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일런트 힐(Silent Hill, 2006)

2013.03.01 01:45

hermit 조회 수:6620

 

 

저는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특히 일본쪽 호러와는 상극이고요... (슬래셔 무비는 그럭저럭)

 

특유의 스멀스멀하고 답답한 분위기를 싫어하기도 하고, 특히 주인공이 바보짓하고 있는 걸 보면 스크린 속으로 뛰쳐들어가 뒤통수 한대 후리며 소리지르고 싶거든요. 

 

"그러니까 깜깜한 데서 더듬거리지 말고, 제발 불 좀 켜고 친구랑 같이 다니라고, XX아!!-ㅁ-!!" ...이렇게 말이죠. 

 

하지만 이와는 별도로 화면이 예쁜 공포영화는 좀 보고픈 마음이 드는데, 장화 홍련이나 이 영화 같은 경우죠. 

 

사일런트 힐... 최근 방향성을 잃은 채 망해가고 있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굉장히 유명한 호러 게임 프랜차이즈죠. (하긴 모든 호러게임이 뒤로 갈수록 호러는 사라지고 액션만 남는 건 거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기도 합니다. 이런 숙명에 가장 잘 적응한 건 역시 데드 스페이스 시리즈겠죠. 진짜 호러 게임이었던 1편에 비해 3편은 불쌍한 네크로모프들을 온갖 무기로 학살하는 슈팅게임이니까요. ...그런데 호러 빼고 슈터 장르로만 따져도 역대급 재미 & 타격감을 가졌다는 게 진짜 무서운 점;; 호러 & 슈터 장르의 원조 격인 바이오 해저드 시리즈도 올드 팬에게 욕먹긴 할지언정 그냥저냥 꽤 잘 버티고 있고요. 근데 사일런트 힐은 원래 액션보다 어드벤처 요소 강한 게임이라 시류와 불화...ㅠ_ㅠ)

 

사일런트 힐의 특징이라면 직접적인 고어나 깜짝 놀래키는 요소보다는, 한치 앞조차 잘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속에서 느끼는 적막감과 어둠속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공포 요소가 강하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주인공보다도 더욱 유명한 그로테스크한 디자인의 크리쳐들도 한 몫 하고요(특히 게임 2편에서 삼각두와 간호사, 기괴한 모습의 두 크리쳐가 교미(?)하는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는 씬은 혐오감과 공포감이 뒤섞인 명장면으로 꼽히죠.) 하지만 사일런트 힐에서 가장 좋았던 건 음악과 세계관이었습니다. 사일런트 힐에서 가장 무서운 건 괴물도 악마도 아닙니다. 바로 사람이죠. 기괴한 모습의 크리쳐들은 뒤틀린 욕망의 투사체일 뿐이고, 평범한 얼굴 뒤에 광기를 숨기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괴물들이죠. 특히 주민들의 종교적 광신과 집단의 폭력은 단순히 게임 속 이야기가 아니기에, 더욱 서늘합니다. 그리고 이런 음울하고 서늘한 분위기임에도 또 게임 전반에 깔린 서정적인 음악이 꽤나 잘 어울립니다. 

 

...게임 얘기가 너무 길었군요. 이제 영화 얘기로 복귀... 

 

영화 '사일런트 힐'은 '크라잉 프리맨', '늑대의 후예들'을 감독한 크리스토프 강이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두 편 모두 프랑스 감독임에도 동양적인 요소가 짙은, 상당히 특이한 짬뽕 분위기의 액션영화들이며 영상 하나만큼은 상당히 잘 뽑아낸 작품들이었죠. 각본가가 의외다 싶을 정도인데 무려 로저 애버리라더군요. 타란티노와 함께 '저수지의 개들', '트루 로맨스', '펄프 픽션' 등의 각본을 썼고 '트루 로맨스'는 타란티노보다 애버리의 영향이 더 컸다고 합니다. 그리고 숀 빈, 라다 미첼 등 좋은 배우들도 출연했고요. 물론 자신의 두번째 영화임에도 엄청난 포스를 내뿜는 아역배우 조델 퍼랜드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게다가 얘 데뷔작은 테리 길리엄의 기괴한 잔혹동화 '타이드 랜드'. 어린 나이에도 정말 왠만한 성인연기자를 압도하는 포스를 보여줍니다). 화면을 잘 뽑아낼 줄 아는 감독과 좋은 각본가, 연기력을 갖춘 배우들의 조합이며 시너지 효과가 상당합니다. 

 

일단 영화는 아름답습니다. 기괴한 크리쳐들이 사람을 산채로 가죽을 벗겨 죽이고, 쇠사슬로 휘감아 갈아버리는 영화가 아름답다니 뭔소리냐 싶겠지만, 화면의 분위기가 상당히 좋습니다. 현실의 사일런트 힐(대화재 이후 버려진 마을), 연옥으로서의 사일런트 힐(죽은자들이 심판을 거부한 채 여전히 광신적 행위를 하고 있는 곳), 마지막으로 피의 복수가 이루어질 지옥으로서의 사일런트 힐까지 3개의 세계를 시각화로 그려내는 감각이 탁월하죠. 특히 사일런트 힐에 어둠이 내리는 순간 건물의 표면들이 핏빛으로 벗겨져내리고 기괴한 크리처들이 스멀스멀 나타나는 묘사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서정적인 음악이 결합되면(게임 음악을 그대로 쓴 경우도 있고, 게임의 음악감독이 영화에도 참여해서 굉장히 분위기를 잘 살렸죠.), 끔찍한 고어장면과 더욱 끔찍한 인간의 추악함에도 불구하고 짙은 안개과 눈처럼 내리는 재에 휩싸인 이 폐허 속 마을이 퍽 아름다워보일 때도 있습니다. 

 

또 영화의 이야기는 독자적인 구석이 있으면서도 게임의 세계관과 맞닿아 서늘함을 줍니다. 전체적인 세계관은 게임 1편의 이야기와 비슷하지만, 게임의 주인공이 사별한 부인이 남긴 편지를 조사하기 위해 사일런트 힐을 찾는데 비해 영화에서는 점점 심해지는 딸의 악몽 때문에 사일런트 힐에 왔다 없어져버린 그녀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마의 이야기로 바뀌었습니다. 이 선택은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덕분에 영화는 사일런트 힐 특유의 서글픈 느낌에 모성애까지 결합되며 감정적으로 더욱 큰 울림을 줍니다. 앞서 얘기했듯 사일런트 힐에서 정말로 무서운 것은 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영화는 종교적 광신과 집단의 폭력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미혼모의 자식이란 이유로 어린 소녀 알레사를 따돌리고 강간한 것으로 모자라 공동체의 순수성을 유지한다며 그녀를 화형시키려했던 마을 주민들과,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 간신히 살아남아 악마와 손잡고 피의 복수를 벌이는 알레사... 그들 중 누가 비난받아야 할 사람이고 누가 진짜 악마였을까요...? 영화에서 가장 끔찍한 장면은 사람이 찢겨죽는 고어씬이나 그로테스크한 크리쳐들이 등장하는 장면이 아닙니다. 최소한 저에게는, "악마"에게 도달한 로즈가 추악한 진실을 알게 되는 장면이 훨씬 더 끔찍했어요. 그리고 매침내 피의 심판이 이루어졌을 때, 저는 순수한 마음으로 알레사와 악마를 응원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더 고통스럽게 죽이지 않은 것이 아쉬웠죠. 

 

배우들의 연기도 좋습니다. 크리스 역을 맡은 숀 빈은 조연이라 아쉬웠지만, 오랜만에 그의 평범한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카리스마 쩌는 형님 이미지가 아니라, 무기력하면서도 실종된 딸과 아내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가정적인 아빠 역할이거든요. 주연급이 대부분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주인공 로즈 역의 라다 미첼은 여리면서도 강인한 어머니의 모습을 잘 표현해냅니다. 요즘 '워킹 데드'의 안드레아 역으로 알려진 로라 홀든도 의무감 넘치고 헌신적인 시빌 베넷 경위 역할에 썩 어울리고요. 광신도들의 우두머리로 나왔던 앨리스 크리지도 인상깊어 필모그래피를 찾아봤더니... 맙소사 스타트랙 8 : 퍼스트 컨택트의 보그 여왕님을 맡으셨던 분이군요. 영화에서는 추악한 역으로 나오지만 참 곱게 나이 드셨다는 생각이 들었음... 가장 눈에 띄는 배우는 단연 조델 퍼랜드입니다. 천진한 샤론, 어두운 알레사, 그리고 악마까지 1인 3역을 오가며 나이에 비해 정말 믿을 수 없는 연기력... 이 귀여운 외모의 꼬마 아가씨가 얼마나 더 성장할지 기대됩니다. ...근데 이후 출연작이 마스터즈 오브 호러, 캐빈 인 더 우즈, 더 톨 맨 등 공포영화가 반이네요;; 그녀의 밝은 모습도 보고 싶어 나홀로 집에 5를 봐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파라노만'에도 목소리 출연했으니 가히 호러 퀸... 아니 호러 프린세스로 부를 만 합니다. 

 

최근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많이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헤일로'나 '기어스 오브 워', '데드 스페이스' 같은 대작게임들의 영화화 루머도 끊임없이 나돌고요. 하지만 이제껏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 대부분이 영화라기보다는 산업폐기물에 가까운 졸작이었다는 것 역시 사실이죠. 이런 졸작들이 양산되는 이유로는 애초에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 게임을 영화화하려 했기 때문이기도 하고(특히 격투게임 영화화는 '모탈 컴뱃' 빼면 모두 개망했죠.), 또 게임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기도 합니다. 고급문화는 아닐지언정 게임은 분명 독자적인 세계관과 분위기를 가진 문화인데, 여기에 대한 이해 없이 소재만 뽑아먹고 설정 무시한 채 지멋대로 이야기 전개하며 화려하게 뿅뿅 효과 좀 넣어주면 팬들이 만족할 거라 생각하니 잘될 턱이 없죠. 

 

그리고 영화 사일런트 힐은 이런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만 합니다. 단순히 게임의 설정이나 캐릭터를 쏙쏙 빼먹겠다는 게 아니라, 사일런트 힐이란 세계관을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노력이 보여요. 게임의 장면을 최대한 비슷하게 재현하려 노력하면서도, 팬서비스 차원에서 뜬금없이 등장하는 게 아니라 영화의 독자적인 이야기 속에 완벽하게 녹여내고 있죠. 로즈가 제한된 아이템(명패 조각, 손전등, 나이프)을 적재적소에 써먹는 모습이나 막판에 지도 외우는 장면은 게이머 입장에서 상당히 깨알같은 장면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역대 게임 원작 영화 중 단연 최고의 영화입니다. 툼 레이더나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가 더 흥행했을지 몰라도, 이들이 게임의 설정만 빌려온 채 배우의 유명세에 기댄 영화였던 데 비해 사일런트 힐은 정말로 원작을 존중하는 자세를 보이거든요. 실제로 영화가 나왔을 때 원작 게임 팬들의 반응도 상당히 우호적이었죠. ...다만 영화 2편에선 이 모든 장점들을 말아먹은 채 삼각두가 칼춤 추는 슬래셔 무비로 변질...ㅠ_ㅠ 꼭 게임 원작이란 측면에서 접근하지 않더라도,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영상미와 탄탄한 각본, 뛰어난 배우들이 있고 고어 장면이 있는 호러 영화지만 영화가 끝났을 때는 무서움보다 먹먹함이 남는 영화... 

 

p.s. 끝으로 조델 퍼랜드 짤방.

“I’m burning.”

(난 불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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