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열광하고 있었습니다. 1964년 2월 7일 존 에프 케네디 공항, 그 순간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지만 누구라도 유튜브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영상기록을 통해 그 열기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소녀들은 까무러쳤고, 청년들은 괴성을 질렀습니다. 비틀즈가 머무는 호텔에 진입하려는 팬들을 막기 위해 경찰이 투입되었고, 클리프 리차드를 포함해 그 이전의 어느 영국 가수도 미국에서 성공하지 못했다는 오랜 징크스는 기우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들은 실로 그 이후 등장한 모든 아이돌 밴드의 원조였습니다.

 

 

비틀즈가 머무는 호텔에 진입하려는 소녀 팬들

 

 

한 시대를 뒤흔드는 스타가 탄생하면 그 일거수일투족이 모방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그들의 단정한 바가지 머리에 어울리지 않는 거침없는 언변과 반항적인 태도 역시 새로운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기자회견장에서 노래 한 곡 해달라는 부탁에 "돈을 먼저 주셔야"라고 대답했고, 성공하게 된 비결은 "홍보담당자가 있어서"라고 넘어갔으며, 그들의 노래와 패션이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의 메시지가 아니냐는 질문에는 "지저분한 거짓말이네요"라고 받아쳤습니다. 연예인을 '공인'으로 분류하는 기준에서 보자면 지나치게 건방진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틀 후 그들의 첫 미국 공연 [에드 설리번 쇼] 시청률은 60%를 넘겼고 무려 7천 3백만 명이 동시에 그들의 공연을 보았습니다. 이쯤되면 예의범절을 떠나서 하나의 현상이자 시대정신으로 보아야 할 일입니다.

 

워킹 클래스로 태어나 폭력적이기로 이름난 함부르크의 클럽에서 하루에 열 시간씩 공연하며 무명시절을 보낸 그들이 화초처럼 키워진 착한 오빠들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 무렵의 함부르크 거리에서 패싸움 정도는 경찰이 말리지도 않을 정도였고 흥분한 관중들이 무대로 의자를 집어던지는 것이 유행이었다니까 아마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을 겁니다. 절규하다 혼절하는 팬들을 눈앞에 두고서도 편안한 표정으로 아름다운 화성을 넣을 수 있었던 건 이때 다져진 내공 덕분이 아닐까요.

 

 

1965년 2월 9일, 역사적인 에드 설리번 쇼 공연

 

 

그들이 거칠게 열어젖힌 문 뒤로 영국 밴드들이 미국에서 연이어 성공하면서 비틀즈는 영국 음악의 미국 침공, 'British Invasion'을 하나의 관용구로 만들어 버린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Top 10에 한 곡만 올려도 3대가 먹고 산다는 빌보드 싱글차트를 1위부터 5위까지 동시에 석권하며 전설을 시작했고, 66년 그들의 중기 걸작 [리볼버] 앨범이 나오기까지 3년간 모든 공연이 매진되었습니다. 대형 스타디움을 가득 메우던 팬들의 열광적 환호는 그러나, 존 레논의 "우리가 예수보다 인기있다(We're more popular than Jesus)"는 유명한 발언 이후 열광적 증오로 반전되고 말았습니다. 과거의 팬들은 애써 모은 음반과 기념품들을 모아서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행사를 곳곳에서 열었고, 악명높은 KKK단은 공연장에서 그들에게 린치를 가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비틀즈는 결국 모든 공연을 중단하고 다시는 무대에 서지 않겠다고 발표하고 맙니다.

 

 

 

절규하는 팬들

 

 

사실, 여기까지가 전부라면 비틀즈도 그저 흔하게 명멸하는 팝 스타에 불과할 것입니다. 순회 공연을 중단하자 갑자기 시간이 많아진 비틀즈는 스튜디오에서 온갖 음악적 실험을 하며 남는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전까지 팬시한 멜로디와 단순한 리듬의 짤막한 곡들을 만들어온 그들이 본격적으로 '예술'을 시작한 것입니다. [후추 상사의 고독씨 클럽 밴드], [더 비틀즈], [애비 로드], [렛 잇 비]로 이어지는 후기 걸작들이 쏟아졌고 등돌렸던 팬들은 다시 등을 돌려 음반점으로 향했습니다. 정확한 집계가 어려워 공인된 통계는 아니지만, 전세계에서 팔린 비틀즈 앨범은 10억장이 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그 숫자가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몇 년간의 전성기를 보낸 아이돌 스타를 넘어 음악사에 길이 남을 전설이 된 것은 분명, 스튜디오 레코딩을 예술로 승화시킨 이 앨범들 덕분입니다.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이 죽고 밴드는 해체된지 이미 40년이 넘었지만, 비틀즈 앨범 판매량 증가 추세에 또다른 획기적인 모멘트가 생겼습니다. 올해 초, EMI 레코드가 그들의 모든 앨범을 새로이 복각해서 '09년 9월 9일에 발매하겠다고 발표한 것입니다. 처음 이 기획이 발표되었을 때, 세대를 초월한 음악적 영웅이 부재한 이 시대에 복고 마케팅으로 마지막 단물까지 빨아먹겠다는 장삿속이 아니겠냐는 우려가 많았습니다. 같은 날 [The Beatles: Rockband]라는 게임까지 동시 출시한다니까 걱정은 더 컸죠.

 

 

2009년 9월 9일 발매된 스테레오 박스셋

 

 

그리고 약속했던 '09년 9월 9일, 15개의 앨범으로 구성된 스테레오 박스셋과 3개가 빠진 모노 박스셋이 발매되었습니다. 결과는 놀랍습니다. CD보다 MP3를 먼저 찾는 21세기에도 그들의 음반은 5일만에 2백만장이 넘게 팔려나갔고, 지금도 전세계 음반 차트사를 실시간으로 다시 쓰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일 줄은 미처 몰랐던 EMI는 전세계적으로 품절 사태가 벌어지자 부랴부랴 추가 제작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만만치 않은 가격대를 자랑하는 이 박스셋은 그들의 음악을 이미 들어본 사람들에게, 더 나아가 그들의 음반을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대체 이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요?

 

지금처럼 LCD 모니터가 세상을 뒤덮기 전에 CRT 모니터가 브라운관의 우아한 곡선을 자랑하던 시절, 부드러운 화면 위엔 대체로 얇은 먼지층이 덮여 있었고, 그걸 크리넥스로 싹 닦아내면 갑자기 맑은 화면이 새롭게 다가오던 기억이 아마 있으실 겁니다. 컨트라스트와 채도가 떨어져 칙칙해 보이던, 그래서 원래 이런건가 하던 화면이 말끔하게 새로 단장해 눈에 들어오던 기억이요. 처음에 무슨 앨범부터 올려놓을까 고민하다 화이트 앨범을 넣고 'Back in the USSR'이 흘러나올 때,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온몸을 감싸며 살아움직이는 온갖 악기들은 "원래 이래야 했던 것이 제대로 돌아온 것"이라고 선명하게 외쳤고, 과연 EMI의 엔지니어들이 오리지널 녹음을 새 기술로 복원하면서 "이전의 비틀즈는 잊으라"고 했던 것이 허언이 아님을 실감했습니다.

 

 

 

예약판매만으로 품절되어버린 비틀매니아용 모노 박스셋

 

 

비틀즈 팬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기획 앨범을 한 장씩 사도 좋을 것이고, 단번에 박스셋을 사도 좋을 것이며, 사실 먼지쌓인 오래전 음반을 그냥 다시 한 번 꺼내 들으셔도 좋을 것입니다. 그들의 모든 곡은 틀림없이 아름다우니까요. 개인적으로는 비틀즈를 들으며 소름돋게 사랑하던 이십대, 타협을 모르던 또는 경멸하던 시절을 추억할 수 있어 기뻤고, 이번 기회에 다시 비틀즈를 듣게 된 다른 이들도 이 느낌을 공유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행복한 기획일 것입니다. 이렇게 비틀즈는, 그들의 첫 미국 침공이 45년이나 지난 오늘도 그들의 역사를 이어갑니다. 아마도 영원히.

 

 

 

(2009/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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