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최고의 디븨디와 블루레이

2014.02.06 14:50

Q 조회 수:7096

안녕들 하셨습니까? 새삼스럽게 다시 하는 말이지만 듀나게시판이 두달만에 새로 열리게되어 정말 기쁩니다. 연말마다 모은 디븨디와 블루 레이를 정리해서 그 중 인상깊었던 작품들을 올리곤 했었는데 그 연례 행사를 2013년에는 못하게 되는가 싶었는데, 구정이 끝나가는 이 시점에서라도 뒷북이긴 하지만 올리려고 합니다.


예년에 써놓은 글들을 보니 뭐 그렇게 말들이 많은지... ^ ^ 간단하게 정리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워낙 잡소리가 많은 인간이라 쉽지가 않네요. 2013년에는 디븨디의 구매량이 소폭 감소하고, 그 대신에 전반적으로 본 영화의 양이 2012년에 비해 소폭 증가한 것 같습니다. 워너 필름 아카이브 등의 특화된 스트리밍 서비스가 본격 궤도에 오른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도 듣보굉 영화들의 블루 레이 출시 건수가 폭발적으로 늘었다는 것이 가장 큰 요인입니다. 크라이테리언, 마스터즈 오브 시네마, British Film Institute, 워너 브라더스 등의 고급 부티크 레벨이나 거대 스튜디오 레벨에서 내놓는 블루 레이의 수는 꾸준하게 공급되기는 해도, 크게 증가하지는 않는 가운데 바야흐로 올리브 필름스, 스크림/샤우트 팩토리, 트와일라이트 타임, (영국의) 애로우 비데오, 그라인드하우스 릴리싱 등의 특화된 레벨에서 고전 작품들을 하이 데피니션으로 꾸역꾸역 쏟아놓고 있는 시대로 접어들었죠. 여전히 스트리밍은 신용할 수 없고, 아이튠스를 제외한 다운로드 서비스의 퀄리티도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블루레이의 압도적인 강세가 피부로 느껴진 한 해였습니다.


아이러니칼한것은 크라이테리언을 위시한 대다수의 레벨들이, 마치 아직 디븨디에 대한 아쉬움을 저버리지 못했다는 듯이, 블루레이와 디븨디를 같은 박스에 끼워서 파는 “2 디스크 에디션” 행태를 버리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우리 학과에서 유일하게 랩탑에도 블루레이 플레이어를 장착하고 사는 교수인 제 입장에서 보면, 컴으로 돌리기 쉽게 디븨디를 끼워 파는 거라는 둥, 이 판매 전략에 대한 각종 옹호론들이 전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만, 뭐 그건 중요한 이슈는 아니죠. 어차피 제작자들이 디븨디로 나왔던 모든 영화들을 블루 레이 포맷으로 다시금 내줄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요.  


어쨌거나, 2013년에는 디븨디의 경우 열편을 채우는 데 그다지 어렵지 않았던 반면에, 블루 레이의 경우에는 죽어도 손에서 놓기 싫다라는 강렬한 느낌을 주는 삼십 장 (!) 의 타이틀을 놓고 끙끙 앓은 끝에 거의 무작위적인 선택을 거쳐 어거지로 열 두장을 골랐습니다. 물론 예년과 마찬가지로 영어판의 리스트와 한국어판 리스트의 내용이 조금 차이가 난다는 꼼수를 부렸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루 레이 열 두편의 경우 그것과 맞먹는 수의 “차점작” 들의 존재한다는 것만 확인하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영화 (또는 TV 시리즈) 자체의 명성, 퀄리티, 예술성은 제쳐놓고, 저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크나큰 발견의 기쁨, 전혀 예상치 않았던 감동, 도무지 다시는 만날 수 없었을 것 같은 오래된 추억의 일편을 현재 시점에서 만나는 경이로운 체험, 그리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완전히 신비의 영역에 들어가는 이해할 수 없는 쇼크 내지는 분석할 수 없는 놀라움을 가져다 준 타이틀들을 우선적으로 골랐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리스트에는 이때까지 그런 영화가 있다는 것을 들어본 일도 없었던 한편도 있으며, 영화사 교과서에 반드시 등재되어야 마땅한 역사적인 한편도 있습니다. 1916년 (!) 이라는 시네마의 초창기에 만들어진 대작도 있고, 자기가 뱉은 가래에 얼굴이 녹아버리는 남자가 나오는 싸구려 호러영화도 있고, 한 캐릭터를 한 배우가 영화회사를 옮기면서까지 20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 지속적으로 연기한 25편의 시리즈물을 하나도 빼지 않고 전부 빡빡 닦은 블루 레이 화질로 한데 묶어다 판다는, 회사가 망해도 팬심이 더 중요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고 이러나 하는 의구심이 들게 만드는 희대의 기획편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또 주절주절 이야기가 길어질 것이 뻔하니 이즈음에서 얘기 허리를 잘라버리고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먼저 디븨디부터. 작년에는 디븨디 섹션에 스트리밍과 다운로드로 본 영화들을 포함시키겠다고 공언했는데, 결국 훌루 플러스처럼 크라이테리언을 마구 풀어놓은 스트리밍 서비스를 돈을 내고 들여놓고서도 디븨디로 출시해주기를 멍하니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돈이 아무리 아까와도, 디븨디때문에 아무리 집구석에 아무것도 놓을 자리가 없어져도, 콜렉터로서의 정체성을 바꿀 수는 없는 듯 합니다.


10. 마린 보이 시즌 1 (워너 아카이브- 코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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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왕자 마린 보이!


이 추억의 “만화 영화” 를 놀랍게도 워너 아카이브에서 내어놓을 줄은 몰랐습니다. [마린 보이] 는 그 기본 성격은 일본에서 1969년에 만들어진 아니메 시리즈입니다만, (원제는 [해저소년 마린]) 처음부터 해외 (미국) 수출을 노리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같은 시기의 최강 아니메에션 [밀림의 왕자 레오] 등과 비교해 봐도, 소위 말하는 “일본색” 이 많이 탈색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 방영되었던 버젼에서도 프로덕션 크레딧이 영어로 뜨는 등, 아주 미국 아니메이션 행세를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것은 단순히 등장인물의 배경이라던가 그런 가시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캐릭터의 구상과 행동양식에도 반영되어 있어서, 마린 보이는 테즈카 오사무의 소년 만화에 나오는 “진취적이고 똘똘한 소년” 캐릭터와는 달리, 오션 패트럴이라는 조직의 행동대원으로서의 위치에서 좀 더 어린이들만의 세계가 아닌 어른들의 세계에 적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요. 보이 스카우트 적이라고 할까? 온갖 극채색과 싸이케델릭한 칼러를 통해 묘사되는 바다 괴물들, “어린이용”매체에 흔히 보이는 아부바부하는 저능스러운 개그가 쏙 빠진 날렵한 액션, 오션 패트럴과는 상반된 신비주의적 입장에서 마린 보이를 돕는 인어 넵티나 등, 어린이용 애니라는 편견을 충분히 불식시켜주는 재미가 만재한 시리즈였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다시 확인했습니다.


누군가가 제대로 된 멋있는 SF 작품으로 리메이크 해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게 되는 한편인데, [스피드 레이서 (달려라 번개호)] 같은 방식으로 가서는 안되겠죠. [마린 보이] 는 이제는 인간이 아닌 돌고래와 넵티나와 같은 수서 (水棲) 인종들의 편에서 싸워야 할 겁니다. 충분히 할 수 있어요. 무슨 올림픽 운동선수 응원가 같은 걸로 만들어서 국가주의에 봉사하게 만드는 몹쓸짓은 하지들 마시고...


착하고 아름다운 인어 아가씨야/마음씨 착한 흰고래야/ 정말 고맙다


이것이 [마린보이] 리뉴얼의 포인트라야 하죠.


9. 바디 멜트 (스코피언 릴리징- 코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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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 괴담] 에 대한 영어 논문을 집필할 정도로 호러영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지녔고, 멜버른 왕립기술대학의 교수이기도 한 필립 브로피선생이 1993년에 만든 컬트호러 영화입니다. 팬 &스캔된 화면비긴 했지만, 비데오 시절에는 [반지의 제왕] 으로 세계적 명감독의 반열에 들기 전, 뉴질랜드에서 키위먹고 살다가 싹막하게 미쳐버린 고어영화의 제왕으로 호러팬들 사이에 거명되던 시절 피터 잭슨의 [고무인간의 최후] 및 [데드-얼라이브] 와 더불어,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고어를 논하지 말라!” 라는 렛떼루가 붙어있던 전설의 명작이지요.


막상 보시면 호오가 갈릴 수 있는 작품이긴 해요. 피터 잭슨의 [데드-얼라이브] 가 무참하게 캐릭터들을 짓이기고 찢어 발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귀엽고 참한 (?) 한편인데 비해, [바디 멜트] 는 시치미떼고 멀쩡한 사회 비판영화 내지는 이죽거리는 톤의 블랙 코메디 (건강식품과 의약품을 둘러싼 대기업의 행태 및 거기에 빠져드는 소비자들의 머절함에 대한 비판의 강도는 강한 편) 인척 하다가 급소에 가서, 아주 질알맞고 잔악하게 해까닥 돌아버리는 모습이 보는 분들의 간을 콩알만하게 만듭니다.


극성 호러 팬이라면 놓쳐서는 안될 한편이죠. 그러나 위에서 제가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자기가 뱉어낸 가래 (또는 푼 콧물) 에 얼굴이 녹아버리는 남자가 나오는 영화라고... ^ ^ 그런 활동사진을 보시고도 비위가 상하지 않을 분들만 보세요.


8. 살인에 관한 사실 (미야 코뮤니케이션즈- 코드 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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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디븨디는 정말 우연찮게 구입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영화를 틀자마자 “아모레, 아모레 아모레 미오...” 라고 구성지게 부르는 귀에 익은 카를로 루스티켈리 작곡의 멜로디가 흘러나오지 않겠습니까? 백만년전에 성북동의 우리 집에서 흑백TV 로 [형사] 였던가 그런 번역 제목을 달고 KBS 에서 한국어 더빙판으로 보았던 기억이 나는 추억의 이탈리아 영화였네요. 당시에는 일종의 치정 멜로드라마로 받아들였던 것 같은데, 지금 와서 보니, 그 본질은 사회파 범죄 드라마입니다. 피에트로 제르미감독이 스스로 형사로 분장해서 등장하고, 단순해 보였던 사건이 종착된 인간 관계가 밝혀지면서 점차 숨겨졌던 캐릭터들의 이면이 드러나게 되고 나아가서는 전후 이탈리아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 이르기까지 파헤쳐집니다. 영미 장르 영화 걸작들의 깔끔하고 정제된 맛은 없을지 몰라도, 이탈리아 영화만이 가진 문화적인 여유로움이랄까, 추잡하고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진 캐릭터들을 묘사할 때에도 그들에게 일말의 연극적 (드라마틱) 존재감을 허용하는 듯한 연출력이 돋보입니다.


7. 김기덕 콜렉션 (한국 영상자료원/블루 키노- 코드 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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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 와 [뫼비우스] 만든 해외 평론계의 총아 김기덕 감독 말고... 1960년대의 상업영화계에서 히트메이커로 명성을 떨치셨던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을 모은 디븨디 모음집입니다.


영상자료원에서 출시하는 디븨디들은 모두들 구입하고들 계시지요? 인터넷에서 무슨 아베 신조 욕하고 독도는 우리땅이다 떠들고 그런거 하지 마시고, 영상자료원에 돈 갖다 바치셔서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데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간단하게 공헌하세요. 돈없다고 거짓말하지 마시고... PC방 가실돈, 애인이랑 프라이드 치킨 먹을 돈 있으면 이런데다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요번에 묶여나온 김기덕 감독들의 작품들은 김기영이나 신상옥 콜렉션과 달리 “작가적 관심사” 가 아닌 장르적 포괄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보입니다만, 이만희 감독작들과 마찬가지로, 무심하게 엔터테인먼트의 관성을 쫓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자의식 가득찬 “예술 영화” 들이 놓치고 있는 당대의 사회적, 문화적 진실을 포착해주는 그런 저력이 있어 보입니다. 잘 알려진 [맨발의 청춘] (1964) 은 물론이고 [말띠 신부] (1966) 와 [5인의 해병] (1961), 심지어는 대놓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운 [남과 북] (1965) 조차도 재발견의 즐거움을 한껏 제공해줍니다.


6. 악인을 죽이는 기계 (훌루 플러스-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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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악인을 죽이는 기계] 냐고요? 아니 글쎄, 크라이테리언에서 잉그리드 버그만과 로베르토 로셀리니 콤비의 명작들은 블루 레이로 팩키지해서 내놨으면서, 이 신기하기 이를 데 없는 로셀리니의 판타지 코메디 (!) 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소식이 없다는 거 아닙니까. 보아하니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마이너 장편들을 모아서 이클립스 시리즈로 내줄 것 같지도 않고... (로셀리니가 60년대 후반 이후에 만든 유럽 사상사를 다룬 TV 영화 걸작들은 이클립스로 이미 나왔죠) 이 영화는 진짜 혼자 보기 아까운 숨겨진 명작이란 말입니다!


한국의 울릉도나 그런 섬을 연상시키는 안달루시아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주인공이 너덜너덜한 거지 할배 한사람의 사진을 찍는데, 이 할배가 자기가 실은 안드레아 성인이라고 주장을 하면서, 사진기를 써서 마음에 안드는 사람들을 처치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주인공은 처음에는 이 “살인 사진기” 의 효력에 경악하고 할배에게 물러달라고 호소합니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을의 구 파시스트, 고리대금업자, 지주, 미국 관광업체에 섬을 통째로 팔아넘기려는 지방 유지들을 “공동체를 위해” 이 살인 사진기로 “청산” 하는 작업을 정당화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 직후의 가난하기 짝이 없는 이탈리아의 한촌을 배경으로,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아마추어들을 대거 등용해서 만든 차밍하기 짝이 없는 사회풍자극인데, 이 한편을 보시면 “네오리얼리스트 판타지” 라는 게 전혀 상호모순적인 표현이 아니라는 걸 실감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펠리니에 못지 않게 로셀리니도 로마시대부터 내려오는 자국의 우화적 전통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영화인이었다는 사실도.


시네테카 볼로냐와 이마지네 리트로바타 랩에서 디지털 복원한 판본으로 감상했는데, 눈이 툭 튀어나오는 고화질과 깨끗하기 이를 데 없는 사운드를 자랑합니다. 훌루 플러스 보실 수 있으신 분들은 없어지기 전에 서둘러 감상하시기를.


5. 필름 느와르 콜럼비아 클래식 제 4편 (TCM- 코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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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맥이 끊길 것 같으면서도 지속되는 워너 브라더스에 이은 콜럼비아 (소니) 필름 느와르 클래식 시리즈의 네번째 콜렉션인데, 요번에는 [하녀] 의 복원으로 국내팬들에게도 잘 알려진 필름 파운데이션의 지원으로 출시되었기 때문에, 마틴 스코세시 감독님의 소개영상이 서플로 첨부되어 있습니다. 미국산 필름 느와르도 서부극과 마찬가지로 한도 끝도 없이 듣보굉들이 계속 발굴되는 분야입니다만, 여기에 수록된 [그렇듯 어두운 밤에 So Dark the Night], [쟈니 어클락 Johnny O'Clock], [1 마일의 굽은길을 걸어라 Walk a Crooked Mile] 등의 작품군은 돈 시겔, 니콜라스 레이 등의 유명 감독들이 아닌 조셉 H. 루이스, 고든 더글러스 등의 장인 클래스에 속하는 감독들이 주로 에드먼드 오브라언, 스티븐 그레이 등의 성격배우들을 주연으로 만든 영화들입니다. 그래서 간혹 명품 느와르가 지닌 탐미적이고 여유로운 시선이 부족하게 여겨질 때도 있지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B급 영화적인 결기와 박력이 더 살벌하게 피부로 느껴질 때도 있는 그런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4. 글렌 포드 언더카버 크라임스 콜렉션 (TCM- 코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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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느와르 콜럼비아 클래식] 도 좋았지만, Turner Classical Movie 에서 내놓은 작년 최고의 디븨디 콜렉션은 단연 글렌 포드가 주연으로 나오는 범죄영화들을 한데 묶어놓은 [언더카버 크라임스 콜렉션] 이 아닐 수 없죠. 로맨틱 코메디용의 참하고 명랑한 청년부터 어두운 과거에 얽매여 정서불안에 시달리는 퀭한 눈의 필름 느와르의 주인공까지 다양한 캐릭터들을 고전 헐리웃의 명배우들이 그러하듯이, 눈매의 표정만 살짝 바꾸는 것 처럼 보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연기로 적확하게 묘사해온 글렌 포드의 실력을 음미할 수 있는 콜렉션입니다. 특히 [언더카버 맨 The Undercover Man] (1949) 과 [수감되다 Convicted] (1950) 에서의 (알 카폰을 모델로 삼은 것이 명백한) 랄프 보키와 브로더릭 크로포드 간수장과의 주고 받는 연기의 매력이란! 헐리웃 스타의 에고 따위는 단 1 밀리그램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3. 코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반체제 영화: 이클립스 시리즈 38권 (크라이테리언- 코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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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쿠, 이 콜렉션은 여느 해 같았으면 당연히 1위를 장식해야 마땅한데, 금년은 도무지 예상치 않았던 보물이 두개나 등장하는 바람에 3위로 밀려났군요. [절복] 과 [인간의 조건] 의 코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위대한 실력이야 말해보았자 바이트의 낭비고, 문제는 이러한 위대한 감독들도 일본인이기 때문에 서구 (그리고 어쩌면 한국에서도?) 에서는 “쌔무래이 영화” 의 감독이라는 이미지로 소비되고 있다는 겁니다. 이분들이 만든 자신들이 살던 시대의 폐부를 찌르는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아요. 한국의 시네마테크에서는 그래도 일본 국제교류기금등의 도움으로 고전기 일본영화가 자주 걸리던데, 여러분들, 아베 신조가 죽일놈인건 그런거고, 50-60년대의 고전 일본영화의 명작들은 빼놓지 말고 섭렵하시길 바래요. 일본문화에 전문적 지식이 생기고 어쩌고 그런거하고 관계없어요. 그냥 인간으로서 사는데 도움이 되는 행위입니다.


[코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반체제 영화] 에서도 다른 장르와 아젠다를 지닌 네 편의 역작을 선보입니다만, 개인적으로 가장 놀라왔던 한편은 프로 야구의 스카우트 시스템의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파헤친 [당신을 삽니다 (1956)] 였습니다. 코바야시 감독께서 야구팬들에게서 협박은 받지 않으셨는지 ;;; 걱정이 될 정도로 신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다 케이지가 연기하는 스카우트 요원은 전혀 악인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아요.


2. 이카리에 XB-1 (세컨드 런- PAL 코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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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산 SF 고전영화 [이카리에 (이카루스호) XB-1] 은 부천영화제때 상영했었는데 놓쳤던 기억이 납니다만, 작년까지만해도 디븨디 판본으로는 몇십유로라는 가격표가 달린 체코 국내판이 유일했습니다만, 마침내 깨끗한 화질의 프린트로 동구영화 전문 레벨 세컨드 런에서 출시되었습니다. [이카리에 XB-1] 은 아름다운 흑백 영상, 독특한 60년대풍의 프로덕션 디자인, 동구권 영화 다운 자본주의와 군사대국주의 비판이라는 아젠다를 지닌 본격 SF 영화입니다만, 요번에 제가 세컨드 런 판본으로 보고 새삼스럽게 놀란 것은 [스타 트렉] 과 [스페이스 1999] 등의 구미 SF 시리즈가 얼마나 이 작품의 영향을 빡세게 (…) 받았는가 하는 것의 발견이었습니다. “검은 태양 (블랙홀이라는 개념이 대중화되기 전에 만들어진 한편이죠),” 오랜 우주 항해가 선원들에게 미치는 정신적 영향, 전쟁에 의해 괴멸된 지구에서 온 또하나의 우주선을 발견한다는 플롯 ([칸의 분노] 의 기본 설정), 우주 항해중 결혼하고 태어나는 어린 아기 등... 다 [이카리에 XB-1] 에서 베껴먹은 것들이더군요!


[스타 트렉] 에서 한껏 폼을 재면서 어필하려고 하지만 언제나 클리세로 전락하기 마련인, 인류의 “새로운 문명” 과의 만남이라는 대사건을 아주 평이하게 감동적으로 풀어낸 멋진 엔딩에 이르까지, 이 한편은 “생활형 우주 탐사” SF 의 걸작이며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 이나 [에일리언] 에 결코 뒤지지 않는 공력의 소유자입니다.


1. 다섯 손가락을 지닌 맹수 (워너 아카이브- 코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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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013년 최고의 디븨디는 그동안 말은 많이 들었지만 볼 기회는 없었던 고전 헐리웃 호러 영화 말기의 (1946 년도작) “잘라진 손이 원래 소유자의 의사대로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오를락의 손] 테마를 원용한 정통 괴기공포영화 올습니다. 물론 이 작품의 백미는 피터 로레 선생의 비요용 튀어나온 두 눈으로 관객들을 억압하는 공포연기지만, 거의 모든 플롯의 전환점을 다 예상핳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로버트 플로리감독의 훌륭한 연출과 쿠르트 시오드마크의 날카로운 각본, 그리고 막스 스타이너의 중후한 스코어가 함께 이끌어내는 고전영화만이 지닌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이런게 호러영화죠. 사지 절단 이런거 피를 콸콸 흘리면서 보여주는거가 호러가 아닐지니.


그러면 블루 레이로 넘어가볼까요?


12. 빈센트 프라이스 콜렉션 (스크림 팩토리- 코드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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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피터 쿠싱 선생님의 잊혀진 메디컬 호러 [타락 Corruption] 과 함께 호러영화 블루레이출시작의 베스트리스트에 빠짐없이 올라갔던 타이틀입니다. 영어판 리스트에는 워낙 어렸을 적부터 많이 보아왔던 작품들이라서 일부러 더하기가 저어되는 측면이 있었는데, 한국어판에는 역시 넣는 게 어울려보입니다. 사실상 한국에서는 케이블에서 틀어줄 것도 아니고, 이렇게 유려한 화질과 사운드 퀄리티로 볼 기회가 거의 없을테니 말씀입니다. 이미 걸작으로 재평가된 로저 코어먼 감독의 [적사병의 가면], [어셔 가의 몰락] 그리고 [함정과 추] 뿐만 아니라, 일부에서는 실패작이라고도 여겨져 왔던 [귀신 들린 궁전] (포가 아니고 러브크래프트의 [찰스 덱스터 워드에 관한 일건] 의 영화화입니다), 영국에서만 출시되었던 [마녀 사냥꾼] 그리고 괜시리 아롱다롱하게 칼러풀한 드래그 퀸 같은 호러영화 [흉물스러운 파이브스 박사] 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서플 중에서는 1980년대 아이오와주 퍼블릭 TV에서 에드가 앨런 포 영화화 작품들의 방송을 위해 빈센트옹이 녹음한 작품 소개가 가장 마음에 들어요.


11. 나이트라이더스 (샤우트 팩토리- 코드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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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로메로가 1981년에 제작-감독한 이색작입니다. 중세기의 기사들처럼 분장한 바이커들이 말 대신에 오토바이를 타고 기사들의 결투를 재현해 보이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일종의 유랑곡예단의 생활을, 새로운 멤버를 맞아들이고, 대기업을 스폰서로 업느냐 마느냐 등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고민하며, 보수적인 동네의 깡패같은 경찰관들과 대립하는 등 여러 에피소드로 점철하면서 묘사해나갑니다만, 놀랍게도 그 저변에 깔린 서사는 아서왕의 전설과 카멜롯의 성쇠담입니다.


 파랗게 젊은 에드 해리스가 아서왕, 특수메이크업의 전설인 톰 사비니가 검은 턱수염을 기른 모드레드, 하바드 대학을 졸업하고 구전 (口傳) 문학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실제로 캠브리지 시가지에서 구전문학을 공연하면서 생활을 했던 브라더 블루 (2009년에 88살의 나이로 타계)가 멀린, 그렇게 댓구를 이루는 역할들이 주어져 있습니다. 로메로 작품중에서는 감상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작가의 감정 이입도가 높은 작품입죠.


클라이맥스에서 에드 해리스가 왕관을 넘겨주는 장면에서는 스탭과 연기자들이 다 진짜로 폭풍처럼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엔드 크레딧이 올라갈때쯤 되면 정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상향이 가버렸다는 애잔한 심정에 보는 여러분도 눈물을 펑펑 흘리게 될 겁니다. 80년대에 비하면 돈은 못 벌었을지 몰라도, 위대한 실험정신과 장인정신이 기막힌 시너지를 이루었던 70년대 미국 영화계에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방식으로 작별을 고하는 한편이기도 합니다.


10. 화가 샬켄 (BFI Flipside- 코드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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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쿠 무시라! 듣보굉인 호러 영화를 아무 사전지식도 없이 보게 되었을 때의 별미는 각별한 것입니다. 이 [화가 샬켄] 은 여성을 선호하는 여자 흡혈귀 카밀라의 창시자로 유명한 고딕 소설가 셰리단 르 파뉘의 중편의 TV 영화화판입니다. 고트프리드 샬켄은 실존했던 네덜란드 화가인데, 그 그림속의 어딘지 모르게 으시시하고 미스테리어스한 부분을 르 파뉘가 자기 증조할아버지대부터 내려오는 전승이라고 뻥을 치면서 “해석” 을 가한 것이 중편의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베르미어나 렘브란트의 그림을 영화적으로 재현한 것 같은 아름다운 화면이 먼저 정신을 쏙 빼놓는데, 레슬리 메거이 감독은 그러한 네덜란드 명장들의 그림에 항존하는“그림자” 의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서, 뭔가 우리의 시계에 완벽하게 들어오지는 않지만, 그 존재를 분명히 느끼고 있으며 또한 부단히 신경쓰지 않을 수 없는, 우리가 애써서 무시하는 삶의 요소들에 대한 불안을 부각시킵니다. 화면이 장중하게 아름다우면 아름다울 수록, 그 아름다움의 바로 저편에 존재하는 부패와 죽음의 그림자가 더욱 신경쓰이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접근방식이죠.


아아 정말 무섭습니다. 잘못하다간 베르미어를 비롯한 멀쩡한 세계 명화들에 대한 괜한 공포증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서 보세요.


9. 나라야마부시 코오 (크라이테리언- 코드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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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일본의 노인 고려장 풍습을 다룬 [나라야마부시 코오] 는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따내고 세계에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이름을 알린 1983년 버젼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만 이 리스트에 들어간 작품은 키노시타 케이스케감독이 1958년에 지극히 양식화된 세트와 전통극적 음악을 구사해서 만든 구판입니다. [나라야마부시 코오] 의 내용을 나이든 세대의 젊은 세대를 위한 희생정신의 강요라거나, 불교적 사상에 기반을 둔 “체제 순응” 의 논리로 재단하여 비판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러한 먹물들의 논리는 타나카 키누요를 위시한 연기진의 가슴을 종처럼 울리는 명연과 키노시타 감독의 잔잔한 공감과 슬픔의 시선이 항시 담겨있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카메라에 압도당해 고개를 들 수가 없게 됩니다. 크라이테리언의 HD 트랜스퍼는 원작의 따뜻하고도 잔혹한, 적과 녹의 색감을 씨니컬한 관객들의 입을 막아버리는 강렬한 포스와 더불어 재현해줍니다.


8. 바그다드의 도적 (코엔 미디어 그룹- 코드 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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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다 비치는 실크 바지를 입고 웃통을 벗어제낀 더글러스 페어뱅크스가 중력의 힘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관객들을 마법과 꿈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사일렌트영화의 명작입니다. 지금 보면 [뽀뽀뽀] 나 [텔레터비] 를 연상시켜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원시적인 “특수효과” 도 나오긴 하지만, 누구나가 기억하는 하늘을 나르는 양탄자를 위시한 주요 장면들은 여전히 그 마력이 유효할 뿐더러, 윌리엄 카메론 멘지스가 담당한 프로덕션 디자인의 샤프하고 미래지향적인 아름다움 또한 현대의 관객들을 매료하기에 충분합니다. 페르시아와 아랍인에 대해 몽골인을 악인으로 대비시키는 인종차별적 시각을 지닌 한편이라는 게 난점이긴 한데, 그것도 악역으로 나오는 카미야마 소오진과 안나 메이 웡의 연기가 워낙 빼어나서 거의 용서해 주고 말죠.


1924년에 제작된 무성영화 [바그다드의 도적] 을 한번 보시고 나면, 요즈음 극장에 걸리는 마블 코믹스니 뭐니 하는 헐리웃산의 대작들이 뭔가 잃어버린 것이 많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드실 것입니다. 물론 코엔 미디어 그룹이 복원한 블루 레이 판본처럼 제대로 된 영사속도와 칼러 틴팅, 그리고 칼 데이비스 작곡가의 유려한 스코어 등의 혜택을 제대로 받은 버젼을 보셔야 그 진가를 확인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7. 너무 많이 알았던 사나이 (크라이테리언- 코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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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작년의 최고 블루레이들은“오리지널의 재발견”이라는 테마로 묶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려. 이 알프레드 히치코크의 [너무 많이 알았던 사나이] 도 제임스 스튜어트와 도리스 데이가 주연하고 노래“케 세라 세라”를 대 히트시킨 1956년도판이 아니고 히치코크가 미국으로 넘어가기 전에 전전 (戰前) 영국에서 만든 1934년도판입니다.


 “그렇지!” 하고 무릎을 치고 히죽히죽 웃으면서 즐기게 되는 재미로 따지자면 이 리스트의 어느 작품도 이 히치코크 초기작에 감히 따라올 수 없을 것입니다만, 거기에 더해서, 이 한편에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기 때문에 의미도 모른채 발음만 따라서 대사를 읊어 연기를 했다는 (어떻게?!) 피터 로레 선생의 악당연기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방사능에 오염되었는지 머리 한 끄트머리만 하얗게 센 채, 경멸과 야멸스러움이 가득찬 시선을 카메라를 통해 우리 관객들에게 직접 레이저처럼 쏘아보내는 로레 선생의 파충류적인 연기는 무섭고 징하면서도 한없이 매력적입니다. ^ ^


6. 앞으로 일어날 일들 (크라이테리언- 코드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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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H. G. 웰즈의 예언서적 문학작품 [The Shape of Things to Come 미래의 초상 (이 한국어번역 타이틀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을 위대한 헝가리출신 프로듀서 알렉산더 코르다가 이미 상기 [바그다드의 도적] 등에서 솜씨를 발휘했던 디자이너 윌리엄 카메론 멘지스를 감독으로 기용해서 1936년에 제작한 한편이죠. 21세기의 현대의 시점에서 보자면 이 영화가 그려놓은 “미래” 의 세계는 다소 테크노-파시스트적인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테크노크라트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 유일하게 반항하는 그룹이 “인문학자” 들이라는 설정에 대해서는 그냥 웃어야 할지...). 그러나 그러한 점을 감수하더라도, 크라이테리언의 빠작하게 복원된 판본으로 보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 은 여전히 고전 SF 의 위용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코맥 맥카시등의 주류 소설가들이 디스토피아를 그냥 문학적 장치로 써먹게 된 작금의 시절, 미래에 대한 투사라는 측면에서 고전적인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이 한편을 재발견하게 되는 것도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일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5. 미이라 (해머- ICON- 코드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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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영화를 만들게 된 것은 좋은데 막상 영국에서 자기네들의 고전작품을 디븨디로 출시하는 데 있어서는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여준 해머 필름스 (자기네들이 제대로 못하겠으면 앙커 베이나 시냅스같은 장르 전문가들한테 계속 맡기면 될것을...) 에서 금년 초에 [드라큘라의 공포] 를 라이언즈게이트와 합동으로 블루 레이로 내놓았는데, 일본 수출용 프린트에만 있는 몇 분 분량의 검열삭제되었던 크리스토퍼 리의 연기와 고어 장면을 찾아내서 복원했다는 거짓말같은 뉴스 때문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새로 복원된 장면들은 예상대로 멋집니다만, 이 블루 레이의 문제는 트랜스퍼의 색조가 이상하게 어두운 파란색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마치 요즘 영화의 색감에 맞추어서 50년대 당시의 테크니칼러 색조를 칙칙하게 바꾼 것 같았는데 (해머 필름스의 대변인이 거의 그렇게 한거라고 인정을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더 정확한 정보를 아시는 분들이 계시리라 믿습니다), 새빨간 진홍색의 피라던지 그런 (현대의 감각으로 보면) 리얼하지 않아보이는 색깔이 신경에 거슬렸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만, 이것은 저한테는 거의 원본의 훼손에 가까운 행태라고 여겨지네요. 전혀 지지할 수 없는 짓거리죠.


다른 영화는 모르겠다 쳐도, 마리오 바바 등의 이탈리아 장르 영화와 고전 해머 호러영화의 색깔을 그렇게 마음대로 바꿔버리면 어떡합니까 (같은 이유로 블루레이 출시를 학수고대하던 작품중 하나인 바바의 [채찍과 육체]의 키노 인터내셔널 판본도 최종 리스트에서 탈락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개인적으로는 고전기 해머 영화중 최고작이라고 생각하는 [미이라] 의 약간 소프트한 영상과 색감은 블루레이에 그대로 유지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도 여러번 DVD 로도 돌려보고 케이블 TV 에서도 감상하고 워너 아카이브에서 마련한 HD 스트리밍으로도 봤는데, 최소한 제 눈에는 요번 해머에서 내놓은 블루 레이의 색감이 가장 안정되어 보입니다. 요번에 각별한 화질의 블루 레이로 보고서야, 크리스토퍼 리가 연기하는 카리스가 금지된 생명의 파피루스를 읽어나가자, 이미 시체가 되어 미이라로 보존된 아낭카 여사제의 눈 밑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영상을 처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4. 마르케타 라자로바 (크라이테리언- 코드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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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체코 영화작가 프란티세크 블라칠이 1967년에 만든 이 한편은 제가 한 영화에 대한 썰을 늘어놓을 수 있는 능력을 가볍게 초월하는 경외스러운 활동사진입니다.


 뭐라고 해야할지? 블라칠이 그야말로 아무런 생각없이 카메라를 들이대고 찍고, 또 아무 생각없이 잘라다 이어붙이는 것처럼 보이는 광폭하고 미쳐버린 편집에 의해 만들어낸 이 작품은... 눈보라에 휩싸인 중세 동유럽의 황막한 어느 골짜기에서 정말 짐승처럼 살아가는 영지의 한 호족에 관한 얘기입니다만... 그 일족이 “문명” 의 세력을 대변하는 국왕이 보낸 경찰관과 독일인 귀족 집안의 비위를 거슬려서, 그들과 무익하고 처참한 전투를 되풀이하면서 도륙을 당하고 몰락하는 얘기이기도 하고... 거기에 양과 로맨틱한 관계 (?) 를 맺고 있는 수도사가 등장해서, 전지적 작가의 시점으로 이 짐승같은 인간들을 경멸스럽게 꼬나보시는 (?) 하느님하고 대화 (?!) 를 나누기도 하고, 또 주위의 끔직한 상황들에 대해 코멘트를 늘어놓기도 하고... 무섭기 짝이 없는 검은 늑대의 떼거리들이 사탄의 사자인양 또는 자연의 인간에 대한 복수인양 출몰하고... 여주인공 마르케타가 수녀원에 들어가서 하느님에 구원을 호소하는 장면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싸이킥 에너지의 압박...


아아아아 설명할 수 없어요! 그냥 보시라고 할 수 밖에...


[마르케타 라자로바] 같은 한편을 보시고 나면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한 여러분의 기본적인 신념의 구조가 와르르 렉킹볼로 깨부셔지는 경험을 하시게 될 겁니다. 크라이테리언에서 출시한 블루 레이에는 마치 이 1967년도에 만든 마법과 신앙이 불꽃을 튀기면서 보는 사람들을 작살내는 한편이 지난주에 극장 공개되기라도 한 것처럼 번쩍거리는 화질과 음질로 실려있습니다.


3. 불관용 (코엔 미디어 그룹- 코드 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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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스트에서도 여기까지 올라오면 더이상 제가 주절주절 잡소리를 늘어놓는 것이 바보같아지는 경지에 도달했죠. 1916년에 W. D.그리피스가 감독한 [불관용 Intolerance] 은 영화라는 매체의 역사를 관통하려면 한번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위대한 작품인데, 저는 학생 시절때 너덜너덜하게 떨어진 (불완전한) 판본으로 보았었죠. 덕택에 그 유명한 교차편집의 기술적 뛰어남은 인정할 수 있었지만 그 내용에는 전혀 몰입을 못했었습니다. 이제 코엔 미디어 그룹에서 복원된 블루 레이판으로 보게 되었는데, 옛날 거지같은 판본과의 격차가 정말 벽에 못을 박는데 쓰던 짱돌을 갈고 닦고 또 갈고 닦아서 240 캐럿짜리 다이아몬드로 만들어놓은 것에도 비견할 수 있겠네요. 그 정도의 차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턱뼈가 빠져서 덜렁거리게 만드는 바빌론 시퀜스의 특수효과와 프로덕션 퀄리티도 그렇지만, “친구가 없는 애 The Friendless One” 그리고 “산기집애 Mountain Girl” 같은 희한한 “배역명” 이 붙어있는 여성 캐릭터들의 시대를 초월한 매력과 생동감에 넋을 잃고 봤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이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한 5백페이지짜리 소설을 써내려가고 싶은 충동을 어쩌지 못하겠습니다.


2. 자토이치 전작 콜렉션 (크라이테리언- 코드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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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불 아이구! 외국에 판권 안 넘기기로 유명한 토오호오에서 찍은 [자토이치 요짐보와 만나다] 등의 후기 시리즈편까지도 (정작 일본에서 발매된 “전작 콜렉션” 에는 토오호오에서 제작된 작품들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다 총괄한 스물 다섯편 (….) 을, 다 비까번쩍하게 최고 수준의 영어 자막을 달아서, 거기다 당대의 그래픽 노블 아티스트들을 총동원해서 멋들어진 일러스트레이션과 해설서까지. 2000년대 초반에 홈 비젼과 아니메이고에서 [자토이치] 시리즈를 디븨디로 꾸준히 내주는 것만도 당시로서는 거의 기적같은 일이었는데, 이제 이 크라이테리언 전작 콜렉션이 나오고 나니 진짜, 그야말로, 할말이 없어지네요.


1. 투우사와 여인 (올리브 필름스- 코드 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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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극 전문 감독으로 알려진 버드 뵈티커 감독이 사재를 털어서 멕시코에서 투우사가 되고 싶어하는 미국인 청년의 입봉기를 다룬 1960년작입니다. 2013년 통털어서 본 모든 영화들-- [설국열차] 도 [지슬] 도 [12년 노예] 도 [홀리 모터스] 도 다 포함해서-- 가장 저의 가슴을 울린 한편은 바로 이제는 “야만적” 이라는 비판을 두루 받으면서 죽어가는 “스포츠” 인 투우를 주제로 삼은, 겉으로 봐서는 별것도 아닌 구티가 철철 나는 “미쿡영화” 였습니다.


왜 그렇게 가슴을 울렸나고요? 하하... (허탈하고 자조적인 웃음) 위에서도 얘기했다시피 그걸 이 짧은 시간안에 여러분들에게 납득이 가게 써내려갈 수 있으면 왜 안하겠습니까. 못하니까 안하지.


리뷰를 쓴다면 어쩌면 자세히 풀어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단지 [투우사와 여인] 은 마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닌 따른 어떤 평행세계, 우리보다 더 감정을 가식이 없이 정직하게 표현하고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 세계의 사람들이 만든 영화처럼 느껴진다는 솔직한 감상을 쓰는데서 그치겠습니다. 그 평행세계는 지상낙원도 아니고 유토피아도 아니며, 여전히 거짓말과 오해와 집착이 범람하는 세상이겠지만,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만큼은 우리 세상의 영화와는 달리 무엇인가 더 근본적인 인간들의 진실된 마음에 호소하는 정직함을 지니고 있을 것 같습니다. [투우사와 여인] 은 보는 내내 그런 평행세계에서 날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칠 수 없는 그런 한편의 활동사진이었습니다.


버드 뵈티커의 존명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영화의 존재는 이 나이가 되기까지 전혀 몰랐으며, 그러한 50년 묵은 알지도 못했던 영화가 최근에 만들어진 다른 어떤 한편보다도 저의 심금을 울릴 수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영화의 마법에서 저는 영구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그 마법을 이렇게 아무때에서나 만끽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필설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이 리스트에 포함된 작품들과 아깝게 누락된 작품들도 포함해서 듀나게시판과 M의 데스크 (blog.naver.com/qfatcat) 에 리뷰를 올려나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싸이 말대로 이제 나이 먹었으니 그만 놀고 열심히 리뷰 쓰겠습니다… 오늘 밤만 빼고… ^ ^


마지막으로 참고삼아서 최종후보까지 올라갔다가 누락된 블루레이 디스크를 타이틀과 출시회사만 표기해 두겠습니다.


고르고 Gorgo (VCI),  폐지장에서: 스페셜 에디션 On the Waterfront  (크라이테리언),  태양은 가득히 Purple Noon (크라이테리언),  배드랜즈 Badlands (크라이테리언),  내일에 작별의 입맞춤을 Kiss Tomorrow Goodbye (올리브 필름스),  저주받은 자들 The Damned (코엔 미디어 그룹), 미디엄 쿨 Medium Cool (크라이테리언),  타락: 피터 쿠싱 탄생 100주년 기념 에디션 Corruption: Peter Cushing's 100th Birthday Anniversary Edition (그라인드하우스 릴리싱), 약탈의 대로 Plunder Road (올리브 필름스),  소름: 블루 레이 한정판 (콘텐트 존), 피어리스/두려움없이 Fearless (워너 아카이브 콜렉션), 도시의 등불 City Lights (크라이테리언),  살인광시대 Monsieur Verdoux (크라이테리언), 세컨즈 Seconds (크라이테리언), 외투와 단검 Cloak and Dagger (올리브 필름스), 막말 태양전 Bakumatsu Taiyoden (마스터스 오브 시네마),폭주기관차 Runaway Train (애로우 비데오), 제임스 딘 궁극 특별판 (워너 브라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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