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떠돌이 개

2014.01.25 12:20

menaceT 조회 수:1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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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cerclerouge/40202045515

 

郊遊 (2013)

 

12월 3일, CGV 압구정.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차이밍량의 신작 '떠돌이 개'를 보았다.

 

  영화의 첫 숏에서 카메라는 어두운 방안에 잠든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 옆에 앉아 있는 여자를 응시한다. 여자는 이따금 아이들을 내려다 보며 머리를 빗는데, 아무래도 외출 준비를 하는 듯 보인다. 이 여자와 아이들의 관계는 무엇일까? 이때 화면 위로 떠오르는 또다른 제목 '소풍', 이는 과연 누구의, 어디로의 소풍일까? 다음 숏에서 여자는 갑자기 사라지고 첫 숏의 아이들만이 저들끼리 숲 같은 곳을 헤매며 어디론가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숏에선 한 남자가 보트에 올라 물로 나아간다.

 

  첫 숏 이후로 사라진, 아마 머리를 빗고 어디론가 떠났을 여자, 그 다음 숏에서 어디론가 향하는 아이들, 다시 그 다음 숏에서 보트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남자, '떠난다'는 공통점으로 묶여 있는 이들의 관계는 무엇일까? 가장 일반적인 해석을 해 보자면, 우리는 성인 남녀와 두 아이인 그들을 '가족'이란 이름으로 엮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가족이라면 왜 그들을 각각 다른 숏에서 떠나는가? 그들은 왜 함께 움직이지 않는가?

 

  그 다음 숏에서 아이들은 거대한 하수구 같은 곳을 들여다 본다. 이어지는 숏은 하수구 안쪽에서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반대 방향으로 추정되는) 출구를 바라보는 시점 숏이다. 그리고 그 다음 숏에선 보트를 탔던 그 남자가 인간 광고판이 되어 아파트 분양 광고를 하고 있다. 앞서 등장한 또다른 제목 '소풍'을 이 일련의 숏들과 연결해 볼 때, 우리는 아이들의 '소풍'이 첫 숏의 여자를 떠나 숲을 지나고 하수구를 통해 이 숏의 남자에게로 가 닿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해변가 숏에서 앞서 프레임 안으로 등장해 달려가는 아이들을 곧 그 남자가 따라잡아 한 무리가 되더니, 이후로 그들은 밤마다 같은 방에서 잠을 잔다. 이 남성은 아이들의 아버지일까? 영화 내에서 아이들이 그를 '아빠'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이 점에 대해서는 긍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첫 숏의 여자에 대해서도 그녀가 아이들의 어머니라고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을까?

 

  그런데 영화는 그 짐작을 방해하려는 것처럼, 여기서 대뜸 마트의 한 여자를 주요 인물로 등장시킨다. 마트를 배경으로 한 일련의 숏들에서 그녀는 마치 아이들의 어머니인 양 마트 화장실에서 아이들을 씻기고 아이들의 용변을 해결케 하는가 하면 마트 시식 코너 등에서 아이들이 끼니를 때우게 한다. 아이들은 이제 그들의 아버지가 일을 하는 시간인 낮 배경의 숏으로 추정되는 숏들에선 마트의 여자와 함께 마트 안에서 시간을 보내고, 아버지가 돌아오는 밤 배경의 숏들에선 아버지와 함께 거리 혹은 허름한 방에서 시간을 보낸다. 즉, 아이들의 소풍은 첫 숏의 여자를 떠난 뒤 낮과 밤마다 마트의 여자와 아버지 사이를 오가며 매일의 소풍을 이어 나가는 방식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아이들과 한 공간에 머물던 첫 숏의 여인과 이 마트의 여인은 무슨 관계이며, 마트 여인과 아이들 그리고 남자는 무슨 관계인가?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아이들은 마트에선 마트 여자와 종종 프레임을 공유하고, 밤이 되면 거리와 방에서 종종 남자와 프레임을 공유하지만, 정작 남자와 마트 여자는 한 프레임 안에 공존하는 경우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들이 부부라면 왜 그들은 프레임을 공유하지 못하는가?

 

  남자가 아이들과 허름한 방에서 잠을 청하는 어느 밤, 마트 여자는 그 공간과 유사해 보이는 폐건물을 손전등 불빛(남자가 죽어가는 듯한 허름한 공간에 살림을 차려 간신히 생의 공간으로 버티고 사는 것과 유사하게, 여자가 의존하는 손전등 불빛 역시 죽어버린 공간인 폐건물에 간신히 생의 가능성을 불어넣는 듯하다. 그들은 그렇게 죽음의 공간에 간신히 생을 불어넣어 버텨야 하는 인물들이다.)에 의지해 걷다가 그곳의 개들에게 가족처럼 이름을 불러가며 안부를 묻는다. 여기서 마트 여자는 밤 시간마다 맞게 되는 아이들의 부재를 개들의 존재로 채워 보려는 듯하다. 아이들의 존재가 개들의 존재와 동일시될 때, 우리는 여자와 남자 사이를 오가며 마트에서 식사와 용변을 해결하고 허름한 방에서 잠을 자는 아이들이, 나아가 낮엔 마트에서 일하고 밤엔 폐건물을 헤매는 여자가, 그리고 낮엔 인간 광고판으로 일하고 밤엔 허름한 방구석으로 향하는 남자가 모두 '떠돌이 개'의 신세나 다름없음을 알게 된다.

 

  여자가 아이들이 부재한 밤 시간마다 폐건물을 돌아 다니고 개의 존재로 스스로를 위로한다면, 남자는 아이들이 자신의 옆에 부재한 낮 시간마다 늘 인간 광고판으로 아파트를 홍보하며 집에 대한 갈망을 내보인다. 그는 낮 시간마다 맞게 되는 아이들의 부재를 '안온한 집, 온전한 가정에 대한 갈망'으로 채우는 듯하다. 이러한 갈망은 남자가 낮 시간에 일을 하는 대신 표지판을 짊어지고 모델 하우스에 드어가 낮잠을 청하는 부분에서 극대화된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밤 숏에서 아이들의 옆에 누웠으나 잠들지 못하던 그는, 아이들과 자신 사이에 누워 그 가정에 부재해 있는 아내, 어머니를 대신하고 있는 양배추(아이들이 양배추를 성인 여성 형상으로 꾸며 두었다.)를 마구 물어뜯으며 울부짖는다. 온전한 가정의 부재가 그를 그토록 좌절케 한다.

 

  낮과 밤, 분명 이어져 있으나 숏으로 분화된 시간. 허름한 방과 폐건물, 무척이나 유사한 죽음의 공간이지만 다시 숏으로 분화된 공간. 한 어머니에게서 소풍 나오듯 떠나온 아이들은 그 분화된, 파편화된 시공간을 따라 날마다 또 한 명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오가며 매일의 소풍을 이어간다. 이를 통해 영화는 어머니의 존재를 명확히 규정지을 수 없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공존할 수도 없으며, 집이라는 공간을 끝없이 갈망하거나 혹은 떠돌이 개나 양배추로 부재한 가족 구성원을 보충해 가면서까지 가정 내 결핍을 채워보려 허망한 시도를 이어가야 하는, 한 가족의 파편화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제시하는 데 있어서 영화는 매 숏을 롱테이크로 구성하는 한 편, 숏들의 연결에 있어서 시간적, 공간적 연결성을 거의 고려하지 않으며 부러 각각의 숏들을 파편화한다. 이처럼 파편화된 각각의 숏들은 각각의 숏 내부에서의 시간을 롱테이크의 방식으로 연장시킴으로써, 온전한 가정을 이루지 못하는 그 쓸쓸하며 괴로운 결핍과 인내의 시간을 관객이 직접 체험하도록 한다.

 

  그런데 이 파편화된 숏들, 그 중에서도 거의 연결되는 일이 없는 남자의 숏과 마트 여자의 숏이 독특하게도 운동의 연속성 하에서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아들이 잠에서 깨더니 화장실에 가고 싶다 말하자 남자가 그를 데리고 나선다. 분명 그들이 어디론가 향해 가는 과정의 숏은 존재하는데, 우리는 그들이 화장실에 도달해 변을 보는 모습은 보지 못한다. 대신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마트 여자가 소변을 보는 모습이다. 그녀는 이전 숏에서 부자가 걷던 그 공간과 유사한 폐건물을 걷다, 갑자기 콘크리트 벽에 산과 강 등이 새겨진 그림에 빛이 향하도록 손전등을 놓고는 바닥에 앉아 소변을 본다. 배변을 위해 화장실로 향하던 것은 남자와 아들인데, 그 운동의 연속성 하에서 배변 활동을 완성시키는 것은 마트 여성이다.

 

  영화 초반, 인간 광고판 일을 하던 남자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숏이 있다. 이때 그 남자는 (마치 중국 본토에서 대만으로 흘러 들어온 외성인이 본토를 그리듯) 돌아갈 수 없는 옛 고국, 고향을 그리는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또 다른 숏에서 남자는 갈대풀 사이로 성기를 드러내고 소변을 본다.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배변 행위', 이 두 가지 요소가 두 개의 서로 다른 숏에 걸쳐 남자의 행위로 드러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마트 여자가 소변을 보는 숏에서 여자가 마주한 콘크리트 벽화는 가짜 산천을 콘크리트 벽 위에 표현함으로써 이를 마치 돌아갈 수 없는 공간처럼 묘사하고 있다. 여자는 이 벽화에 불빛을 비춘 채 소변을 봄으로써 남자가 두 가지 다른 숏에 걸쳐 보인 바 있는 두 가지 요소를 하나의 숏 안에 수렴시키는 방식으로 다시 남자와 연결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영화 내에서 가장 이질적인 연결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이 부분에서 차이밍량은 꽤 의미심장한 암시를 던진다. 남자의 숏에서 벽에 걸려 있던, 장제스로 보이는 이의 사진(혹은 초상화)이 마트 여자가 등장하는 숏에서는 바닥에 떨어져 있으며 곧 여자의 발에 밟힌다. 장제스를 따라 중국 본토로부터 대만으로 떠나 온 외성인들에게 있어서, 대만이라는 공간은 그 자체로 새로운 집인 동시에 진짜 집, 고향의 결핍을 상기시키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차이밍량은 대만이라는 국가의 역사는 그 시작부터 '집의 결핍'을 안고 시작했다는 암시를 남자의 숏과 여자의 숏의 이질적인 연결을 통해 부각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 그 역사의 연장선 상에서, 남자의 광고판으로 대표되는 개발, 산업화, 자본주의라는 시대의 흐름은 이 영화 속 인물들이 보여주듯 경제적으로 하층 계급에 속하는 이들을 '떠돌이 개'나 다름없는 형편으로 몰아가며 사회로부터 소외시키고 있다. 그것이 영화적 언어로 구현된 파편화를 통해 한 번 드러나고, 자본주의의 암부를 보여주는 죽음의 공간, 폐건물에서 그간 파편화되어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공간이 '용변'이라는 행위를 매개 삼아 잠시 연결됨으로써 다시 한 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모델 하우스에서 잠을 자고 양배추를 물어 뜯고 집어삼키며 가정에 대한 갈망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뒤, 남자는 대뜸 비를 뚫고 아이들과 함께 보트에 오르려 한다. 집을 마련하지 못하며 가족 구성원의 부재도 채우지 못했다는, 가장으로서의 무능함에 대한 자기 인식에서 더 이상 벗어나지 못하게 되자, 그는 아예 삶의 터전 자체를 바꿈으로써 무익한 도주를 시도하려 한 듯 보인다. 그런데 이때 풀숲에서 등장한 마트 여자가 아이들을 데려가 버린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여자가 부르자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그녀에게 가 버린다. 남자는 보트에 나동그라져 울부짖으며 떠내려 가고, 마트 여인은 아이들을 양팔로 감싸 안는다. 남자와 여자가 드디어 만난 이 순간, 남자는 밤의 영역에서마저 아이들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아이들은 이렇게 다시 한 번 소풍을 떠나는 셈이고, 가족은 가장의 소외라는 또 다른 양상으로 다시 한 번 파편화된다.

 

  그러나 다음 숏에서 촛불이 켜지면, 어찌된 영문인지 남자와 아이들, 그리고 새로운 여자 한 명이 한 공간(이 공간은 첫 번째 여자가 등장한 그 첫 숏의 공간과 유사하다.)에 모여 있는데, 그것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한 프레임 안에 모든 구성원이 등장하는 상태로 제시된다. 아이들을 품에 안았던 마트 여자는 어디로 갔는지, 새로 나타난 여자의 정체는 무엇인지, 아이들과 그 여자와 남자가 어떻게 그 집에 함께 있게 된 것인지, 그 숏의 시점이 이전 내용의 과거인지 혹은 이전 내용으로부터 이어지는 현재인지, 그것도 아니면 훨씬 미래의 일인지, 그 무엇도 설명되지 않기에 숏 간의 단절이 또 한 번 부각된다.

 

  새로 등장한 세 번째 여자는 어머니 역할을 이어받은 것처럼, 아이들과 나란히 소파에 앉아 남자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한 번은 자국어로, 한 번은 영어로 불러준다. 얼핏 화목해 보이지만 어색함이 감도는 정경. 그 뒤의 숏들에서 아이들이 그 여자를 직접 '엄마'라 칭하기까지 하는 것을 고려하면, 이 숏에서의 아버지, 어머니, 두 아이의 공존은 일견 모두가 바라던 가족의 회복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트 여자가 아이들을 남자에게 빼앗아 안은 순간의 연장선 상에서, 세 번째 여인은 아이들과 나란히 붙어 앉아 남자를 마주 보고 있고 남자는 기뻐 보이지도 않는 표정으로 멀뚱히 서서 이들을 쳐다만 볼 뿐 그 무리에 온전히 포섭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러한 가족의 모습조차도, 소원을 빌라는 여자와 아이들의 성화에 남자가 촛불을 후 불면 모두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전까지 남자의 소원은 집이라는 공간의 획득과 온전한 가정의 회복인 듯 보였다. 그러나 이제 남자가 소원을 비는 순간은 외형상 회복된 것처럼 보이는 가족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과 동일시된다. 그렇다. 여전히 가정은 온전한 형태로 회복되지 못한 것이다. 카메라는 한 프레임 안에 그들을 공존시키면서도 다시 그 안에 보이지 않는 벽을 세워 두었고, 따라서 그들은 여전히 파편화되어 있다.

 

  이후의 한 숏에서 카메라는 집안 벽에 가득한 얼룩을 훑는다. 보이스오버로 들리는 딸과 어머니의 대화에서, 세 번째 여자는 얼룩이 생긴 원인을 묻는 딸의 질문에 '비가 내려 집이 우는 것'이라 답한다. 마침내 획득한 듯 보였던 집이라는 공간은 비조차도 제대로 막아주지 못할 만큼 허약하다. 촛불이 켜질 때 피어올랐던 온전한 가정이라는 허상은 촛불이 꺼지듯, 허약한 집의 형태로, 집이란 공간 자체가 '울고 있다'는 언급으로 모두 깨지고 만다. 바로 이전 숏에서 나란히 누워 있던 딸과 어머니의 얼굴이 다음 숏에서 집의 눈물이라는 얼룩의 모습으로 치환되는 연결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여전히 불완전한 가정 내에서 가장의 소외라는 형태로 파편화된 가족의 모습은 또 다른 숏에서 다시 재현되기도 한다. 어머니와 두 아이가 프레임 우편 식탁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반면 아버지는 홀로 프레임 왼편 소파에 누워 있다. 한 프레임 안에 공존하고 있지만 갈라져 있는 듯한 이 두 세계는, 식탁에서 일어나 아버지에게 과일을 건네는 딸의 행위로 간신히 봉합된다. 그러나 딸은 다시 식탁으로 돌아가고, 아버지가 그 과일을 먹는 행위는 한참 뒤에나 일어난다.

 

  이처럼 지속적인 가정 내 파편화의 양상을 보여주던 영화는, 세 번째 여자가 손전등을 들고 폐건물 안을 걸어가고 남자가 그 뒤를 따르는 장면을 제시함으로써, 그 집이라는 공간 자체를 다시 죽은 공간으로 치환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그들이 이른 곳은 두 번째 여자(마트 여자)가 소변을 본 바로 그 콘크리트 벽화의 공간이다. 숏의 연결로 보아 우리는 그 공간이 방금 전까지 가족이 머물던 얼룩진 벽의 집과 이어진 공간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세 번째 여자와 가족들이 머물던 공간은 첫 번째 여자가 머물던 첫 숏의 공간과 유사하다. 즉, 첫 번째 여자, 두 번째 여자, 세 번째 여자로 대표되는 공간들은 모두 이어진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어쩌면 그 세 여자도 세 명이면서 동시에 한 명, 다시 말해, 한 사람의 세 가지 파편들인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아이들의 '소풍'은 어머니의 첫 번째 파편으로부터 출발해 아버지와 어머니의 두 번째 파편 사이를 밤낮으로 오가다 어머니의 세 번째 파편에 이르는, 결국 제자리에서 뱅뱅 헛도는 과정에 불과했던 것이다. 차이밍량에게 있어 현대 대만이라는 공간은, 이처럼 아버지 가장은 가정으로부터 소외되고, 어머니는 하나의 온전한 존재로 대우받기보다는 파편화된 껍데기로 남으며, 아이들은 제대로 사랑받을 새도 없이 제자리에서 헤맬 뿐 영영 성장하지 못하는, 영원히 화합할 수 없는 가족이란 허상에 사로잡힌 떠돌이 개들의 공간인 것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콘크리트 벽화 앞 공간에서 진행된다. 세 번째 여자가 앞에, 남자가 뒤에 나란히 선 모습을, 멈춰선 카메라가 45도 각도로 가만히 바라보는 십여 분 간의 롱테이크. 그 길고 긴 시간 동안 여자는 가끔 눈물을 흘리고 남자는 가끔 술을 들이킬 뿐,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않고 그저 서 있기만 한다. 파편화된 숏 구성으로 파편화된 가족의 양상을 보여주고 각각의 숏을 롱테이크로 채움으로써 파편화된 자신의 가정을 확인하는 극중 인물들의 지독한 자각의 순간을 관객에게 전이하던 영화는, 이 클라이맥스에서 그 감각의 전이의 궁극적 수준에 이른다. 그들은 부부로서 앞뒤로 나란히 서 있지만 서로 마주 보지도, 말을 걸지도 못하고 가만히 선 채로 외로움, 쓸쓸함, 어색함, 난처함, 막막함, 조바심, 걱정, 지난 날의 후회 등을 그 오랜 시간 동안 견뎌 낸 뒤 어떠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차이밍량은 그 괴로운 시간을 조금도 끊거나 외면하지 않고 직시함으로써 관객이 그들의 복잡한 심리를 오롯이 체험하도록 한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전달하는, 어쩌면 지루하고 괴롭지만 그만큼 충격적이고도 놀라운 이 체험은 근래 어떤 영화에서도 겪어본 바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 끝에 마침내 남자는 여자를 뒤에서 껴안지만, 카메라가 그 공간을 내려다 보는 시점의 다음 숏에서 여자는 그 손을 뿌리치고 그 공간을 나선다. 손전등은 여전히 그 콘크리트 벽화를 비추고 있다. 남자는 혼자 황망히 그림을 마주한 채 서 있다가 마지막 술 한 모금을 마시곤 술병을 던져 버린다. 그리고 곧 그도 그 공간을 떠나면, 이제 카메라만이 그곳에 남아 콘크리트 벽화와 그 공간을 가만히 내려다 보고 있다.

 

  콘크리트 벽에 새겨진 산과 들과 강처럼 이 회색빛 도시에서는 이제 가족과 가정도 신화가 되고 말았다. 차이밍량은 그 신화의 허상을 영화적 언어로 구현해 낸 뒤, 그 허상에 취해 있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영화 속 인물들의 심리를 전이시킴으로써 관객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고자 한다. 차이밍량에게 있어 이 영화의 낯선 언어는 익숙한 현재를 낯설게 보기 위해서 지극히 당연히 요구되는 수단이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언어를 통해 그가 써 내려 간, 공간과 그 안의 관계에 대한 영화적 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설 때 맞이한 도시의 풍경이 그날따라 유난히 더 회색빛으로 느껴졌던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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