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 포커스 (Zero Focus, 2009) ☆☆1/2

 

 

 

[제로 포커스]는 이야기가 정말 말도 안 되는 해답이라도 내놓을지언정 용서해 줄 수 있는 분위기를 지녔습니다. 드넓은 바다와 마주한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에서는 파도가 격하게 부딪히기고 하면서 흰 거품들을 만들고 그 절벽에는 기다란 도로가 나 있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음악과 함께 자동차나 사람이 극적으로 다이빙할 수 있습니다. 배경이 겨울이니 이런 분위기에 어울릴 법한 폭풍우가 몰아닥치지 않지만, 영화 주요 배경에서 눈발이 날리고 쌓인 모습은 천둥 번개를 전주곡으로 삼았고 이는 주인공의 불안과 의혹에 쌓인 내면을 화면 안에 증폭시킵니다. 이런 마당에 불안정한 음악이 곁들여지면, 굳이 누가 “뭔가 수상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지 않아도 주인공이나 우리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걸 잘 압니다.

 

 

일본이 2차 세계 대전 패전의 상처를 딛고 경제 발전을 박차고 있는 중이었던 1957년 겨울, 데이코(히로스에 료코)의 남편 겐이치(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사라져 버립니다. 비록 남편에 대해서 많이 아는 게 없지만 그 해 여름 맞선을 통해 만난 후 금세 좋아하게 된 데이코는 상당히 빨리 그와 결혼식을 올렸고, 결혼식 후 얼마 안 되어서 겐이치는 이전 근무지인 가나자와에서의 일을 정리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그곳으로 떠났었습니다. 하지만 일주일 후 돌아오겠다는 그의 약속과 달리 약속 날짜가 사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니, 데이코는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합니다.

 

 

그리하여 데이코는 기차를 타고 직접 가나자와로 갑니다. 그녀는 남편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찾아다니려고 하지만 가면 갈수록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 자신이 별로 아는 게 없다는 것만 실감합니다. 한편 그 동네에서는 시장선거가 열리고 있었고, 당시 일본 사회가 겪고 있던 빠른 변화는 그 지방에서도 들어오려고 하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여성 시장 후보가 출마하면서 동네 분위기가 불안정해지고 있고 선거운동본부에는 돌덩이가 유리창을 깨뜨리고 날아 들어오기도 합니다.

이 여성 시장 후보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면서 선거 운동을 지탱하고 있는 사람은 그 동네에서 잘 나가고 있는 벽돌 공장 사장의 미모의 아내 사치코(나키타니 미키)입니다. 공장 노동자들에게 너무할 정도로 가혹하게 구는 사장과 사치코는 겐이치와 가까운 사이였고 데이코에게 사치코는 겐이치에 관해 여러 가지를 말해 주긴 하지만 나키타니 미키는 그것보다 더 많은 걸 말하지 않음을 사모님다운 단정함 속에서 암시합니다. 하지만 데이코에게 그리 정직하지 않은 사람은 사치코만 있는 게 아니고 그러다가 의문의 살인사건들이 연이어 터지게 되면서 겐이치의 행방에 대한 의문은 더 커지지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동안에 겐이치가 그녀로부터 숨겼던 것들은 하나씩 드러납니다. 그리하여 40년대 말 미군기지에서의 그의 순사시절 뿐만 아니라 그녀를 만나기 전에 가나자와에서 그가 뭘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데이코는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알아가게 되고 그런 동안에 일본 전후 사회를 배경으로 과거로부터 벗어나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절박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넓게 해석하면 2차 세계 대전까지 고려할 수 있으니 이는 좀 얄밉게 보이긴 하지만, 플래시백 장면들을 통해 보이는 모습은 우리 쪽 사정과 통하는 면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다가 추리소설 각색물들이 흔히 걸려 넘어지는 부분에서 영화는 상당히 늘어집니다. 데이코를 따라가다가 다른 캐릭터의 관점들로 바뀌어가서 사건 뒤의 사정과 이유를 설명하는 것에 신경을 집중하다 보니 이야기는 힘을 잃지요. 이야기 내내 우리가 줄곧 같이 따라왔던 주인공인 데이코가 이야기 밖으로 점차 서서히 물러나가는 것도 이야기와 캐릭터들에 대한 거리감이 더 커져 가는 원인들 중 하나입니다. 영화는 이미 1961년에 한 번 영화화된 적이 있는 마쓰모토 세이치의 추리소설을 원작으로 했다는 데, 이들이 본 영화처럼 그리 잘 먹히지 않는 신파로 결말을 맺었었는지에 대해 전 궁금해졌습니다.

이점에 대해 제가 더 아쉬움을 느끼는 이유는, 앞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영화가 좋은 신파를 할 만한 배경을 잘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같은 정갈한 분위기의 드라마를 만든 경력이 있는 감독 이누도 잇신은 매끈한 작품을 만들어 내놓았고, 여느 최근 일본 영화들과 달리 상당한 예산을 들여 만든 시대극인 본 작품은 의상, 세트, 촬영 등의 기술적 측면에서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제작진들은 경기도 부천 판타스틱 스튜디오에서 일부 촬영을 했지만 화면 안에서 그런 흔적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그 때문에 나중에 엔드 크레딧을 통해 전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제로 포커스]는 분위기로 흥미를 자극하기는 하지만 미스터리 자체는 딱히 만족스럽지 않은 영화입니다. 용의자들은 그리 많이 찍어놓지도 않으니 범인이 누구이고 또 누가 훈제청어인지 금세 파악이 되니 영화가 정말 추리소설 원작이 맞긴 맞는지 의심이 갈 지경입니다. 신파 엔딩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지만 결말은 여러 사람들의 동기가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모자란 감이 듭니다. 그래도 영화엔 제가 자세히 얘기하고 싶지 않는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긴 하고, 중요 역할을 맡은 기무라 타에는 그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녀뿐만 아니라 조용하게 자리를 지키는 히로스예 료코, 그리고 신경질적 매력이 있는 나카타니 마키 모두 각각 맡은 역할을 잘 수행해내었다는 걸 말씀드려도 별 문제가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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