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쉬   The Danish Girl


영국-독일-미국, 2015.          


A Working Title Films/Artemis Productions/Pretty Pictures/ReVision Pictures Co-Production. Distributed by Focus Pictures. 화면비 1.85:1, Red Epic Dragon. Dolby Digital. 2시간.
Director: Tom Hooper
Screenplay: Lucinda Coxon
Based on a novel by David Ebershoff
Cinematography: Danny Cohen
Production Design: Eve Stewart
Art Direction: Grant Armstrong, Tom Weaving
Costume Design: Paco Delgado
Music: Alexandre Desplat


CAST: Alicia Vikander (거르다 붸게너), Ed Redmayne (아이나르 붸게너/릴리 엘베), Matthias Schoenenaerts (한스), Ben Whishaw (헨릭), Sebastian Koch (바르네크로스 박사), Amber Heard (울라), Adrian Schiller (라스무센), Sonya Cullingford (스트립쇼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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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껏 나의 기억속에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성전환자 (트랜스젠더) 실존인물에 관한 연기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여사가 TV 영화 [세컨드 서브] 에서 테니스 선수 르네 리처즈 역할을 맡아서 보여준 것이다. 리처즈는 원래 남성이었다가 성전환수술을 받았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여성 테니스 선수로 출전하는 것을 금지당했다가, 1977년에 대법원의 판결로 가능케 된 트랜스젠더사상 개척자적인 인물 중 하나다. 영화는 아마도 모범적인 TV 전기 영화였을 듯 하지만, 그래도 레드그레이브 여사가 완전히 여성이 된 다음에 테니스 용 스커트와 브라우스를 입고 담배를 뻑뻑 피우면서 전화를 받아들고 갑자기 걸걸한 목소리로, “어~ 아빠다 아빠! ” 하고 아저씨 대사를 치시는 장면이 아직까지도 인상에 남아있다. 그런데 검색을 해보니 이 TV 영화가 나온것이 이미 1986년이다. “트랜스젠더의 역사” 라는 관점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성전환수술을 한 사람인 (중 하나라고 여겨지는... 왜냐하면 기록이 백프로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나르 붸게너 (여성이 된 다음에는 릴리 엘베로 스스로를 일컬었다) 의 일대기를 영화로 만들기에는 2015년이란 너무 늦어버린 것 아닌가 하는 만시지탄의 감을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다. 그런 반면에, 십오년전에 시작된 기획이 이렇게 오랜 시일을 거쳐서야 겨우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한국에도 하리수가 연기 활동을 대놓고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고 해서, 트랜스젠더 이슈를 “정치적” 또는 “구경거리적” 색안경을 끼고 보아야만 하는 뭇사람들의 기본적 성향이 잦아든 것은 아닐 것이라고 짐작된다.


애초에 이 기획은 라세 할스트룀 감독이 스웨덴에서 로케이션 중심의 촬영을 하기로 되어있었으며 샬리즈 테론, 그위네스 팔트로, 마리옹 코틸랴르, 레이철 와이스 등의 쟁쟁한 이름들이 거르다 역의 물망에 올랐었던 바 있는데, 막상 아이나르/릴리 역을 맡을 배우를 구하는데는 난항을 거듭했고, 또 자본금을 유치하기도 그렇게 순조롭지 못했던 듯 하다 (자국 내에서 일정 부분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조건을 감수하고 독일 자본까지 합세를 한 것을 보면). 결국 2014년이 되어서 영국의 워킹 타이틀이 프로덕션을 전담하고 [킹즈 스피치] 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톰 후퍼가 에드 레드메인을 에이나르/릴리로 캐스팅하면서야 비로소 제작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사실 워킹 타이틀이 제작 주도권을 쥐게 된 것에 대해 의구심을 지닐 관객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는 공적으로는 대놓고 말 못할 우여곡절이 많았었을 역사상의 이야기를 지나치게 로맨틱한 러브 스토리로 예쁘게 포장해서 내놓는 거 아닌가하는 불안도 불안이려니와, 정지적인 공정함의 압박 (여기서 정치적으로 공정함이란 결코 헤테로 “주류” 의 시점에서 바라본 시각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게이 레스비언 코뮤니티에서도 마찬가지로 “대표성” 과 “일반화” 에 관한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영화의 명성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에 굴복하여 적당한 타협의 선택으로 이지러진 한편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최소한 내 (나름대로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친구와 지인들을 각각 주위에 둘 이상씩 알고 있는 헤테로 아시아계 중년 남성) 입장에서 결과를 놓고 보자면, [대니쉬 걸] 은 일반적인 수준의 관객이 “로맨틱 러브 스토리” 라는 개념을 지니고 관람하러 갈 만한 한편의 수위를 거침없이 넘어가지는 않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이건 성인용 미국 아트 하우스 영화 기준으로 하는 얘기고... 에드 레드메인이 발가벗은 채 자신의 남성 성기를 다리 가랑이 사이에 감추고 거울 앞에서 여자 옷을 몸에 대보는 신 등이 한국에서는 검열을 피할 수 있을런지 그건 모르겠다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냥 물렁하게 보기 편한 영화라고 폄하할 수는 없다. [대니쉬 걸] 에는 보기에 따라서는 의외로 느껴질 정도로 강한 성적 긴장감이 존재하며, 그러한 긴장감을 생성하는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는, 이 한편이 남편인 “아이나르” 를 “릴리” 라는 여성으로 거듭 태어나게 만드는 결정적인 창조자임과 동시에 지원자인 거르다의 입장에서 시종일관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확증이 있는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 강렬한 “여성중심적” 인 시각이 (각본가로보다는 극작가로 잘 알려진) 루신다 콕슨의 각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추측한다. [대니쉬 걸] 은 화가 부부인 아이나르와 거르다의 행복한 부부 생활의 묘사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이미 이 도입부에서 영화는 아이나르의 내면적 세계가 아닌, “(남자를 바라보는) 여성의 시선 (Female gaze-- 이 표현은 로라 멀비 등의 영화연구가들이 구사한 “남성의 시선” 이라는 개념과 댓구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을 거침없이 투사하는 “예술가” 인 거르다의 남성 중심의 사회 속에서의 좌절 섞인 투쟁에 관심을 기울인다.


풍경화가 아이나르가 그린 그림들을 너무나 아름다운 (디지탈) 촬영으로 재현한 나무와 늪지대의 경치들은 오프닝 샷에서 무심히 지나가듯이 보여주는 후퍼 감독과 콕슨 각본가 팀은 아이나르/릴리의 (그녀가 직접 심경을 자세하게 기술한 일기장이 남아있으며, 원작자 데이빗 에버스호프의 소설이 이 일기장을 주된 자료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소리” 를 수면 밑에 가라앉혀 둔다. 이 한편에는 우리가 하나의 주류적인 선택지로 받아들일 수 있을만한, “아이나르” 와 “릴리” 를 별개의 개체로 취급하는 영화적 기교-- 남성인 아이나르 속에서 여성의 목소리로 발화하는 “여성” 인 릴리의 보이스오버 등-- 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우리는 이러한 작품에서 이때까지 볼 수 없었던 두 가지의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는데, 하나는 “아이나르” 가 “릴리” 로 바뀌면서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남편이 다른 인격을 가진 다른 인간으로 “변신” 하는 과정을 상실의 고통과 함께 지켜보아야 하는 거르다의 모습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비록 “릴리” 자신이 아이나르안에 항상 존재해왔던 실체일지라도, 그 릴리를 구체적인 사회적 실존으로 끌어내는 계기는 거르다의 예술적 재능에 있었다, 라는 설정이다. 즉 릴리는 거르다가 아이나르를 모델 (처음에는 스타킹을 신은 다리를 그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림의 원래 모델이었던 발레댄서 울라가 백합꽃을 안고 나타나서, 스타킹을 신은 그를 마주치자 농담으로 부른 이름이 “릴리” 였다) 로 삼고 초상화를 그림으로서 비로소 사회적인 실체를 갖추기 시작한다. 흥미있는 것은 거르다가 남편과 짙은 로맨틱한 전위행위를 즐기다가 갑자기 아이나르가 셔츠와 바지 밑에 여성용 속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장면이다. 이 신에서 거르다는 남편을 거부하기는 커녕 더 성적으로 흥분하여 여자 속옷을 입은 그를 침대로 끌어들인다.

이러한 거르다의 남성과 여성의 분기점을 넘나드는 정체성에 기초를 두고, 두 화가 주인공들의 그림들을 유기적으로 캐릭터들과 그들의 주위 환경에 배치해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전반부에서, 릴리가 바야흐로 에이나르의 인격을 잠식했다는 사실을 거르다가 받아들여야 하는 릴리, 거르다 그리고 한스의 대화 장면까지가 [대니쉬 걸]의 뛰어난 부분이다. 특히 후자의 시퀜스에서는 어린 시절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단서를 제공했던 “친구” 한스에 대한 에이나르/릴리의 회한과 희열이 섞인 미묘한 감정, 그리고 그의 변화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르다의 좌절감과 여전히 남편을 감정적인 상처로부터 보호하고 싶은 사랑이 혼재하는 심정이, 제3자인 한스를 가운데 놓고 종횡으로 교차하는 멋진 연기의 한마당을 관람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후반부로 넘어가서 성전환 수술을 받기 위한 준비를 하는 부분부터 [대니쉬 걸] 은 위에서 말한 TV 영화식의 “인간승리” 적 휴먼 드라마의 공식에 접근하게 되고, 전반부의 유니크하고도 가슴 떨리게 하는 성적 긴장감은 흐트러져버린다. 한스와 거르다의 관계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망서리는 것 같은 부분들도, 전반부에 세 캐릭터들이 구성했던 긴장을 동반하면서도 애정과 신의가 넘치는 “삼각관계” 의 참신함에 비하면 진부하게 느껴진다. 주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충분히 절제되고 캐릭터들에 대한 존중심을 잃지 않는 결말에도 불구하고 이 한편은 일정한 수준의 우수함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연기에 대해서 말하자면, 많은 이들이 에드 레드메인의 그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긴 하다. 레드메인의 연기의 훌륭함에 대해서는,  그가 남자임이 “분명” 한 아이나르를 연기할 때에도 마치 그가 “남장여성” 인 것처럼 착시현상을 일으키게 만드는데, 신기하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레드메인의 연기가 정말 빛나는 부위는 짙은 립스틱을 바르고 주근깨를 채 가리지 못하는 화장 밑에서 수줍게 살 떨리는 미소를 짓는 릴리의 클로스업과 같은 개소가 아니라, 파티에 차마 끼어들지 못하고 구석에 앉아있는 “목이 길고 세상 물정 모르게 착해보이는 시골 처녀” 릴리를 가식 없이 보여주는 미디엄 숏의 장면들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대니쉬 걸] 의 서사를 주도하는 실질적 주인공은 거르다이고, [엑스 마키나] 등에서 전형적인 팜므 파탈의 형상화를 피로한 알리시아 비칸더가 몸을 사르는 열연을 보여준다. 비칸더는 너무나 초자연적으로 (그야말로 “여성성” 을 일반화한 안드로이드역에 적합할 정도로) 아름답기 때문에 특정 관객들의 편견어린 시선에 노출되어야 할 운명을 짊어진 여배우지만, 이 한편에서는 잉그리드 버그먼의 초기 작품의 배역들을 연상시키는, “남성성” 을 내포한 캐릭터를 맡아서 그런지 평소보다 체감온도가 훨씬 높은, 열정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미카엘 로스캄 감독의 [불헤드] 에 출연했을 때부터 주목받았던 벨기에인 스타 마티아스 스쿠나어르츠 (“쇼에나어르츠”가 맞는 발음이면 지적해주시면 감사) 는 상대적으로 인상이 약하지만, 온갖 정서적 문제를 뒤집어쓴 캐릭터들 ([러스트 앤 본], [더 드롭] 등등) 만 연기하다가 모처럼 이렇게 남에 대한 배려심으로 똘똘 뭉친 디슨트한 남자역을 맡게 되어서 팬으로써 기분이 좋다.

촬영을 담당한 대니 코엔과 프로덕션 디자이너 이브 스튜어트 이하 프로덕션 크루는 톰 후퍼 감독의 [레 미제라블]을 담당했던 팀이니 그 실력의 수준은 미루어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영화를 보기 전에 예상하기 쉬울 20년대식 아트 데코 스타일의 화려함은 비교적 억제되어 있고, 로케이션 중심으로 보다 수수하고 자연스러운 풍광이 두드러지는 만듦새를 하고 있다. 단지, 실존하는 거르다가 그린 그림들에 묘사된 릴리는 여장한 레드메인과 별로 닮지 않았기 때문에, 미술 스탭이 레드메인을 실제로 모델로 한 “붸게너 풍” 의 릴리 그림들을 모사하는 등의 고생을 해야 했다고 한다. 영화 안에서 쓰여진 그림들은 위에서 지적했듯이 그 드라마적 기복 및 캐릭터들의 심리 변화와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그림들을 관찰하는 재미도 상당히 있다.


아름답고, 착하고, 감동적이며, 두 주연-- 레드메인과 비칸더-- 의 뛰어난 연기를 감상할 수 있는 좋은 영화지만 위대함을 넘보거나 영화적으로 참신한 시도를 하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여전히, 그리고 특히 한국 관객분들에게는 강력하게 추천드린다. 개인적으로는, 레드메인 팬들만 몰려가서 보시지 마시고^ ^ 남자처럼 툭툭 던지는 말투가 매력적인 비칸더양에게도 여성 팬들이 많이 생기셨으면 좋겠다.

사족 1: 괜시리 한국말 자막이 걱정된다. 아이나르일때는 거르다에게 반말을 찍찍 하다가 릴리일때는 거르다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존댓말을 하게 되는 것은 설마 아니겠지.

사족 2: 트랜스젠더 캐릭터를 다루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게이와 레즈비언 양 코뮤니티에서 기분 나쁠 수 있는 시비거리를 찾을 수 있는 한편이기도 하다. 게이 입장에서는 벤 위쇼가 연기한 캐릭터를 문제삼을 수 있겠고, 레즈비언 입장에서는 거르다가 여성들끼리 거침없이 나체로 성행위를 즐기는 에로티카를 많이 남겼고 기타 정황상으로도 레즈비언 (또는 바이섹슈얼) 이었다는 것이 확실한데, 그 측면은 영화에서는 희석되어버렸다는 불만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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