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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 리뷰 게시판에 글 쓰는 거 오랜만이네요. 아마 글 쓰시는 분들 & 안 쓰시는 분들 모두 은연중에 느끼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이 게시판에는 어쩐지 앞뒤가 맞고 자체 완결성을 지닌 '리뷰'만 써야 한다는 기분이 있어서 말이죠. 예전에는 그런 글 곧잘 쓰곤 했는데 요즘은 영화에 관한 생각도 좀 바뀌고 그런 글 잘 안 쓰게 되더군요. 그래서 그냥 메인 게시판에 올릴까 하다가 그래도 엄연히 영화 보고 감상 쓰는 건데 이 게시판을 애써 피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싶어 여기 쓰기로 했습니다. 그냥 후기 정도로 생각해 주시길.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바바둑]을 보고 왔습니다. 선댄스 영화제에서 인기를 끌었다는 오스트레일리아 공포 영화입니다. 저는 공포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는데 겁이 많아서 극장에서 잘 보질 못해요. 가서 좋은 영화를 건지면 즐거워하기는 하는데, 극장까지 가는 데에 필요한 용기를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작년에 [컨저링(The Conjuring, 2013)] 보러 가는 것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물론 영화는 정말 좋았습니다. 21세기 공포 영화 중에서도 손꼽을 만하지 않나 생각하는데요.) [바바둑]도 예고편 보고 '아, 힘들겠구나.' 하면서 한참을 망설이다 한국만화박물관 상영관 시설은 어떤지 구경이라도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집을 나섰습니다.

 결과적으로 한국만화박물관 상영관은 무척 별로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롯데시네마가 빠지고 CGV 부천, CGV 소풍, 부천시청, 한국만화박물관 네 곳에서 영화를 상영합니다. 이중 CGV가 2.35:1 화면비 영화를 상영할 때 마스킹을 하지 않는다는 건 DJUNA 님의 맹렬한 원맨 테러리스트 활동을 통해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정말 존경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마땅한 전문가들 ─ 실무자들뿐만 아니라 영화 매체 종사자들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 은 다 입을 다물고 있죠.) 저도 이 마스킹 무시 정책 때문에 CGV에서는 영화를 보지 않게 된 지 꽤 됐고, 이번 부천 감상작도 부천시청과 한국만화박물관을 중심으로 짜뒀습니다. 그런데 두 상영관 역시 CGV와 마찬가지로 마스킹 문제가 심하더군요. 부천시청은 한국어 자막을 영사할 자리를 마련한다는 미명하에 좌우 마스킹을 싹 무시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고 하고, 한국만화박물관은 분명 스크린은 더 커 보였는데도 굳이 좌우를 가려 1.85:1 화면비로 스크린을 열어놓은 다음 그 안에다 위아래에 레터박스를 넣은 2.35:1 영화를 영사하고 있었습니다. CGV랑 다를 게 없죠. 한국만화박물관의 좌석이 스크린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CGV보다 더 안 좋다고 할 수도 있고. 현재 예매해 둔 작품 중 한국만화박물관 상영작이 몇 편 더 있는데 다 취소할까 고민 중입니다.

 그렇습니다만, 그 악조건 속에서도 [바바둑(The Babadook, 2014)]은 정말 좋은 영화였습니다. 왜, [컨저링] 개봉 때 홍보 문구로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 영화"라는 말 썼던 거 기억하실 겁니다. 그때의 "무서운 장면"이란 오늘날 공포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뭔가가 화면 밖에서 불쑥 튀어나오거나 갑자기 귀가 찢어질 듯 큰 효과음을 터뜨려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는 장면을 가리키는 말이었죠. 그런 연출이 무조건 별로인 건 아니지만 ─ 가령 샘 레이미의 [날 지옥으로 끌고 가라(Drag Me to Hell, 2009)] 같은 영화에서는 쇼크 효과 직전에 긴장을 조성하는 연출의 우아함과 리듬 덕분에 꽤 좋게 다가왔습니다 ─ 오늘날 많은 공포 영화들이 변변찮은 아이디어도 없이 시청각적 과잉 자극에 대한 관객의 생리적 조건 반사를 공포인 양 포장하고 있다는 점에는 동의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심지어 관객 쪽에서도 이런 유행에 거듭 훈련이 되다 보니 '공포 = 놀라게 하는 거 + 잔인한 거' 정도로 여기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되고요. '하나도 안 무서운' 3, 40년대 공포 영화 엄청 좋아하는 저는 이런 경향이 아주 괴롭습니다.

 [바바둑]이 제게 좋은 인상을 남긴 건, 뭔가가 불쑥 튀어나오거나 갑자기 큰 소리를 터뜨려 관객을 놀라게 하는 연출을 단. 한. 번. 도. 쓰지 않으면서 관객을 조여드는 공포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몇몇 장면에서는 어떻게든 시청각적 자극으로 관객을 공격하지 않기 위해 기를 쓴다는 인상마저 받았을 정도였어요. 사실 (역시나) 이 때문에 시시하다고 투덜거리는 관객들도 있었고, 국내 정식 개봉도 쉽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하지만 제겐 그런 접근이 정말 사랑스러웠습니다. 그편이 훨씬 어려운 일이며, 공포 영화가 다루는 '공포'라는 감정/대상의 범위를 새로이 더듬어보게 해주지요. (혹시 감독이 여성인 것과도 관련이 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케케묵은 남성스러움/여성스러움 이분법에 의존하고 싶지는 않은데, 예전에 모 감독님께서 진행하시는 시나리오 수업 시간에 절벽 너머에서 손이 불쑥 올라오는 쇼트를 묘사했더니 그런 공격적인 연출은 지극히 남성적이라고 하셨던 게 문득 떠올라서.)

 또한 [바바둑]은 실로 오랜만에 보는 지독하게 불편한 공포 영화이기도 했습니다("불편"이라고 하니 뉘앙스가 살짝 달라지는 것 같기도 한데, 실제로 보면서 제 머릿속을 맴돌았던 감탄사는 'Holy shit, this is disturbing as fxxk!' 이었습니다). 이 정도로 질렸던 영화라면 로만 폴란스키의 [세입자(Le Locataire, 1976)]가 떠오릅니다. 이런 불편함은 그냥 과도하게 괴기스럽거나 잔혹하거나 엽기적인 상황을 늘어놓는다고 나오지 않지요. 그보다는 쉬이 공감할 수 있는 일상의 스트레스가 바탕을 깔아줘야 합니다. 왜, [세입자]를 보면 초자연적인 현상 이전에 우선 '아파트에 사는 이웃들이 인사도 잘 안 받아주고 버리지도 않은 쓰레기 나보고 버렸다고 뭐라고 하는 등 좀 불친절하고 퉁명스럽다'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상황을 전제로 두고 1g씩 그 불친절함의 강도를 높여가면서 관객을 서서히 돌아버리게 하잖아요. [바바둑]도 그렇습니다. 일곱 살짜리 애가 있는데 자신만의 환상의 세계에 너무 심취해 있고 양식 있는 어른들을 불편하게 하는 말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솔직하게 해버리는 성격이라 학교에서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합니다. 좋게 말해서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정도지, 왕따에다 툭하면 문제를 일으켜서 학교에 찾아가야 해요. 그렇다 보니 자신을 받아주는 엄마한테는 더더욱 매달리고요. 그런 애를 누구의 도움도 없이 엄마 혼자 키워야 합니다. 더구나 엄마는 아빠가 죽기 전까지만 해도 어린이 책 쓰는 작가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치매 병동에서 일하는 간호조무사입니다. 뭘 해도 반응이 없고 스트레스만 안겨주는 치매 환자들 사이에서 종일 일하죠. 딱히 친구도 없고, 의지할 만한 혈육이라고는 동생뿐인데 동생도 형부 죽은 지 7년쯤 지나고 보니 인제 언니에게 보낼 동정심이나 배려심도 다 떨어졌는지 그저 언니 앞에서 조카를 대놓고 불편하게 여기고 언니더러 그렇게 살지 말라는 막연한 얘기밖에 않습니다. 애는 버리라는 소린지? 그런 와중에 애가 동화책을 잘못 보고는 바바둑이라는 괴물이 와서 엄마를 죽일 거라면서 별 해괴한 소리를 하루 종일 하는 겁니다. 당장 잠도 못 잘 정도로요. 학교에서는 애한테 행동 발달 장애가 있으니 치료가 필요하다고 하고, 집에는 복지사들이 찾아올 정도입니다. 이 모든 문제가 끝이 없어요. 언제까지만 참으면 된다 그런 것도 아닙니다. 솔직히 이 정도면 아주 잠시나마 애를 확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해도 이해할 만합니다.

 당연히 바바둑이라는 괴물은 이 아이의 환상인 동시에 아이가 없었으면 하는 엄마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또 바바둑에게 '현실을 반영하는 심리적 상징' 따위의 짐을 지우면서 '주제 의식'을 설파하고 '흔한 공포 영화를 넘어서는 심리 드라마' 운운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장르 팬들은 그런 개소리를 듣는 고통을 이미 너무 많이 겪었습니다. (최근의 예로는 역시 [설국열차]와 [그녀]가 떠오르는군요.) 기쁘게도 [바바둑]은 바바둑이 건드리는 모자의 취약점을 성실하게 짚어내는 동시에 공포스러운 초자연적 존재로서의 바바둑도 절대 무시하지 않습니다. 바바둑이 없었더라면 모자의 삶이 이처럼 험난해지지는 않았을 테고, 또 모자의 삶이 애초에 지닌 문제점들이 아니었더라면 바바둑이 이처럼 무서운 존재가 되지도 않았을 테지요. 환상/현실이라는 명료한 이분법에 과도하게 의존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 둘 모두가 서로를 보완하고 이끌어 나간다는 점에서 가깝게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스페인어 공포 영화들, 멀게는 발 루튼의 영화들도 떠올랐습니다. 이것은 좋은 환상-공포 영화입니다.

 다시금 [컨저링]과 비교하자면 연출의 우아함과 화려함은 [컨저링]이 앞섭니다. 하지만 [컨저링]이 이미 클리셰처럼 굳어진 소재를 애써 쇄신하기보다는 다만 그 표현의 방식을 근래에 보기 드물게 갈고 닦아 세련되게 다뤄내는 영화였다면, [바바둑]은 아직도 무언가 새로운 이야기 ─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참신한 소재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장르 관습 이전에 캐릭터의 내면에 깊이 뿌리 박음으로써 인물의 개인사를 고유한 것으로 존중하도록 이끄는 영화라는 점에서 ─ 를 해보려 하는 기백이 있는 영화여서 더 정이 가는 구석이 있습니다. [컨저링]의 캐릭터들이나 갈등도 정말 좋았지만 본지 한참 된 지금 이 시점에 와서는 다 휘발되고 막연하게 '아, 참 좋았지.' 하는 정도로만 가물가물 기억에 남아있다면, [바바둑]의 모자가 겪은 일은 쉬이 잊히지 않을 것 같아요. [컨저링]은 좋아하면서도 아직도 Blu-ray를 안 사고 있는데, [바바둑] Blu-ray에는 그보다 좀 더 쉽게 손이 갈 것 같습니다. (한 영화의 특징을 말하기 위해 다른 영화를 끌고 들어와 깎아내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다시 말하거니와 [컨저링]도 무척 좋아하는 영화라서 손쉬운 비교 기준으로 삼았을 뿐이니 양해해주세요.)

 아, 그리고 극 중에 나오는 [Mister Babadook] 팝업 그림책 말인데, 확실히 애가 보면 곤란할 것 같기는 합니다만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저는 그림책 수집 취미가 없는데도 갖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어렵던데요. 결국 실제로 출간된다는 데에 5백 원 걸어보겠습니다.

 뭐야, 그냥 '영화 짱 좋아요! 보러 가셈!' 하려고 쓰기 시작한 글이 왜 이렇게 길어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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