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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네 생각만 하고 살았나]는 이윤학 시인이 1992년부터 2008년까지 펴낸 일곱 권의 시집에서 

사랑에 관한 시들을 골라 엮은 시선집이다. 


시집의 제목만 봐도 가슴 한구석이 내려앉지 않는가. 

버릴 수 없었던 것들, 까맣게 타들어갔던 마음들, 모래알처럼 새어나갔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가지 않는가.



이 시집의 첫 시는 당연하게도 <첫사랑>이다.

 

그대가 꺾어준 꽃,

시들 때까지 들여다보았네

 

그대가 남기고 간 시든 꽃

다시 필 때까지

 

 

첫사랑이 시원찮았던 나 같은 사람도 단번에 첫사랑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다.   

짧고 향기로운, 돌이킬 수 없지만 돌이키고 싶은 불가능한 꿈 



다음으로 등장하는 시는 <잠긴 방문>이다.

 

잠긴 방문 앞에서 서성이는 사람이 있네

그는 방금 방문을 잠그고 나온 사람이네

열쇠를 안에 두고 방문을 잠근 사람이네

아무도 없는 방문 안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방문 안의 세계를 향하여, 그는 걸어가야 하네

어딘지 모르는 열쇠 가게를 향하여 걸어가야 하네

 

 

이 시를 읽으면 아무래도 비슷한 소재를 사용한 이상의 <정식IV>를 떠올리게 된다.

(사실 나에게 이상의 시가 좀 더 좋은 건 어쩔 수 없으니 같이 읽어보자.) 


너는 누구냐 그러나 문 밖에 와서 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라고 외치니

나를 찾는 일심(一心)이 아니고 또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른다고 한들

나는 차마 그대로 내어버려 둘 수는 없어서 문을 열어주려 하나

문은 안으로만 고리가 걸린 것이 아니라 밖으로도 너는 모르게 잠겨 있으니

안에서만 열어주면 무엇을 하느냐 너는 누구기에 구태여 닫힌 문 앞에 탄생하였느냐



자신이 잠가 버린 문을 어떻게 열어야 할지 몰라 난감해 하는 사람이 있고 

안에서 문을 잠가 놓고는 밖에 있는 사람에게 열어달라고 열심히 문을 두드리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잠근 문이라고 항상 맘대로 열 수 있는 건 아니다. 

 

<장롱에 달린 거울>도 조금은 이상의 <오감도 시 제15호>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거울은 필수품인데 이상만 사용하는 건 불공평하지. 


나는 당신이 유리이길 원할 뿐, 결코 거울이기를

원치 않는다. - 페드로 살리나스 Pedro Salinas

 

그는 안에서 긁혀 있었다.

그 상처 때문이었지

들여다보는 사람 얼굴도 긁혀 있었다.

 

깨뜨리고 들어갈 수 없는 벽.

깨뜨려도 소용없는 벽.

 

그는 긁힌 속을 들여다보았다.

들어가 숨기 불가능한 공간

들어가 숨기 쫍쫍한 공간

들어가 살기 위하여,

그는 앞으로 당겨 앉았다.

 

그는 거울 속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과거에 살았던 사람

순간의 냉기가 그에게로

거울에게로 전해졌다.

 

그는 번번이,

거울에게 등을 보여줬다.



이 시에서 거울은 삼차원적 공간 같다. <잠긴 방문>에서 문이 잠긴 방처럼 과거의 그가 갇혀 있는 공간  

그러나 과거의 그가 가졌던 상처는 현재의 그의 얼굴에도 비친다. 

현재의 그는 과거의 그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전해지는 건 거울의 냉기뿐  

그는 결국 상처받은 자신의 모습을 번번이 외면하게 될 뿐이다. 

 

네 번째로 소개하고 싶은 시는 <오리>다.

 

오리가 쑤시고 다니는 호수를 보고 있었지.

오리는 뭉툭한 부리로 호수를 쑤시고 있었지.

호수의 몸속 건더기를 집어삼키고 있었지.

나는 당신 마음을 쑤시고 있었지.

나는 당신 마음 위에 떠 있었지.

꼬리를 흔들며 갈퀴손으로

당신 마음을 긁어내고 있었지.

당신 마음이 너무 깊고 넓게 퍼져

나는 가보지 않은 데 더 많고

내 눈은 어두워 보지 못했지.

나는 마음 밖으로 나와 볼일을 보고

꼬리를 흔들며 뒤뚱거리며

당신 마음 위에 뜨곤 했었지.

나는 당신 마음 위에서 자지 못하고

수많은 갈대 사이에 있었지.

갈대가 흔드는 칼을 보았지.

칼이 꺾이는 걸 보았지.

내 날개는

당신을 떠나는 데만 사용되었지.

 

 

앞의 시구들에 마음이 뒤뚱뒤뚱 흔들리다가 마지막의 “내 날개는 당신을 떠나는 데만 사용되었지”에 다다르면 

목이 메는 건 어쩔 수 없다. 왜 나의 자유는 안녕이라고 이별을 고할 때만 사용되는가.

 

물론 이별을 고하기 전에 상대방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사랑을 구걸하기도 한다. 

<측백나무 2>를 읽으면 측백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질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생각난다. 너를 보면

황혼 속으로 파묻히는 순결은 말이 없고

너는 왜 흔들리지 않느냐, 흔들리지 않느냐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너는 먼 산을 쳐다보고 있었다. 먼 산

나는 먼 산을 보고 넘고 싶었다.

 

 

때때로 이 시인은 꽤 잔인하기도 하다. <연민>이라는 시를 읽으며 그의 숨죽인 잔혹함을 만끽해 보자.

 

한 마리 개미를 관찰한다

 

돋보기로 보는 개미

흐릿하게 확대되어

어지러운 마음속에 사로잡힌다

 

얼마나 추웠을까?

 

초점을 맞춘다

 

 

이 시를 읽으며 나의 시선은 어떤 종류의 것인가 생각해 본다.  

추워 보이는 그에게 온기를 나눠주려고 했던 나의 눈길은 어느새 뜨거운 열기를 띠고 그를 숨막히게 하고 있었던가? 

나도 모르는 새 그를 태워버리고 있었던가?

 

좀 더 피 튀기는 잔인한 시를 원한다면 이 시인의 다른 시집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에 수록된 <이미지>를 권한다.

 

삽날에 목이 찍히자

뱀은

떨어진 머리통을

금방 버린다

 

피가 떨어지는 호스가

방향도 없이 내둘러진다

고통을 잠글 수도꼭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뱀은

쏜살같이

어딘가로 떠난다

 

가야 한다

가야 한다

잊으러 가야 한다

 

 

머리가 떨어져 나가고 열린 가슴에서는 피가 솟구치는데 잘린 머리쯤이야 어떻게 되든 

그 사람 앞에서 달아나기 위해 상처받은 가슴을 움켜쥐고 안간힘을 쓰던 순간이 당신에겐 있었는가?

 

가끔 사랑은 시간으로 측량되기도 한다. <경주 - 느티나무, 무덤 위에서 죽다>에 나타난 끈질긴 시간은 어떤가?

 

내가 당신 무덤을 파먹었지

내가 그곳을 열어보았지

너무 깊은 데 당신이 묻혀

그 추억을 파먹는 데 꼬박

천 년이 흘렀다

 

 

느티나무 뿌리가 무덤 속으로 파고 내려간 천 년이란 세월에 비하면 어림없지만 

그래도 사랑이 끝나서 시린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이에겐 <눈보라> 만한 시가 없다.

 

상상은 끝났다,

버림받는 순간,

그걸 깨닫기 무섭게

끝없는 벼랑만 남았다

 

눈보라 치는 벌판 한가운데

끝없이 나 있는 좁은 길바닥,

내 맘을 따라온 발자국들,

흩어지고 흩어지고 있다

 

어디로도 가지 못한다, 나는

나를 버리려고 헤매고 있을 뿐!

나를 따라온 발자국들, 예전에도

나를 떠났던 것, 나는 나를 지우지 못한다

 

나는 내가 아니기를,

얼마나 오랫동안 바라고 있었던가

 

길가에 쳐진 버드나무 가지들, 그

길고 가느다란 꼬랑지들 쉴 새 없이,

사방팔방으로 찢기려고

발광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시집에 수록되어 있진 않지만 나에게 이윤학 시인을 처음으로 기억하게 했던 오래된 시 

<판교리3 - 염전>을 읽으며 빠이빠이~~

 

길은 돌가루를 뒤집어쓰고 있다.

사라지고 있다, 너에게 가는 길은 가뭄 속이다.

들깨냄새 지독한 길이다. 침묵 속으로 끊어질 듯

나 있는 길. 차돌 위에서 반짝거리는 금속들.

차돌은 차가운 빛을 무한정 감추고 있다.

그러나 차돌 속은 캄캄한 침묵이다. 물이 펄펄 끓어 넘치고

있다. 침묵은 불덩어리다. 나는 오랫동안 불덩이를 가두고

참아왔다. 걸어온 길이 끊어지는 곳.

가뭄의 염전이 눈앞에 펼쳐놓는, 아픈 순간들......

 

나는 부스러진 차돌 같은, 가루 소금이 되고 싶다.

문 없는, 상처 속으로 스며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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