기엔 죽음은 너무 만연해 있고, 세상은 점점 더 영약해질것이며 복잡해질 것 이다.

하녀의 화두는 ‘죽음’ 이거나 ‘계급’일지는 몰라도, 우리의 화두는 ‘끈질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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