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경주

2014.06.24 01:17

menaceT 조회 수:5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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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2013)
 
6월 22일, 씨네큐브 광화문.
 
 
(스포일러 있음)
 
  얼마 전에 본 파올로 소렌티노의 영화 ‘그레이트 뷰티’는 로마를 죽음의 공간으로 제시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영화를 본 뒤 기말고사를 끝내고 처음 극장에서 가서 보게 된 영화, ‘경주’도 경주라는 공간을 죽음의 공간으로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레이트 뷰티’에서 묘사하는 로마가, 예술의 잘못된 소비 방식으로 인해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서히 죽음으로 향해 가는 공간이라 한다면, 영화 ‘경주’ 속의 공간 경주가 죽음을 품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영화 ‘경주’가 그리고 있는 경주는 여러 모로 독특한 공간이다. 옛 능들이 상징하는 과거의 죽음의 기억이 현재의 생과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는 공간이 바로 경주이다. 그곳에서는 능 앞에서 어린 학생들이 과감하게 뽀뽀를 하고 그 옆으로 더 어린 꼬마들이 뛰어다니는 풍경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현이 윤희의 집에서 잠을 잘 때도, 카메라는 삶의 공간과 능들이 공존하고 있는 경주의 풍경을 패닝으로 보여준다. 또한 극중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이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경주가 죽음을 품고 있는 공간임을 잘 드러내고 있다. 형사 영민은 모녀 자살 사건을 맡게 된다. 플로리스트 강 선생(류승완 감독이 까메오로 출연한다.)은 휴지로 흰 꽃을 만들어 윤희에게 선물하는데, 휴지로 만든 꽃이니 그 꽃은 이미 그 자체로 죽어 있는 꽃이며 더군다나 흰 꽃은 주로 죽음과 그에 대한 애도를 상징한다. 하필이면 강 선생은 윤희가 노고지리의 ‘찻잔’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그 꽃을 선물한다. 그런데 ‘차’라는 것도 결국에는 꽃잎 등을 따다 그 죽은 흔적들을 말려다 다시 우려내어 그 맛을 즐긴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죽은 것에 대한 기억, 애도와 연결된 상징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윤희 역시 죽음과 관련되어 있음이 드러나는데, 이 점은 그의 남편의 죽음이 이야기되는 순간 더욱 강화된다.
 
  경주에 머무르고 있던 그들 외에, 외부에서 경주로 흘러 들어온 이들 역시 ‘죽음’에 이끌려 경주로 왔다고 할 수 있다. 현의 연락을 받고 경주로 온 여정은 기껏 서울에서 경주까지 와 놓고서도 현에게 쌀쌀맞기 그지없다. 그러던 그녀가 점집에서 ‘앞으로 아이가 없다’는 말을 듣더니, 다시 서울로 올라가기 전, 사실 현에게 낙태해야 했던 현의 아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는 결국 그 아이의 ‘죽음’을 현에게 이야기하고 그 책임을 묻기 위해 경주에 온 셈이다. 현과 두 번에 걸쳐 마주친 모녀의 경우는, 현과의 첫 만남 장소를 고려하면, 자살을 위해 굳이 경주까지 내려온 외지인이라 볼 수 있다. 주인공 최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친하게 지냈던 형 창희의 장례식을 찾았다가 그 형과의 경주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고 경주로 온다. 여기서 영화가 배경 공간으로 오로지 장례식장과 경주, 두 공간만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의 동선을 따라 영화는 장례식장에서 경주로 이동하지만, 그 중간 과정은 모조리 생략함으로써 장례식장과 경주를 사실상 동일시한다. 결국 경주라는 공간 자체가 장례식장이 그렇듯 죽음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공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경주는 이렇게 누군가의 생의 터전이 되는 동시에 죽음을 기억하며 애도하는 공간이 됨으로써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러나 극중에서 묘사되는 경주의 특이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공간은 한국에 속해 있는 지역으로서의 ‘경주’인 동시에 한국, 일본, 중국이 뒤섞여 일종의 무국적의 공간처럼 제시된다. 작중 두 주요 인물인 최현과 공윤희는 모두 중국과 연이 있는 존재들이다. 최현은 북경에서 교수 일을 하며 중국인 아내와 살다가 경주에 온 사람이고, 공윤희는 공자의 후손이라 한다. 이들의 중국 관련 대화가 경주를 배경으로 아무렇지 않게 꽤 오래 진행된다. 그런가 하면 일본인 관광객이 등장해 윤희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이들도 지나가는 단역 치고는 그리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스크린을 채우고 있다.
 
  또한 경주는 예술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공간이기도 하다. 작중에서 박 교수(백현진이 까메오 출연했다.)는 최현의 이름이 실제 북한의 장군 이름과 같다고 말한다. 그냥 지나가는 대사일 수도 있지만, 엔딩 크레딧에서 드러나듯 공윤희, 김여정 등 작중 주요 인물들의 이름을 실제 인물의 이름에서 따 왔다는 것을 보면, 그 대사도 허투루 지나칠 수가 없다. 한 편, 박해일이 연기하는 최현 캐릭터는 작중에서 여러 번 ‘잘생겼다’는 칭찬을 듣고 심지어 일본인 관광객들에게는 ‘배우’로 오인된다. 수많은 영화들에 미남, 미녀 배우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은 그 영화 속에서 ‘일반인’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조금 후줄근한 옷을 입거나 행색이 추레하다는 이유만으로 작중에서 ‘못생겼다’고 이야기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런 점을 고려할 때 박해일이 연기한 최현의 행색이 그다지 깔끔하지 않은데도 ‘잘생겼다’, 특히 ‘배우 같다’는 칭찬을 지속적으로 듣게 하는 것은, 어떤 의도 하의 선택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즉, 최현, 공윤희, 김여정 등의 이름이 현실의 이름들과 매치되고, 최현 캐릭터와 배우 박해일의 경계 사이가 흐릿해지는 등 영화 속 경주는 계속해서 현실과 예술, 혹은 환상의 경계를 흐리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 국적의 경계, 예술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한국이라는 특정 국가의 특정 도시가 아닌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에 위치한 미지의 공간처럼 그려지는 경주는 반복 안에 갇힌 공간이기도 하다. 수많은 요소들이 반복되는데, 이러한 반복은 경주를 더더욱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으로 변형시킨다. 그런데 이 반복은 극중에서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모녀와 폭주족, 점집 등이 반복해서 등장할 때, 이들은 모두 두 번째 등장하는 순간 ‘죽어 버린다’. 한 편, 존재하지 않는다던 돌다리는 어느새 최현의 발 밑에 위치해 있고, 최현이 안내원과 대화 중 천둥 소리를 듣고 ‘이것이 천둥 소리가 아니라 북한의 포 소리일 수도 있다’고 언급한 것은 당시에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되지만, 후에 북한학 교수의 등장으로 묘하게 뒤틀린 채 재현되기도 한다. 반복은 이렇게 산 것을 죽은 것으로, 죽은 것을 산 것으로 전복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삶과 죽음을 뒤트는 이러한 반복의 존재는 경주를 흡사 ‘연옥’과 같은 공간으로 만들어 놓는다.
 
  이제 이 연옥과도 같은 경주로 이끌려 들어온 주인공 최현을 보자. 최현은 창희의 죽음에 이끌려 경주로 흘러 들어온다. 그렇게 ‘죽음’으로 시작된 그의 경주 여행은, 주로 여성을 따라 흘러간다. 그는 경주에 도착해서는 바로 여정을 부른다. 술에 취한 여정을 집에 데려가 섹스를 한 뒤 책임도 지지 않았던 과거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여자의 관계에 그리 진중한 성격이 되지 못하는 듯하다. 그가 여정을 경주로 불러냈을 때만 해도 여전히 그는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차가운 여정의 태도에 현의 의도는 그 결실을 보지 못하고, 외려 여정에게 ‘내가 이번에도 또 같이 자야겠냐’며 타박을 듣고는 민망스럽게 사과를 한다. 그리고 이 둘의 만남을 최종적으로 마무리 짓는 것은 낙태, 즉,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정의 관계가 그렇게 ‘죽음’으로 마무리된 뒤부터, 현의 경주 여행을 이끌어 가는 여인은 윤희이다. 현은 죽은 창희와 관련된 그 춘화를 찾으려다 윤희와 연이 닿게 되었으니 윤희와의 연은 처음부터 ‘죽음’과 관련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윤희는 그 존재 자체가 어딘가 모호하다. 차가 내포하는 의미로 볼 때 그녀는 죽음과 가까운 존재라고 볼 수 있는데, 현이 아리솔 찻집 바깥 쪽에서 찻집 안 윤희 쪽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은 뒤 그 사진을 확인하니 윤희의 모습이 찍혀 있지 않을 때 그녀의 존재와 ‘죽음’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진다. ‘경주의 여신’이라는 윤희의 별명이나, 죽은 뒤 경주의 능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그녀의 언급을 듣다 보면, 그녀의 존재가 삶과 죽음의 경계 사이에 선 경주라는 공간 그 자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현은 여정을 대할 때 보였던 여성에 대한 무책임한 자세와는 달리, 윤희를 대하는 데 있어서 계속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한다. 윤희가 자신의 집에 현을 들인 뒤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자주 이래요?’라고 물을 때도 현은 그럴 것 같아 보이냐고 되묻는다. 그리고 그녀의 가장 내밀한 공간인 그녀의 집에서 현은 그녀의 남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또한 그녀의 남편이 죽기 전에 전시해 두었다던 한시를 읊게 되기도 하는데, ‘사람들 다 흩어지고’로 시작하는 그 한시는 마치 ‘죽음’ 뒤의 풍경을 묘사한 듯하다. 이렇게 그녀의 공간에서 두 번에 걸쳐 죽음을 접한 현은, 살짝 열린 그녀의 방문 앞에서 고민하다 결국 그녀와 동침하기를 포기하고 그 집을 나선다.
 
  현이 경주로 불러낸 여정도, 현이 경주에서 만난 윤희도 모두 ‘죽음’과 관련된 암시로 그 관계가 종결되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남은 여인은 중국인 아내뿐일 것이다. 그리고 윤희의 집을 나서기 직전, 그는 중국인 아내의 음성 메시지를 듣게 된다. 사실 중국인 아내가 뒤에서 지켜보는 것 같다며 담배를 피우지 않고 향만 맡던 현이 여정을 서울로 떠나 보내고 담배를 두 개나 피우던 순간부터 그에게 중국인 아내의 존재는 상당히 흐릿해져 있었다. 그런데 음성 메시지 내용으로 보건대, 그의 아내 역시 현을 그리워하기는 하지만 그가 북경으로 돌아올 거라 기대하지는 않는 듯하다. 이때 음성 메시지 상에서 현의 아내는 현이 좋아하는 노래라며 ‘모리화(자스민 꽃)’라는 민요를 부른다. ‘모리화’는 하얀 자스민 꽃이 핀 차밭을 배경으로 한 중국 강소 지방의 민요로, 자스민 차를 위해 찻잎을 따며 불렀던 노동요로 추정된다고 한다. ‘차’라는 소재가 영화 내에서 가지는 의미를 따지고 보면, 결국 이 ‘모리화’를 부르는 행위 역시 ‘죽음’과 연관된 행위라 할 수 있다. 중국인 아내가 단 한 번도 화면 상에 등장하지 않고 이렇게 ‘음성’ 메시지라는 청각적 정보로만 등장한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은 윤희에게서 죽은 남편과 귀가 닮았다는 말을 듣는다. 그렇게 죽은 자와 관련된 귀라는 신체 기관으로만 감각할 수 있는 정보로만 중국인 아내가 등장한다면, 결국 그 음성 메시지 자체를 ‘죽음’과 연관시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렇게 현은 ‘죽음’을 바탕으로 경주에 들어와 세 여성들과의 관계를 차례차례 거치게 되지만, 그 관계는 모두 ‘죽음’과 관련된 무언가를 통해 종결된다. 그는 중국인 아내의 음성 메시지를 듣지만 북경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여정의 남편이 그를 쫓고 있다는 여정의 연락을 듣고 그에게서 도망치고자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주를 떠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점집을 다시 찾지만 점집 할아버지가 ‘이미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폭주족을 다시 만나는데 그 폭주족들은 그의 앞에서 ‘죽는다’. 그 죽음들로부터 달아나려 하면서도 경주를 벗어나지는 못하던 현은 어느새 돌다리 위에 서 있다. 물은 죄다 말라 있지만, 그는 7년 전 취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물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돌다리에서 그 물이 말라버린, 그러나 물소리는 여전히 들려오는 그곳으로 뛰어든다. 실제로는 물이 없지만 그에게만은 물소리가 들려온다는 점에서, 그는 상징적 영역에서 그 모녀가 그랬듯 물에 뛰어들어 자살한 셈이다. 이를 증명하듯, 현은 풀숲을 헤매다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이때 현이 사라지자, 그때까지 한 번도 주체성을 지니고 움직인 적이 없던 카메라가 갑자기 핸드헬드로, 마치 누군가의 시야인 것처럼 주체성을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치 ‘생’의 에너지가 현에게서 그를 지켜보던 카메라에게로 옮겨간 것처럼. 그렇다면 이로써 현의 죽음은 더욱 명확해진다.
 
  그러나 ‘죽음’에서 시작해 연옥 같은 경주에 갇힌 채 ‘죽음’과 엮이며 맴돌다 끝내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현의 여정은 어느 정도 미리 예견된 바 있다. 현이 장례식장을 찾았을 때 현의 친구는 그가 아내를 만난 뒤 두문불출하느라 친구들을 잘 만나지도 않았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아내를 만난 뒤 친구들을 잘 만나지 않은 것은, 중국인 아내와 결혼해 북경대 교수로 지내느라 한국을 수 년간 찾지 않은 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친구는 아무래도 창희의 아내가 기가 세서 그 때문에 창희가 죽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덧붙이기도 하는데, 이 이야기는 후에 여정이 ‘중국 여자는 기가 세다’ 운운하며 현의 아내도 그렇지 않냐고 묻는 것으로 재현된다. 한 편, 현은 아리솔에서 차를 마시던 중 창희의 아내의 환영을 보게 되는데, 여기서 창희의 아내는 현에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는 대승들처럼 창희 역시 스스로 죽음의 날을 택한 셈이라며, 현에게 이를 이해할 수 있지 않느냐고 공감을 구한다. 그러자 현은 공감의 표시로 창희의 아내의 손을 잡는다. 창희와 현의 유사성, 그리고 창희의 아내의 환영이 하는 말을 두고 볼 때, 어쩌면 현이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의 죽음’에 이끌려 이 연옥으로 흘러 들어왔는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그가 경주에 들어온 뒤 그가 계속해서 죽음에 엮인 것, 그로부터 탈출하려 하면서도 경주를 벗어나진 않은 것, 결국 최종적으로 상징적 죽음에 이른 과정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현은 윤희와의 동침을 포기하는 그 시점에 대뜸 초에 불을 밝히더니 이를 입김으로 불어 끄려 한다. 담배의 향만을 맡다가 마침내 담배에 불을 붙여 두 개피나 피웠던 행위의 연장선 상에서 이 불을 끄는 행위를 보면, 이는 마치 향에 불을 피워 장례를 치르다 마침내 그 불을 끄는 행위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의 경주 행은 창희의 장례식의 연장선 상에서 마치 그의 죽음을 기억하고 기리듯 시작되었다. 어쩌면 경주 그 자체나 다름없던 윤희와의 관계가 끝난 그 시점에서 현은 초를 불어 끔으로써 창희에 대한 애도 작업을 모두 마무리하고 창희와 닮은 본인 스스로의 죽음을 위한 최종 단계에 본격적으로 이르게 것인지도 모른다.
 
  현의 죽음 뒤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된 카메라는 이제 윤희에게로 넘어간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려 경주를 헤매다 끝내 죽음으로 향하게 된 현이 사라지자, 경주 그 자체나 다름없는 윤희를 비추는 것이다. 경주가 능들을 통해 죽음을 생의 영역 안에 공존시키며 기억하는 것처럼, 윤희는 갑자기 아리솔의 벽을 뜯어 죽은 현의 옛 기억이 담긴 춘화를 다시 생의 영역으로 끌어내려 한다. 벽이 뜯기는 순간, 암전. 그리고 다음 숏은 창희, 현이 아직 모두 살아 있던 7년 전의 아리솔을 보여준다. 이 숏에서 우리는 몇 가지 점들을 확인할 수 있다. 크레딧에 따르면 제목부터가 ‘경주’인, 그리고 이전에 현이 언급한 바에 따르면 애초부터 그 공간과 하나인 것 같다던 그 춘화는 성관계 중인 남녀와 학 한 마리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런데 춘화 속 남자가 입은 옷의 색은 창희가 입은 옷의 색과 같고, 춘화 속 여성이 입은 옷의 색은 현이 입은 옷의 색과 같다(그리고 다른 인물들은 춘화 속 여성이 현과 닮았다며 현을 놀린다.). 그렇다면 삽입을 통해 일체화된 춘화 속 남녀를 통해 창희와 현의 동일성이, 그리고 현이 자신의 죽음에 이끌려 경주에 왔음이 다시 한 번 강조되는 셈이다.
 
  한 편, 그 장면에서 아리솔의 주인은 여전히 신민아가 연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윤희는 3년 전부터 가게를 이어 받았다고 했으니 그 주인이 윤희는 아닐 것이다. 현이 춘화가 언제 그려졌는지를 물었을 때 윤희가 ‘예쁜 전 주인’을 언급했던 것을 떠올려 보면, 바로 그 예쁜 전 주인이 공교롭게도 윤희와 매우 닮은 것이리라. 이때 그 아리솔 주인은 흰색 웃옷과 검은색 아래옷을 입고 있는데 이는 춘화 속 학의 모습과 닮아 있다. 현이 처음 경주에 도착했을 때 학이 날아가는 모습이 화면에 등장한 바 있음을 떠올려 보면, 학은 곧 경주의 공간성을 대변하는 사물이라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인물인데도 같은 ‘윤희의 형상’으로 그려진다는 점은 윤희라는 인물의 모호성을 더욱 부각시키며, 그녀가 학과 동일시된다는 점은 윤희가 경주 그 자체를 상징하고 있으리라는 예측에 심증을 더한다. 학을 닮은, 경주 그 자체나 다름없는 주인이 ‘죽음’을 담지하고 있는 차를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창희와 현에게 건네는 이 숏. 여기서 현이 웃기 시작하니 다른 이들도 따라 웃는다. 이 숏은 7년 전 경주에 처음 온 순간부터 그들의 운명이 정해져 있었음을, 그들은 어쩌면 그때부터 ‘죽음을 선택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음’을 명확히 보여줌으로써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영화는 이처럼 경주를 배경으로 하되 이 공간을 현실로부터 유리된 영화적 공간으로 구현하고는, 이 위에서 죽음에 대한 환상적인 이야기를 펼쳐낸다. 재치 있으면서도 음산하고, 느릿하고 여유로운 듯하면서도 긴장감이 감돌고, 현실적인 듯하면서도 비현실적이기 짝이 없는 이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들은 마치 죽음을 품고 있는 어떤 이계의 공간에 다녀 온 것 같은 기묘한 심사에 사로잡히게 된다. 영화를 그 자체로 공간화해 관객들을 이 안에 가두었다 풀어주곤 하는, 데이빗 린치의 영화에서 기대할 법한 그러한 마법이, 바로 이 장률의 ‘경주’에도 서려 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놀라움. 그러나 장률의 ‘경주’가 가지는 의미는 단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장률의 필모그래피 상에서 이 영화를 재조명할 때 이 영화가 지니는 의미는 훨씬 커진다.
 
  조선족 자치주에서 태어난 장률 감독은 그간 조선족, 중국 내 소수 민족, 여성, 노동자, 탈북자 등 한반도와 중국 대륙의 약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덤덤하게 드러내는 영화들을 만들어 왔다. 그는 ‘두만강’까지는 쭉 극영화를 찍어 오다, 그 이후 ‘풍경’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찍고, 다시 ‘경주’를 통해 극영화의 영역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그의 필모 상의 여정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극영화라면 그것이 아무리 리얼리즘의 탈을 쓰고 있다고 한들 결국엔 현실을 가공한 것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조선족으로서 한국인의 정체성, 중국인의 정체성을 모두 지니되 양쪽에서 모두 소수자, 약자일 수밖에 없던 그가 한반도와 중국의 소수자, 약자의 이야기를 극영화로 그려내는 것에는 분명 영화로서 그들의 참담한 현실을 수많은 관객들에게 인지시키고 어떻게든 그 현실에 변화를 주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 있을 것이라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극영화가 애초부터 현실을 가공해야 한다는 한계 때문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없다면, 과연 극영화가 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올바른 방법론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고민을 오래도록 해 왔던 것일까? 장률은 ‘경주’ 이전의 마지막 극영화였던 ‘두만강’을 찍은 뒤 영화 작업을 그만둘 것을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영화 작업을 그만두는 대신, 다음 작품으로 첫 다큐멘터리 영화인 ‘풍경’을 내놓는다. 어떻게 본다면 방법론의 전환을 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다큐멘터리 ‘풍경’으로 직접 한국 내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직접 카메라 안에 담는다. 그러나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것은 ‘현실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다큐멘터리 역시 현실의 것들을 취사 선택하여 카메라 안에 담는 것이기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배우들 대신 실제 인물들의 삶을 조명해 현실과 더욱 유사한 외피를 뒤집어 쓰고 있는 다큐멘터리는 관객에게 자신이 보여주는 것이 곧 현실인 양 관객을 호도할 위험성이 훨씬 크다. 그래서일까? 그는 ‘경주’에서 다시 극영화의 영역으로 돌아온다.
 
  ‘경주’의 주인공 최현은 춘화 속 여인과 닮아 있다는 점에서 여성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한국인이면서 중국인 아내를 두고 있는 중국의 대학 교수이며, 중국인 혹은 조선족으로 오해 받기도 한다. 그러나 최현은 춘화 속 여성을 닮았을 뿐이지 여성이 아닌 남성이며, 중국인이나 조선족으로 오해될 뿐 직접 여권을 내밀어 조선족이 아님을 증명하는 입장이다. 그러한 특성은 조선족이나 여성 등을 대변하고자 했던 장률의 영화들과 닮아 있다(물론 장률은 자신이 조선족이긴 하지만.). 장률의 영화들이 자신이 대변하고자 하는 이들의 삶을 프레임 안에 담아내려 했던 것처럼 최현은 경주에서 보는 풍경들마다 이를 사진으로 담아내려 한다. 극영화가, 다큐가 그렇듯이 사진도 살아 있는 현재의 것을 멈춰 있는, 다르게 말하면 ‘죽어 있는’ ‘과거’의 것으로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작중에서 최현이 사진 찍히는 객체가 되는 순간만 보아도, 그는 자기 자신이 아닌 ‘어떤 배우’로 ‘오해’ 받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최현은 결국 사진을 통해 그가 보는 경주를 그대로 담아내는 데 실패할 것이다.
 
  최현이 경주 안에서 움직이는 데 핵심이랄 수 있는 세 명의 여자들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윤진서가 연기한 한국인 여성 여정과, 최현의 중국인 아내의 경우를 보자. 장률은 중국을 배경으로 중국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중경’과 한국을 배경으로 한국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이리’를 한 묶음으로 찍은 바 있다. 공교롭게도 ‘이리’에서 여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가 윤진서였다. 최현이 여정의 사진을 찍지만 여정이 곧 그 사진을 지운다는 점, 최현의 중국인 아내가 단 한 번도 작중에서 ‘시각적으로’ 등장하지조차 않았다는 점은, 최현이 사진을 통해 자신이 담고자 하는 대상에 본질적으로 접근하는 데 실패함을 보여주고, 이는 곧 장률이 스스로 ‘중경’과 ‘이리’로 여성을 대변하고자 하는 데 실패했다는 자조로 읽힌다(여정은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최현에게 ‘기억해 줘서 고맙다’는 문자를 남긴다. 장률이 생각하기에 그의 영화는 늘 그러한 여성들의 처지를 ‘기억해’ 주었으나 거기서 정지했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윤희는 어떠한가? 윤희는 ‘경주의 여신’인 동시에 ‘공자의 후예’이다. 즉,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모두 갖춘 것이다. 이 점에서 그녀는 장률이 여태껏 영화로 대변하고자 하던 주 대상인 조선족들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현이 처음 윤희의 사진을 몰래 찍었을 때, 그 사진 속에 윤희의 모습은 없다. 그 이후에 다시 현이 아리솔 안에서 사진을 찍으려 할 때, 윤희는 사진 찍히는 것을 거부하고 현의 등 뒤에 붙은 채로 뱅뱅 돈다. 그렇게 현은(장률의 영화는) 윤희를(담고자 하는 대상을) 그토록 가까이 두고서도 프레임 안에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현은 그 이후로 의식적으로 윤희에게 카메라를 들이미는 대신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르며 그녀의 행동들을 모방하기 시작한다. 이는 영화가 현실을 모방함으로써 현실에 다가가려 하는 그 의지를 표현하는 듯하다. 그 모방의 끝에서 현은 윤희의 집에 들어서게 되지만 그곳에서 목도하는 것은 ‘죽음’의 흔적들이다. 그리고 거기서 윤희는 현의 귀가 자신의 죽은 남편과 닮아 관심을 가졌으나 직접 만져 보니 ‘전혀 다르다’는 말을 한다. 현은 마치 윤희의 죽은 남편을 대체할 수 있을 존재처럼 그녀의 집안까지 들어 왔으나 결국 그는 그녀의 죽은 남편을 오롯이 모방조차 할 수 없다. 모방의 방법론조차 실패로 돌아간 순간. 이제 현은 문틈 너머로 보이는 그녀를 갈망하지만 그 침실 내로 들어설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결국 영화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취할 수 없다. 현은 윤희의 침실에 들어가는 대신 초에 불을 밝히고는 입김으로 이를 끄려 한다. 현의 입김은 아리솔에서 금붕어들을 담아둔 물그릇에도 대단한 파문을 내지 못했고, 그 자리에서도 촛불 하나 끄는 것이 힘겨워 보인다. 장률에게 있어 자신의 영화가 현실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은 그만큼 버거워 보이는 듯하다
 
  여기서 잠깐 술자리 씬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술자리에서 현이 동북아 정치학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나고, 그에게 북한학을 가르치는 박 교수가 일대일로 대화를 시도한다. 동북아 정치학에 중국 영토와 한반도가 포섭되고, 또한 조선족을 비롯한 중국의 소수민족 이슈가 뗄래야 뗄 수 없는 이슈라는 점에서, 그리고 ‘두만강’에서 탈북자와 조선족들 간의 이야기가 다루어졌다는 점에서, 동북아 정치학 전공자이자 조선족으로 오해를 받기도 한 현과 북한학 전공주 박 교수의 대면 또한 장률의 필모그래피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 자리에서 현은 그들의 연구가 모두 ‘똥’ 같다고 말한다. 그들의 연구가 사실상 그 자체로 중국의 소수 민족들이나 북한 민중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담아낼 수도, 혹은 그 비참한 현실을 바꾸어 낼 수도 없다는 데서 오는 회의감 때문이라면, 그 점에서는 그들의 이야기를 다루던 장률의 영화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지도, 그렇다고 현실을 개선시킬 수도 없는 장률 자신의 영화들이 결국에는 ‘똥’이나 다름없다고, 그 씬을 통해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박 교수와의 대화를 마친 뒤 현이 과거의 허망함을 노래하는 술상남을 지켜보는 장면 역시 그러한 자조의 연속처럼 보인다.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변의 약자들의 비참한 현실에 눈뜨게 하고 그들에게 인식적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우선 그 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존 장률의 영화들은 이미 그가 어떤 영화를 만들고 있고 어떤 의도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는 평론가들과 특정 관걕층에 의해서만 제한적으로 향유되고 있지 않은가? 장률의 목적이 단순히 예술적 성취라면 그들에게만 향유되는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미학적으로 스스로의 영화를 발전시켜는 데서 만족해도 좋겠지만, 예술 안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까지 가 닿고 싶다면 근본적인 방법론의 전환이 필요할 것이다. 결국 현은 상징적으로 죽음을 택한다. 장률은 현실을 담아내는 데도, 변화시키는 데도 실패한 기존의 자신의 영화 방법론에 그렇게 ‘죽음’을 선언한다.
 
  그렇다고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이 죽은 다음에 오히려 카메라는 생동감을 가지고 움직이더니, 현이 영화를 주도하는 내내 객체로만 남아 있던 윤희를 주인공으로 승격시킨다. 그리고 윤희가 벽장을 뜯어 현의 과거의 기억이 얽힌 춘화를 끄집어내게 함으로써, 기존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영화적 재현의 객체가 영화적 재현의 주체를 기억 및 회상하게 한다. 카메라가 어떠한 인위로부터도 벗어나는 순간이, 그리고 영화적 재현의 객체로 갇혀 있던 것들이 그 관계를 전복시키고 주체가 되는 순간이 분명 언젠가 도래하리라고 장률은 기대하고 있다.
 
  ‘경주’는 이전 장률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스타 캐스팅, 음악의 적극적 사용, 장르적 외피의 차용 등이 눈에 띈다. 평론가들이나 특정 관객층에 의해 제한적으로 향유됨으로써 떠안을 수밖에 없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도입한 요소들임에 분명해 보인다. 그는 좀 더 폭넓은 관객들을 대상으로 한 이 영화에서, 기존의 방법론의 폐기를 선언하고 새로운 방법론을 예비한다. 춘화에 적혀 있던 ‘한 잔 하고 하세’라는 문구처럼, 장률은 삶과 죽음이 뒤섞인 경주라는 공간을 마련해 놓고 그곳에서 차를 마시듯 지나간 자신의 방법론을 재고하며 이에 죽음, 안녕을 고하고 새로 시작하기 위한 휴식, 과도기의 의미에서 영화를 그려낸 것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경주라는 공간이 현실 속 경주라는 공간의 재현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전혀 다른 무정형의 공간처럼 제시되어 관객들에게 색다른 공간적 체험을 선사한 것과 같이, 언젠가는 그가 늘 다루고자 했던 그 주제들 역시 전혀 다른 에너지로 현실까지 가 닿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함께, 그는 생과 사의 경계, 경주에 서서 그렇게 내일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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