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몽상가들 (2003)

2014.03.07 21:07

CsOAEA 조회 수:10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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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류도 많고 스포도 많습니다.

 

 

얼마 전 재개봉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The Dreamers)”을 보고 왔다. “장기하의 대단한 라디오”에서 어떤 평론가가 ‘그 어느 것에도 구애 받지 않는 자유롭고 건강한 청춘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해서 관심이 간 터였다. 프랑스 68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였는데, 알아 보니 2003년에 처음 개봉했다고 한다. 내가 대학 새내기 때 아무 것도 모르고 멍 때리고 있던 시절 이런 영화가 나왔었다니, 그 젊었던 시절에 이 영화를 본방사수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68혁명 하면 언제 들어봤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마 제일 마지막으로 들어봤던 게 2008년 미국산 쇠고기 반대 운동이 68혁명과 유사하다는 언론 보도였던 것 같다. 입대 지원을 했다가 몸이 안 좋아 입대 연기가 되고 집에서 쉬던 때, 나도 그 현장에 있었다. 이런걸 군인복무규율 위반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68혁명, 잘 모르겠어서 좀 찾아보니 아래와 같은 꼭지로 정리되었다.

  
① 68년 5월 프랑스 전역을 뒤덮은 대규모 소요(공장/학교 점거 등)

②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성장한 젊은 세대가 주도
③ 노동당이 주도했던 기존 소요완 달리, 지휘 주체가 불분명

④ 구좌파(?)와 대비되는 신좌파(?)가 탄생, 확장되는 계기
⑤ 결국 실패. But 지금까지도 프랑스인들의 인식에 영향을 주고 있음(똘레랑스, 약자배려 등)

  
이중 내가 “몽상가들”을 보며 가장 주목하게 된 것은 ③번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기에 이 영화는 신좌파적 가치들을 확장시키면서, 68혁명의 본질은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할 개념. 구좌파, 신좌파가 무엇인가? 잘 몰라서 찾아봤다.

 

• 구좌파 :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노동자에게 주목. 프롤레타리아트(노동자 계급) 해방을 위한 노동운동을 전개함
• 신좌파 : 구좌파적 지배-피지배 관계를 제 분야로 확장시킴. 예컨대 남성-여성, 정상인-장애인, 이성애-동성애 등. 노동자 뿐만 아니라 억압받는 모든 것들의 해방을 도모함
 
“몽상가들”은 지배-피지배, 주류-비주류라는 대립관계를 마치 브레인 스토밍하듯 나열한다는 측면에서 신좌파적 가치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으며, 그것들을 단순 나열하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립항들간의 황홀한 공존을 표현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일단 감독이 대립관계를 어떻게 나열하는지부터 살펴봐야 할 것이다.

 

 
[대립관계의 나열들]
 


1. 시네마테크를 철거하려는 자들과 시네마테크를 지키려는 자들
 

68년 당시 프랑스에서 시네마테크는 사회에 불만 많은 양아치들이 반정부적인 작당을 하는 곳으로 인식되었나보다. 그래서 드골 정부는 시네마테크 원장이었던 링글루아를 해임하고 시네마테크를 폐쇄했다. 이런 양상은 마치 군사정권 시절에 문예모임을 간첩 빨갱이 집단으로 간주하고 소탕했던 모습과 상당히 비슷해 보이는데, 아무튼 드골 정부가 시네마테크를 하려고 하자, 학자들, 학생들, 예술가들이 대대적으로 반발하여 링글루아를 복직시킨다. 이게 68혁명 바로 전에 있었던 사건인데 이때의 승리감이 68혁명의 원동력 중 하나였다는 평가도 있다. 영화에서는 시네마테크 폐쇄 반대 운동이 미국인 메튜와 쌍둥이 프랑스인 테오/이자벨과 만나는 계기가 된다.
  

 

2. 부모와 자식(어른과 아동)

  

테오는 메튜를 초대한 저녁식사에서 당시 소요에 대한 입장차 때문에 아버지(시인)와 논쟁을 벌인다. 아버지는 당시 소요 사태를 망나니 같은 놈들의 사회 파괴행위라고 말하는 반면, 테오는 예술과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 당연한 것이라 항변한다. 이 논쟁에서 “시는 탄원서이고 탄원서는 시이다”라는 아버지가 쓴 시가 나오는데, 이런 시를 쓴 사람이 시위에 반대한다니 좀 아이러니컬하지 않은가? 이 문구는 작품의 주제의식을 함축하고 있는데 쪼개서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다.

 
- 시=탄원서일 수 있는가? : 신좌파적 관점에서는 그럴 수 있다. 왜냐하면 탄원서가 부당한 권력에 항거하는 수단인 것처럼, 시를 쓰는 예술행위 또한 예술적 가치를 무시하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시인이 현실 집회를 반대하는 건 표리부동아닌가? : 표리부동이다. 과거에 집회 깨나 나갔던 사람들도 자기 자식들은 별 탈 없이 살아주었으면 하는 게 부모 마음일테고, 내 주변에도 이런 사례들은 많다. 그런데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건 이러한 단순한 현실을 넘어서 작가-작품의 관계도 역시 대립관계라는 것이다.

 
테오와 매일 밤 발가벗고 자고 이자벨도, 그런 짓 하는 걸 부모님한테 들키면 어떻게 할거냐고 물었을 때 “자살하겠다”라고 한다. 즉 부모는 감시, 통제하며 벌을 주는 자이고 자식은 부모가 싫어하는 짓을 들키지 않고 즐기는 자인 것이다.
 


3. 작가와 작품
 
작품은 작가의 산출물이며, 작가에 의해 모양지어지는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시는 곧 타원서이며, 탄원서는 곧 시이다”라는 인용구처럼, 작품은 작가를 배반하기도 하며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기도 한다.
  

 

4. 집과 텐트

이자벨이 집에 텐트를 쳐주자 테오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좋아한다. 집이 부모의 공간이자 기성 세대, 억압과 금지를 상징한다면, 그 안에 있는 텐트는 어린 아이의 공간, 혁명 세대, 방종적 자유를 상징한다. 그 안에서 근친상간과 질펀한 쓰리썸이 벌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5. 개인과 비개인
 
메튜는 테오/이자벨과 같이 놀지만 근본적으로 혼자다. 반면 테오와 이자벨은 서로를 샴쌍둥이로 생각하며 플라토닉 사랑을 나눈다고 한다. 서로 연결된 존재인 테오와 이자벨의 관계는 근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는 메튜와 같은 근대적 개인에게는 용납하기 어려운 짐승, 인간 이하의 것, 미친놈들의 짓거리인 것이다.

 


6. 섹스와 플라토닉 사랑
 
메튜-테오/이자벨의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섹스와 정신적 사랑의 대립이 파생된다. 테오와 이자벨은 맨날 발가벗고 놀긴 하지만, 실제로 이자벨과 처음 섹스한 건 메튜다. 메튜는 자신과 이자벨의 관계가 테오/이자벨의 정신적 연결 관계보다 우월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 메튜-이자벨은 섹스도 하고 데이트도 하지만 어딘가 어색해보인다. 하지만 테오/이자벨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하나인 것 같다.

 

 
7. 일반인과 장애인
 
나는 처음에 일란성 쌍둥이를 왜 테오가 자꾸 샴쌍둥이라고 부르는지 의아했다. 엄밀하게 말해서 샴쌍둥이는 아닌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대사로부터 일반인과 장애인의 대립구도가 나온다.

 


8. 영화관 맨 뒤에 앉는 것과 맨 앞에 앉는 것
 
메튜는 영화 초반에는 영사기의 빛이 사라지기 전에 느끼고 싶어서 영화관 맨 앞줄에 앉는 영화광이었으나, 이자벨과 데이트를 하면서는 영화관에서 애정행각을 벌이고 싶어서인지 맨 뒤에 앉는다. 요새는 영화관람이 필수 데이트 코스가 되면서 영화관을 연애의 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영화가 좋아서 혼자 영화관을 찾는 사람을 ‘친구 없는 사람’으로 대놓고 찌질이 취급하기도 하고, 그런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혼자 영화보러 온 사람들은 제일 인기없는 맨 앞줄로 밀려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게 맞을까? 영화산업은 영화관을 연애 장소로 ‘대실’하며 연명하고 있지만, 영화관의 본질은 그것이 아닐 수도 있다.

 


9. 공권력과 시위대
 

스토리가 진행되는 내내 도시에서는 공권력과 시위대가 맞부딛힌다.
 

 

10. 현실과 현실도피(집밖과 집안)
 

밖에서는 시민들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데, 정작 시위대를 옹호하던 테오/이자벨은 집안에서 영화장면이나 따라한다. 집밖의 혁명운동과 집안에서의 퇴폐적인 현실도피가 대비를 이루는 것이다. 이에 대해 메튜는 테오/이자벨이 “혁명 혁명” 말만 하지 실천은 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집안에서의 행위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일까? 테오/이자벨의 현실도피(몽상) 행위도 일종의 혁명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테오/이자벨의 근친상간, 쓰리썸, 게이 섹스(상영본에서는 잘림)는 당시의 지배적인 도덕률에 도전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는 주류, 권위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집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민혁명과 형식적으로 동일하다.

 
이 시점에서 오시이 마모루의 “야수들의 밤”의 한 구절을 살펴보자.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일본 69년 전공투 세대인데 이런 주옥같은 대사를 친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대충.. ‘집안에서 부모에게 투쟁하는 것은 노동운동, 사회운동과 별 반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집안에서 부모는 기존 지배질서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선배들은 우리가 투쟁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비난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집안에서 미시적인 투쟁 중이다.”
 

 

영화를 보고 영화를 따라하는 것, 이 또한 혁명적일 수 있다. 메튜가 “영화는 침실 훔쳐보기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범죄행위”라고 말하는 것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 영화에 삽입된 수많은 누벨바그 영화와 헐리우드 클래식은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는 저항적 예술작품으로 평가받았다. 누벨바그는 시네마테크에서 헐리우드 영화 좀 본 세대들(트뤼포, 고다르 등)이 50년대 프랑스 방송업계를 지배하던 저질 신파극 수준의 영상문화를 비판하며 만들어낸 흐름이라는 점에서, 헐리우드 클래식은 그들이 당시 주류 영화계에 저항하기 위한 무기였던 셈이다.

 
집밖과 집안의 구도가 나오니까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게 있다. 자식이 학업에 열중하고 취업도 잘하길 원하는 부모들은 자식들이 집안에서 뒹굴고 있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집안에서 뒹굴고 있는 자식 새끼를 보면 학교 도서관에라도 가서 공부라도 하고 인턴이라도 해서 경험이나 쌓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굴뚝같을 것이다. 그런데 꼭 그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보면 하루데 2시간 신문배달하고 하루종일 집에서 노는 행복한 아저씨가 나온다. 집안에서 뒹굴뒹굴하는 사람이 집밖에서 열심히 자아실현하는 사람보다 더 행복할 수도 있다.

 


11. 기계와 인간
 

메튜는 버스터 키튼의 기계적 슬랩스틱을 극찬하나, 테오는 채플린의 작품, 연기에서 느낄 수 있는 인간의 감정, 동일시 감정을 중시한다. 이러한 대립은 이빨 연주로 대표되는 지미 핸드릭스와 감성 연주로 대표되는 에릭 클랩툰의 대립과 병행된다. 메튜가 이러한 논쟁에서 테오를 항상 이긴다는 것(말빨로 찍어 누르는 것)도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12. 전쟁과 평화
 

메튜는 전쟁은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베트남 전쟁을 옹호하지만, 테오는 강대국에 의한 부당한 폭력이라고 비판한다. 이 논쟁에서도 역시 메튜가 이긴다.

 


13. 이성과 감정
 

메튜와 테오의 논쟁 양상에서도 드러나듯, 메튜는 항상 말빨을 통해 테오를 이성적으로 납득시키려 한다. 그러면 말빨이 딸리는 테오는 분노하면서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진다. 하지만 이것을 테오가 졌다고 볼 수 있을까?

 

 
14. 국가의 폭력과 개인의 폭력
 

집회 참여 현장에서 메튜는 국가적 폭력(베트남 전쟁)은 막을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용인되어야 하는 것인 반면, 개인의 폭력은 도덕적으로 납득될 수 없는 행위라고주장한다. 반면 테오는 방향성만 맞다면 개인도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메튜는 시위대로부터 도망치지만 테오/이자벨은 최전선에서 화염병을 던진다.

  

이 외에도 얼마든지 대립관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나, 중요한 것은 “몽상가들”이 이러한 이항대립의 컬렉션을 나열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이항대립적 사고를 가능케하는 메튜적 태도과 그와 대비되는 테오/이사벨적 태도를 대비하는 데까지 나아간다는 점이다.

 

 

15. 메튜적 태도와 테오/이사벨적 태도
 

미국인인 메튜는 합리성을 중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논점에 논리를 따지며, 근거로 상대방을 설득시키려 한다. “사회는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개인이 나선다고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폭력으로써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 메튜는 현실과 현실도피를, 이성과 감성, 국가와 개인을 명확하게 구분한다. 현실을 비판하면서 현실도피하고 있는 테오/이자벨을 이해하지 못하며, 차가운 이성으로 폭력 시위에 반대하고 뜨거운 감성으로는 일탈을 즐긴다. 즉 메튜의 태토는 이분법적 태도이며, 말과 행동이 모순되지 않게 깔 맞추려는 신사적 태도다(그는 항상 옷도 신사처럼 입고 다닌다).

 
반대로 테오/이사벨은 논리가 없기 때문에 메튜와의 논쟁에서 맨날 지며 그에 대한 반응도 감정적이다. 투쟁에 찬성하지만 집안에서 킬링 타임이나 하며, 국가의 폭력엔 비판적이지만 개인의 폭력 행사엔 관대하다. 심지어 집안에서 보여주는 나체 플레이, 오줌 묻은 칫솔로 양치질하기(테오는 몰랐겠지만) 등은 짐승다움에 근접한 모습들이다. 즉 메튜와 달리 테오/이사벨의 태도는 뒤죽박죽된 모순 덩어리이며 본능에 충실하고 있는 셈이다.

 
허나 이러한 두 가지 태도를 양분하는 것 자체도 메튜적 태도인 바, 이 영화에서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이러한 대립관계 자체가 아니다. 수많은 대립관계에서 한쪽은 우월하고 Wanna be인 것으로, 반대쪽은 열등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일 수 있으나, “몽상가들”에서는 두 항이 서로 평등한 관계에서 공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공존은 싼 티 나는 힐링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극적인 화해, 너와 나 우리 모두가 하나됨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카오스 안의 아름다움이라고나 할까. ‘백합이 넘도록 승부가 나지 않았지만 눈부시게 멋있었을 장비와 관우의 일기토’, ‘쓰러져가고 있는 중이지만 기묘한 우아함에 눈길을 뗄 수 없는 회현 시민아파트’, ‘로마 판테온 안에서 보았던 그로테스트한 소녀의 그림’. 이런 말 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이러한 공존은 다음 세 가지 매개체에 의해 표현된다.

  


[공존의 매개체로서의 예술(영화), 욕조(생리혈), 돌맹이]

 

 • 예술(영화) : 아버지와 테오를 연결해주었던 것은 “시는 곧 탄원서이고, 탄원서는 곧 시”라고 하는 문구였다. 물론 이 문구 때문에 부자의 논쟁은 더욱 과격해진다. 하지만 난 이 논쟁이 너무나 멋져 보였다. 아들이 아버지를 정당하게 비판하고 아버지는 그것에 항변하는, 서로에게 할 말은 하는 자유로운 문답.

 
또한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메튜와 테오/이사벨을 엮어준 것은 시네마테크, 영화였다. 그들은 영화을 보고 따라하면서, 헐리우드 클래식을 추억하고 누벨바그에 동참한다. 어떤 때는 영화 따라하기 자체가 사회 규율에 대한 반항(루브르 박물관 가로지르기)이었고, 영화 퀴즈를 맞추지 못한 것에 대한 벌칙이 금기에 대한 도전(타인 앞에서의 자위와 섹스)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셋은 증오과 외로움, 수치심, 우월감, 찌릿찌릿한 흥분 등 수많은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는데, 이들의 불순한 놀이를 엿보면서 나는 ‘쟤네 왜 저래’라고 생각하면서도, 옷을 홀라당 벗고 그 속에 동참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달까...

 
메튜라는 인물 자체도 테오/이사벨과 대조되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면면히 뜯어보면 애매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감없고 약 빤 듯한 표정, 기우뚱 거리는 걸음걸이, 귀를 간질거리는 목소리 등... 그는 전형적인 미국인이 아니다. 말로는 베트남전쟁을 옹호하지만 애국심의 발로가 아니다. 오히려 징집을 피해 파리에 와서는 하루종일 시네마테크에 죽치고 앉아 있는 그에게서는 어딘가 보헤미안의 냄새가 난다. 메튜는 실험실(이사벨의 방)의 대조군이자 실험군이며, 이방인이자 내부자인 것이다.

 

 
• 욕조(생리혈) : 감독이 정말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그 장면. 세명이 함께 욕조 속에 들어가 있고 그 주위를 카메라가 맴돌며 반대편에 있는 거울엔 카메라가 보여주지 못하는 부분을 비춰준다. 거울의 활용은 단순한 미장센적 아름다움을 넘어서, 감독(관객)의 욕망을 극대화하여 표현하는 것 같다. 이 젊은 넘치는 청춘들을 보여주고 또 보고 싶다는. 이건 모텔에 가면 벽에도 거울이 있고 천장에도 거울이 있는 것과 비슷하다. 욕조 안에 함께 몸을 담그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이쪽에서 보여주고 저쪽에서 보여주고 정상적으로는 볼 수 없는 곳까지 보여주는, 다분히 포르노그라피적인 연출이다.

 
세 명은 욕조 속에서 지미 핸드릭스와 에릭 클랩툰에 관해, 베트남 전쟁에 관해 토론한다. 치열한 공방이 오고 가는 중에 이자벨의 뱃속에서 나온 생리혈이 물 속에 피어 난다. 고통 속에서 그녀의 자궁벽이 무너져내린 찌꺼기가. 그 찌꺼기 속에서 세명은 토론하고 화를 내고 서로의 다름을 확인한다.

 


• 돌맹이 : 텐트 속에서 셋이 서로 뒤엉켜 자고 있는 중에 부모님이 왔다간 사실을 알게된 이사벨은 가스 중독에 의한 자살을 시도한다. 그때 갑자기 집밖 시위대가 던진 돌맹이가 창문을 깨고 들어오면서 공기를 환기시킨다. 그리고 세명은 바로 거리로 나가 투쟁에 동참한다.

 
이 영화 마지막 부분에 대한 해석은 분분한 편이나, 나는 의심 없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앞에서도 썼듯이 집안에서의 엽기적 행각은 집밖에서 일어나고 있던 시위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투쟁이다. 따라서 테오와 이사벨은 돌맹이로 인해서 각성하고 현실에 참여하게 되었다라기보다, 이미 A라는 투쟁을 하고 있다가 B라는 다른 투쟁으로 옮겨탄 것일 뿐이다.

 
즉 돌맹이는 결국 집안과 집밖을 이어주며 집안에서의 투쟁과 집밖에서의 투쟁이 서로 동질적인 것이라는 점을 말해주는 도구이다. 이 돌맹이에 의해 집밖과 집안의 대립관계가 무너진다. 영화에서는

 

이 세가지 기제에 의해 대립항들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 하지만 앞서도 썻듯이 이 조화는 순조로운 조화가 아니다. 서로 대립하는 힘들이 엎치락 뒷치락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에너지다. “몽상가들”에서 말하고자 하는 68혁명의 본질은 바로 이런 것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 대립관계가 존재하니 투쟁의 외연을 넓히자라는 신좌파적 메시지에만 그치지 않고, 각각의 대립항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빛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냈던 것, 그것이 바로 68혁명이란 것이다.

 

 


[우리 삶에는 이런 장면이 있을까]
 

나는 직장인이다. 나의 삶에도 몇 가지 대립관계들이 존재한다. 그 중에서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것은 갑을관계이다. 고객과의 관계, 상사와의 관계... 갑을관계를 벗어난 회사생활이란 상상할 수 없다. 

 

“몽상가들”을 보고 가장 많이 생각난건 내 삶에 존재하는 대립관계들을 어떻게 화해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방식은 두 가지가 있을 것 같다.
 

• 처세가들의 방식 : 나를 죽이고 갑에게 복종한다. 이로써 인정받아 내 위치를 확보한다.

• 몽상가들의 방식 : 갑과 을이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장을 만든다. 불협화음이 나겠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몽상가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집안에서의 투쟁이 집밖에서의 투쟁이 같은 것이라면, 내 회사생활 속 갑을관계에 대한 투쟁도 체게바라의 멋있는 투쟁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문제는 몽상가들의 방식을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가. 방안이 있을까라는 점이다.

 

나는 어찌보면 ‘프로젝트’라는 것이 해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모든 프로젝트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프로젝트의 목적은 결국 Mission Complete이기 때문에, 상사든 고객의 말을 잘 듣는 것보다는 내 판단이 제일 중요하다. 내 판단을 위해 고객과 싸우고 상사와 싸워야 프로젝트가 제대로 간다. 불협화음이 나지 않는 프로젝트는 나중에 가면 꼭 문제가 터진다. 서로 좋은 관계를 위해 말 안하고 감춰 두었던 것들에 의한 후폭풍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밀려온다.

 
자신을 숨기지 말고 드러내고 열심히 싸우다보면(일을 하기 싫어서 싸우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프로젝트가 성공하고, 그렇게 싸웠던 사람들과도 나중에 웃으면서 술한잔 할 수 있다.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서로 사이좋게 지내던 사람들도 나중에 지나면 안보게 된다더라. 아직 프로젝트가 실패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실패할 것 같으니 나중에 비교해보면 될 것 같다.


그래서 앞으로도 프로젝트를 열심히 할 것 같다. 갑을관계를 뛰어 넘어 서로 치고박는 그 황홀한 순간을 위해서. 이렇게 글까지 남기니까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도 앞으로 더욱 열심히 싸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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