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BBC Sherlock, 7-3

2011.02.27 01:17

lonegunman 조회 수:5191






이중주 duet

왓슨, 아주 피곤해 보여, 거기 소파에 좀 누워, 내가 재워줄테니.
홈즈는 방 한 쪽 구석에서 바이올린을 꺼내 오더니, 내가 소파에 눕자 낮고 아름다우며 환상적인 곡을 연주해주었다.
틀림없이 홈즈의 자작곡이었을 것이다. 그는 즉흥적으로 곡을 만들어 내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가냘픈 손, 진지한 얼굴, 활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모습 등이 나른하게 눈 앞에 어른거리던 기억이 난다.
나는 마침내 조용한 소리의 바다 위를 둥실둥실 떠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 네 개의 서명





현대판 셜록 도입부에서 존은 아프가니스탄의 악몽에 허덕이다 홀로 잠에서 깨어납니다. 원전 속 왓슨의 첫 등장이 얼마나 우울했는지를 떠올린다면 이것은 낯선 시작이 아닙니다. '주홍색 연구'의 그리 길지 않은 첫 몇 페이지는 살인과 범죄가 난무하는 원전의 에피소드 전체에 비견해도 눈에 띌만큼 암울하니까요. 짧게 옮겨보겠습니다.


내게 찾아온 것은 불운과 재난 뿐이었다. / 영국에는 친구도 친척도 없었다. 나는 바람처럼 자유로웠다. 즉 하루 지급액인 11실링 6펜스로 생활하는 한 자유의 몸이었다. 그런 상태에 있던 나는 비틀비틀 런던으로 이끌려 갔다. 영국 제국의 모든 한량들이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그 거대한 분뇨더미 속으로.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홈즈에 대해 말하는 왓슨' 이외의 왓슨을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연대기적 기록이 아니라 생생한 한 인간으로서 말입니다. 그가 말하길 홈즈에겐 친구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왓슨 자신은 어떻습니까? 그는 홈즈가 가족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왓슨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홈즈의 괴벽들, 사소한 습관들, 표정과 몸짓들에 대해 생생히 알고 있습니다. 왓슨에 대해선 어떻습니까? 기록되어진 자보다 기록하는 자에 대한 정보가 빈약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2인조의 한 축에 대한 정보가 이렇게 부실하다는 건 좀 불공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고작해야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건 시드니 패짓이 거의 창조하다시피 한 외형이고, 대부분의 셜록 홈즈 시리즈에선 이를 따르고 있습니다. 단정하게 콧수염을 기른, 진지하고, 후덕하고, 조금은 어리석어보이는. 거추장스러운 콧수염은 현대로 오면서 당연한 수순으로 떼어버렸지만, 마틴 프리먼의 캐스팅은 신선하다기보단 안전한 쪽에 가깝죠. 그가 한 대 맞은 듯한 벙찐 표정이나, 난처함과 민망함과 뻘쭘함과 어색함과 당황스러움과 수치심과… 기타 등등의 비슷비슷한 감정들을 때에 따라 미묘하게 배합하여 얼마나 다양하면서도 일관된 연기를 보여주는지 우리는 본 적이 있으니까요. 아직 사회 적응하기 전에 허드슨 부인에게 짜증내는 장면 ['하숙집 여주인은 아침 식사는 물론 커피조차도 준비해 놓지 않았다. 그럴 때면 인간은 매우 화가 나게 마련이다. 나는 벨을 울리고는 '나는 언제든지 식사할 준비가 되어있다'며 좀 비꼬는 듯이 말했다.' (주홍색 연구)]이나, 분위기 파악한 후 궁금해도 참고 묵묵히 셜록의 곁을 지키는 모습 ['왓슨, 자네는 침묵할 줄 아는 굉장한 재능을 지녔어, 길동무로서 그보다 더 값진 미덕은 없지. 정말이지 나한테는 얘기를 나눌 사람이 꼭 필요해. 생각만 하는 것은 그리 즐겁지 않거든. (입술이 뒤틀린 남자)], 마치 금붕어처럼 셜록의 재주에 놀랐다가 돌아서면 또 새롭게 놀라는 모습 [ '맞았어! 대체 그걸 어떻게 안 거야? -늘 감탄을 해주니 기쁘기 그지없군' (바스커빌가의 개)], 악인에겐 단호하리만치 냉혹한 모습 ('바솔로뮤 숄토의 죽음에 관해서도, 그 사실만 놓고 이야기하자면 그에 대한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범인들에게 그다지 강한 반발심을 느낄 수 없었다' '그 어떤 벌을 받게 되더라도 나는 이 사내를 눈꼽만큼도 동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 개의 서명)] 그리고 등장하는 여인들마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처음봤다고 정신줄 놓는 모습까지. [ '…' 지면이 부족하여 생략합니다] 적절한 캐스팅. 배우에 대해선 덧붙일 말이 없습니다. (아, prelude장에서 이미 팬심을 비췄었던 가요. 그래요, 가까운 사람이 '이상한 거 모으는 취미'로 분류하는 취향이지만 존중해주시죠. 저 '진지한 얼간이'류에 환장합니다. 스티븐 카렐, 애덤 샌들러, 벤 스틸러… 그만 합시다.)

왓슨은 산초 판사가 아닙니다. 살리에르도 아니죠. 가이리치 판의 왓슨이 실패한 것은 끝없이 홈즈의 재능을 흉내내고 선수치려 하는 컴플렉스성 짙은 태도에서부터 출발할 것입니다. '조수'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상하관계의 함의에도 불구하고 자타 공인 홈즈의 '조수'인 왓슨이 끝내 그와 평등하고 동등한 위치에서 우정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왓슨이 홈즈와 같은 천재이거나, 천재가 되려 하거나, 천재가 될 수 있거나 해서가 아닙니다. 그러하지도 않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죠. 왜냐하면 홈즈의 천재성을 알아보는 것, 그 아름다움의 실체를 직시할 수 있는 것, 그 희소하고도 탁월한 객관적 안목 자체가 그의 재능이니까요.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은 순수하고 절대적인 것입니다. 예술 작품이 아름답다고 해서 상대적으로 내가 추해지는 건 아니라는 거죠. 그것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그것으로 충분한, 향유의 대상인 것입니다. 왓슨에게는 그러한 태도와 안목을 거의 일관되게 유지할 수 있는 재능이 있었고, 현실 세계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재능으로 치자면 홈즈의 천재성만큼이나 희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셜록 홈즈라는 예술 작품에 압도당하지만 압사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왓슨은 홈즈의 조수이면서도 비굴하거나 구차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가 홈즈의 조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격조높은 한 인간으로 기억하지요.

체스터튼은 '범죄자는 예술가이고, 탐정은 비평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건 단조롭게 범죄자의 자취를 밟아나가는데 급급한 고루한 브라운 신부에게나 해당되는 말이고 (어이쿠), 홈즈와 왓슨의 관계야 말로 예술가/비평가에 가장 가까운 무엇일 겁니다. BBC 셜록에서 경찰관 '샐리'는 셜록이 싸이코패스이며 결국엔 스스로 살인자가 되어 나타날 거라고 단언하지만, 그러한 분석이 틀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탐정질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지만, 홈즈가 주창한 '추론의 과학'과 범죄 해결의 방법론은 그 자체가 창조이며 예술이기 때문에 그는 다른 창조적 행위(범죄)를 갈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홈즈의 추리 기술에 탄복하는 왓슨에게 '그런 건 아주 간단한 일이야. 무슨 연극처럼 보이게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명백한 사실이니까 (네 개의 서명)'라고 대답했던 걸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추론의 논리적 과정 자체가 충분히 아름다운 예술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것을 '연극처럼 보이게' 일부러 꾸미거나 치장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반면, 실질적인 행동의 영역에선 다른 태도를 취하는데 '네 개의 서명'에서 줄곧 반복하던 대사를 떠올려보십시오. ['범인을 쫓을 방법이라면 이외에도 얼마든지 알고 있어. 하지만 이게 가장 손쉬운 방법이지!' '실패를 한다 해도 다른 방법은 또 있으니까.' '이 방법 외의 다른 방법들을 남김없이 검토해봤지만, 결국은 이 방법이 가장 좋더군.'] 추론의 영역을 벗어난 범죄 해결의 방법은 그 단순성이나 명쾌함이 떨어지며,  도출된 결과 역시 추론을 통한 결과 도출만큼의 충격이나 아름다움을 결여하고 있다고 홈즈는 생각합니다. 그 결과, 극적인 수사를 배제하는 추론의 태도와는 반대로, 오히려 적극적으로 무대를 만들고 연출을 곁들여 또다른 방식으로 예술적 창조물을 만들어내기에 이릅니다. ['내 속의 어떤 예술가적 기질 때문에 나는 자꾸만 잘 꾸며진 연극을 고집하게 된다네, 맥 경감. 우리가 우리의 성과물을 빛내기 위해 가끔씩 무대를 꾸미지 않는다면 이 직업이란 틀림없이 단조롭고 칙칙한 것이 되고 말걸? (공포의 계곡)' '저는 물불을 안 가리고 아주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고 싶어하죠. 그래서 잠시 무례했습니다. 매우 무례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마지랭 보석)']

현대판 셜록에서 후자의 경우, 즉 셜록이 직접 극적 상황을 연출하여 한 편의 작품을 만드는 경우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아직 나오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차후에 더 자세히 이야기 하겠지만 이를 손실로 볼 수도, 혹은 단순한 가지치기로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아무튼, 현대판에선 후자를 버리고 전자, 즉 추론의 과학에 천착하는데 존은 여기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립니다. 셜록의 주위에 들러붙어있는 범죄의 자락들이 전쟁을 갈망하는 존의 몸을 움직인다면, 셜록의 아름다운 추론은 '전기 작가'에 버금갈만큼 객관적이고 균형잡힌 존의 섬세한 정신을 움직이는 거죠. 원전에서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었던 홈즈의 지위는 현대에 와선 괴물, 싸이코패스 등으로 불리며 땅에 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감안해보면, 자신이 목도한 재능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 재능이 때론 자신의 안전과 평화를 위협해도 흔들림없이 -심지어 '스터디 인 핑크'의 첫 크라임씬에선 셜록의 동행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은근한 조롱과 멸시를 감수해야 했는데도- 그 관점을 유지하는 존의 재능은 빅토리아 시대에서보다도 오히려 현대에 와서 더욱 빛을 발하는 미덕으로 보입니다.


현대판에서 가장 좋은 연출 중 하나는, 돈도 없으면서 곧 죽어도 택시 타는 두 남자를 보여주는 방식에 있습니다. 둘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있지만 카메라는 셜록을 비출 땐 마치 그의 내면을 비추듯 동승자를 잘라내고 오직  그만을 화면 안에 담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간 존을 비추는 카메라는 역시 존의 내면을 비추듯 -심지어 고개를 돌리고 앉아 있는 장면에서도- 화면의 한 구석을 셜록의 존재감으로 가득 채워놓습니다. 이러한 관계의 암시가 철저히 연출적으로 계산된 것이라면, 두 배우의 음색이 만들어내는 하모니는 어떠한 계획이나 계산으로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우연한 선물같은 것입니다. 특히 '블라인드 뱅커' 에피소드에서 도서관씬 이후, 하숙집 벽 앞에서 서로 주거니 받거니 사건을 재구성하는 장면은 그냥 음악적으로 아름답습니다.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발성하는 단조로운 어조의 굵고 풍성한 저음과, 그에 비해 고음과 저음, 진성과 속삭임을 넘나드는 다양한 어조의 마틴 프리먼의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짧막한 하모니는 참으로 귀를 즐겁게 하는 앙상블입니다.


하지만 셜록 홈즈를 현대화한다는 발상이 진짜로 빛을 발하는 대목은 다른 데에 있습니다. 원전이 대한민국에서 그냥 유명한 고전, 지금에 와서 열광하기엔 좀 시시한 한물간 화석처럼 여겨지는 건 극단적인 하오체에 기인한 필연적 오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실제 원전에 담긴 빅토리아 시대의 점잖음에, 번역을 거치며 엄격한 한국식 경어체의 경직성이 더해져 낳은 불가피한 결과인 거죠. 사실을 말씀드릴까요? 가끔 제가 이 작품을 옹호할 필요가 있을 때 그 안에 담긴 몇몇 장면들을 예로 들면, 원전을 읽은 사람들조차도 거기에 그런 장면이 있었나 싶어할 만큼 신랄하고 위트넘치는 씬들이 산재합니다. 물론 제가 인용할 때는 원전의 점잖음을 좀 덜어버리고 왜곡시키는 면이 없다고 할 순 없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몇 장면만 보여드릴까요.


나는 홈즈가 쓰는 방법을 최대한 따라하면서 추리해보았다.
홈즈가 말했다, 훌륭해! 정말 대단하군 / 기가 막히군! / 왓슨, 정말 굉장해!
나는 거만하게 물었다, 내가 뭐 놓친 거라도 있나? 중요한 건 거의 다 맞췄지?
왓슨, 미안하지만 거의 다 틀렸어. 조금 전에 너의 재능이 나의 천재성을 자극한다고 했던 건, 네가 저지른 오류를 지적하는 과정에서 내가 저절로 문제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었어.
-바스커빌가의 개

홈즈, 넌 지금 병에 걸렸고, 환자는 어린애랑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난 널 어린애 취급할 거야.
홈즈가 독기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날 치료받게 하겠다 이거지? 그럼 제대로 된 의사를 데려오던가!
그러니까 지금 날 못 믿겠단 말이야?
우정이야 믿어 의심치 않지. 하지만 말이야 바른 말이지, 넌 그냥 경험도 부족하고 실력도 떨어지는 변두리 의사잖아. 난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어, 이건 네가 시킨 거나 다름없어.
나는 충격 받았다
-죽어가는 탐정

내 생각에는 말야… 내가 말을 꺼냈다.
그래, 네 생각이 맞아, 홈즈가 성급히 말을 끊었다.
나는 스스로를 인내심의 화신 쯤으로 여기고 있지만 홈즈가 냉소적으로 말허리를 자르자 화가 치밀어올랐다.
이봐, 홈즈. 너 가끔 사람 열받게 하는 거 알아?
-공포의 계곡

정말 부지런히도 뛰어다녀줬구나, 왓슨.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실수를 남김없이 저질러줬으니 말이야. 네가 들쑤시고 다닌 덕에 소란은 더 커지고 단서는 다 놓쳤네.
너였어도 그보다 낫진 않았을 거야, 나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나였어도 별 수 없었을 거라니, 그건 아니지. 난 벌써 능숙한 솜씨로 다 처리해놨으니까.
-프란시스 카팍스의 실종

왓슨, 그래서, 남아프리카 주식에 투자할 생각은 아예 없는 거네?
뭐야, 그걸 대체 어떻게 안 거야?!
지금 엄청 당황했지? 순순히 인정해.
당연히 인정하지.
그럼 인정한다고 종이에 쓰고 싸인해.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데-_-
왜냐면 넌 5분도 안 지나서 '뭐야, 그렇게 간단한 거였어?하고 말할테니까.
절대로 안 그럴 거거든?

뭐야, 한심스럽군! 그렇게 간단한 거였어?!
-춤추는 인형



아이고, 배꼽이야. 이 농담들 저만 웃긴가요? 다 옮기려면 한도 끝도 없겠습니다. 솔직히, 아무리 줄여서 말해도 셜록 홈즈 원전은 5분의 1 이상이 개그예요. 도서관 안에선 금서로 지정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솔직히 지하철에서 읽기도 창피해요, 어느 지점에서 빵 터질지 모르니까. 아, 맞다. 리뷰 쓰고 있었지. 여하간에, 이러한 장면들을 현대로 옮긴다는 건 그야말로 봉인 해제입니다. 점잖은 척 할 말 다하던 두 사람이 이제 그냥 할 말 다 하게 됐으니까요. 왓슨의 소설을 두고 둘이 논쟁하던 장면만 마저 보고 넘어갑시다.


나도 훑어봤지만, 솔직히 말해 칭찬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어. 탐정의 일이란 엄밀한 과학이지. 과학이 아니면 안 돼. 따라서 감정이 섞이지 않은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는데, 자네는 거기에 소설적인 요소를 가미하려 했어. 그 때문에 마치 유클리드 기하학의 다섯 번째 정의에 연애나 사랑의 도피에 관한 얘기를 가미한 듯한 꼴이 돼버리고 말았지.
하지만 거기에는 연애도 실제로 있었잖아? 사실을 왜곡할 수는 없다고
버려야만 하는 진실도 있는 거야. 적어도 사실을 다룰 때에는 올바른 균형 감각에 따라야 하지
그 누구보다도 홈즈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아주 신경써서 쓴 작품을 이런 식으로 비판 당하자 나는 화가 났다.
-네 개의 서명

거기서 사실상 유일하게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인과과정에 대한 치열한 추리야. 바로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과업에만 충실해야 했어.
그런 점에서는 자네를 충분히 충실하게 드러냈다고 보는데?
나는 다소 쌀쌀맞게 말했다. 홈즈의 자기중심적인 발언에 정나미가 뚝 떨어졌기 때문이다.
아냐, 이건 이기심이나 자부심에서 비롯한 말이 아니야.
그는 버릇처럼, 내가 말한 것보다 내가 생각한 것에 대꾸를 했다.
내 기예를 충분히 충실하게 기록해주길 내가 원한다면, 그건 내 기예가 비개인적인 것, 나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야. 범죄는 흔하고, 논리는 희귀해. 그러니 마땅히 범죄보다는 논리를 강조해야 하는 거지. 아무튼 자네는 강의해야 마땅한 것들을 이야기로 깎아내렸어.
-너도밤나무 저택


원전에서 왓슨이 출판한 글들에 대해 홈즈가 얼마나 혹평을 해댔는지는 이미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왓슨이 홈즈를 종용해 그 스스로 두 편의 작품을 발표하게 만든 것은 단순히 복수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왓슨이 출판한 글들 덕분에 홈즈의 살림살이가 얼마나 나아졌는지도 잘 알려진 이야기지요. '기술자의 엄지 손가락'에서 보수도 못 받고 엄지 손가락은 짤리고 대체 내가 얻은 건 뭐냐고 한탄하던 사내에게 홈즈가 넌지시 '그건 간접적으로 큰 가치가 있을 수 있어요. 그걸 이야기로 써내기만 하면, 남은 평생 떵떵거리며 회사를 꾸려나갈 수 있는 명성을 얻게 될 겁니다'라고 조언하는 것만 봐도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왓슨은 홈즈가 유명해지길 원하지 않고, 자기가 쓴 글 때문에 유명세에 시달리게 된 것을 성가스러워 했다고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철썩같이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랬-을 거긴 하지만, 정말 그랬기만 했을까요? [ '아, 믿음직한 동지는 항상 도움이 되지, 연대기 작가는 더욱 큰 도움이 되고 (입술이 뒤틀린 남자)' '나의 보즈웰(사뮤엘 존슨의 자서전을 쓴 전기 작가 제임스 보즈웰)이 없으면 난 어쩌라고 (보헤미아 왕실 스캔들)' '이건 우리 전기 작가님께서 영광스럽게도 내 전기를 써주시기 전까지의 초기 기록들이야 (머스그레이브씨네 의식문)' ] 슬슬 좀 의심스러워지실 겁니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자네가 정직한 사람이라면 이번 일을 기록해서 내 성공을 조금은 깎아 내려야 할 거야 (바스커빌가의 개)' '이번 사건을 자네의 기록에 덧붙일 생각이라면 말이지… 그건 제 아무리 뛰어난 머리를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그 회전이 둔해진다는 사실의 예밖에 되지 않을 거야. 이번 사건으로 내 명성일 떨어질 뻔 했는데 최소한 그에 대한 변명은 할 수 있게 해줘 (프란시스 카팍스의 실종)] 이제 이렇게 써라 저렇게 써라 훈수까지 놓고요. '마지막 문제' 이후, 명성 때문에 살기 힘들다고 왓슨에게 출판 금지령을 내려놓고는, 곧이곧대로 한 길을 가는 사나이 왓슨이 정말로 글을 안 쓰니까 참다 참다 결국 '왜 콘월의 공포를 발표하지 않나? 그렇게 이상한 사건도 없는데 (악마의 발)'라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판을 종용하는 대목에까지 이르면 홈즈란 인간이 얼마나 의뭉스런 캐릭터인지를 재고하지 않을 수 없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왓슨은 홈즈가 자신의 재능을 칭찬하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단박에 알아챘으면서, 자기만의 전기작가를 갖게 된 것을 얼마나 우쭐해 하는지에 대해선 추호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다만 '홈즈에게 얼마나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의 신변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들지 않는 홈즈의 입을 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주홍색 연구)' 모른다며 '어느 것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이 어느덧 내 의무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문제)'고만 밝히고 있습니다. 끝내 자신이 출판한 작품들에 대한 친구의 진심을 몰랐다는 건 참 쓸쓸한 일이긴 하지만, 그나마 왓슨이 충실한 전기작가인 덕에 그의 기록을 통해서나마 그 자신은 알지 못했던 사실을 우리는 생생히 들여다볼 수 있다는 건 감사할 일입니다.

현대판 셜록에서 둘의 관계는 이제 시작이라 우리는 '나의 블로거'라는 셜록의 기대에 찬 호칭만을 들었을 뿐이고, 그렇게 큰 맘 먹고 띄워준 보람도 없게스리 그에 못미치는 (적어도 본인은 한참 못미친다고 여기는) 결과물을 접하곤 토라져 소파 위에 돌아눕는 모습만을 보았을 뿐입니다. 갈 길이 한참 멉니다. 다만, 저러한 홈즈의 태도에 '나는 무척 화가 났다'고 기록해놓았을 뿐 제대로된 언쟁이 그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럴듯하게 반박하거나 면박을 주지도 못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왓슨에 비하자면 현대의 존은 얼마나 진일보했습니까. 자신의 잘남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셜록의 면전에 대고 '왜냐면 넌 멍청이니까'라고 말하거나(스터디 인 핑크), 장도 안 보고 남의 컴퓨터 해킹하고 돈도 안 꿔주는 친구가 친구라고 소개할 때 '동료'라고 정정하거나(블라인드 뱅커), 기껏 좋아할 줄 알고 블로그에 장문의 전기를 포스팅해줬더니 찌질대며 돌아누운 친구를 달래기보다는 입 한 번 삐죽한 뒤 여자친구-였으면 좋겠다고 어김없이 생각하는- 집에 가서 자고 오거나(그레잇 게임). 갈 길은 한참 멀지만 그야말로 'the game, everybody, is on'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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