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도둑들 (Time Bandits, 1981) ☆☆☆

 

작년 연말에 극장에서 접한 테리 길리엄의 최신작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에 그다지 잘 반응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영화를 보는 동안 전 이야기 자체가 길리엄과 맞물려져서 나오는 안쓰러움을 느꼈습니다. 자신이 더욱 더 초라해질지언정 여전히 이야기를 계속 하겠다는 주인공과 많이 불리한 상황들 속에서도 고집스럽게 영화를 완성했던 길리엄의 모습은 많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80-90년대 동안 명성을 날렸다가 21세기에 들어와선 경력이 상대적으로 많이 가라앉은 걸 고려하면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의 처지를 대변하는 게 아닌 가 싶었지요. 그렇다고 그의 능력이 완전 쇠진한 건 아니고 그의 초기작 [시간 도둑들]을 DVD로 뒤늦게야 보면서 제가 깨달은 건 길리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최신작만큼이나 본 영화도 그의 장점과 결점들을 고스란히 다 가지고 있고 단지 성취도에만 차이가 있지요.

 

  어린 주인공 케빈(크레이그 워녹)에겐 책들이 유일한 위안거리입니다. TV와 가전제품들 밖에 모르는 가운데 아들에게 무관심한 부모들은 그가 뭘 말하든 간에 별 상관을 하지 않고, 그러니 온갖 그림들이 벽에 가득 붙어 있고 많은 장난감들이 마루에 널려 있는 자신의 침실에서 그는 더 편안해 하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그는 침실 옷장에서 자신의 상상에서나 존재할 법한 것이 뛰쳐나오는 걸 보게 됩니다. 처음엔 그냥 꿈인가 했지만 바로 다음날 밤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옷장에서 6인조 난쟁이 일당들이 나오고 그에 이어 금세 케빈은 이들과 휩쓸려서 시공간 여행을 하거든요.

 

  이 난쟁이 일당들은 시공간 여행을 통해 한 껀 하려고 하는 도둑들입니다. ‘전지전능한 존재'의 밑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우주 창조 과정에도 관여하기도 한 그들은 최근에 자신들 일에 진저리가 나면서 불만을 품게 되어서 고용주가 만든 시간 지도를 훔친 후 고용주의 추적을 피해 시공간을 나돌아 다니고 있는 중이지요. 지도에서는(그리 자세히 보여 지지 않습니다) 불완전한 시공간의 구멍들의 4차원적 위치가 적혀 있고, 이를 통해 난쟁이 일당들과 케빈은 온갖 장소들을 넘나듭니다. 19세기 초로 가서 유럽 정복을 진행 중인 나폴레옹(이언 홈)를 접하는 가하면 중세 시대로 넘어가서 로빈 훗(존 클리즈)과 그의 일당들과 마주치고 그에 이어 그리스 시대에 가서 아가멤논 왕(숀 코너리)을 만나다가 어느 새 타이타닉 호에도 승선도 하고 나중엔 지도를 손에 넣어서 세상을 자기 걸로 만들려는 악마(데이빗 워너)와도 대면하지요.

 

  이렇게 한 배경에서 다른 배경으로 연달아 넘어가는 동안 테리 길리엄은 풍성한 볼거리들을 연달아 가득 펼쳐놓습니다. 본 영화가 첫 작품으로 속하는 삼부작의 다른 두 영화들인 [브라질]과 [바론의 대모험]에 비해 규모는 비교적 작은 편이지만, 훌륭한 의상들과 세트들 그리고 거기에 곁들여진 좋은 구식 특수효과가 만들어내는 순간들은 지금 봐도 근사한 시각적 성찬입니다. 이 모든 게 한 어린애의 상상일 수도 있는 가능성을 대변하듯이 카메라 시선은 아이의 시선만큼이나 낮은 가운데 우거진 중세 시대 숲, 고대 시대의 궁전, 어두컴컴하고 웅대한 요새와 같은 일련의 풍경은 애들의 순수한 상상력에서 나올 법하게 꾸며졌습니다.

 

영화의 주목적은 애들을 즐겁게 하는 거지만 이야기 안엔 좋은 볼거리뿐만 아니라 성인관객들도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요소들도 여럿이 있습니다. 몬티 파이썬 일당들 중 한 명이었던 길리엄은 애들 이야기 속에 슬쩍 어른들 농담들을 집어넣었고 그리하여 우린 악마가 컴퓨터와 같은 현대 문명기술을 들먹이면서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얘기하는 걸 보게 되는 가하면 ‘전지전능한 존재’가 참으로 전지전능할지언정 모범 고용주와 거리는 멀다는 걸 알게 되지요(용역 깡패 만들어서 설설 기게 만드는 사장님쯤으로 봐도 됩니다). 이야기 안에서 기술 의존이 야기할 수 있는 상상력의 빈곤함에 대한 경고가 있고 우리 주위를 둘러다 보면 이는 그리 틀리지 않는 말입니다. [바론의 대모험]에서처럼, 본 영화도 마지막에 상상력을 가로막으려는 장벽을 제거하는데 여기선 더 얄궂은 방식으로 합니다.

 

이처럼 영화엔 들어있는 게 많지만 그게 바로 영화의 결점이기도 하고 이는 그 후에 나온 길리엄의 다른 좋은 작품들의 발목 잡는 요소가 되어 왔습니다. 상상력이 끊임없이 그리고 거침없이 발휘되는 걸 즐기다 보면 정작 이를 통제해야 하는 이야기가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겁니다. 이것저것 보여주느라 영화가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동안 이야기는 그 많은 것들을 지탱할 수 없어서 덜컹거려가고 반복적인 느낌도 강해지면서 인내심이 떨어져 갑니다. 이야기의 절정은 어린 애들 방바닥의 혼란스러움에 가깝고 이를 나중에 정리를 하려고 하지만 그게 그리 썩 잘 맺어진 건 아니지요.

 

  아역배우 크레이그 워녹과 다른 6명의 난쟁이 배우들이 영화의 중심을 잘 유지하는 가운데 그들 주위엔 그보다 더 익숙한 배우들이 등장하곤 합니다. 존 클리즈처럼 몬티 파이썬 멤버인 마이클 팰린이 셸리 듀발과 함께 웃기게 등장하는가 하면, 나중에 [브라질]에 조연으로 나오는 이언 홈, 피터 본, 짐 브로드벤트, 캐서린 헬몬드(그 죽 잡아당겨진 얼굴의 주인공이십니다)를 본 영화에서 접할 수 있지요. 숀 코너리는 우연히 접한 각본을 읽고 출연할 의향을 보였다고 하는데 각본상의 캐릭터 묘사는 ‘someone that looks exactly like Sean Connery, or an actor of equal but cheaper stature’였다고 합니다. 데이빗 워너는 우스꽝스럽게 과장된 악역을 즐기고 있는 티가 확연하고 나중에 ‘전지전능한 존재’로 나오는 랠프 리차드슨은 느긋하지만 가장 재미있는 코미디 연기를 합니다.

 

여러 결점들에 불만이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시간 도둑들]은 좋은 판타지 영화입니다. 창의적인 상상력뿐만 아니라 이를 가능한 한 더 많이 발휘하려고 하는 열의가 영화엔 들어 있고, 이로 인해 너무 잡다하게 채워 넣은 탓에 결과물은 삐걱거리지만 그럼에도 매력적인 볼거리입니다. 이 영화 이후 길리엄의 영화들에서 재등장할 요소들을 여기저기서 찾는 재미도 있는가 하면 길리엄이 그 때나 지금이나 그의 방식을 고집스럽게 지키고 있다는 걸 볼 수 있지요. 그게 좋은 일인지 전 확신이 잘 안 가지만 적어도 그 고집만큼은 인정할 만합니다.

 

 

P.S.

국내 DVD 출시되었을 때 비디오 출시 때 그 괴상한 제목인 [4차원의 난쟁이 이티] 대신에 [시간 도둑들]로 제목이 바뀌어 나왔지요. 한데 아직도 [브라질]은 [여인의 음모]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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