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두 세계의 충돌, [무적자]

2010.09.10 18:06

taijae 조회 수:5173



어차피 ‘영웅본색’(1986, 감독 오우삼)을 언급 하지 않고 영화 [무적자](감독 송해성)를 이야기 하기는 힘들다. 알다시피 ‘영웅본색’은 홍콩느와르의 전설이 됐고, ‘주윤발 따라하기’는 남자들의 로망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원작의 주윤발 역을 이어받은 송승헌(이영춘 역)이 “잘해도 본전”이라고 한건 결코 엄살이 아니다. 오우삼 감독이 직접 제작에 참여한 이 첫 번째 ‘영웅본색’ 리메이크 영화는 정말 무슨 생각으로 이 독배를 집어 든 것일까?


사실 요즘의 젊은 관객들이 ‘영웅본색’을 본다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다. 80년대 만들어진 영화치고는 훌륭하게 표현된 액션 장면들이 즐비하지만, 지금 관객들이 기대하는 정도의 비쥬얼적인 충격은 느끼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대단하게 느껴지는 건 오우삼이 축조해낸 ‘영웅본색’의 세계가 단순하고 명쾌한 장르적 일관성을 유지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웅본색’은 작품 속 대사처럼 ‘의리가 사라진 세상’에서 끝까지 의리를 지키려고 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다. ([무적자]에도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이 영화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순간은 두 형제가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는 마지막 장면이 아니라, 피한방울 안 섞인 주윤발이 두 사람을 돕기 위해 보트의 핸들을 꺾을 때다. 그리고 결국 주윤발만 머리에 총을 맞아 숨을 거둘 때, 이미 영화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 전반에 걸쳐 흐르는 인물들의 과잉된 감정들과 제스쳐들은 이 세계 속에 온전히 녹아든다. 인물들은 조금 경박해 보이기까지 하는 낙천성과 조금 촌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진지함 사이에서 큰 보폭의 걸음을 내딛지만, 발자국에는 선명한 힘이 느껴진다. 액션은 파토스를 자아내고, 멜로는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송해성 감독은 ‘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이 그리는 ‘의리의 사나이’ 이야기에 비해 형제의 이야기가 조금 아쉽다고 느꼈던 것 같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그는 [무적자]를 탈북한 형제들의 정통멜로드라마로 탈바꿈 시켰다. ‘영웅본색’에서는 형제가 어떻게 갈라서게 되는지에 대해서부터 이야기하지만, [무적자]는 시작과 동시에 배신한 형과 원망하는 동생을 가른다. 


김혁(주진모)과 김철(김강우) 형제는 북한을 탈출하다 군인들에게 발각되어 생이별을 하게된다. 형인 혁은 동생을 버리고 남한으로 무사히 내려왔지만 철은 북한에 남아 죽을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을 치러야 했다. 그 시간동안 형성된 형을 향한 원망의 감정은 원작보다도 더 진한 파국을 예고한다. 결국 남한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한 동생의 마음을 얻기 위해 김혁은 모든 것을 버린다. 


영화는 이 두 사람의 감정 변화들을 설명하는데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여기서, 송해성 감독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욕망이 느껴진다. 원작이 감정의 이유만 제시한 채 조금 서둘러 드라마를 진행시킨 데 비해, 그의 서사는 조심스럽고 진지하며 촘촘하다. 그리고 이 서사를 아우르는 중요한 결은 ‘탈북자’에 대한 감독의 시선이다.


감독은 이미 ‘파이란’과 ‘역도산’ 등을 통해 국적을 둘러싼 사회적 함수관계들을 조명한 바 있다. ‘파이란’에서는 위장결혼을 통해 한국 국적을 얻으려는 조선족 처녀가, ‘역도산’에서는 일본최고의 영웅이 되는 조선인이 등장한다. [무적자] 역시 대한민국에 둥지 틀기를 원하는 북한 사람들의 삶이 저변에 깔려 있다.(제목 역시 ‘국적이 없는 자’란 뜻을 포함하고 있다) 어쩌면 그가 지금껏 꾸준히 해온 작업들은 ‘타자’가 겪는 정치적 수난을 개인의 멜로드라마로 환원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어떨 땐 실패하고 어떨 땐 성공한다.


문제는 송해성의 세계와 오우삼의 세계가 그렇게 썩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특히, “느그 고향으로 꺼지라고”를 외치다 장렬히 전사한 정태민(조한선)은 그 불협화음의 주범 중의 하나로 느껴진다. 원작에 비해 가장 조악해 보이는 이 캐릭터는 오우삼의 장르적 세계가 갖춘 균형을 깨뜨리고, 단말마 같은 반동적 구호만 외친 후 퇴장한다. 더 큰 문제는 탈북자에 대한 진지한 시선을 포기한 채 장르적 카타르시스를 향해 돌진하는 작품의 비극적 결말이다. 결국, 액션은 기술적으로 훌륭하나 파토스를 전하지 못하고, 멜로는 골조만 쌓은 채 살을 붙이지 못하고 산화한다.


물론 이 영화가 ‘영웅본색’의 명성에 누를 끼치는 졸작이라고 말하는 건 과도한 혹평이다. [무적자]는 그 자체적인 호흡과 목표를 가진 작품이고, 몇몇 액션 장면은 원작에 비교해서도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하다. 젊은 미남배우 4명의 연기도 그들의 필모그래피 중 어느 때보다 진지하며, 잘 통제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영웅본색’이라는 속박 속으로 애초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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