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형편없는 제목 때문에 부당한 취급을 받는 영화가 있는데 이 영화는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겁나는 여친의 완벽한 비밀"이라니... 참 오글오글할만큼 유치한 제목 아닌가... 더구나 My Super Ex-Girlfriend라는 꽤 괜찮은 원제를 놔두고서 말이다. 직역하여 "내 슈퍼 전 여친"이라고 하면 너무 의미불명이니, "내 전 여친은 슈퍼 히로인" 정도로 의역하는 것이 타당했을 것이다. 뭐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 슈퍼 히어로 장르가 그리 익숙하지 않았고 용어 역시 인지도가 낮았다는 점을 변명이 될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겁나는 여친의 완벽한 비밀" 따위의 제목보다는 훨씬 낫지 않았을까 싶다. 특히 슈퍼 히어로물을 로맨틱 코미디로 비틀어 재해석한 영화의 특징을 선명하게 드러낼 수도 있었고...

 

표면적으로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물이다.(아니 알콩달콩한 사랑얘기보다는 여친과 헤어진 뒤 겪는 끔찍한 고생담이니 그냥 코미디라고 할까?) 항상 주변에 이상한 여자와만 엮이며 연애운이 없던 주인공이 고루해보이는 여자에게 작업을 건다. 처음에는 그녀의 말많고 산만한 태도, 냉담함에 실망하지만 침대에서의 그녀는 상상을 초월할만큼 화끈하다. 그러나 스토커를 방불케 하는 그녀의 집착에 주인공은 곧 질려버리고 결국 이별을 통보하려 하는데...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로맨스 영화의 흐름이다. 그러나 이렇다면 원제에 'Super'가 들어간 목적이 없지 않나... 그 Super의 의미가 드러나면서 이 영화의 진정한 재미가 시작된다. 사실, 주인공이 차버린 그녀는 그냥 집착 강한 스토커녀가 아니라 슈퍼맨과 맞먹는 파워를 지닌 슈퍼 히로인 G-걸이었던 것이다! 오, 마이 갓!

 

뭐 개인적으로는 경험이 없어 잘은 모르겠지만, 죽을둥살둥 사귀다가도 헤어진 이후 웬수가 되어버리는 남녀도 흔히 있고, 더 나아가 헤어진 뒤에도 감정의 앙금이 남아 유치한 복수를 계획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그런데 나에게 앙금을 품고 유치한 복수를 벼르는 그녀가 슈퍼 히로인이라면...? 내 차를 열쇠로 긁어놓는 대신 우주로 날려버리거나, 내 방으로 돌을 던지는 대신 상어를 던져놓을 파워가 있다면? 헤어진 전 여친의 유치한 복수담은 평범한 이야깃거리다. 하지만 이 복수의 규모가 슈퍼히어로 장르와 만나 슈퍼급으로 스케일이 커지는 순간, 주인공에겐 짜증나는 게 아니라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는 악몽이 되고, 그걸 지켜보는 우리 입장에선 상식을 뛰어넘어 꽤나 웃기는 코미디가 된다. 살짝 정신니간 듯 하지만, 바로 이 점이 영화의 매력 포인트이다. 평범한 남자의 슈퍼 스케일 연애악몽...

 

우마 서먼이 연기한 히로인 G-걸은 정석적인 슈퍼히어로의 클리셰를 따르는 척 하다가 비틀어놓음으로써 재미를 준다. 고등학교 때까지 왕따였다가 우연히 운석에서 슈퍼파워를 얻고(비행능력+투시력+히트비전+냉기브레스+금강불괴로 완벽한 슈퍼맨의 카피) 이후 비밀 신분을 유지한 채 뉴욕의 영웅 G-걸로 활약하며 시민들을 돕고 도시의 안전을 지킨다... 여기까진 어디서 많이 본듯한 전형적인 슈퍼히어로물이다. 하지만 이 무적의 히로인의 이면을 들춰봤더,니 사실 히어로질하느라 변변한 연애도 못해봤고 때문에 욕구불만이 쌓일대로 쌓여있으며 집착 강하고 히스테리컬하기까지 한 노처녀라면? 정신나간듯 하면서도 묘하게 현실적이지 않나? 자기 사생활과 개인의 행복을 희생한 채 이중생활에 치여사는 히어로들은 과연 자신의 불합리한 삶에 불만이 없을까? 스파이더맨이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른다"라는 교훈론으로 '너 그냥 계속 희생해라'고 넘어가고, 와치맨이 이 문제에 거의 정신분석학적 접근을 시도한다면, 이 영화는 이런 딜레마를 코미디로 풀어낸다. 쌓였던 G-걸의 욕구불만이 드디어 폭발하고, 그 대상이 바로 불쌍한 주인공이 된 것이다. 뭐 요즘이야 '초능력을 가진다고 모두 영웅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대놓고 선언하는 크로니클 같은 영화도 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슈퍼 히어로의 본분을 외면한 채 헤어진 전 남친에 대한 유치한 복수를 위해 자신의 슈퍼 파워를 아낌없이 남용하는 이 막나가는 슈퍼 히로인 캐릭터는 꽤 참신했다.

 

사실 이런 비틀린 설정으로 좀 더 막나가도 좋았을 뻔 했다.(그랬다면 아마 흥행에서 대대적으로 망한 뒤 훗날 괴작으로 추앙받았을지도;;) 하지만 영화의 기본 장르가 로맨틱 코미디이다보니 이 막나가는 설정은 그냥  시끌벅적한 해프닝에 그치고 결국은 모두가 행복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특히 렉스 루터의 설정을 빼닮은 슈퍼 빌런(생각해보니 그는 '슈퍼'가 아니다. 그냥 돈많은 매드 사이언티스트) 베들렘 교수조차 사실은 G-걸의 고등학교 동창이며, G-걸의 왕따시절 유일한 절친이다가 그녀가 파워를 얻고 그를 외면한 뒤 인정받기 위해 힘을 추구한 지고지순 순정파였고, 나중에 G-걸과 맺어지기까지 하는 장면을 볼 때는 꽤 귀엽다.

 

꽤 귀여운 영화다. 미친 척 더 막나갈 수 있었음에도 결국 로맨틱 코미디의 틀 안에 머물기로 한 것은 좀 아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퍼히어로의 이중생활에 대한 딜레마라는 소재를 코믹하게 비튼 설정과 전개는 여전히 재미있다. 멀쩡하게 생겨서 항상 소심하게 당하는 역할만 맡는 루크 윌슨과 히스테릭한 슈퍼히로인을 연기한 우마 서먼, 귀엽고도 섹시한 매력의 안나 패리스 등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무엇보다 슈퍼히어로의 전형적인 클리셰를 따르는 척 하다 비틀어 버리는 장면들이 장르 팬들에게 웃음을 준다. 가벼운 마음으로 보면 킬킬대며 즐길 수 있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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