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들 아시겠지만, 올해가 쿠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를 맞이하여 전 세계에서 회고전이 열리고 또 거의 전작을 담은 DVD 박스세트가 나오고 하는데요, 다행히 우리나라도 그 물길을 타고 한국영상자료원을 통해 "구로사와 아키라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상영작 수만 해도 스물세 편에 달하고 (〈라쇼몽〉은 한 편으로 치고, 크리스 마르케의 〈란〉에 관한 다큐멘터리 〈A.K.〉는 일단 생략했습니다. 쿠로사와 감독 이야기를 하려는 거니까요.) 쿠로사와 감독과 함께 일했던 스크립트 수퍼바이저 / 프로덕션 매니저 / 조감독 노가미 테루요 씨와 쿠로사와 감독 뿐만 아니라 일본의 많은 명감독들과 작업했던 대배우 나카다이 타츠야 선생님(왜 노가미 씨는 “씨”고 나카다이 선생님은 “선생님”인가… 팬심이라 어쩔 수 없네요.)께서 내한을 하시니 어마어마한 기획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별전 후반에는 하야시 가이조 감독과 〈카게무샤〉에 토쿠가와 이에야스 역으로 출연한 배우 유이 마사유키도 한국을 방문하여 대담과 강연 자리를 갖는다고 합니다. 이 특별전은 7월 1일부터 25일까지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뒤, 7월 24일부터 8월 4일까지는 필름 포럼에서, 8월 9일, 13일, 17일, 20일에는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에서(이 때는 DVD 상영), 그리고 8월 10일부터 29일까지는 시네마테크부산에서 계속 이어진다고 하니 참조하시길.

 여하 간에, 이런 좋은 기회를 맞이하여 쿠로사와 감독 영화의 팬으로서 흥행에 조금이나마 일조하고 싶은 마음에 간략한 소개글 비슷한 것을 써 보았습니다. 아마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좋은 책자를 내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아직은 소식이 없고, 기존에 나온 일본국제교류기금에서 만든 한 장짜리 팜플렛에 실린 소개말은 솔직히 너무나도 실망스러워서요. 물론 쿠로사와 감독의 영화는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이번 특별전은 데뷔작부터 시작해서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작품도 포함하고 있으니 만큼 이런 글이 관심 있는 분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스가타 산시로 (1943) : 쿠로사와의 데뷔작입니다. 데뷔작이지만 처음 메가폰 잡아본 사람의 어설픔 같은 것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쿠로사와 특유의 역동적인 영상과 정적인 영상, 갑작스럽게 터지는 음향과 침묵을 교차해 가며 관객의 혼을 빼놓고 심금을 울리는 연출 방식은 이미 원숙한 꼴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강한 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만 앞서는 풋내기 스가타 산시로가 유도를 배우고 적수들을 만나면서 점점 사람이 되어가는 자기 수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직 사회적 혼란과 인간의 나약함을 다루지는 않아서, 마냥 가슴 따뜻한 일본 스포츠 만화처럼 포근한 분위기만 감돌고 있습니다만, 쿠로사와식 영웅의 원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는 이후 나올 전성기 작품의 특질도 어느 정도 예감케 합니다. 두기봉 감독의 청춘 영화 〈유도용호방〉이 쿠로사와 감독의 영화 세계, 특히 이 작품에 경의를 표하는 영화이니 두기봉 감독 팬들도 봐두시면 좋을 듯. 검열에 의해 일부가 삭제되었고 아직도 삭제본으로만 만날 수 있는 작품이지만 툭툭 끊어지면서 감상에 지장을 주는 식은 아니니 걱정 마시길. 한국영상자료원 트위터에 따르면 이번에 상영되는 판본은 몇몇 장면이 삭제된 채 자막 해설만 보강되었던 79분 버전이 아니라 삭제된 장면을 다시 붙인 91분 버전이라고 합니다. 제가 아는 한에서는 홍콩판이든 일본판이든 미국판이든 DVD로는 접할 수 없었던 판본이네요. 이거야 말로 이번 특별전의 가장 큰 수확 중 하나가 아닐지.



 가장 아름답게 (1944) : 한국영상자료원의 일본국제교류기금의 소개말에 따르면 “구로사와 감독으로서는 드문 집단 여성극. 감독 스스로도 가장 귀여운 작품으로 인정.”입니다만, 여기에 속아서 극장을 찾으셨다가는 몹시 당황하실 지도 모릅니다. (쿠로사와에 별 관심 없는 친구라도 같이 끌고 갔다가는 더더욱.) 제2차 세계대전의 끝이 눈앞에 다가온 이 시기에 만든 작품들은 〈스가타 산시로〉 정도를 제외하면 (그나마 이 작품도 검열의 대상이었고) 모두 쿠로사와가 작가적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었던 작품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게〉는 정부의 요구에 따라 만든 일종의 전시 선전영화입니다. 다행히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을 자랑스레 떠벌리는 류의 영화는 아닙니다만, 군납용 렌즈를 만드는 공장에 일하는 여공들이 개인의 고난을 감내하면서도 헌신적으로 노동에 임하여 전시 상황에 주어진 추가 할당량을 달성하고자 노력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작품의 형태 자체는 사실 썩 괜찮고, 몇몇 장면들은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답거나 감동적이기도 합니다. 쿠로사와라는, 젊은 시절에는 좌파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본격적으로 영화감독의 길을 걸으면서부터는 좌니 우니 하는 협의의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인간 본연의 마음씨를 탐구하였던 감독의 영화 작법이, 불편한 내용과 만났을 때는 그만큼 손쉽게 정치 선전영화가 될 가능성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어쨌든, 정치적 함의에 거리를 두고 보실 자신이 있는 분들, 쿠로사와의 영화 세계 전체를 공부해 보고 싶은 분들께는 권할 수 있습니다.



 속 스가타 산시로 (1945) : “패전 직전에 발표된 명쾌한 액션 영화. 관객과 비평가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얻은 작품.”이라는 한국영상자료원의 일본국제교류기금의 소개글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거의 사기에 가깝습니다. 이 작품은 쿠로사와가 억지로 만든 속편입니다. 유도와 주짓수의 대결이라는 소재를 다루면서 개인의 수양에 대해 다루었던 전편과는 한참 다릅니다. 스가타 산시로가 술 취해서 난동 피우는 미 해군을 집어던지는 대목에서 시작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무도를 통한 일본의 정신” 어쩌고 저쩌고를 이야기하는 일종의 국수주의 무술영화입니다. 하다못해 결투 장면만이라도 근사할 거라고 생각하신다면 오산입니다. 영화적 아름다움이 꽤 많았던 〈가장 아름답게〉와는 달리 이 영화는 쿠로사와가 정말 만들기 싫어했다는 티가 확 납니다. 쿠로사와의 전작을 일별하고 싶은 분이 아니라면 특별히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나이들 (1945) : “구로사와 감독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뮤지컬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색 영화. 일본 전통 예능 가부키의 패러디를 시도한 획기적인 작품.”이라는 소개말 역시 걸러 들어야 합니다. 노래하는 대목이 있긴 합니다만 이것을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뮤지컬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따지면 차라리 〈밑바닥〉이 더 뮤지컬스럽습니다. 그리고 가부키의 패러디를 시도했다는 말도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정확히는 일본의 노와 가부키에서 다뤄진 바 있는 12세기 말 미나모토 요리모토와 미나모토 요시츠네 사이의 골육상쟁에 관한 민중 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인데요, 이 설화를 이야기할 때 요시츠네와 그 부하들의 위엄과 용맹, 슬기를 중점적으로 묘사했던 기존의 시점에 비해 쿠로사와는 평민 짐꾼의 시선을 끼워 넣어 시대극으로서의 무게감을 덜어내고 희화화하는 속성이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런 희화화의 시선이 작품 전체를 압도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숨겨진 요새의 세 악인〉 같은 작품과 비교해 보면 대단치 않은 수준입니다. 따라서 “획기적인 작품”이라는 말도 과장이 심합니다. 하지만 어쨌든 제법 든든하게 짜인 소품이고, 영화적으로 감탄스러운 순간도 여럿 있습니다. 종전 이전에 만든 네 작품 중에서는 〈스가타 산시로〉 다음으로 좋은 작품이라고 할 만합니다.



 우리 청춘 후회 없다 (1946) : 전후에 만든 첫 번째 영화입니다. “구로사와 감독으로서는 드물게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 제국주의에 용감하게 대항하는 주인공의 삶을 묘사.”라는 소개말 또한 걸러 들어야 합니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라는 것은 맞지만 일단 쿠로사와는 한 번도 성(性)의 문제를 깊이 다뤄본 적이 없는 감독이라는 점을 지적해야 합니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남자였어도 별로 달라질 게 없을 영화입니다. 또 표면상 제국주의에 대항한다고도 할 수 있지만 결코 구체적 정치적 상황을 주의 깊게 다루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주인공은 자신이 사랑하던 좌익 활동가 남자를 통해 각성을 한 다음에도 정치 활동은 안합니다. 다만 그의 의지를 믿고 따르겠다는 자신의 결단을 어떤 노동을 통해서 드러낼 뿐이지요. (어떤 노동인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쿠로사와의 영화는 행동하는 사람들의 영화이기 때문에 수동적인 주인공이 등장할 경우 영화가 하염없이 심심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 영화의 전반부가 그렇습니다. 주인공이 각성한 후반부에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을 연상케 하는 강력한 몽타주가 나오면서 영화를 선도하기 때문에 볼 만합니다만 플롯/이야기 중심의 영화만을 즐기는 분께는 추천하기 어렵습니다.



 멋진 일요일 (1947) : 쿠로사와 작품 중 덜 알려진 작품인데, 개인적으로는 강력히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주말에 만난 연인이 돈 없이 데이트하는 과정을 그리는 일종의 로맨스인 동시에 비관적인 세상에서 삶의 의지를 갖는다는 것에 대한, 가슴을 찢어놓는 고통이 담긴 걸작이지요. 고전기 할리우드의 연출 양식을 답습하는가 싶으면서도 180도 가상선과 공간의 변화를 이용해 인물의 심리 변화를 담아내는 교묘한 연출이 압권이고, 특히 결말부에서 영화의 안팎을 넘나드는 소리의 연출을 통해 관객에게도 주인공들의 의지를 공유해주기를 호소하는 대목이 또한 압권입니다. 이 결말부에서 관객들이 박수를 치나 안 치나가 현재 저의 주된 관심사입니다.



 주정뱅이 천사 (1948) : 폐병 걸린 야쿠자와 심지 굳은 의사의 관계를 다룬 이 작품은 누구에게나 망설임 없이 추천할 수 있는 재미있고 시원스런 걸작입니다. 미후네 토시로의 첫 번째 쿠로사와 영화. 엄혹한 세상 안에서 인간다운 것, 선한 것을 실천하기 위해 쓰라린 패배를 무릅쓰고 분투하는 쿠로사와적 영웅담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들개 (1949) : 전후 사회의 풍경을 가로지르며 전개되는 수사극입니다. 40년대 미국에서 나왔던 세미다큐멘터리 수사극에 관심 있는 분들께는 특히 강력히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런 세미다큐멘터리 수사극은 “현실”을 “사실감 넘치게” 보여줘야 한다는 사명감에 휘둘리면서 등장인물의 캐릭터성을 놓치곤 하기 때문에 〈벌거벗은 도시〉를 만든 쥴스 다신 정도 되는 감독이 아니면 좀처럼 재미있게 다루질 못하는데, 쿠로사와 감독은 전후 일본의 갖가지 풍경을 망라하면서도 미후네 토시로의 육신을 통해 (“육신을 통해”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입니다. 〈주정뱅이 천사〉의 일부 장면에서도 그렇지만 여기서의 미후네는 정말 있는 고생 없는 고생을 다합니다.) 쿠로사와적 영웅의 분투를 보여주는 데에 성공합니다. 다만 무척 훌륭한 영화임에도 추천을 살짝 망설이게 되는데요, 초반부에 나오는 어마어마한 몽타주 때문입니다. 초반부에 8분 동안 이야기의 전개를 멈춰 놓고 이미지와 사운드의 교섭만으로 영화를 전개하는 대목이 있는데 (저도 처음 이 영화 봤을 때 그랬지만) 이야기를 좇기에 급급해지기 쉬운 관객 입장에서는 이 대목에서 졸기 십상이거든요.



 라쇼몽 (1950) : 워낙에 유명한 영화고 이 영화에 대한 제 의견은 이미 따로 글을 통해 썼습니다만, 어쨌든 이번 기회에 다시 보시면서 이 영화에 대해 기존에 나왔던 소리들이 맞는지 확인해 보시는 시간을 가지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뭐, 그런 사명감이 없어도 기본적으로 훌륭한 영화라서 재미있게 볼 수 있지만요. 다소 여담 같은 소리가 되겠습니다만 전쟁 직후 쿠로사와 영화들, 즉 〈내 청춘에 후회는 없다〉부터 〈살다〉까지의 작품들은 하나 같이 어떤 형식적으로 과도한 실험이 있는데요, 이 영화도 과언은 아님.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무성영화적 감성으로 이해해야만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사의 내용에는 완전히 신경을 끄고 배우들의 몸을 움직이는 방식과 그것을 담는 카메라, 그리고 음악에만 집중해도 충분히 황홀합니다. 참고로 이번 특별전에는 〈라쇼몽〉 복원판이 온다던데, 그냥 〈라쇼몽〉 상영도 있고 〈라쇼몽〉 복원판 상영도 따로 있어서 좀 의아합니다. 〈라쇼몽〉에 이본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그냥 화질이랑 음질만 개선 했겠거니 했는데 어떻게 된 건지. 아직 한국영상자료원에서도 속 시원한 답은 없네요.



 이키루 (1952) : 역시 별 소개는 필요 없을 만큼 유명하며 주제로 보나 성취로 보나 쿠로사와 감독의 최고작 중 하나입니다. 다만 최근에 다시 보았을 때 느낀 소회를 덧붙이자면, 그 주제의 명료함과는 별개로 영화의 생긴 꼴이 무척 파편적이고 실험적이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시청각적 형식의 실험을 즐기는 차원에서 감상해도 상당히 흥분되는 영화이리라고 생각합니다. DJUNA 님의 리뷰첨부합니다.



 7인의 사무라이 (1954) : ‘굳이 소개할 필요가 있나’하는 생각이 드는 영화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고 있군요. 기우 삼아 하는 말입니다만 ‘나는 사무라이가 칼부림하는 액션 영화 별 관심 없는데요.’라고 생각하면서 기피하셨던 분이 계신다면 이번 기회에 보시고 편견을 타파하시면 좋겠습니다. (사실 제가 본 유명 일본 시대극들은 설령 찬바라 영화로 분류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거의 모두 칼부림 액션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상황 자체의 긴장과 멜로드라마가 중심이었습니다. 서부극은 남성적인 총싸움으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지만 실상 훌륭한 서부극에서 총싸움은 대체로 몇 초에서 몇 분으로 끝나고 거기까지 갈등을 강화해 나가는 과정의 드라마가 훨씬 중요한 것처럼요.)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농민들이 산적들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사무라이들을 고용해 함께 싸우는 이야기’라고 할 수밖에 없는 작품입니다만 사실 첫 장면을 제외하면 영화의 절반이 지나도록 산적은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고 있고, 나온 뒤에도 영화의 핵심은 사무라이와 농민들 사이의 미묘한 계급적 갈등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감탄스러운 것은 이런 유형의 이야기 구도에서 기대하기 마련인 서로 다른 액션 영웅들 사이의 활기 넘치는 인간적 유대나 악당들과의 대결이 가져다주는 활극으로서의 긴장감을 전혀 놓치지 않으면서도 농민들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로 〈대부〉와 마찬가지로 중후한 주제 의식과 엔터테인먼트 양면에 있어서 최상의 경지에 올라 있는 극소수의 작품 중 하나라 하겠습니다.



 생존의 기록 (1955) : “[핵]에 대한 공포를 축으로 하여 구로사와 감독 자신이 핵반대 입장을 명확하게 내세운 수작.”이라는 소개말이 붙어 있는데요,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핵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핵에 대해 너무나도 큰 공포를 가진 나머지 가족 모두와 함께 브라질로 이민 갈 계획을 세우는 공장주 노인과, 그런 노인을 금치산자로 몰아 재산을 보전하려는 가족들의 대립을 다루는 내용인데 영화는 핵 자체에 대한 사회적 쟁점과 ‘대체 이 노인이 왜 이러는가’라는 한 인물을 중심으로 한 수수께끼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다가 이도 저도 충분히 다루지 못하고 맙니다. 그 의미상 개인의 선의지만으로 세상을 더 나아지게 만들 수 있을까, 라는 쿠로사와적 영웅의 도전에 대해 알레고리적인 사고 실험을 하는 영화라고 평가할 수는 있지만 이 이야기에서 영웅의 힘은 너무나도 무력하고, 그에 발맞춰 영화적 형식이나 이야기의 전개 또한 너무나 무력하기 때문에, 한 마디로 재미가 없습니다.



 거미집의 성 (1957) :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원작으로 한 영화로 유명하지요. 한국영상자료원의 소식지 『영화천국』 14호에 실린 이정국 교수의 글에 따르면 “옥스퍼드 사전에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가장 잘 각색한 영화로 올라가 있”다고 하는데요, 그리 놀랍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너무 셰익스피어의 이름값에 기대어 봐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DJUNA 님께서도 예전에 리뷰 통해 지적하셨지만 문화적 여건상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좇을 수밖에 없는 영미권의 각색물과는 달리 쿠로사와는 셰익스피어와 동등한 위치에서 대결을 벌이면서 대등한 작품을 만들어 내거든요. 셰익스피어의 기나긴 말들은 몽땅 사라진 채 영화적 표현으로 옮겨져 있으며, 더구나 셰익스피어의 시선이 쿠로사와 자신의 시선으로 대체된 대목도 여러 군데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비해 더 묵시록적이고 희망이 없어 보이는 세계를 다루는 이 작품은 후기작 〈카게무샤〉나 〈란〉의 절규에 가득 찬 비관주의를 예고하는 듯합니다. 보고 있으면 (특히 클라이맥스의 경우) 그 소름끼치는 분위기에 온몸이 압도당하는데요, 쿠로사와가 만든 가장 무서운 공포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밑바닥 (1957) : 한정된 공간 속에서 배우들이 말 많이 하면 성급히 “연극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고리끼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희곡과 마찬가지로 한정된 공간에서 여러 배우들이 수많은 대사를 치면서 전개되지만 쿠로사와는 말 자체보다도 카메라 및 공간 내에서 배우들의 위치 선정과 시선 등에 더 주의를 기울이면서 턱없이 좁은 공간을 끊임없이 좁혔다 넓혔다 하면서 긴장을 부여합니다. 음… 사실 그 점이 이 영화의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인 것 같아요. 연극의 영화화에 대한 좋은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거. ‘고난에 찌들어 희망조차 잃은 채 무심코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은 어느 정도까지 허용되어야 하는가.’라는 주제는 나름 또 매력이 있긴 합니다만 제게는 잘 안 와 닿더라고요.



 숨은 요새의 세 악인 (1958) : 쿠로사와 영화 중 가장 허심탄회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오락 영화로 알려져 있는 작품입니다. 아, 실제로도 그렇지만 제게는 이것보다 더 즐거운 영화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조지 루카스가 이 작품에서 모티프를 따 와서 〈스타워즈〉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이제 그만 좀 했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그 점 때문에 보고 싶어 하시는 분들은 여전히 꽤 많겠지요. 크라이테리언 DVD에 수록된 소개 영상에 따르면 루카스가 특히 여기서 따온 점은 거대한 이야기를 조역이나 단역에 가까움 직한 작은 두 인물의 시선을 통해 시작한다는 것이었는데요, 글쎄, 저는 〈스타워즈〉에서 C3PO와 R2D2를 이용한 방식이 쿠로사와가 이 작품에서 두 패잔병을 이용한 방식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서… 그냥 오마주 수준으로나 보는 편이 좋은 것 같습니다. 차라리 적진을 헤치고 망국의 공주를 탈출시킨다든가 아니면 미후네 토시로에게 맞서는 적장과 다스베이더 사이의 유사성 같은 부분이 더 재미있지 않을지. 하여튼 물론 저는 〈스타워즈〉도 좋고 재미있는 영화라고 생각을 합니다마는 아무리 그래도 루카스 영화를 토대로 해서 쿠로사와의 작품을 받아들이는 건 재미삼아 해볼 만한 일이지 너무 거기에 얽매이면 곤란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보다도 쿠로사와가 시대극 모험담의 구조와 캐릭터를 이용해서 기존 일본 시대극의 봉건적 가치 체계를 뒤틀어가는 태도랄지, 아니면 처음으로 토호 스코프를 사용하게 된 그가 와이드스크린을 이용하는 방식이랄지, 혹은 기본적으로는 작은 이야기인 이 작품을 일종의 블록버스터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연출의 묘에 관심을 기울이는 게 더 얻을 것 많은 접근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고 보니까 〈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내들〉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아무리 이렇게 말을 많이 해봐야 일단 상영관에 들어서고 나면 영화 자체의 힘에 넋 놓고 끌려가게 되는 작품입니다만. 예전 회원리뷰 게시판에 곽재식 님과 Q 님의 리뷰가 있었는데 아직 공사중이라 열람이 안 되네요. 드디어 옛 리뷰 게시판이 열렸네요. 곽재식 님 리뷰 / Q 님 리뷰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 (1960) : 일단 영화가 시작하고 첫 번째 장면인 결혼식 장면에서 쿠로사와가 순식간에 인물 관계도를 그려내면서 정경유착의 구린내를 선보일 즈음에는 마냥 빨려들게 되는 작품입니다. 기업 비리에 관한 스릴러라고 해서 뭔가 말만 많고 서류상으로 싸우는 그런 따분한 이야기 아니고요, 우격다짐만 없다 뿐이지 웬만한 액션 스릴러 뺨치는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에… 사실 쿠로사와가 토호 스코프를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붉은 수염〉까지는 모두 하염없이 재미있는 영화들인지라 소개를 하기도 멋쩍고 그렇네요.) 여담이지만 〈거미집의 성〉이 『맥베스』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작품이고 〈란〉이 『리어 왕』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작품이라는 점은 곧잘 언급이 되는데 왜 이 작품과 『햄릿』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논의가 적은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따지고 보면 세 작품과 셰익스피어 희곡 사이의 연관성은 비등한데요.



 요짐보 (1961) : 이런 영화도 소개를 해야 한단 말인가… 세르지오 레오네가 이 영화 고대로 베꼈다는 이야기는 이제 고만 하죠. 그리 영양가 있는 결과물이 나왔던 것도 아니고 (그래도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구석은 있습니다. 특히 최후의 결전에서 바람이라는 자연 요소를 연출하는 방식 같은 거.) 레오네도 그 후 쭉 남 영화 베껴먹고 살던 허접한 감독 절대 아닌데 너무 그 이야기만 반복되는 듯해요. 아무튼 말해 뭐하랴 싶을 정도로 유명한, 모든 찬바라 영화의 주춧돌과 같은 작품입니다. 다만 마냥 즐거운 오락 영화로 취급되는 경우가 있던데 사실 좀 암울한 영화입니다. 슈퍼히어로가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고 떠나는 이야기라기보다는 극소수의 나약한 사람들을 빼면 멍청하고 나쁜 놈들만 가득한 세상을 완전히 끝장내고 가 버리는 묵시록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쓰바키 산주로 (1962) : 〈요짐보〉의 비공식적 속편입니다. 몇몇 대목에서 〈요짐보〉와 유사한 연출이 나타나는 대목이 있고 특히 미후네 토시로의 캐릭터는 무척 유사하지만 그렇다고 꼭 〈요짐보〉를 먼저 보고나서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초인적인 영웅이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큰 구도는 유사합니다만 〈요짐보〉가 웃음 뒤에 서늘하게 벼린 칼날을 숨긴 일종의 블랙 코미디라면 〈츠바키 산주로〉는 그보다 훨씬 낙관적이고 진취적이며 교육적인 코미디입니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쿠로사와 영화이기도 합니다.



 천국과 지옥 (1963) : 박찬욱 감독이 가장 사랑하는 쿠로사와 영화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보고 나서 ‘더 이상 유괴 영화는 못 만들겠구나.’하다가 ‘이런 방향이면 가능하지도 않을까?’ 해서 만든 게 바로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저는 못 봤지만 각본만 쓴 이무영 감독의 〈휴머니스트〉에도 〈천국과 지옥〉에 경의를 표하는 대목이 있다고 하고 지난 주 『씨네21』 “씨네 산책” 코너에서 현재 자신의 영화 베스트 11 목록을 꼽을 때도 넣었더군요. 〈들개〉를 모든 면에서 업그레이드한 걸작 수사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영화가 두 부분으로 확연히 나뉘는 것은 여전히 이 세미다큐멘터리 수사물 특유의, 더 나아가 쿠로사와적 영웅담 특유의, 거대한 현대사회의 구조적 문제점과 개인의 도덕적 선의지라는 두 가지 요소를 어떻게 조율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문제 앞에 내놓은 불완전한 해결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설령 그렇더라도 양쪽 모두 이 정도로 훌륭하면 시비를 걸기가 쉽지 않습니다. DJUNA 님 리뷰 첨부합니다.



 붉은 수염 (1965) : 쿠로사와의 중기, 가장 박력 넘치고 대중 친화적이었던 시기를 마무리하는 종합 선물 세트와도 같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끝으로 쿠로사와는 여러 가지 대내외적 요인으로 인해 침체를 겪게 되고, 서서히 후기의 보다 정적인 화풍으로 나아가게 되지요. 어쨌든 이쯤 되면 정말 별로 할 말은 없네요. 그냥 잔재미를 위해서 말해두자면 〈요짐보〉랑 〈츠바키 산주로〉의 미후네 토시로 이미지를 익혀두신 뒤 보시면 각별히 재미난 부분이 있습니다.



 도데스카덴 (1970) : 이번 상영작 중 유일하게 아직 본 적이 없는 영화네요. 쿠로사와의 첫 번째 컬러 영화인데, 그 설정상 〈밑바닥〉과 유사점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카게무샤 (1980) : 쿠로사와의 절절한 비관주의가 폭발하는 작품. 그러나 염려 마시길. 세 시간이 후딱 지나갈 정도로 재미있습니다. 크라이테리언에서 출시한 DVD로 영어 자막 띄우고 봤는데 일본의 전국 시대 역사에 대해서 대강만 아는 상태에서 봤는데도 막 빠져들었더랬지요. 유사한 화풍의 〈란〉에 비하면 한 수 아래로 평가되는 감이 있고 쿠로사와 스스로도 나중에 〈카게무샤〉는 〈란〉을 위한 준비 운동이었다고 말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그런 말로 덮기에는 너무나도 강렬해요. 기마대가 태양과 구름을 벗 삼아 지축을 흔들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란〉의 스펙터클에 비하면 감각적인 자극은 덜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저는 그 반대편에 위치한, 정적인 구도에서 비롯하는 중압감에 완전히 반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영화 초반부에 전령이 각양각색의 깃발을 지닌 병사들 사이를 내달리는 장면만 봐도 알 수 있듯 무턱대고 정적인 영화도 아닙니다.) 해외에서 상을 받은 일본 영화만 수입이 가능했던 당시에 우리나라에서 개봉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그때 어떤 버전이 상영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그 후에 20세기 폭스를 통해 출시된 한국판 DVD는 160분짜리 국제판만을 담고 있습니다. 이번에 상영되는 것은 180분짜리 감독판이니 참조하시길.



 란 (1985) : 여기까지 소개했으니까 이 영화 소개는 좀 생략해도 되지요? 스크린이라든가 극장이라든가 하는 것은 이런 영화를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팬이 만든 예고편 하나 올릴 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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