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월의 흔적을 가득 안고서 나홀로 쓸쓸히 표지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녹슨 못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녹으로 대변되는 세상의 고된 풍파를 겪기전에는 저 못도 분명히 자신을 사용해줄 누군가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며 어떤 희망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두번 다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깊숙하게 녹이 슬어 버렸기에 그 희망은 점점 불안과 절망의 늪으로 가라 앉고 있다.

 

참으로 이상하다. 그저 단순히 녹슨 못 하나만이 놓여있는 책의 표지만을 보았을 뿐인데도 이렇게나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으니 말이다. 이토록 인상적인 표지는 나에게 어떤 애달픔에 관한 단상과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아 버리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는 상당한 강렬함을 동시에 선사했다. 그러한 강렬한 첫 인상을 심어준 표지의 주인공은 바로 최용준이 번역을 맡아 국내에 출간된 필립 마이어의 데뷔작 [아메리칸 러스트]이다.

 

지난 2009년에 필립 마이어가 자신의 데뷔작인 [아메리칸 러스트]를 처음 발표하면서 마치 혜성처럼 등장했을 때 미국 문단은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코맥 매카시와 데니스 루헤인에 비견될 만한 신인이라는 찬사와 함께 존 스타인벡이 다시 살아서 돌아온 것만 같다는 호평을 들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이렇게 뛰어난 작가들과 비교되며 주목을 받고 문단의 열광과 찬사를 얻은 것일까? 그에 대한 의문과 기대를 함께 품으면서 작품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범상치 않은 두뇌를 소유하고 있지만 소심한 성격과 다소 결핍된 사회성으로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돌보며 살아가는 아이작 잉글리시와 예전에는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훌륭한 풋볼 선수로서 활약을 했었지만 현재는 어머니와 트레일러에서 살고 있는 다혈질 성격의 빌리 포는 친구 사이다. 어느 날, 빌리와 아이작은 우연히 뜻하지 않은 상황에 처하게 되고 위험에 빠진 빌리를 구하려던 아이작은 그만 사람을 죽이게 된다. 그렇게 살인 사건에 얽매이게된 두 친구를 중심으로 흡인력 넘치는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펜실베이니아 주에 위치한 작은 철강 도시인 부엘을 배경으로 하는 필립 마이어의 [아메리칸 러스트]는 미국 철강 산업의 몰락과 한때는 번영을 누렸었지만 이제는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져 버린 쇠락한 공업 도시와 그 안에서 가난과 절망에 허우적 거리고 어쩔 수 없이 무기력한 자신들의 현실을 받아들이며 적응해 나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다소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속에서 작가의 담담한 시선을 통해서 그려지고 있다.

 

앞에서는 이야기의 큰 뼈대를 구축하고 있는 살인 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아이작과 빌리만을 언급했지만 실제로 이 작품에 등장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주인공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이작의 누나 리와 빌리의 어머니인 그레이스, 그레이스에게 애정을 품고 그녀를 돌봐주는 경찰 서장 해리스와 불운의 사고로 인해 몸이 불편해진 아이작의 아버지 헨리까지. 작가는 이들 여섯 명의 시점으로 번갈아 가며 이야기를 전개 시키고 절박한 상황속에서 그들이 겪게 되는 심리적인 동요를 풍부하고 깊은 문장속에 담아내고 있다.

 

세상에 처음 공개된 작가의 데뷔작과 조우하는 것은 언제나 흥분되고 즐거운 일이다. 필립 마이어는 바로 [아메리칸 러스트]를 통해서 그런 기대와 설렘을 완벽하게 만족시켜 주는 더할 나위 없이 강렬한 데뷔작을 탄생시켰다. 비극적인 사건으로 시작된 이야기에서 벗어나기 힘든 깊은 절망으로 녹슬어 가는 주인공들의 어두운 내면과 그들이 겪어야만 하는 도덕이라는 이름의 울타리로 둘러싸인 딜레마적 상황을 황량하지만 그것 마저도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지는 문장으로 그려낸 이 작품은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데뷔작으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앞으로 다시 만나게될 필립 마이어의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감으로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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