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저씨

2010.08.20 04:22

milk & Honey 조회 수:4685

 

 

 

 

파스텔톤 샤바라바랑 동화들이 실제로는 잔혹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설화가 형성되던 시기의 중세는 오랜 기간 동안 이어진 전쟁과 질병, 자아개념의 부재 등으로 상당히 잔인한 시기였지요. 이야기는 그런 시대를 반영하는 동시에 향유자들에게 세상의 야만을 경계시키기도 했습니다. 주인공이 맞아들이는 해피엔딩은 마약과도 같은 것이지요. 독자는 그를 통해 현실을 잊거나 순응해나갈 힘을 얻어갑니다. 여기엔 그 따스함을 유지할 장작이 필요한데, 그것은 환상이나 영웅의 출현입니다.

 

[아저씨]는 그런 영웅의 이야기입니다. 좀더 정확하게는 반영웅에 가깝지요. 국가가 양성한, 완벽한 인간병기였던 '아저씨' 차태식은 정작 자신이 지켜내야 할 중요한 것을 지켜내지 못합니다. 그 업으로 뒤틀어지고 구겨진 삶을 이어나가구요. ‘당장’만이 존재하는, 순간순간이 낭떠러지와도 같은 삶. 단절된 시간을 이어주는 유일한 접착제라곤 그가 지켜내지 못한 대상과의 추억뿐입니다. 깊고 어두운 늪과 같은 그의 생활에 그나마 작은 파문을 일으키는 것은 ‘옆집 아이’ 소미입니다. 그 나이에 당연히 누려야 할 양육과 사랑이 부족한 이 아이는 ‘전당포 귀신’ 아저씨의 쓸쓸함과 고단함에 공명하며 둘의 우정을 주도해 나갑니다. 모든 어린이들은 자고로 영특한 개체들이지요.

 

주인공 ‘아저씨’의 반영웅적 성격은 이미 클리셰로 굳어져 있는 것입니다. 일본만화 몇몇이 생각나는군요. [바람의 검심]의 켄신, [무한의 주인]의 만지, [베르세르크]의 가츠 등 모두 의당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해 고통받는 인물들입니다. 그렇다면 [아저씨]의 이야기가 어떻게 풀어진다는 것은 누구나 예측 가능한 일이 되어버리지요. 속죄할 수 있는, 새로이 지켜야 하는 대상이 나타나고 그 ‘지켜냄’으로 인해 구원받을 거라는. 물론 이 ‘구원’은 주인공 영웅이 현실에서의 삶을 이어 나가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구분되는 건 아닙니다. 일례로 영생이란 굴레로 인해 매번 이곳 저곳 썰리는 만지에게, 참된 구원은 죽음을 통한 안식이 틀림없으니까요.

 

[아저씨]의 매력은 강렬한 대비와 일관성에 있습니다. 악은 동정의 여지없이, 구구절절한 사연없이 순수하게 악하며, 그 악의 각다귀들이 뜯어먹는 영혼들은 아무런 무기도 보호막도 없는 약하고 선한 존재들입니다. 악은 나이트클럽, 대리석 처발처발 터키탕, 돌체 앤 가바나의 밝고 빛나는 세상이며, 선은 누추한 뒷골목, 모자 달린 잠바, 싸구려 손톱 에나멜의 어둡고 음습한 세상입니다. 악은 그 탐욕을 반성할 줄 모르며 선은 앞날의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자칫 뻔하고 촌스러울 수 있는 이러한 보색대비에도 불구, 상영시간을 숨가쁘게 유지해나간 것은 영화가 시종일관 지켜준 일관성에 그 공을 돌려야 할 겁니다. 영화의 높고 낮은 흐름 적재적소에 디테일들이 잘 배치가 되었다는 이야기지요. 내내 꿀꿀했던 주인공의 표정이나 한쪽 눈을 가린 헤어스타일이 언제 어떻게 변하는지, 소미의 소품들이 만들어내는 알레고리와 리듬감 등을 말할 수 있겠네요. 서사의 대조를 받쳐내는 일관성, 매력적인 주인공의 성장과 구원이 주는 카타르시스, 붉게 튀고 흐르는 피의 시각적 자극, 꽈드득 챙챙 푸슉하는 각종 청각적 자극, 이 모든 것들이 욕심없이 자기의 자리를 잘 지키고 있다는 것이 [아저씨]의 가장 큰 힘입니다. 다만 주인공의 과거를 보여주는 장면이나 마지막 장면에서 수족수축의 요소들을 절제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글고 다들 너무 한 폼하더라능-_-)

 

하지만 영화를 보고나서 가슴이 아린 것은 그런 아쉬움 때문이 아닙니다. 머리가 굵어진 우리들은 그 연약한 아이들에게 특작부대 출신의 귀신같은 영웅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후한 사랑을 받지 못했으면서도 그저 낳아준 어미가 기다리는 집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보듬자마자 영원히 버림받는 아이들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는 우리들은 지켜낼 힘도 그 방법도 모르구요. 설사 안다 한들 그 ‘지킴’이 조금이라도 우리의 가정과 일상을 파괴한다면 어마 뜨거라 손을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아저씨]는 도시의 어둡고 슬픈 동화입니다.

 

 

 

 

* 그 좋은 차들이 왜 하나같이 에어백이 안 터지는지.

* 원빈 뭡니까. 면도날로 아무렇게나 퍽퍽 자르면 무심한듯 쉬크한 섀기 컷이, 면도기로 왱왱 밀면 산뜻한 배컴 스타일이 완성되고 말예요...

* 보고나면 영화관의 모든 남자들이 문어 오징어 꼴뚜기로 보인다던데 전 오히려 평범하게 살아가고 계실 확률이 높은 상영관 안의 남자분들은 복되단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서 ‘평범한’의 비교대상은 절대미모 원빈이 아니라 영화 속 아저씨 차태식의 고생스런 인생입니다.

* '아저씨'란 제목 좋지 않았나요. 전 좋았습니다. 그의 적들도 '이봐 아저씨' 하지만 무엇보다 소미의 관점에서 '아저씨'지요. 근데 한편으론 이것도 한 폼 하긴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느낌? : A-아니, 여기서 이럴 실력이 아닌데 다..당신 정체가 뭐요? B-....그냥 지나가던 아저씨라고 해두죠...(자판 치는 손가락 곱아들고..-_-)

* 정을 준 어린 것들은 그렇게 가슴이 아린 벱이지여. 미남 조폭 아저씨 보십쎠.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회원 리뷰엔 사진이 필요합니다. [32] DJUNA 2010.06.28 82399
701 [영화] 이끼(2010) - 스포일러 [2] [1] 개소리월월 2010.08.05 4993
700 [소설] 술래의 발소리 - 미치오 슈스케 [2] 보쿠리코 2010.08.05 4215
699 [영화] <AK 100>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 悪い奴ほどよく眠る [4] Q 2010.08.06 5644
698 [영화] 잔인한 영화 [악마를 보았다] [3] taijae 2010.08.12 7026
697 [영화] 악마를 보았다(2010), 착취는 해냈지만 [3] [1] oldies 2010.08.12 9233
696 [소설] 퇴마록 이우혁의 신작 『바이퍼케이션』 [3] [1] 날개 2010.08.13 7702
695 [영화] 아저씨 (The Man from Nowhere, 2010) [5] [22] 푸른새벽 2010.08.18 11459
» [영화] 아저씨 [1] [1] milk & Honey 2010.08.20 4685
693 [영화] 땅의 여자 [1] 범인은미세스문 2010.08.23 3958
692 [책]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 서영은, 산티아고 순례기 [12] [206] 어둠의속 2010.08.24 10394
691 [소설]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 - 미쓰다 신조 [2] [1] 보쿠리코 2010.08.27 5571
690 [영화] MTV 액션의 한계, [해결사] [1] taijae 2010.09.01 3627
689 [TV] Goodieyoung의 주말 예능 리뷰 - MBC / 8월 마지막 주 8/28 8/29 [2] [1] Goodieyoung 2010.09.02 3820
688 [영화] 악마를 보았다 [1] r2d2 2010.09.03 4673
687 [영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Bedeviled [5] [1] Q 2010.09.05 8383
686 [영화] '로맨틱 코미디'를 만드는 방법, [시라노;연애조작단] [1] taijae 2010.09.05 4598
685 [소설] 얼굴에 흩날리는 비 - 기리노 나쓰오 [3] [1] 보쿠리코 2010.09.05 5137
684 [영화] 아홉개의 꼬리가 달린 고양이 The Cat O'Nine Tails <유로호러-지알로 콜렉션> [4] [1] Q 2010.09.08 6506
683 [영화] 사랑스러운 김태희, [그랑프리] [1] taijae 2010.09.09 4573
682 [영화] 마루 밑 아리에티 [8] [20] milk & Honey 2010.09.10 12591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