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하베스트 Elizabeth Harvest      


미국, 2018.      


IFC Films & Motion Picture Capital Present, An Automatik/REP 12/Voltage Pictures Production. 화면비 2.40:1, 1 시간 49분. 


Director & Screenplay: Sebastian Gutierrez 

Cinematography: Cale Finot 

Production Design: Diana Trujillo 

Music: Rachel Zeffira, Matt Mayer 

Producers: Sandra Yee Ling, Brian Kavanaugh, Leon Clarance, Fred Berger, Sebastian Gutierrez 


CAST: Abbey Lee (엘리자베스), Ciaran Hinds (헨리 켈렌버그), Carla Gugino (클레어 스트래튼), Matthew Beard (올리버), Dylan Baker (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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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IQ 가 높고 막대한 부를 지닌 헨리라는 재수없는 개저씨가 나이가 많아 봐야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여성을 신부로 맞아서 산꼭대기에 지어진 거대한 SF적 저택으로 데려온다. 클레어라는 여성 집사(?) 와 맹인인 젊은 도우미 (?) 올리버가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는 모양인데, 일상적으로 받는 융숭한 대접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는 막연한 불안감을 느낀다. 거기다가 헨리는 "이 집의 모든 것이 내 것이자 당신 것이지만… 이 방만은 들어가서는 안되니까, 그리 아시오" 라는 아주 고전적인 "푸른 수염" 경고를 발해놓은 상태. 설정이 이렇게 된 이상 엘리자베스가, 헨리에 대한 지적 열등감과 그의 알게 모르게 고압적인 태도에 대한 공포심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 방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그 사실을 발견한 헨리는 폭발적으로 광인으로 돌변하여 비극적인 사태가 발생한다. 그런데 6주가 지난 어느 날, 엘리자베스는 영화에서 시작한 것과 똑 같은 새색시 차림으로, 똑 같은 내면의 대사를 읊으면서, 헨리의 저택에 도착한다. 요번에도 전번과 똑 같은 운명이 엘리자베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엘리자베스 하베스트] 는 최근에 본 비슷한 색깔의 장르 스릴러 중에서는 [리벤지] 와 여러모로 흥미있는 댓구를 이루는 작품이다. [리벤지] 를 보고 난 남성 관객들의 일부가 플롯이나 캐릭터의 비판과 더불어 불편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과 비슷하게, [하베스트] 를 보고 난 일부의 여성 관객들은 한심한 여혐영화라는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좀 있다. 물론 딱히 그렇지 않다라고 집요하게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재미있는 것은, [리벤지] 의 코랄리 파르제 감독이 [너의 무덤에 침을 뱉으리] 같은 여성 주인공인 복수 스릴러의 장르적 컨벤션을 굉장히 잘 이해하고 충분히 소화한 다음에, 그 전형적인 요소들을 치밀하게 전복적으로 재구성 재배치 하고 있는 것처럼, [하베스트] 의 세바스찬 구티에레스 감독도 역시 "재수없는 유한계급의 중년 남성이 모델처럼 어여쁜 젊은 여자를 스토킹하거나 괴롭히거나 죽이는" 내용인 수많은-- 다리오 아르젠토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유럽제 스릴러의 장르적 컨벤션을 교활하게 이용해서 관객들의 예상을 뒤엎으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단, [리벤지] 와는 달리 중간에서 카를라 구지노 (나는 이 작품 보기 전에는 몰랐는데, 베네주엘라 출신인 구티에레스와 여섯편이 넘는 작품에 협업을 했다. 첨언하자면 구지노는 이탈리아-아일랜드 계통의 플로리다 출신 백 프로 미국인이다. 구티에레스의 북미 데뷔작이고, 좀 하찮지만 나름 펄프적인 매력이 있는 인어 괴물 영화 [She Creatures] 에도 출연했다는 것은 요번 리뷰 쓰면서 처음 깨달았다. 언제 한번 다시 찾아봐야겠음) 가 연기하는 여성 부주인공 클레어로 서사의 주어가 옮겨가고 그 시점에서 영화가 크게 한번 접히면서, "푸른 수염" 주제를 천착하는 듯이 보였던 지알로 적인 스릴러에서 전혀 다른 장르의 영화로 넘어간다. 


그 장르가 무엇이냐를 밝혀 버리면 완전 스포일러가 될 터이니 말은 하지 않겠지만, 위의 첫 문단에서 내가 써놓은 전개를 읽어보신 장르 스릴러에 조예가 있는 관객 분들이라면,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듀나님 같은 경우는 영어제목의 "하베스트" 의 의미로부터 연상되는-- 실제 주인공 엘리자베스의 성[姓] 은 영화 안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서브장르, 라고 쓰면 대번 알아챌 수 있으실 것 같다). 이 한편이 이렇게 접히는 서사상의 "경첩"의 순간에 있어서, 구티에레스가 더욱 관객들의 흥미를 끌어들일 수 있는 화술의 공력을 발휘할 수 있었더라면, 그 (아마도 의도적으로) 구식인 설정과 캐릭터 디자인에도 불구하고 2018년 최고의 혼성 장르 스릴러 중 하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진상" 이 대충 밝혀지는 시점부터 막상 그녀가 집을 떠난 것을 본 일이 없는 경찰이 저택을 방문하고, 올리버와 클레어의 "정체"를 플래쉬백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하는 와중에서, 전반부까지 지탱했던 묘하게 깔끔하고 동시에 비현실적인 분위기가 흐트러진다는 약점을 노정한다. 엘리자베스가 스스로의 도펠갱어를 마주하는 종반부도 아이러니칼한 방향으로 틀려는 노력을 과다하게 기울인 듯 하고, 나에게는 정서적으로 큰 만족감을 안겨다 주지는 못했다 ([리벤지] 처럼 할 말을 다 하고 난 후, 그냥 여주인공이 관객을 째려보면서 끝나는 간결한 엔딩 같은 식으로는 끝날 수는 없었겠지만). 단지, 구티에레스의 명예를 위해서 첨언하자면 후반부의 약간 과도한 설명조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장르를 아주 진지하게 다루고 있으며, 대충 대충 그럴듯한 언설로 퉁치고 넘어가지는 않는다 (과학적으로는 여전히 논리적으로 허술한 측면이 있다. 후반부의 서브장르에서 이러한 문제점을 제대로 해소한 작품은 거의 본 적이 없긴 하지만).


photo ELIZABETH HARVEST- THE DRIVE_zps6gqzzhlj.jpg


[하베스트] 는 플롯과 내용보다는 그 만듦새와 미적 선택에 커다란 매력이 있는 한편이다. 구티에레스의 오랜 스탭인 케일 피노가 담당한 촬영과 다이아나 트루히요가 지도한 미술은 상당히 의도적으로 60-70년대 지알로나 브라이언 드 팔마 등의 포스트 히치코크적 네오 느와르의 영상미를 추구하는 비주얼을 선보인다. 역시 마리오 바바나 아르젠토를 연상시키는 붉은색, 녹색, 청색 등의 단색으로 물들인 조명, 의도적으로 칼 드라이어의 [흡혈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전적인 "의식의 흐름" 방식으로 그려진 드림 시퀜스, 드 팔마가 [시스터즈] [드레스드 투 킬] 등에서 애용했던 분할화면 기법을 원용한 서스펜스 묘사, 그리고 레이철 제피라 ([듀크 오브 버건디… 한국 제목이 이게 뭐냐 정말… ]의 작곡가) 와 매트 메이어가 담당한 이것 또한 지극히 지알로시기의 엔니오 모리코네- 키스 에머슨 스타일의 팝 튠과 무조음적 신세사이저가 효과적으로 어우러진 음악 등이 매력 포인트이다. 물론 성적인 함의를 지닌 고전 유럽 회화들이 벽에 걸린 것을 엘리자베스가 멀거니 바라보는 것을 보여주는 따위의 쓸데없이 공식에 충실한 부위도 있긴 하지만. 


캐릭터의 구상에 대해서도 의견이 좀 갈릴 수 있겠는데, 나는 이 부분에서 구티에레스가, 혁신적이라기 까지는 할 수 없지만, 구태의연한 전형성을 비틀고 쪼아 보려는 노력을 기울였고, 그것이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시어란 하인즈가 연기하는 헨리 캐릭터는 지알로를 위시해서, 남성이 여성을 가두고, 못살게 굴거나 아니면 스토킹 하다가 결국 죽이는 내용의 장르 영화의 개저씨 악당 캐릭터를 순도를 아주 높게 정련한 것 같은 존재인데, 아마 이 캐릭터가 보기 싫어서 영화 자체가 싫어지는 분들도 없지 않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막상 고전 지알로나 옛적의 스릴러 작품에서는 헨리처럼 남성 감독의 시선을 자기 반영적으로 투사하는 그런 캐릭터-- 헨리의 말도 안되는 자기합리화에서 그냥 트럼프적 투정으로 미끄러들어나는 대사에는 "내가 왜 죽였냐고… 죽이고 싶으니까 죽였지 먼 동기가 다 필요해? 내가 못살게 괴롭히다가 처참하게 죽이려고 일부러 지어낸 캐릭터인데 왜! 머가 문제냐고! 18니네들도 다 그런 게 보고 싶으니까 이 영화 보러 온 주제에 말이 많아" 라는 식의 남성 감독들의 변 (辨)이 서브텍스트로 깔려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는 의외로 적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 한편에서는 헨리는 나중에 전모가 드러나는 부조리한 미친 짓을 저지를 아무런 합당한 동기나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 동기나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실상 그 행위의 "진짜 이유" 라는 점에서,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카를라 구지노는 요즘 마이크 플래나간이랑 작업하면서 엄청나게 실력이 있는 연기파 배우라는 것을 깨달았는데 (잭 스나이더하고는 앞으로 다시는 일하지 마시길 빈다), 이 한편에서도 도무지 답답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괴기영화에서 피터 쿠싱 선생님께서 단골로 맡으시는 것 같은 관조자 역할을 잘 소화해 주고 있다. 이런 똑똑하고도 매력적인 여성이 스스로 헨리 같은 개저씨의 의도에 복속되어 살게 되었다는 전개는 따지자면 부조리하게 이를 데 없지만, 유감스럽게도 실제 상황에서 그러한 예를 많이 볼 수 있으니 어쩌랴 (한숨). 


무엇보다도 엘리자베스 역을 맡은 애비 리 커쇼우가 적역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수퍼모델인데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임모르탄 조의 어린 성노예 중 하나로 출연했던가 보다. 이 영화에서는 촬영과 조명 탓도 있겠지만, 영국의 60년대 수퍼모델 트위기를 연상시키는데, 예상외로 감정 표현이나 이런 측면에서 섬세하고 설득력 있는 연기를 피로하고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오스카상 받을만한 정교한 연기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 메릴 스트리프가 보여주는 것 같은 연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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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났으니까 말인데, 옛적부터 한국 분들이 연기자들 특히 젊고 예쁜 이들의 연기를 평가할 때 그들의 경험 미숙이나 연기 지도의 부재, 각본의 넌덜머리 나는 전형성 등의 요소를 망각한 채, 너무 쉽사리 "발연기" 라고 폄하해 버리는 것이 항상 마음에 안 들었고, 지금도 마음에 안 든다. 연기자들이 자신의 안전지대 (comfort zone) 을 넘어서서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 결과물이 우리들의 기대와 다르거나 설사 "객관적"으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 노력의 과정을 평가해주는 태도를 지니면 좀 어떨지 (대학 교수의 입장에서 볼 때, 나는 많은 학생들이 내가 원하는 수준의 성과를 전혀 내지 못하더라도, 그들이 "발공부" 했다는 식으로 일괄적인 평가를 내리고 싶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볼 때, 아무한테나 선뜻 추천하기는 조금 어려운 한편이고, 지알로를 비롯한 60-70년대 유럽과 미국의 호러-스릴러의 전통에 어느 정도 발을 담가 본 경험이 있으신 분들께 우선적으로 추천하겠다. 나는 꽤 재미있게 보았다. 굳이 비교하자면 [리벤지] 쪽이 더 강력한 (페미니즘적인 시각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한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하베스트] 가 영리하게 보여주는 방식의, 한 물 갔다고 여겨지는 설정이나 아이디어를 농담과 진담의 경계선에서 줄타기하면서 업데이트하는 방식의 장르영화 만들기가 내 취향저격이라는 사실을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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