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할 때 늑장부리다 놓친 영화를 영상자료원에서 한다기에 영화관에서 안보면 후회할 걸 알고 결국 갔습니다.

 

미술가의 전기영화라면 의무적으로 봐야 할 입장인데도 망설인건 사실 제가 터너를 별로 안좋아해서 입니다. 테이트 미술관에 걸린 수많은 터너 그림을 건성으로 보면서도 영화 속 빅토리아 여왕처럼 노란색과 흰색 범벅이군하고 지나갔거든요.

낭만주의 화가로서 중요성이나 근대 풍경회화에 미친 영향은 익히 알지만, 그의 사생활에 대한 정보는 별로 없어서 누군지 궁금하지가 않았었고요.

 

그래서 본 영화는 좀 놀라왔습니다. 전통적으로 화가의 전기영화는 아무래도 낭만적인 초상이 되기 마련입니다. 미켈란젤로에서 반 고호까지 전설적인 천재화가라는 것 자체가 비극적인 드라마로 엮이는게 정석이거든요. 일반인은 이해 못하는 천재성, 광기로 위협받는 내면의 고통, 주로 불륜인 화려한 로맨스 등등. 카미유 클로델에서 잭슨 폴록까지 이런 로맨틱한 천재작가들은 근사하게 영화화 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터너 역의 티모시 스폴은 아름답거나 남성미있는 모습이 절대 아니고요. 사생활로 따져도 자녀까지 둔 내연녀를 무시하고, 동료 화가에게 빌려주는 돈을 깎는 등 영 초라한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동시대인들이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 못해 비웃는 장면도 나오지만 이미 꽤 성공을 거둔 후 노년기의 모습이라서 그렇게 절절한 모양은 아니고요. 강의장면에서 나온 것처럼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는데 서툴고, 예술원 전시장에서처럼 엉뚱한 기행도 서슴지 않는 마당에 맨날 킁킁거리는 모습이 별로 동정이 가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고나니 터너가 새롭게 보이긴 합니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인물 못나고 피부 나쁘고 치열 삐뚤어진 늙으스레 한 사람들이지만 그래서 그런지 진짜 19세기 영국 사람 같은 현장감이 느껴지고요, 꼼꼼하게 재현한 작가 스튜디오나 전시장들, 터너가 근사하게 그린 낭만적인 풍경들은 큰 화면으로 본 보람이 있게 아름답습니다. 터너 인생의 마지막 20년가량을 에피소드별로 간단하게 그리는데, 후원자인 귀족의 시골저택에서 휴가를 보내고, 자기조수로 일하던 아버지와 가족의 과거를 회상하고, 어렸을 때 살던 바닷가 마을에서 만난 과부와 사귀고, 동료 예술원 화가들과 경쟁하고, 친구 자연과학자와 빛의 성질을 탐험하고, 최신발명품인 은판사진의 의미를 느끼는 등등이 이어지는데 이게 고집장이 작가의 진실한 모습을 아주 그럴듯하게 묘사합니다.

 

영화내용상 18세기 영국문화계의 실존인물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예술원 화가들은 다 실존인물들이겠고, 제일 의미있게 등장하는 징징거리는 작가 헤이든은 나중에 정말 자살했더라고요.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을 비롯해서 슬로언 경이라든지 알만한 사람들이 나온 듯 한데 남의 나라 역사인지라 모르고 그냥 지나갑니다. 미술평론가로는 원래 터너 지지자로 유명한 러스킨이 왕재수 젊은이로 등장합니다. 러스킨이 터너 화실에서 그림 보면서 제 감흥에 못 이겨 장광설을 늘어놓는데 터너가 뚱하게 대하는 장면이 특히 맘에 듭니다. 전 사실 러스킨이 지지한 라파엘 전파를 꽤 좋아하는데, 말년의 터너가 자신의 현대적인 접근과 반대되는 복고풍 라파엘전파 그림이 예술원 전시장에 걸린걸 보면서 코웃음 치는 장면에서 어느새 공감하는 자신을 알고 놀랐다니까요.

이렇게 되고 나니 테이트 갤러리에서 터너 그림을 제대로 보리라는 결심을 하지만 일단 런던에 가야

 

 

,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추레한 모습이 특히 두드러지는 건 바로 직전 전에 본 1차 대전배경 영국영화인 <청춘의 증언>의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등장인물들과 비교가 되서 그런 듯 해요. 마이크 리 영화에서 영화배우 같은 등장인물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꽤 미인으로 알려진 러스킨 부인같은 사람은 슬쩍 지나가 버리고, 피부병때문에 흉해진 하녀 한나가 여주인공급인걸 생각하면 누가 감독님 영화 아니랄까봐 소리가 절로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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