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매란방 (2008)

2010.04.28 04:31

abneural 조회 수:4050



* 스포일러도 있습니다.


많은 영화를 찾아보지 못했고, 특히 유명한 패왕별희(1993)는 너무 기대가 커서 아직도 보지 못했지만. 현 위의 인생(1991), 투게더(2002), 텐미닛츠 트럼펫(2002) 등을 보고 난 후 저에게 "가장 좋아하는 음악영화 감독"은 첸 카이거였습니다. 최근작 매란방(2008)도 당연히 개봉했을 때 봐야했지만 어찌하다보니 못보고 최근 곰티비에서 보게 되었네요. 별로라는 평이 대부분이었기에 오히려 마음 편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원래부터 꽉 짜여진 플롯 따위가 장점인 감독은 아니었지만 두 시간 넘는 대작 치고는 인물도, 갈등도, 스펙타클도 지나치게 헐렁하죠. 매란방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기에 위키피디아에서 사후 조사를 해보니 실제 매란방은 영화에서 묘사된 것 보다는 적극적인 삶을 살았을 것 같습니다. 특히 영화 후반부에서 일본 때문에 어두운 시간을 보낸 것이 굉장히 큰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일본이 베이징을 점령한 이후 매란방이 공연을 거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때를 제외하고는 일본에서도 공연하는 등 열정적으로 활동했다고 하네요. 때론 '이거 너무 미화시킨 거 아니야?' 하는 생각도 들고 전기영화로써 썩 훌륭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음악 영화로써는 기대하던 것에 못 미치지 않았습니다. 회화나 영화 등등 다른 장르와 구별되는 공연 예술 나름의 판타지을 영화로 옮겨냈다는 점이 가장 인상깊었죠. 이런 것들을 클리셰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공연 예술과 관련 된 몇 가지 감동적 요소들이 있는데, 그 중 한가지는 금기시 되던 것을 깨고 무대에서 새로운 것을 보여주었을 때의 카타르시스입니다. 영화 백야(1985)가 남겨준 단 하나의 인상깊은 장면이었던, 자유롭게 춤추는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를 보고 헬렌 미렌이 감동해 눈물을 흘리던 장면에서 완벽하게 전달되었던 어떤 감정이죠.


두번째는 의심의 여지 없이 완벽하게 준비된 최고의 공연을 과연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순간의 긴장감. 최고의 공연은 그 어떤 관객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절대적인 믿음은 공연 예술의 아주 근본적인 부분이 아닐까요.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체홉의 '갈매기'를 초연했을 때를 회고한 책에서 비슷한 상황을 보고 수십번이나 다시 읽었던 때를 회상해 봅니다. 극단은 영화에서의 매란방처럼 재정적으로도 막다른 골목에 몰렸고 그 공연의 성패에 따라 모든 것이 좌우될 절박한 상황에 처했는데, 관객들이 과연 그 연극을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조차도 없습니다. 하지만 최고의 공연에 관객은 기립박수와 끊이지 않는 커튼콜로 화답을 하죠. (박수가 터져나오기 전의 고요함은 필수)


마지막으로 전쟁의 광기 속에서도 음악은 인간을 감동시킨다. 적군 장교가 주인공의 음악에 감동을 받아 주인공이 위기를 넘기는 순간 같은거죠. 영화 피아니스트(2002)에 그런 장면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어쩌면 아주 뻔할 뻔자인 장면들만 모아놓았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하지만 뭐 저는 이 감독이 저랑 이런 판타지를 공유한다는 것 자체가 좋습니다.


패왕별희는 안 봤기 때문에 예전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투게더와 매란방의 첸 카이거 감독은 탐미적 예술 지상주의자가 아닙니다. 순수하고 젠틀한 성정과 재능을 함께 타고난 사람이 있는데, 세상은 그의 재능을 보고 끊임없이 그에게 '너의 모든 것을 예술에 바쳐라'라고 종용합니다. 지치지도 않는 그 요구에 끝끝내 "아무래도 내 전부를 예술에 내어줄 수는 없겠다"라고 대답할 때, 즉 예술보다는 삶을 선택할 때 예술적인 삶이 완성된다는 것. 감독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반면 이 영화는 여자 역할을 주로 한 남자 경극배우가 관객들에게 심어주었을 긴장감과 환상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죠. '감히 매란방의 전기 영화에 물의를 일으킨 여배우가 나와서는 안된다'는 중국인들의 반발로 스캔들에 연루된 여배우가 나오는 부분은 모조리 삭제되었다니 두 눈 부릅뜬 '국민'의 관심에 영화가 경직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냥 감독 자체가 탐미적인 것 보다는 음악 좋아하는 영감님같은 센스를 추구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 기존 게시판에서 아이디를 없앴는데 여기는 아이디가 살아있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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