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거상 (巨像) The Colossus of New York  

 


미국, 1958.    ☆☆☆★★


A Paramount Pictures Production. 화면비 1.78:1 (1.66:1), 1시간 10분. 

Director: Eugene Lourié 

Screenplay: Thelma Schnee 

Based on a story by Willis Goldbeck 

Cinematography: John F. Warren 

Production Design: John B. Goodman, Hal Pereira 

Music: [Nathan] Van Cleave 

Producer: William Alland 

Colossus Design: Charles Gemora, Ralph Jester 


CAST: John Baragrey (헨리 스펜서), Ross Martin (제레미 스펜서), Otto Kruger (윌리엄 스펜서), Mala Powers (앤), Robert Hutton (캐링턴), Charles Herbert (빌리), Ed Wolff (거대 로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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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장르의 문학에서나 영화상에서의 진화의 역사를 논할 때 우리가 흔히 할 수 있는 착각 중 하나가 개별적인 저작들이 바로 고 “전단계” 의 작품들을 참조해서 그것과 뭔가 더 한 단계 이론적이나 기술적인 “발전” 을 충실히 반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사실, H.G. 웰즈의 소설에 나온 달세계 인간의 모습에서 E. E. “닥” 스미스의 스카이라크나 렌즈맨 시리즈에 나오는 외계인의 모습, 프레데릭 폴이나 아서 C. 클라크의 소설에 나오는 형이상학적인 우주적 지성, 이렇게 나열해 보자면 전자로부터 후자로 “진화” 되어온 경로가 한 눈에 보이는 것같은 착시현상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각 고전작품들을 개별적으로 접근해 보면, 실제로는 그 하나 하나의 이론적 배경과 철학적 심도는, 시대의 흐름을 어느 정도 따르기는 할지언정, 반드시 그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반드시 몇 십년 흐른 다음에나 읽어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선구적인 메시지나 사상을 설파하는 것도 아니며, 그런 선구적인 뭔가를 보여주어야만 수십년이 넘게 고전으로 사랑받게 되는 것도 당연히 아니다. 실제 기술과 문학상의 SF 적 상상력의 관련성에 있어서는, 그 관계는 더더욱 들쑥날쑥하고 제멋대로이다. 


하나 사고 실험을 해보자: H.G. 웰즈의 [달세계 최초의 인간] (1900-1901) 에서 천재 과학자 케이버가 월세계 탐험을 위해 취한 기술적 방법은 “케이버라이트” 라는 반중력 물질로 구체를 둘러싼다는 간단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 “반중력 물질” 을19세기말에 웰즈가 생각해낸 이론적 기초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바탕을 둔 물리학 세계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단 알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러면 “반중력 비행” 이라는 개념 자체는 실제로 20세기 들어와서 인류가 지구의 궤도를 벗어나서 외우주를 항행하기 위해 원용한 액체-고체 연료를 태워서 로케트를 발진하는 추진기술보다 “뒤떨어진 사고” 였다고 선뜻 인정하실 수 있나? 뭔가 “반중력 추진” 이 “로케트 추진” 보다 시대적으로 몇 십년 뒤떨어진 시대의 산물이라니, 좀 이상하게 들리지 않으실런지? 이 경우 반중력 추진이라는 것이 실제 현재 물리학에 들어맞는 기술적인 방법으로는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반중력 추진” 이라는 것이 우리 세상보다 훨씬 미래 세계에서는 실현 가능한 테크놀로지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단순히 시대 정신의 변천이라던가 물리학 이론의 발전에 의해 생긴 지식과 이해에 발맞추어 “SF 적 아이디어”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물리적 법칙” 을 대놓고 거스르는 “SF적 아이디어” 에도 커다란 매력을 느끼며, 그러한 아이디어를 실현 가능한 방향으로 어떻게든지 “현실의 물리학” 을 비틀어 맞추려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다. 현재 물리학 이론으로는 (시간 경과의 문제, 우주선의 재질 등, 수도 없이 존재하는 기술적인 난점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순수하고 이론적인 측면에서만 고찰하더라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초광속항행” 을 SF 가 절대로 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물리적으로 “말이 되는” 꼼수를 적용해서라도 실현을 시키려고 하는 것도 이러한 현상의 하나다. 물리학의 법칙이라고 해서 이것이 우리의 상상력을 가로막는 “장애물” 이 될 수는 없는 것이고, 현존하는 (“현재 존재하는” 에 찍힌 방점도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조건사항이지만) 물리학 법칙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해서 “하드 SF” 에서 제외해버리는 따위의 과학근본주의적 태도는 SF를 열화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죽이는 데에 공헌은 할 수 있을지언정, 지금 막 한국어사용 주류 사회에서 가까스로 존재하고 있어왔다는 것을 인정이나마 받고 있는 이 장르의 발전과 성장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될 것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또 서론이 길어졌다. 위의 잡설은, 나는 지금 리뷰를 작성하고 있는 [뉴욕의 거상] 과 같은 고전 작품을 진지한 “하드 SF” 의 카테고리에 분류하는 데에 전혀 망서림이 없다는 걸 말하고 싶었고, 그러한 태도야 말로 진정으로 SF 가 국뽕 쳐드신 대하 역사소설 또는 천만영화 따위를 꺾고 한국어사용 문학계 및 영화계를 석권하기를 (물론 SF가 일단 “돈은 되는” 장르로 받아들여진 이후에도 중국의 영화판 [떠도는 행성] 같은 예에서 보듯이 국뽕 쳐드신 “스펙타클” SF 가 양산되어 나올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긴 하다만) 간절히 바라는 나같은 사람이 지녀야 할 “옳은 태도” 라는 것을 역설하고자 시작한 얘기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뉴욕의 거상] 은 무슨 [2001년 우주 오디세이] 같은 “진짜 하-드 (옛날 길거리에서 “아이스 케키” 팔던 시절에 소년 매판원들이 고함치듯이 “하아~드” 라고 발음해주면 더 운치있을 듯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에게는 “하드 SF” 나 “수정주의 서부극” 이나 그 분야의 진흙탕 속에 들어가서 부대끼는 창조자가 아니라, 바깥에 서서 뭔가 운운하고 싶은 비평가들이 자꾸 문화 권력 휘두르면서 시비 걸려고 써먹는 카테고리로 전락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하아~드” 면 어떻고 “소프트” 면 어떠냐? 소프트 아이스 크림은 아이스 크림이 아니라고 강변할텐가? ) SF” 로 넘어가는 “진화과정” 에서 존재했던 어설픈 “전단계” 작품들이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정확하게 분석하자면, [뉴욕의 거상] 은 로봇에 관한 영화는 아니고, 사이보그에 대한 작품이다. 말하자면 인간과 닮은 형태로 만들어지거나 인간과 유사하지 않더라도 인공지능을 보유한 “기계인간”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영미권의 50-60년대 제작들— [Gog], [금단의 행성], [Tobor the Great] 또는 TV 시리즈 [우주 가족]—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냉전하의 우주 항행기술과 연계된 형태의 신 군사기술, 또는 인간 승무원들의 “슈퍼 도우미” 로서 기능하는 미래형 도구적 존재로서의 “로봇” 에 대한 작품이라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이 한편은 유럽계 헐리웃 영화인들과 SF 작가들이 파시즘 창궐 이후에 집착하게 된 뇌과학-인지과학적인 주제인, “육체로부터 분리된 (독재적) 인격” 의 문제를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다. 각본의 원안은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로 가장 유명한 윌리스 골드벡이 내놓았는데, 특히 뇌이식수술의 대가 윌리엄 스펜서 캐릭터에서 이러한 기술적인 성취에 눈이 먼 나머지 윤리적인 문제점들을 쓸어내담아 버리는 “매드 Mad” 라기 보다는 “양심이 고장난 Conscience-impaired” 과학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런 면에서 쿠르트 시오드마크가 집필한 [도노반의 뇌] (1953) 와 유사한 서사의 흐름을 타고 있다. 


[뉴욕의 거상] 에서는 존 바레그레이 ([대괴수 가메라] 의 영어판에도 출연하심) 가 연기하는 불행한 사고를 당하게 되는 식물학자 (생물학자? 인류의 식량문제 해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이유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 직전에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는 설정) 제레미의 형 헨리 스펜서가 적출된 그의 뇌수를 수납할 거대한 로봇을 건조하는데, 이 로봇의 디자인은 “거상” 이라는 고대문명적인 이미지에 걸맞는 그 일면 고대 그리스 타일의 조상 (彫像) 적인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그 나름의 위협성과 장중함을 보여준다. 당시의 시대상에 걸맞게 “오토메이션 automation” 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는 “거상”을 각본가들은 애초에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라는 등 설정상의 무리수를 두지 않고, 인간의 기본적인 형태만 갖추었을 뿐, 2차대전기의 탱크와 크게 차별화되어 보이지 않는 투박한 “기계인형” 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그러한 투박함 자체를 뇌로만 남아서 불편한 “상자곽” 속에서 존재하게 된 제레미의 인격의 내파라는 서사에 반영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런 전략 덕택에 어찌 보자면 굉장히 힘들고 불편해 보이는 거상의 움직임도 관객들의 입장에서 좀이 쑤시게 보여지는 대신에 일종의 중후함을 지니고 다가올 수 있다고 여겨진다. 


감독은 우크라이나 출신이며, 1930년대 프랑스 영화계에서 프로덕션 디자이너로 큰 활약을 했고 (딴 작품들은 고사하고 장 르느와르 감독의 [위대한 환영], [게임의 법칙], [강] 등 문자 그대로 인류 역사상의 고전 명작들의 미술을 담당), 르느와르 감독이 헐리웃으로 일시 넘어왔을 때 같이 미국 영화계로 이민와서 헐리웃에서도 미술감독으로 명성을 떨친 유젠 루리에인데, 이 분은 어떤 연유로 그렇게 되셨는지 궁금하지만, 50-60년대 미국 괴수영화의 역사에서도 또한 개척자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다 ([고지라] 에게 영감을 가져다 준 것이 확실하고 해리 해리하우젠이 특촬감독을 맡은 [The Beast from 20,000 Fathoms] 의 감독일 뿐 아니라, 고지라 아이디어를 영미권에서 재탕한 [고르고] 의 감독도 맡으셨다). [뉴욕의 거상] 에서의 루리에 감독의 접근방식을 한마디로 묘사하자면 “표현주의적 미니멀리즘” 이라고나 부를 만한 것인데, 단순히 저예산이고 소규모이기 때문에 필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기 보다는, 예산이 얼마 없다는 실제적인 난점을 프로덕션 디자인에 고대로 적용시켜서, 독특한 분위기와 일관성있는 미적 외양을 창출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거상이 뉴욕시의UN 빌딩에 진입해서 눈의 렌즈에서 발생하는 살인광선으로 살육을 자행하는 클라이맥스인데, UN 건물의 내부는 아무런 가구나 오피스가 없이 황량하게 거대한 체스보드처럼 생긴 바닥의 오픈 스페이스로 묘사되고 있다. [환상특급/제 6지대] 오리지널의 스코어도 담당했던 네이선 반 클리브의 음악도 피아노 한 대를 거의 유일한 악기로 쓰는 미니멀리스틱한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으며, [뉴욕의 거상] 의 우의 (偶意) 적인 측면을 전면에 세우는 데 있어서 상당히 효과적일 뿐 아니라, 동시대에 만들어졌던 거의 모든 다른 SF 영화들과 차별화되어 관객의 기억에 남는 데 큰 공헌을 하고 있다. 


물론 한 시대 전 장르영화적인 편의주의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거상 로봇이 뜬금없이 눈의 렌즈에서 살인광선 (광선에 맞고 죽은 희생자들의 시신이 부옇게 빛을 발하는 것에서 유추하면, 방사능의 조사?!) 을 발사하는 것을 위시해서, 자신의 고통스러운 위치에 분노하는 제레미가 갑자기 다른 캐릭터들에게 최면술과 유사한 정신 감응능력을 발휘해서 컨트럴하게 된다는, [도노반의 뇌] 와도 겹쳐지는 약간 유사과학적인 설정 등, 책을 잡으려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연기자들을 놓고 보자면, 모두에서 잠깐만 얼굴을 비추고 나머지는 목소리 연기를 통해 혼란, 분노, 설움 등의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로스 마틴이 가장 인상에 남는다 (이분은 AFKN의 롱 런닝 “첩보 웨스턴” 시리즈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에서 웨스트의 파트너이자 변장의 명인 아티머스 고든 역으로 가장 큰 히트를 쳤었다). 나머지 분들은 그냥 TV시트콤적 “아역 연기” 의 평균적 레벨을 보여주는 빌리역의 찰스 허버트 ([더 플라이] 오리지널에서 “하얀색 머리가 달린 파리” 를 찾아다니는 소년 역으로도 유명) 도 포함해서 평범한 수준. 


각본상에서 내가 좀 불만인 점을 굳이 지적하자면, 유럽계 배우 오토 크루거가 연기한 아버지 윌리엄이 사실 그 행동의 윤리적인 함의를 따지자면 모든 문제를 불러일으킨 빌런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인류를 위해서 그런 무리수를 저지른 마음 이해합니다” 라는 식으로 “봐주고” 넘어가고 있다는 것이 신경을 거슬린다. 윌리엄처럼 직인적 능력과 더불어 사회적으로 명성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념적 정당성을 밀어붙이기때문에, 인체실험이나 피시술자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은 의료 조치와 같은 문제들이 21세기인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캐릭터의 끔직한 생체 실험적인 짓거리가 이런 식의 “좋은 의도” 라는 변론을 통해 “정당화” 될 수도 있다는 어떻게 보자면 안이한 사고 방식이, 로봇의 디자인이나 기술적으로 덜 세련된 묘사 등 보다도 이 한편이 50년대 작품이라는 것을 웅변으로 더 잘 보여주고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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