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Fast Color 패스트 컬러 (2018)

2019.09.02 15:27

Q 조회 수:1293

패스 Fast Color


미국, 2018.    ☆☆☆★★


An LD Entertainment/Original Headquarters/Codeblack Films Co-Production, distributed by Lionsgate Pictures. 화면비1.85:1, 1 시간 41분. 


Director: Julia Hart 

Screenplay: Julia Hart & Jordan Horowitz 

Cinematography: Michael Fimognari 

Production Design: Gae Buckley 

Editor: Martin Pensa 

Costume Design: Elizabeth Warn 

Special Effects Supervisor: David Fletcher 

Music: Rob Simonsen, Dan Wilcox 


CAST: Gugu Mbtha-Raw (루스), Lorraine Toussant (보), Sanyya Sidney (라일라), Christopher Denham (빌), David Strathairn (엘리스 보안관), Ramona King (낸시), Hannah Kaufmann (여관 주인), Levi Dylan (알바 청년). 


photo FAST COLOR- RUTH AND LILAH_zpsp0h1zi7t.jpg


미국영화의 장르영역의 저변은 심각하게 덕질을 하면서 미국 장르영화를 파 본 경험이 없는 “일반 영화팬” 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넓다는 말을 내가 지난 십 몇년 동안 리뷰를 쓰면서 한 번 이상 했던 것 같은데, 이것은 단순히 “호러” 나 “SF” 라는 통상적으로 일컬어지는 주류적 장르의 분류에만 해당되는 주장이 아니고, 그 장르의 세분화에 집착하면 할 수록 더 그 저예산-인디-지방영화 카테고리 안에서의 서브장르의 각양각태의 발전상에 놀라게 되는 수가 있다. 단순히 극장영화 뿐만이 아닌 아마존이나 넷플릭스같은 데서 자주 제작하는 프로그램까지도 고려에 넣어야 하는 최근의 상황을 생각하면, 비데오 (VHS) 와 케이블 TV 가 극장에 걸릴 수 없었던 작품들을 대부분 흡수했던 80년대나 90년대에 비교해도 오히려 더 기회가 넓어져 있는 상황이다. 사실 나는 2010년경 이후부터 소위 말하는 “비데오 시장” 을 아무 사전 정보 없이 섭렵하는 과정에서, “아무도 들어본 일도 없는 괴작이나 걸작” 을 산보하다가 발 끝에 보석 원석이 툭 걸리는 것처럼 진정으로 “우연하게” 발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일찌감치 포기한 바 있다. 


[패스트 칼러]는 인디영화 중에서는 그나마 주류 언론에 홍보가 잘 된 케이스에 속하는데, 흥미있는 것은 주류 언론에서는 이 한편을 [아벤져] 와 같은 대형 수퍼히어로 장르 작품들의 인디적 대안으로 다루는 경향이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이 한편은 내가 보기에는 구태여 수퍼히어로 영화로 분류하기 보다는 옥타비아 버틀러 (한국어로도 번역본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음), 날로 홉킨스 ([The Chaos]), 카렌 로드 ([The Best of All Possible Worlds]) 등의 계보를 잇는 유색인종 페미니스트 SF 의 문제의식을 계승 발전시키고 있는 독립 SF 영화로 분류하는 것이 더 걸맞지 않나 싶지만, “색다른 슈퍼파워를 지닌 주인공이 등장하는 대안적 수퍼히어로 영화라고? 궁금한데?” 라는 호기심때문에 “낚여서” 이 한편을 보게 되신 분들이 계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괜찮은 일이 아닐까 싶다. 사실 미국에서는 이미 많은 평론가들의 의견에 의하면 포화상태 직전에 다다른 마블과 디씨 작품들을 제외하고도 정말 많은 수의 “수퍼히어로” 서브장르의 변주에 속하는 영화들이 우리가 의식 하건 안하건 매년 쏟아져 나온다. 단순히 초능력을 지닌 사람들에 관한 얘기인 [패스트 칼러]같은 한 편은 의도적으로 제외하고, 주인공들이 스스로를 “수퍼히어로” 라고 여기는 “직업의식” 이나 “소명관” 을 지니고 있으며, 이 사람들이 쫄쫄이 코스튬이나 망또를 입고 설치고 다니는 것을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세계관이 존재하는 작품군으로 제한해서 보더라도, 지난 몇 달 동안 손에 닿는 편수만 따져도 아마존이 2019년의 대박시리즈로 밀고 있는 [The Boys], 은퇴한 수퍼히어로들의 양로원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 코메디 [Supervised], 슈퍼맨의 오리진 스토리를 괴물 호러영화로 변주한 [Brightburn 더 보이 (실패한 한국어 제목-- 한국어도 아니지만)] 같은 크고 작은 영상물들이 존재한다. 


[패스트 칼러]는 겉보기로는 수퍼히어로 기원담의 꼴을 갖추고 있지만, 그 진정한 정체성은 3대에 걸쳐 비범한 재능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흑인 여성들이-- 아버지의 계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자신들의 존재를 두려워하고 폄하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주류 (백인 남성) 사회에서 근근하게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면서, 궁극적으로는 단순한 생존을 위한 투쟁의 싸이클에서 벗어나서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형태로 교섭할 수 있는 주체성을 획득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문학작품" 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미 모계의 유전을 거쳐 획득한 흑인 여성들의 초능력이라는 설정과 구상 자체가, 현실 세계의 고난과 불평등의 역사에 대한 은유로 받아들이지 않기가 힘들다고 할 수 있겠다. 다행스럽게도 각본가-감독인 줄리아 하츠 (각본은 [라라랜드] 제작자이기도 한 남편 조단 호로위츠와 공동 집필) 는 쓸데없이 몽환적인 터치를 넣거나, 아니면 이미 존재하는 SF 작품들의 클리세를 장르적 공식에 대한 지식을 과시한다는 명목 하에 마구 끼워 넣음으로써 독창성을 훼손하거나, 등의 우행들은 잘 피해간 듯 하다. 


photo FAST COLOR- BO AND RUTH_zpslcoiwh14.jpg


영화의 시대설정은 "8년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서 물이 엄청나게 귀해진" 근미래의 미국이다. 주인공 루스 ([클로버필드 파라독스] 에도 출연한 바 있는, 요즘 잘 나가는 젊은 영국인 흑인 스타중 하나인 구구 음바타-로우) 는 그 초능력을 이용하려는 미 정부에서 추적당하고 있는 데, 맨틀을 움직여서 지진을 일으킨다는 굉장한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마음 먹은 대로 통제하지를 못하고 있다. 빌이라는 정부팀의 과학자에게 하마터면 잡힐 뻔한 루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마약 중독이 된 채로 뛰쳐나온 이후 연락을 끊었던 친가로 귀환한다. 역시 초능력자인 엄마 보 ([Saving Grace], [Orange is New Black] 등, 20년 넘게 공중파 TV의 중견 연기자로 활약해온 로레인 투생) 는 루스의 딸이자 손녀인 라일라의 안위를 먼저 걱정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루스의 "초능력 발작" 의 위험 부담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내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집에 받아들인다. 자신의 초능력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위의 친지-동료들, 나아가서는 전 세계를 위협하게 되는 수퍼히어로의 서사는 사실 수퍼히어로 장르에서 드문 것이 아니지만 ([다크 피닉스] 등 마블 코믹스의 역사에서도 눈에 띈다), 이 한편에서는 자신이 지닌 "특수 능력" 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느냐라는 (루스 자신이 자문하거나, 보와 라일라가 다른 형태로 던지기도 하는) 질문이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것은 결국 주인공과 그 가족들이 가정의 안전함과 익명성을 등지고 박해와 착취로 가득찬 바깥 세상에 나가야만 할 것이냐라는, 일면 [블랙 팬더] 와도 상통하는 (흑인 주인공들의 백인 중심 사회에서의) 주체성 확립이라는 시도가 가져다 주는 고민과 연결된다. 


사실, 이 한편의 커다란 매력 중의 하나는 이 영화에서 다루는 슈퍼파워 즉 "초능력" 의, 우리가 보통 이런 종류의 미국 영화에서 마주하는 종류의 것과 많이 다른 독창성인데, 여러분들께서 이 영화를 보았을 때의 신선한 감동을 깎아먹을 것을 우려하여 구구절절한 설명은 피하기로 한다.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분해와 재생능력"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분해" 와 "재생" 의 과정을 그려내는 아이디어가 단순 명쾌하고,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특수효과상으로는 세련되어 있지는 않은데도 불구하고, 다른 SF나 판타지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매력이 있다. 극장 관람시에, 처음 루스의 딸 라일라가 식탁의 밥그릇을 공중에서 분해해 보이는 장면에서 관객석 여기저기에서 "오~!" 라는 감탄사가 들렸을 정도인데, 제목에 나오는 "Fast Color" 즉 빨리 움직이는 (점멸하는) 색깔이라는 것도 나중에 등장하기는 하는데, 막상 이 부분은 뭐랄까, 약간 지나치게 직설적이라는 인상도 주긴 한다. 


어쨌거나, 이 한편의 초능력은 "글쓰기," "그림 그리기," "조각 만들기" 등, 실제로 흑인 여성이 할 수 있는 "예술적 활동"을 위한 "재능" 의 은유라는 인상을 강렬하게 준다. 말하자면, 의식적으로 완력이나 무력 (슈퍼맨의 슈퍼파워가 그렇듯이) 같은 남성적이고 파괴적인 "힘" 과 대극적인 "초능력"을 설정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의 엔딩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하늘을 여러 갈래로 찢어 보아라" Take the sky apart 라는 시적인 표현의 구현이 결국은 "온갖 색깔로 물들여진 아름다운 하늘"을 보고 느끼는 것이었다는 점을 봐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이 표현은 "저 높은 곳까지 망설이지 말고 나아가라" 라는 격려의 은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클라이맥스에서 보가 그녀의 초능력을 근엄하고 장중하게 구사하는 양태의 간결하면서도 임팩트 있는 묘사는 무척 마음에 들고, 일반적 마블영화의 "통쾌함" 보다 우수했으면 우수했지 떨어지는 바는 없다. 


연기진은 대체로 다 잘 해내고 있지만 (라일라역의 신인 사니야 시드니도 마냥 귀엽지만은 않고 어머니와의 감정 싸움에서 앙칼짐과 서러움을 적절한 수위로 표현해주고 있다), 주인공 루스역의 음바타-로우보다도 베테랑으로서의 관록을 완벽하게 갖춘 로레인 투생의 보 역의 연기가 그 중에서도 출중하다. 감독 하트는 [미스 스티븐스] 라는 연극을 가르치는 고등학교 교사에 관한 데뷔 장편으로 주목을 받은 신예인데, 서두르지 않게 숨을 고르면서 주인공들의 절제된 연기에 바탕을 둔 서사의 통솔력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마블영화나 그런 데에서 볼 수 있는 팝핀댄스처럼 관절이 착착 꺾이는 듯한 전개의 순발력은 당연한 얘기지만 없다. 애초에 그런 것을 기대하시고 이 한편을 보러 오시는 분들은 없으시겠지만, 이 한편의 장르적 성격은 사실 연상호 감독의 [염력] 이나 [신과 함께] 시리즈 보다 도 훨씬 덜 "DC/마블적" 이라고 말씀 드리면 이해가 가시려나? 


photo FAST COLOR- TAKE THE SKY APART_zpswefsogrk.jpg


저예산 인디 작품이기 때문에 약간 손해를 본 듯한 측면도 있기는 있다. 환경파괴적 디스토피아의 묘사는 헐리웃적 과장을 지양하고, 그냥 사막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이 물을 될 수 있으면 아껴 쓰느라 불편을 겪는 모습을 일상적으로 보여주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다. 또한 영화의 색감이 클라이맥스의 기후 변화 전까지는 오랫동안 입어서 해진 옷을 연상시키는 "바랜 색깔"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러한 미적 접근을 구체적인 인류학적 디테일보다 우선하고 있음은 틀림이 없는 듯 하다. 이 부분은 사실 "비가 내리는" 클라이맥스의 미적 댓구를 이루는 "물이 없는 (사랑과 아름다움이 메말라 버린) 세상"을 상정하기 위한 "유사 SF적 (pseudo-science fictional)" 설정이란 느낌이 나에게는 강하였고, 그렇게 큰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았다고 말해둔다. 


약간 화려함이나 선이 굵은 "재미" 가 부족하다고 느끼실 분들도 계실 것 같은데, 나는 [시간의 주름]처럼 정통 SF 에서 소스를 가져온 대작들에 비해서도 훨씬 더 효율적으로 스스로의 아젠다에 충실했다고 보며, 제프 니콜스 감독의 수작 [미드나이트 스페셜]과 비교할 만한 수준으로 흥미 있게 몰입해서 보았다 (막판에 눈물샘을 마구 건드리지는 않는 잔잔한 감동을 느꼈다는 것도 비슷한 점). 나에게는 니콜스의 작품이 이 한편보다 더 미적으로나 드라마적으로나 정교하고 완성도가 높다고 여겨지긴 하지만, [패스트 칼러] 도 좋은 영화이긴 마찬가지.  페미니스트 SF 의 트렌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 절대적으로 추천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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