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K. 딕의 엘렉트릭 드림스  Philip K. Dick's Electric Dreams <Season One>.


영국-미국, Original Broadcast Dates, September 17 2017- March 19 2018 (Channel 4), January 12, 2018 (Amazon Streaming Service). 


An Anonymous Content/Channel 4/Electric Shepherd Productions/Moon Shot Entertainment/Left Bank Pictures/Rooney McP Productions/Tall Ship Productions Co-Production, distributed by Amazon Studios & Sony Pictures Television. 60 분, 화면비 1.78: 1. 


Executive Producers: Ronald D. Moore, Michael Dinner, Bryan Cranston, Isa Dick Hackett, Kalen Egan, Christopher Tricario, Maril Davis, David Kanter, Matt De Ross, Lila Rawlings, Marigo Kehoe, Kate DiMento, Don Kurt 

Theme Music Composed by: Harry Gregson-Willli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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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새로운 시리즈 물, 그것도 정통적인 SF 시리즈의 리뷰를 할 까 합니다 (오랜만에 존댓말로 쓰는 리뷰입니다 ^ ^). 한국에서는 아마존 스트리밍 서비스가 안 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방송이 안 될 것 같은데, 요즘에는 VPN 이라는 우회통로도 있고 또 아마도 다른 회사에서 인수해서 어떤 형태로든지 공개가 될 것을 예상하고 그냥 쓰기로 합니다. 이 시리즈는 제목을 보시면 알 수 있으시다시피 고전 SF 작가 필립 K. 딕의 단편 작품들을 한 편씩 한 시간짜리 드라마로 각색해서 모두 열 편으로 한 시즌이 완결되는 구성입니다. 흥미있게도, 기획을 시작한 초기의 제작 총지휘 팀은 [배틀스타 갤럭티카] 리부트를 맡았던 로니 무어 외에도 중견 연기자 브라이언 크란스턴의 이름이 보이고, 크란스턴은 실제로 에피소드 [인간이란] 에서 주인공 역으로 등장합니다. 


영화의 초창기부터 끊임없이 영화화 되어왔던 H. G 웰즈나 쥘 베른의 수준까지는 양적으로 다다를 수 없긴 하지만, 특히 70년대 이후 북미의 상업영화 제작자들 사이에서 아마도 가장 인기가 높은 SF 작가가 다른 사람도 아닌 필립 K. 딕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학문적 고찰의 대상이 될 가치가 있습니다. 어째서 딕일까요? 로버트 하인라인은 그 정치 성향 때문에 꺼림직하다 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인라인도 영화화가 안 된 것은 아니죠. [스타쉽 트루퍼], [퍼펫 마스터] 도 있고, [라스트 스타파이터] 도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 의 영향권내에 있다고 봐야겠죠),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C. 클라크, 우르설라 르 귄 등의 작가들은 자신들의 창작 분야의 벽을 넘어서 일반 문화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존재들인데도 불구하고, 70년대 이후 충분히 대표작들이 영화화나 TV 드라마화 되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클라크의 예만 들어도 [2001 우주 오디세이] 는 스탠리 큐브릭의 필르모그래피 상에서만 주로 다뤄지고, 아서 클라크의 원작을 제대로 영화화했는가 여부에 대한 담론은 마이너한 위상으로 밀려나 있는 상태입니다. (언젠가 이 얘기도 할 기회가 오겠지만, 저는 피터 하이암즈 감독의 [2010년] 이, 그 투박하고 통속적인 서사와 접근 방식에도 불구하고, 큐브릭의 68년도 "걸작" 보다 훨씬 더 클라크의 SF 적 비전에 충실하다고 생각합니다). 하기사 시오도어 스터젼이나 할란 엘리슨의 경우는 자신들이 직접 각본가로 개입했던 비교적 마이너한 사례들을 제외하면 제대로 대접받았다고 말할 수 없고, 진 울프, 로저 젤라즈니나 토마스 디쉬처럼 (물론 영화화하기가 어려운 작품들을 쓰시긴 하지만) 거의 완벽하게 무시당한 작가들도 수두룩하죠 (젤라즈니 작품이 아무리 영화화가 어렵다고 해도 그렇지… 사실 운도 없는 것이, 결국 헐리웃에서 돈을 퍼부어서 제작한 "젤라즈니 원작의 정통 SF작품" 이, 같은 해에 공개된 [스타 워즈] 에 의해 자취도 없이 폭살되어버린 세기의 망작 [Damnation Alley]였으니 말입니다). 


그런 다른 위대한 작가들에 대한 답답한 대우와는 달리, 1982년에 53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딕의 경우는 같은 해에 공개된 [블레이드 런너] 이후 2018년의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의 단편과 장편 모두 할 것 없이 다종다양한 형태로 영화화, TV 드라마화되어 왔고, 그 수는 새삼 일별하자면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것은 [토탈 리콜] 이나 [마이너리티 리포트]처럼 매수로 따지면 굉장히 짧은 단편소설에서부터도 유명 감독이 첨부된 블록버스터 기획이 만들어졌고, 또한 완성작들이 나름 상업적 또는 비평적인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인데요. 리들리 스코트, 스필버그나 베르후번 같은 A 리스트 감독의 프로젝트가 아닌, [Screamers] (1995) 나 [Imposter] (2002) 같은 "B급" 장르 영화들도 꾸준히 딕의 중-단편 소설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져 왔지요. 


요번 리뷰에서는 옛적부터 제가 하고 싶었던 것 중의 하나인데, 실제 원작과 그 영화/TV화된 버전을 보통보다 꼼꼼히 비교하는 작업을 좀 해볼까 합니다. 물론 [엘렉트릭 드림] 의 열 편의 에피소드의 원작 단편들이 다 고르게 제 수중에 존재하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까 검색을 해 보니 영국에서는 [엘렉트릭 드림] 의 원작 단편만 따로 모아서 페이퍼백으로 내놓았더군요. 값도 별로 비싸지 않아서 구매할 의향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그걸 기다리다가는 이 리뷰는 또 한도 없이 연기되고 말 터이니까…). 다행스럽게도 저는 원래 언더우드-밀러에서 기획하고 나중에 보급판 페이퍼백으로 시타델에서 1990-1992년에 다섯 권으로 출판된 [Collected Works of Philip. K. Dick] 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딕의 단편은 미확인 작품이나 출판되지 않은 원고 등을 제외하면 모두 120편 정도로, 아시모프나 스터전에 비하면 턱도 없이 적은 숫자지만 그래도 주요 작품만 섭렵하기도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시작하기 전에 한마디 해두자면, 딕의 소설은 주로 1950년대와 60년대에 활동했던 고전적 북미 SF 작가에 공통되는 뚜렷한 역사적 한계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단지 그 한계점이 발동하는 시점과 그 과정이 작가들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 상당히 흥미롭지요. 위키피디아에 "여성관의 문제" 라는 항목이 따로 생겼을 정도로 이 문제에 대해서 고리타분한 (수잔 캘빈 박사라는 지극히 매력적인 고정 캐릭터를 만들어냈음에도 불구하고) 태도를 오래 유지했던 아시모프처럼, 딕도 지구를 아무도 기억 못할 정도로 시간이 지난 멀고도 먼 미래의 얘기를 하면서도, 그 미래세계의 등장인물들의 디폴트는 "노튼" 이라던가 "제이콥슨" 같은 이름을 달고 있는 백인 남성이라는 식의 한계가 명백하게 존재합니다. 또 이 작가의 정치성향은 결코 "좌파" "우파"로 간단하게 나눌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는 않지만, 지금 읽으면 경제복지적 법률이나 사회적 합의에 의한 규제에 대한 극도의 리버타리안적 혐오가 불쾌할 정도까지 드러나는 작품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심지어는 유치원 다닐 정도의 어린 아동들을 정부 기관에서 "낙태" 라는 방식으로 살해하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있는 디스토피아를 묘사한 [The Pre-Persons] (1974) 라는 공화당 우파스러운 단편까지도 쓴 적이 있지요 (사실 임신 중단을 법률적으로 범죄가 아니도록 만들 수 있었던 대법원의 로오 대 웨이드의 판결이 1973년이었으니 70년대까지도 그런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지녔었단 말인가, 라고 놀랄 일은 전혀 아닙니다. 말을 똑바로 하자면 2018년의 한국이나 미국에서도… 이하 생략). 


또, 이것은 딕의 작품들을 (영어로) 웬만큼 숙독한 분들은 아마도 내가 무슨 말 하는 건지 납득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그의 소설들은 스터전이나 젤라즈니, 심지어는 할란 엘리슨의 글보다도 (레이 브래드베리처럼 대놓고 "시적" 인 글을 쓰는 분들은 아예 고려 대상에서 제외합니다) 훨씬 "기능적" 이라는 사실을 아시고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딕의 장편 소설들은 좀 다를 수도 있지만, 그의 단편들은 아주 미니멀하게 하고 싶은 말만 착착 하고 툭 끝나버린다는 인상이 강합니다. 작가의 입장에서 구구절절하게 어떤 상황이나 배경이나 캐릭터를 묘사한다거나 그런 일은 거의 없는 대신, 열 페이지가 채 안 되는 짧은 글 안에서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안겨주는 반전이나 펀치라인을 팍 지르는 그런 무예의 고수 같은 느낌이죠. 


이런 비유가 적당한 지 모르겠습니다만, 테오도어 스터전 ("영문학적" 인 재능으로만 따지자면 딕은 스터전의 비교가 되지 않게 하수입니다) 이나 진 울프가 김민기, 정태춘이나 자우림이라면, 딕은 소위 말하는 "후크송" 을 엄청 잘 굴리는 K팝 프로듀서-- 이수만? 신사동호랭이? 지드래곤?-- 같은 존재라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이렇게 쓰면 엄청 딕 작가를 폄하하는 것으로 들릴 수 있겠는데, 저는 존 스칼지류의 "하드 SF" 가 [시간의 주름] 등보다 더 "훌륭한 SF다" 따위의 분류법을 완전 개무시하기 때문에 (당연한 얘기지만 K 팝이 70년대 통기타 포크나 인디 록보다 "하위의 음악" 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한 의도는 애초에 개입이 되어 있지 않고요. 그러다 보니까 딕의 대표적 단편들을 한국어로 번역해 놓으면 최근의 듀나님의 소설의 일부가 그런 느낌을 주듯이, 뭔가 우리가 "소설" 이라는 글에서 기대하는 "설명적인 부분" 이 다 깎여져 나가고 근육과 골격만 남은 느낌이 드는 분들도 계실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 예시를 하나 적겠는데 [Imposter] 영화와 원작의 스포일러입니다. 그러니 그 영화 안보셨고 보시고 싶으신 분들은 이 문단을 스킵 하시기 바라고요. 아이디어 회관의 직지 프로젝트의 아더 코넌 도일의 [하늘의 공포] 에 이 단편이 번역 수록되어 있는데, 결말 부분의 번역이 이렇습니다:


"그렇지만 만일에, 만일에, 이 시체가 진짜의 나라면, 이 나는 바로 로봇…" 올햄은 그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그 말이, 자기가 자기를 의심하는 말이 바로 암호였던 것이다. 다음 순간, 천지를 진동하는 큰 폭발이 일어났다. 그 폭발은 멀리 알파 켄타우리 별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필립 K. 딕이 쓴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But if that's Olham, then I must be---" He did not complete the sentence, only the first phrase. The blast was visible all the way to Alpha Centau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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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장대하고, 괴팍하고, 진짜로 범상한 수준을 넘어서는 아이디어를, 메인 포인트와 펀치라인을 칼처럼 예리하게 벼려놓은 서사에 고도로 압축해서 수납 (收納)하는 딕 작가의 스킬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아하, 이것이 이분의 소설에 영화나 TV 작가들이 흡인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주된 이유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데요. 그런 면에서는 [I am Legend] 부터 스티븐 스필버그의 [격돌 Duel]까지 폭넓은 분야에서 활약한 리처드 매시슨에 가깝고, 역시 부지런히 영화-TV 드라마화 되고 있지만 스티븐 킹의 소설들과는 여러모로 정반대의 케이스입니다. 킹의 소설들의 주된 강점은 말이 안 되는 상황에 던져진 캐릭터들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을 공감 넘치게 풀어나가는 화술에 있기 때문에, 독자들의 첫 인상과는 달리 각색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에 반해서 딕의 소설들은 캐릭터들과 서사를 비틀거나, 업데이트하거나, 좀 과격하게 나가자면 그 "메인 포인트"와 "펀치라인"을 살리기만 한다면 아예 없애버려도 큰 지장이 없을 뿐 더러, 여러가지로 소설의 기본 아이디어를 더 복잡하거나 웅장하게 확장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거든요. 완전히 다른 세계, 다른 방향의 서사, 그리고 다른 등장인물들을 가지고 오고, 또 자신들의 창의력을 발휘해서 원래 아이디어에 충분한 업데이트나 확장을 시도하여도, 그 아이디어의 기본 파워가 너무나 쎄기 때문에 여전히 "충실한" 각색이 가능한 그런 원본이라면, 세상의 모든 각본가-감독-제작자들이 당연히 매력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각 에피소드를, 아마존에서 배열된 순서 말고 채널 4에서 방영된 순서를 따라서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The Hoodmaker. Originally Broadcast September 17, 2017.       


Teleplay: Matthew Graham, based on a Philip K. Dick story, "The Hood Maker." 

Director: Julian Jarrold 

Director of Photography: Felix Wiedemann 

Production Design: Lisa Marie Hall 

Music: Ólafur Arnalds 


CAST: Holiday Grainger (오너), Richard Madden (로스), Noma Dweznehi (오킬레), Anneika Rose (메리), Paul Ritter (프랭클린), Tom Mothersdale (래스본), Richard McCabe (커터 박사). 


[후드 메이커] 는 돌연변이에 의해 갑자기 출현하게 된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텔레파스들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기술 발전의 양상으로 미루어 볼 때-- 카세트 테이프도 없고 거대한 릴 투 릴 마그네틱 테이프가 사용되고 있고, 영상자료는 흰 색 스크린에 투사하고 잘못 다루면 열 때문에 녹아버리는 8밀리미터 필름입니다-- 1950년대말-1960년대 초반정도의 평행세계가 배경인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딕의 원작이 쓰여진 1953년이라는 시대에 가깝죠). 


"티프 (Teep)" 라는 멸칭으로 불리는 텔레파스들은 하기 모오토 작가의 "유니콘" 들이 머리카락의 무늬 때문에 차별되듯이, 얼굴에 상처처럼 보이는 모반이 있습니다. 티프들은 가상현실 게임기나 거짓말 탐지기처럼 이용되고 있는데, "프리 유니언" 이라고 불리는 파시즘적인 정부에서는 "반면제법" 이라는 모든 시민들을 티프를 통해 사찰하려는 법규를 제정하려고 합니다. 주인공인 로스는 상사의 명령으로 오너라는 여성 티프를 수사관으로 채용해보자는 신규 프로그램을 떠맡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곧 "후드" 라는 정체불명의 금속과 리넨으로 만들어진 탈처럼 생긴 두건을 "정상인" 들에게 무료로 배포하는 조직이 존재하고, 이 후드를 착용하면 오너를 위시한 티프의 텔레파시를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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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후] 의 여러 에피소드와 [유년기의 끝] 미니시리즈의 각본을 집필한 매듀 그레엄이 각색하고 앤 해서웨이 주연의 [비커밍 제인] (2007) 의 감독 줄리안 제롤드가 감독한 이 한편은 무척 우수합니다. 먼저 번쩍거리는 미래 사회가 아닌, 60년대의 문화변혁을 비켜 지나가 버린듯한 영국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우중충한 세계를 배경으로 설정한 것이 좋은 선택입니다. 텔레파스들을 다루는 방식도, 지극히 신선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타인의 가장 깊은 곳의 사적인 영역을 침범하는, 성폭행에도 비유할 수 있을 끔직한 측면과,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생각이 흘러 들어가기 때문에 자신의 자아의 고유 영역이 침범당하는 피해자로서의 측면을 동시에 부각시키고 있는 점은 칭찬해 줄 만 합니다. 딕의 원작과는 달리 티프들이 현재 세상의 피식민자 국가나 난민들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의 사상적 굴레가 둘러 씌워진 도구적인 존재들로 그려지지 않았다는 점도 좋습니다. 


오너 역의 홀리데이 그렌져 ([튤립 피버]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마리아 역) 의 강렬한 연기가 무척 인상적인데요. 짧은 런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그렌져와 리처드 매든 사이의 화학반응 덕택에, 오너의 선택을 관객에게 묻는 방식으로 끝나는, 보통 같으면 책임회피 같이 느껴질 수도 있었을 엔딩도, 만든 이들이 의도했을 만한 멜랑콜리한 허탈함의 풍미를 잘 살려주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딕의 원작에서는 티프들은 나찌나 볼셰비크에 비유되는 엘리트적인 파시스트로 묘사되고 있어서, 전혀 감정이입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TV 판의 주된 감성이 멜랑콜리아라면 [아우터 리미츠] 의 에피소드를 연상시키는 원작의 그것은 파라노이아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엄청 짧은 길이를 고려하면 딕 작가의 닥치고 밀어붙이는 필력의 강렬함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한편이긴 하지요. 막 주요 캐릭터가 "슬렘-건" 이라는 원리도 설명이 안 나오는 총에 맞아서 삽시간에 "바닥에 질질 흐르는 녹은 덩어리" 가 되고 그런 일들이 숨 고를 새도 없이 벌어지다가, 그야말로 칼로 자르듯이 파삭하고 얘기를 맺고는 끝나버립니다. 원작의 "반전" 은 TV판의 그것과는 전혀 방향성이 다른데, 후자의 함의가 "텔레파시의 능력을 가지고도 서로를 믿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나" 인데 비해, 원작의 결말은 "돌연변이로 얻은 형질은 유전이 되지 않는다" 라는 일견 "그게 뭐 어쨌다고?" 라는 의문이 드는 명제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외람되지만 저는 TV판의 매슈 그레엄에게 판정승을 드리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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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전반적으로1950년대적인 배경이 아주 근사하게 유지되고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커터 박사 캐릭터가 "우리가 컴퓨터를 쓸 적에는 그 정보를 암호화해서 프라이버시를 지키고…" 어쩌구 하면서 그가 살고 있는 세계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연장선상인 것처럼 대사를 치는 바람에 산통을 깹니다. [후드 메이커] 의 총체적인 환경을 보면 컴퓨터나 인터넷 같은 것이 한때 존재했던 세상이라는 것이 전혀 납득이 안 가기 때문에, 이것은 그냥 각본가의 실수로 저는 간주하렵니다. 근데 참 많은 SF 제작자들이 "미래"를 상정할 때를 보면, "과거의 모든 자취" 들이 아주 싹쓸이로 없어지거나, 아니면 도태되어야 마땅할 구태의연한 기술이나 행태가 여전히 아무 의식도 없이 존재하거나 하는 양 극단으로 기울어지는 경우가 많네요. 사실 과학 기술의 발전이라는 것은 과거의 정보를 보관하는 과학 기술도 발전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한 시대 의 SF 처럼 세계적 규모 핵전쟁 났다고 해서 몇 세대도 안되어서 인간들이 다 과거의 지식들을 홀라당 잊어버리고 네안데르탈인처럼 살게 되는 그런 설정은 이제는 좀 그렇습니다. 오히려 인간들이 다 죽고 없어져도 인류의 우행에 대한 정보는 꽤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죠. 그걸 인간 이외의 발견자들이 제대로 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The Impossible Planet. Originally broadcast September 24, 2017.    ☆ 


Teleplay: David Farr, based on a short story by Philip K. Dick, "The Impossible Planet." 

Director: David Farr. 


CAST: Geraldine Chaplin (어마 루이즈 고든), Jack Reynor (브라이언 노튼), Benedict Wong (에드 앤드류스), Malik Ibheis (RB 56), Georgina Campbell (바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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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덕션 디자인이나 기타 비주얼한 측면에 중점을 두고 평가하자면 [후드 메이커] 보다 훨씬 더 공을 들였다고도 볼 수 있는 한편이고, 주로 스페인계 호러나 스릴러영화에 조역으로 출연하시던 금년으로 일흔넷이 되시는 제럴딘 채플린여사께서 모처럼 주연을 맡으셔서 참 아름다운 연기를 선보이신다는 점에서는 가치가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SF 단편의 각색으로는 제 성에는 차지 않았습니다. 


스토리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과격하게 단순합니다. 은하계 대부분을 섭렵한 지 몇 세기가 지난 후, "지구" 가 자기네들이 원래 살던 행성이라는 사실까지 거의 잊어버린 세상에서, 멋진 성운이나 행성계에 우주선을 타고 손님들을 관광시켜주고 돈을 버는 2류 우주관광여행사 주인인 노튼과 앤드류스에게, 300살이 넘게 살았다고 주장하는 노파가 로보트 시종을 데리고 나타나서 돈은 얼마든지 줄 터이니 지구로 여행을 가고 싶다고 의뢰를 합니다. 두 사람은 지구가 어디 있는지, 그런 게 있기나 했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면서 쫓아내려고 하지만, 앤드류스는 노인이 자신의 전 재산을 현찰로 지불할 의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말을 바꿉니다. 


그의 계획은 적당한 사이즈의 항성 주위를 아홉 개나 열 개의 행성이 도는 시스템을 물색해서, 그 곳의 세 번째 행성이 지구라고 사기를 치자는 것이죠. 어차피 지구에 가 본 사람은 몇 백 년 동안 아무도 없었고 이 노인도 자신이 직접 지구에 가 본일은 없었던 것이니 시비를 걸 일은 없을 거라는 것입니다. 잘 사는 동네로 이주하고 싶어하는 젊고 매력적인 아내 바바라와 갈등을 겪고 있는 노튼은 돈 욕심 때문에 내키지 않은 채, 엠포르 제 3행성이라는 인간이 도저히 거주할 수 없는 피폐한 행성의 궤도에 우주선을 끌고 가서 "자 지구 보셨으니까 됐죠? 옛날과는 좀 다른 모습이 되었죠 하하." 이러고 퉁친다는 앤드류스의 계획에 찬성합니다. 그런데 노튼은 어마 루이즈 고든이라는 이름의 노쇠했지만 여전히 총기있고 아름다운 할머니와 유대를 쌓으면서, 그이에게 점차 마음이 끌리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어마는 어마대로, 노튼이 자신의 할아버지의 사진과 꼭 닮았다는 것을 이유로 어떤 "운명적" 인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죠. 가까스로 엠포르 제 3 행성에 도착한 노튼은 앤드류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우주복을 입고 어마와 더불어 독가스로 가득찬 지표에 걸어나갑니다.


이 한편을 보고 있으면 각색-감독을 한 데이빗 파 (시얼샤 로난 주연의 괴팍하지만 무척 이쁜 영화 [한나] 의 각본을 썼습니다) 가 크리스토퍼 리브와 제인 시무어 주연의 [사랑의 은하수 Somewhere in Time] (1980) 의 강력한 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물큰 듭니다. SF 적인 요소는 윈도우 드레싱에 불과하다고나 할까요. 시각적으로는 멋집니다만-- 로보트 시종 RB56 의 나무로 깎아서 만든 것 같은 질감이라던가-- 초광속 여행이 가능한 세계에서 농인인 여인이 우리가 쓰는 스마트폰 수준의 답답한 앱으로 대화를 해야 된 다던가, 그런 디테일부터 시작해서,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고 해도 그렇지 인류의 기원인 행성의 위치를 까먹는 다는 설정은 역시 좀 무리라는 생각이 아니 들 수 없어요. 


역시 1953년에 쓰여진 딕의 원작에는 지극히 우화적인 "반전" 이 있는데 이것은 요즘 세상에서는 초등학생들도 넘어가지 않을 구태의연한 아이디어입니다 (지구를 찾으러 떠났는데 주인공들이 지구 비스드름하게 생긴 행성에 가서 지구라고 사기를 치기로 했다, 그러면 이 얘기가 어떻게 끝나야 되겠습니까? 선택지가 별로 없죠). 차라리 50년대 시점에서 환경 파괴의 위험을 지적했다는 측면에서 더 선견지명이 돋보이는 한편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파는 이 아이디어를 고대로 써먹을 수는 없었을 (사실은 그렇게 하는 편이, 알고도 속아주는 복고적 취향으로 끝까지 간다는 의미에서 결과적으로 더 나을 수도 있었겠다 는 생각이 넌지시 듭니다만) 거라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결국 자신이 고른 엔딩은 그냥 흐물흐물한 매직 리얼리즘식 "예쁜 그림"입니다.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사랑의 은하수] … 이하 생략. 그나마 그 작품의 원작-각본가 리처드 매시슨은 나름 논리정합적인 "설명"을 부여하고 있는데 말씀입니다. 저한테는 파의 선택은 좀 답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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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제럴딘 채플린 여사가 똑 부러지는 영어 대사를 굴리시는 열연을 피로해 주시는 것만 감상했다 하더라도, 양심상 시간의 낭비라고는 말 할 수 없습니다만. 


The Commuter. Originally broadcast on October 1, 2017.    


Teleplay: Jack Thorne, based on a short story by Philip K. Dick, "The Commuter." 

Director: Tom Harper CAST: Timothy Spall (에드 제이콥슨), Rudi Dharmalingam (밥 페인), Rebecca Manley (메리), Anthony Boyle (샘), Tuppence Middleton (린다), Anne Reid (마르티느 젠킨스), Tom Brooke (말을 거는 기차 승객), Hayley Squires (웨이트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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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열 편의 에피소드 중에서 최고의 작품 중 하나입니다. 보면서 가슴이 먹먹해지고, 결국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각본상으로는 완전 정공법입니다. [환상특급/ 제 6지대] 에서도 한 번 이상 우려먹었던 아이디어죠. 기차 노선도에도 없고 스케줄에도 없는 역이 있다고 주장하는 통근승객이 나타납니다. 여기서는 보험회사에서 일한다고 주장하는 매력적인 젊은 여성인데, 역의 사무원 에드가 지도를 펼치고 "아니 그러니까… 손님께서 말씀하시는 메이콘 하이츠라는 역은 없다구요. 아예 그런 이름의 도읍이 없어요." 라고 설명을 하는 사이에 증발하듯이 사라져 버립니다. 두 번이나, 그것도 두 번째는 동료 밥이 보는 앞에서 깜쪽같이 소실되는 일이 벌어지자, 에드는 그 사람이 자신이 일하는 역에서 28분 지난 시점에 정차한다는 시간에 알람을 맞춰놓고 실제로 그 노선의 기차를 타고 가 봅니다. 놀랍게도 28분이 지나자, 여러 사람들이 천천히 달리는 기차에서 문을 열고 허허 벌판으로 뛰어내립니다. 에드도 엉겁결에 같이 기차에서 내립니다. 그러자 안개가 자욱하게 낀 언덕에 지금까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거리가 눈에 들어옵니다. 


필립 K. 딕의 원작도 위에 소개한 두 단편보다 훌륭한데, 여전히 에드 제이콥슨이나 밥 페인 등의 캐릭터들은 (원작의 "통근자" 는 당연히 중년의 남자입니다) 디테일이 없는 전형적인 존재들이지만, 위의 작품들보다는 훨씬 더 주관적인 심리묘사 (그것도 여전히 딕 답게 파라노이아에 중점이 얹혀져 있긴 하지만) 가 들어있고, 에드의 걸프렌드인 메리도 일단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냥 마네킹처럼 배경에서 서있는 "여자" 가 아니고) 요소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원작의 포인트는 평행우주, 그리고 두 개의 평행우주 중 하나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다른 쪽으로 흘러오기 시작하는 상황의 공포, 입니다. 딕의 주요 작품 중에서는 [높은 성에 있는 사나이] 와 주제가 연결됩니다. 그것 이외에는 별다른 하고 싶은 말이 없어요.


잭 손과 톰 하퍼의 각본은 (잭 손은 주로 연극계에서 잘 알려진 분이고 [스타 워즈] 9편의 각본가로 물망에 올랐다가 쌍제이가 다시금 장악하면서 밀려났다고 합니다) 이 설정을 확장함과 동시에 에드에게 벌어지는 일의 의미를 백팔십 도 뒤집어놓습니다. 원작의 경우, 에드가 자신의 편집증적 공포에 휘둘리다가, 상황이 독자들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해소되어 버리고 실존적인 의문을 관객의 몫으로 남겨놓는 결말이라면, 각색본의 경우는 좀 더 고전적인 접근-- 즉 상상속의 공동체 메이콘 하이츠에 말할 수 없는 매혹을 느끼는 에드가, 그 곳을 선택함으로써 실제 세상에서 잃어버리는 것을 놓고 벌이는 갈등-- 을 취하고 있습니다. 즉 각색본의 에드는 좀 더 현실 속의 우리와 가까운 존재이고, 좀 더 에드의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주관적인 투쟁의 영상화라는 측면이 강하다는 것이지요. 


[미스터 터너] 등에서 최고급 연기력을 과시한 티모시 스펄 연기자가 에드 역을 맡아서 말도 못하게 인간적이고 섬세한 연기를 보여주십니다. 역무원으로서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억지로 짓는 "실실 쪼개는" 웃음, 정신 질환이 있는 아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일부러 밝게 난리 칠 때의 슬픔이 깃든 웃음, 그리고 에피소드의 결말에 일순 비추이는, 여전히 슬프지만 사랑과 애정이 그 슬픔을 녹여내는 의지를 보여주는 잔잔한 웃음. 미소를 짓는 것만 해도 이렇게 다 의미가 다릅니다. 단지 스펄의 연기를 보기 위해서 2만원 내고 광학 디스크 구입하는 게 하나도 아깝지 않고요.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각색본의 서사는 [환상특급] 등에서 여러 번 우려먹은 아이디어고 (원작에 비해서) 결말도 충분히 예상 가능하지만, 이 모든 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상특급] 오리지널의 진짜 주옥 같았던 에피소드들을 연상시키면서, 아 맞아 이렇게 훌륭했지 라는 감상에 젖게 만들 수 있는 그런 한편입니다. 이건 뭐 거의 최고의 찬사네요. 영화 만드시고 글 쓰시는 분들께서는 관객들을 놀래키는 무슨 서사의 반전 그런 것은 좀 그만 궁리하고, 이런 SF 적인 구상이 과연 우리들의 인생의 의미를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데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 가를 더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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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다른 영화 리뷰 몇 편 더 하고 에피소드 4-10편으로 후속 집필하겠습니다. 뭉근하게 기다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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