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양연화

2014.05.30 03:17

비밀의 청춘 조회 수:3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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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있음))



화양연화,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아름다운 이야기.

 

 

  영화의 맨 처음 도입부 삽입된 문장을 보면서부터, 이 이야기가 바로 당신의 이야기임을 직감하게 된다. 꽃문양 치파오를 입은 고전적인 수리진과 1900년대 어느 시기의 서양문명의 혜택을 입었을 주모운이 좁은 공간에서 마주치지 않고 계속 한 공간에서 떠돌고 있다. 같은 아파트로 이사한 그들은 각자의 배우자 없이 짐을 옮기고 있다. 일본 서적인 남편 책 때문에 처음 얼굴을 보게 된 그들은 건조한 인사말을 주고받는다. 그들의 관계는 바로 그 만남 같다. 그들 서로가 직접 접촉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항상 다른 이를 전제하는 관계.

  아슬아슬한 음악 위에서 카메라의 시선은 천천히 얼굴이 나오지 않는 두 배우자와 주인공들의 동선을 따라간다. 그 안에 정서가 농축된다. 그 누구도 어느 누구의 심리에 관심 없이 마작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미 불안하고 아슬아슬하며, 암시한다. 이 영화는 언제나 그렇다. 불륜관계인 것처럼. 누구 하나 노골적이지 않다. 누구도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솔직히 표현할 수 없다. 그러기 전에 도망간다.

  언제부터 바람을 피우기 시작한 걸까? 전기밥솥의 값을 나눠주기 시작한 때부터일까? 아니면 맨 처음, 서로 눈길이 맞부딪친 그 순간부터? 알 수 없다. 수리진과 주모운의 인연은 배우자들의 외도로부터 시작되는 것인데 배우자들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역시 암시만 될 뿐. 배우자들의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언젠가부터 바람을 피우는 배우자들의 거짓말들이 우리의 눈에도 보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 거짓말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수리진과 주모운을 이어준다. 한 눈에 봐도 습해보이는 홍콩, 착 달라붙은 치파오는 여성의 뒷모습 특히 매력적인 엉덩이를 강조한다. 음식을 기다리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고, 계단을 올라간다. 우리는 치파오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수리진의 어딘가 헐거워 보이면서 동시에 연약해 보이는 얼굴은 우리의 시선을 치파오에서 얼굴로 부드럽게 채간다. 주모운은 그 곁을 지나갈 뿐이지만, 카메라의 시선을 타고 흐르는 긴장감은 우리에게 채워진 허공을 가리킨다. 수리진과 주모운이 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들에게 연결되어 있는 무채색의 감정 선을 본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서로의 존재를 강하게 느끼는 그러한 순간. 서로를 의식하는 것이 강하게 느껴지고, 피부로만으로 알 수 있는, 그러나 그렇기에 기피하는 순간.

  우선 모든 것을 떠나서, 어쨌든 수리진은 남편의 곁에 있는 부인이다. 1960년대 홍콩, 그 좁은 아파트 공간 옆집에서 일어나는 강탈행위 앞에 그녀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꼭 서로 뒹구는 것을 볼 필요 없이 진실을 직감하는 순간이 있다. 그 진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남몰래 울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는다. 바람난 배우자한테도, 그 상대자에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옷을 잘 차려입은 채 걸어 다니고, 하루하루 살아갈 뿐. 그러나 그녀가 점점 연약해지고, 텅 비워지는 것이 보인다.

  주모운에게 이 상황은 어떤 것일까? 아내의 바람 앞에서 그는 딱히 상심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단조로운 가정을 꿈꾸며 황홀한 쾌락보단 사소한 가치를 지키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일까? 그는 수리진에게 다가간다. 아니, 수리진도 주모운에게 다가간다. 누가 먼저인 것인지 잘 모르겠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둘이 붙여두면 서로를 본능적으로 탐하게 되는 관계. 사회적으로 어떤 관계인지, 어떤 기반 위에 있는지 고민도 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끌림을 느끼게 되는 관계들. 그리고 가끔 그러한 관계들 중 몇몇 개는 사회의 냉혹한 눈초리를 받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건 끌림보다 분명 약해 보인다. 적어도 맨 처음,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감정을 눈치 채기 전까지는. 잠시의 지연, 사건과 알려짐 사이의 아주 잠깐의 허용된 순간, 매우 불안하게 떨리는 그 나뭇가지 위에 이 가련한 새들은 관계의 둥지를 짓는다.

  우선 그들은 서로의 배우자가 그들 뒤에서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가간다. 그러나 그들은 오래된 관계와는 다른 관계가 주는 낯설음이 불편하다. 오래되고 안정된 관계가 주는 강점은 비단 사회적 인정에만 달려있지 않다. 오랜 습관은 마치 그것이 당연한 선함인 듯 굳어진다. 흐물흐물한 무엇이라도 오래 두면 딱딱해지는 것처럼. 그들이 계속 이야기하는 주제는 서로의 부인과 남편에 대한 것이다. 박완서의 한 단편 소설이 생각난다. 아마 그리움을 위하여같은데, 오래 남편과 살다 사별한 한 할머니는 새로 재혼한 할아버지와 서로의 옛날 배우자에 대해 수다를 떤다. 그들은 질투 따위는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상대방의 옛날 배우자는 단순히 사랑의 대상만이 아닌 상대방을 형성한 일부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모운이 스테이크를 위해 떠다주는 겨자소스는 아마 그의 아내가 좋아하는 소스일 것이다. 수리진도 그것을 안다. 그 사람의 굳어진 습관, 그 사람의 배려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통 정상적인 관계에서라면, 그러한 것들을 하나하나씩 자신에게로 맞추어 나간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그들이 의식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의 환경 때문에 정상적일 수 없다.

  수리진이 너무 슬퍼보인다. 그래서 아름답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무조건 아름답다. 화양연화의 순간을 담아냈기에. 주모운과의 관계는 자신의 배우자들의 불륜 관계 때문에 생긴 것일까? 아니면 그것은 그저 핑계에 불과한 것일까? 어느 쪽이든 이미 이 관계는 다른 이들의 존재가 너무 크다. 안정적인 사랑을 위해서라면 나와 너만이 있어야 하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들의 관계에는 나와 너만이 아닌 나와 너의 옆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크다.

  예를 들어, 만약 영화를 좋아하는 보통의 성인 남녀라면, 자연스럽게 영화관에서 영화를 같이 보기로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둘은 그것이 가능해 보이지도 않고, 딱히 시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다른 사람들 눈을 신경 써야 하니까. 그들은 그저 안전한 공간들에서 만난다.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황폐한 거리. 그러나 그 안에서 그래도 애정이나 호감이 싹트긴 한다. 아주 조금씩, 아주 조금씩 피어서 그러지. 그러나 걱정과 불안, 초조함으로 인한 담배 연기가 훨씬 더 짙게 피어난다. 그리고 그게 그들의 사랑이 꽃 피우기도 전에 씨앗을 갉아먹는다.

  결국 일이 하나 소소하게 생긴다. 소소해보이지만, 사실 작지 않은 일. 그 둘은 아파트 한 공간에서 있다가 밤을 새며 마작 하러 온 사람들 때문에 갇히게 된다. 그러한 불편함은 어떻게 보면 그 둘에게 있어 재미난 추억을 만들어 주었겠지만, 다르게 보면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점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괜히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 같아요.”

  “우리가 결백해도, 사람들은 그렇게 안 보죠.”

  “절대 잘못되어선 안 돼요.”

  그렇다, 그 절대 잘못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 그들 마음 안에 있는 불안함과 위태로움이 그들의 가장 큰 독이다. 잠은 오지 않는다. 그들에게 결혼, 그리고 평판, 현실은 중요하다. 어른이니까.

  그 둘만의 아지트가 생긴 이후, 그들은 주체할 수 없이 서로에게 시간을 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만남 그 자체가 그들의 관계에 대한 소문을 만든다. 그들은 아무도 자신을 안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모두가 보고 있다. 우리는 살면서 흔적을 남긴다. 범죄에 베테랑이 아닌 이상, 그 모든 흔적들, 그리고 여기서 흔적이란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감정의 흔적들 역시 강하게 남는다. 그것 역시 당사자들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옆에 있는 제3자도 안다. 하나의 사랑이 싹트는 것, 그 남녀의 숨기지 못하는 얼굴의 환희를. 그리고 소문은 그 환희의 정도에 따라 짙게 혹은 옅게 퍼진다.

  행복함, 그 둘만이 전유하는 행복함이 불안을 없애주지 못한다. 행복해지고, 사랑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면 열릴수록, 소심한 남자는 더욱 불안해진다. 더욱 무서워진다.

  사람들은 여전히 지켜본다. 결국 수리진은 아파트 주인에게 한 소리 듣게 된다. 나가지 말라. 남편에게 출장을 덜 다니라고 해라. 어떤 의미인 것일까. 이러한 말이다. 다 안다, 수리진. 무심한 남편 때문에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것. 여자인 너는 자제해야 한다. 여기 이곳, 한심하게 늙어가는 우리들 사이에서 마작을 구경하고, 밥을 먹어라. 불나방처럼 굴다가는 모든 것을 다 잃을 테니. 그리고 그 간접적이고, 걱정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지 날카로운 메시지는 수리진의 심장을 꿰뚫고 간다. 다만 두렵고, 무서워질 뿐.

  수리진과 주모운은 이별 연습을 한다. 이별을 또 연습할 것은 무엇이람. 그런 것은 그냥 소나기 오듯 찾아오던데. 수리진이 운다. 눈물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그저 표현이고, 표출이다. 이미 다들 마음속에서 안다. 서로 떠나야 할 때가 온 것이라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지만, 그래도 올 일은 오니까.

  시간은 계속 간다. 헤어짐 이후, 몇 년 뒤. 그들은 같은 공간에서, 하지만 다른 시간 차이로 스쳐지나간다. 닿으려고 하는 시도가 있지만, 다시 한 번 시도하진 않는다. 보는 이로 하여금, 아쉬움의 탄성이 날까? 아니, 나는 그렇지 않다. 그 누구보다 가슴의 열정이 큰 사람이라도 자신의 열정을 꺼트릴 강한 바람, 차가운 물 앞에서 계속 불탈 수는 없는 법.

  그리고 1966, 시간이 또 간다. 수리진은 옆집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 감정이 살아난다.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에 대한 감정은 여전히. 그리고 그녀는 거기에 자신의 아들과 머무르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우연히 찾아온 주모운. 그녀가 사는지도 모르고, 수리진이 그랬던 것처럼, 옆집을 보며 옛날 기억에 사로잡힌다. 또 그렇게 스쳐지나간다.

  그는 머나먼 곳까지 가서 자신의 비밀을 놓아두고 온다. 정확히 무슨 말을 한 것일까? 누군가한테 하고 싶었지만 차마 못한 말인 것일까. 헛된 상상은 의미 없고, 여전히 모든 것이 희미하다. 우리 모두는 영화를 보듯 자신의 일생을 보지 못한다. 그것이 우리의 비극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놓치니까. 아니, 사랑이 될 수 있었던 것들을 놓치니까. 어안이 벙벙한 채로, 어떻게 일이 돌아가는지 알 수 없는 채로. 잘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채로. 그와 내가 만나고, 사랑하려면 가장 좋은 최적의 조건, 시간, 공간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채로. 그 가능성이 조그마한 양촛불처럼 타고 있다고 믿은 그 때는 그저 아름다운 순간으로 남고, 사랑은 시작조차 해보지 못한 채로 꺼진다. 그러나 오히려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듯이, 모든 것은 그저 가능성으로만 남는다.

  그가 그립고, 그녀가 보고 싶다. 만날 순 없다 해도, 그 감정들이 죽지 않는다 해도, 손에서 떠난 순간은 우리로부터 저 멀리 도망간 이후며, 그리고 그 때로부터 떨어져 온 나는 계속 그 사람의 존재를 아득한 꿈처럼 그리워만 한다. 언젠가는 희미해지겠지. 그것만을 바라며. 슬픈 감정이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벌레처럼 자라나 언젠가는 나비처럼 날아가기만을 바라며.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멈추지 못하는 한, 그와 나의 순간은 영원한 화양연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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