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무도회의 수첩[스포일러!]

2015.08.13 10:05

ally 조회 수: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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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인생의 영화 중에는 어려서 공중파 TV에서 본 더빙판 명화극장 영화들이 좀 있습니다. 이런 고전 명화들은 요즘 dvd나 블루레이 복원판들이 나와서 좋은 화질의 자막판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죠. 그러나 알만한 명화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출시안되는 영화들도 있는데 이중 하나인 <무도회의 수첩>이 수상한 dvd으로 나왔기에 불법 타이틀은 사지 않는다는 원칙을 저버리고 일단 구입했습니다.

 

혹시나가 역시나라서 일어자막이 달린 저화질 비디오를 리핑한 위에 그냥 한글자막을 얹은 판본이네요. 아마 자막도 일어중역일 거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러나 30년전에 TV에서 상영한 이후로 어디서 볼 기회가 없던 터라 반갑게 재시청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많은 장면들이 진짜 있었다는게 가장 놀랍고요. 우울한 주제가인 “회색의 왈츠”는 다시 들어도 좋네요. 주인공을 둘러싼 남자들의 직업이 법률, 정치, 의학, 예술 등등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분야를 다 망라하는 게 보이고요. 각각의 사람들을 만나는 에피소드들이 호러, 스릴러, 코메디, 로맨스 등등으로 장르화 되어 다양한 면모를 보인다는 것도 다시 보니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처음 보았을 때는 부모님이 주무시기를 기다려 몰래 거실에 나와서 TV를 보느라고 맨 첫 장면-크리스틴이 자살한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는 부분을 못 보았는데요. 물론 짐작은 했지만 크리스틴은 꽤 연상이었음이 분명한 부자남편을 전혀 사랑하지 않은 듯해요. 근데 맘에 없는 남자랑 16살에 약혼하고 곧 결혼해서 계속 타향생활을 했다는 건 아무래도 금전적인 문제 때문에 원치 않는 상황에 들어갔다는 의심이 드는군요. 영화의 줄거리는 다 아시는 것처럼 젊은 미망인이 된 크리스틴이 첫 무도회 수첩의 10 남자들을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과거 서구에선 무도회 때 춤 파트너와 미리 약속해서 여자들이 가지고 다니는 작은 수첩에 기록해 놓습니다. 위에 캡쳐 사진을 보시면 여섯번째 춤 상대인 프랑소와에 하일라이트가 쳐 있습니다.) 수첩에 적힌 10인중 2명(모리스와 미셸)이 작고해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이 8명의 남자들에 따라 장이 나뉘어지고요 각각의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프롤로그

젊은 미망인인 크리스틴은 16살때인 1919년 여름 첫 무도회 수첩을 발견하고 그때 자신에게 사랑을 속삭였던 남자들을 찾아 인생의 의미를 다시 발견하려 합니다. 이중에서 유일하게 소재를 파악하지 못한 제라르를 주인공은 진정 사랑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크리스틴이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첫 무도회가 19세기 풍의 고전적인 아름다움으로 충만하게 그려지는게 참 맘에 듭니다. 나중에 이것도 허상이었다는게 밝혀지지만 16살 소녀가 처음 데뷔하는 무도회에 대한 추억을 그럴듯하게 재현하고 있거든요. 이 환상의 중심인 제라르의 사랑이 진짜였는지 아닌지 끝까지 밝히지 않은 점도 아주 적절합니다.

참, 크리스틴은 40대라고 설명이 많이 나오는데 1919년에 16살이었다면 약 20년 후이자 영화가 제작된 해인 1937년에는 아직 30대입니다.

 

2. 조르쥬

조루쥬는 크리스틴의 약혼발표 직후에 자살했고 그 충격으로 홀어머니는 아들이 살아있다는 환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물론 영화 속에서는 이런 사실을 곧바로 알리지 않고, 조루쥬의 옛 집을 방문한 크리스틴을 반갑게 맞은 조르쥬 모친이 크리스틴을 크리스틴의 어머니로 오인하고 자살 당시의 모습(1919년 12월 14일에 머무른 달력까지)을 그대로 보관한 아들의 방을 보여 주는데서 밝혀집니다. 고향 친구가 죽었는데 크리스틴은 전혀 몰랐다는게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성한 모친이 숨겨둔 부고장이 쏟아지는 장면에서 진실이 분명해지죠. 이런 일련의 상황들이 멀쩡한 척 하는 조르쥬 어머니와 사정을 알면서 말 못하는 하녀, 어리둥절한 크리스틴 사이에서 일어나는 과정은 호러 영화에서 유령을 발견하는 과정처럼 묘사됩니다. 귀신의 정체가 밝혀지지만 무섭다기보다는 슬픈 느낌이 강하고요. 창문 밖 나이든 오르골 연주자가 들려주는 회색의 왈츠는 근사한 배경음악이 됩니다.

 

3. 피에르

크리스틴이 진짜 사귀었던 남자는 아무래도 이 피에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제는 죠라는 이름으로 법의 헛점을 이용하는 암흑가의 실력자가 되었지만 한때 크리스틴과 시를 암송하던 법학도였죠. 크리스틴이 죠의 클럽을 방문한 밤이 바로 죠가 계획한 범행이 실패하는 밤이라서 경찰에 연행되면서 “체포되는 사람은 피에르가 아니라 죠”라고 말한 점이 참 인상적인데요. 이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전혀 변치 않은 사람은 죽은 조르쥬나 죽은 것 같은 결혼생활을 한 크리스틴 뿐이고 청년이던 남자들이 중년이 되면서 얼마나 변했는지-즉 다른 사람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첫 단서가 됩니다.

피에르가 법망을 피하기 위해 법률지식을 이용해 범죄를 계획하는 부분은 지금 봐도 기가 막힌데요. 여자가 유혹해서 열쇠를 받아서 몰래 들어가면 불법침입이 아니라던지, 야간범행은 가중처벌되니 아직 어두운 일출시간 이후에 범죄을 저지른다든지 하는 부분은 범죄 영화로서의 묘미를 더합니다.

 

4. 알랭-도미닉 신부

크리스틴의 남자들 중에서 가장 연장자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였던 알랭은 자신이 혼신을 바쳐 작곡한 신곡 발표회에서 크리스틴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걸 깨닫고 곧이어 아들마저 급사하자 사제가 되어 빈민층 아이들을 돌보게 됩니다. 20년전 알랭이 자신을 흠모한다는 것을 알지도 못했던 크리스틴과 이제는 도미닉 신부가 된 알랭이 자기들의 엇나간 사랑이야기를 남의 사연인양 삼인칭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은 고풍스러운 옛 로맨스 소설 같은 느낌을 더합니다.

 

5. 에릭

크리스틴을 한때 흠모했던 남자들 중에서 그나마 다시 그녀와 행복을 찾을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남자로 에릭이 등장합니다. 한때 한량이자 바람둥이었던 그는 이제 등반구조자로 활동 중인데 함께 하자는 크리스틴의 간청을 뿌리치고 위기에 처한 등반객들을 구하겠다고 나섭니다. 나름 숭고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자신이 에릭의 인생에 우선순위를 차지하지 못한다고 느낀 크리스틴은 다시 떠나게 됩니다.

 

6. 프랑소와

이쯤되서는 너무 이야기가 우울해지는 듯 해서인지 한때 위대한 정치가를 꿈꾸었던 프랑소와가 시골마을 시장이 돼서 자기집 하녀와 재혼하는 코미디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시골마을의 결혼식이라는 왁자지껄한 소동 뒤에서 첫 아내와 입양했던 양아들이 아버지에게 돈을 갈취하는 사연이 등장하면서 이 평범하고 온화해 보이는 삶도 풍파가 있음을 비춥니다.

 

7. 티에리

모든 에피소드 중에서 가장 어두운 스릴러 에피소드는 일종의 사회물입니다. 사명감 넘치는 의사였던 티에리는 식민지에서 한쪽 눈을 잃고 그 후유증으로 정신도 망가져서 지금은 공업도시의 불법임신중절의사로 못마땅한 동겨녀와 살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사랑이었던 크리스틴을 처음에는 알아보지도 못하던 그는 크리스틴의 존재와 호의에 새로운 삶을 꿈꾸지만 결국 발작을 일으키고 동거녀를 살해하기에 이르죠.

첫 부분부터 삐딱하게 기울어진 카메라 앵글과 시끄러운 공장소음은 불안정한 티에리의 정신상태를 반영하고요. 크리스틴이 보여준 희미한 희망이 망가지자 완전히 인간성을 저버리는 티에리의 모습은 앞으로 다가올 2차 세계대전의 참상 이후 현대사회의 불안을 예고합니다.

 

8. 파비앙

크리스틴의 남자 중에서 개중 평범한 삶을 사는 미용실 주인인 파비앙의 에피소드에 이르러서야 크리스틴은 제대로 된 귀향을 합니다. 예전에 첫 무도회가 열렸던 홀에서 마침 무도회가 있단 말에 따라가지만 실제 그 장소는 평범하게 초라한 공간에 불과합니다. 그 무도회가 첫 무도회라는 어린 아가씨가 이 아름다운 장소를 평생 기억할 거라고 크리스틴에게 이야기할 때 우리는 크리스틴의 아름다운 회상이 처음부터 다 환상이었음을 알게 되고요.

 

9. 제라르

이렇게 환상이 깨져서 이태리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 크리스틴은 아주 가까운 곳에 제라르가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나마 남은 제라르에 대한 기억이 망가질까 두려워하던 크리스틴이 용기를 내서 찾아간 집에는 젊은 제라르와 똑같은 청년이 있습니다. 크리스틴이 “제라르~”라고 부르자 젊은이는 고개를 들더니 “아버지는 돌아가셨어요”라고 답합니다.

 

10. 에필로그

크리스틴은 제라르의 아들을 양자삼아서 키우게 되었고 더 이상 과거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생애 첫 무도회에 참석하게 되었다고 들뜬 양아들을 크리스틴이 데리고 외출하자 빈 방에는 회색의 왈츠에 맞추어 춤추는 환영들이 남습니다.

 

 

 

30년 전에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는 미래의 꿈과 희망이 이렇게 허무하게 부서질 것이 무서워서 엉엉 울었었는데요. 지금에 돌아보면 그때의 꿈과 희망이 어리석기보다는 애처롭게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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