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크림슨 피크 Crimson Peak

2015.10.31 10:45

Q 조회 수:3125

크림슨 피크 Crimson Peak


미국-캐나다, 2015.      


A Legendary Pictures Production. Distributed by Universal Pictures. 화면비 1.85:1, 35mm/HD Arri Alexa XT, De Luxe Color. Datasat/Dolby Stereo. 1시간 59분.

Director: Guillermo Del Toro

Screenplay: Matthew Robbins, Guillermo Del Toro

Cinematography: Dan Laustsen

Production Design: Thomas E. Sanders

Art Direction: Brandt Gordon

Costume Design: Kate Hawley

Special Effects Makeup: Daniel Carrasco, Xavi Bastida, Jason Detheridge, Nacho Diaz, Graham Chivers, Steven Kostanski, Neil Morrill

Special Effects: DDT SFX, Mr. X Inc., Topics.

Music: Fernando Velazquez


CAST: Mia Wasikowska (이디스 쿠싱), Tom Hiddleston (토마스 샤프), Jessica Chastain (루실 샤프), Charlie Hunnam (알란 맥마이클), Jim Beaver (카터 쿠싱), Burn Gorman (미스터 홀리), Sofia Wells (어린시절의 이디스), Leslie Hope (맥마이클 부인), Bruce Gray (퍼거슨), Bill Lake (검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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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더리 픽쳐스를 통해 [패시픽 림] 속편이나 러브크래프트 원작 [광기의 산속에서] 영화화로 옮아갈 줄 알았던 (후자의 기획은 엎어졌는가? [헬보이] 야 원래 내가 아끼는 시리즈가 아니니까 그렇다 치고…) 기예르모 델 토로가 내놓은 정통파 고딕 호러 한판. 귀신이 여러 명 온갖 무서운 꼴을 하고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호러" 라고 부르기가 꺼려질 정도로 "문예영화" 적인 한편이 나왔다. 당장 어떤 부류의 관객 분들께 추천을 드려야 할 것인지 다소 망서려지는 결과물이다. [다운타운 애비] 같은 영국 TV 드라마적인 색깔을 기대하고 오신 분들께는 지나치게 그로테스크하고 총천연색으로 자극적인 일편이고, 반대로 현대적인 호러영화를 기대하시고 오신 분들께는 "얌전하게" 느껴지거나, 특히 전반부의 진중한 전개가 지루하게 다가올 지도 모르겠다. 나의 개인적인 의견을 물으신다면, [크림슨 피크] 는 [패시픽 림] 은 물론이고 [판의 미로] 보다도 오히려 델 토로 감독의 균형감각이 제대로 잡혀있는 우수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판의 미로]를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감동받으신 분들께서는, 당연한 말이지만, 그 영화가 지닌 독특한, 정제되지 않은 시적인 아름다움 (또는 상당히 정련되지 않은 형태로 표출된 파시즘에 대한 정치적인 분노) 을 전혀 다른 지향성을 지닌 이 한편에서는 발견하실 수 없을 것이다. 단지, 나에게는 [판의 미로] 의 시적인 감성은 우리들의 "가슴" 에 직접 호소하는 "자연스러움" 이고 [크림슨 피크] 의 고딕세계의 아름다움은 헐리우드적인 "인공적" 기술의 산물이라는 식의 해석은 신빙성이 별로 없다. 그냥 소위 헐리우드적인 요소는 무조건 폄하하고 보는 평론가들의 타성이 느껴질 뿐이다.


물론 [크림슨 피크] 에서 묘사된 세상과 그 안에 존재하는 인물들은, 각본가 매튜 로빈스 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지극히 자기반영적, 의식적으로 갖다 맞추어 조립한 "고전 고딕 영문 소설들의 공식" 의 부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난 이 한편의 초기 기획 단계에서 각본가 매튜 로빈스의 공헌도가 궁금한데, 그가 할 바우드와 콤비로 만든 [드래곤슬레이어] 는 이러한 자기반영적인 모더니즘적 시각을 유지하면서도 패러디로 퇴행하지 않는 멋진 중세기 마법 판타지를 만들어내려는 시도였고, [크림슨 피크] 에서는 그러한 작가적 태도와 연계되는 부분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이디스가 막상 자신은 때로는 타고 남은 재에서 품어나오는 숯빛 연기처럼 그슬린 모습으로, 때로는 시뻘겋게 피부가 벗겨진 끔직한 용모로 출몰하는 귀신들을 현실 세계에서 볼 수 있으면서도, 자신이 쓰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귀신은 기억과 억압된 감정의 "은유 (metaphor)" 라는 말로써 규정하는 부분이라던가, 판타지/호러 영화의 특수 효과와 안과의사 (그 자체로 의미 심장한 직업) 맥마이클이 흥미를 표하는 빅토리아조 건판 사진기술로 찍힌 희미한 유령들의 표상과의 의식적인 대비 등을 보면, 그 ("포스트모던" 이라고 부르지는 말자. 그런 거 없다. 우리는 아직도 근대사회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보드리야르 같은 "이론가" 들이 늘어놓은 잡소리들 신봉하지 마시고) 메시지가 아닌 형식을 통해 고전 고딕 장르에 대해 갖다바치는 존중심의 수위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쇼우타임 케이블 시리즈 [페니 드레드풀] 과 흡사한 방식으로, 고전 원작들의 "정통성" 에는 현대의 우리가 결코 도달할 수 없을 줄 "알면서도 속아주는" "허구의 정통성" 을 추구하는 것-- 더 강파르고, 표독스럽고, 독한 맛이 나게 만들 수는 있되, 그 원작들의 사상적 범주를 깨뜨리거나 혹은 비웃으면서 비틀고는 하는 "수정주의적" 또는 “풍자적” 태도를 극력 배제하는 것-- 이 로빈스와 델 토로의 접근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접근 방식이 미리 안고 들어가는 약점이라면, 우리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새로운 사태, 상황이나 캐릭터의 행동 양식은 여기에서는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디스가 엄마 유령의 경고와, 아버지가 고용한 미스터 홀리가 조사해낸 샤프가의 비밀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샤프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영화의 전개보다) 먼저 알고 있고, 토마스의 누나 루실의 차가운 태도가 단순한 질투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고 있으며, 이러한 모든 플롯상의 전개를 예상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레일을 따라가는 열차에 몸을 맡기듯이 델 토로의 화술에 정신을 맡기고 영화를 즐긴다.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 박찬욱 감독이나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최고작들은 이러한 공식들을 따라 가면서도 불현듯 이들을 박살내 깨뜨리고 새로운 경이스러운 차원으로 (잠시간이라도) 이동하곤 하는데 델 토로 감독은 그런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는 듯 하다. 그러나 한계점이 명백한 "조립해서 만든" 건축물이라 할지라도, 이토록 혼을 빼놓는 원색적인 아름다움과,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는 웅장함을 갖추고 나타나면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수천개의 레고 블록을 조립해 만든 어떤 물건이 너무나 정교하게 만들어져서 진짜 그 물건으로 착각할 정도인데,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보니까 레고 블록으로 만든 거더라. 그걸 확인하는 순간, "에이 뭐야, 레고잖아!" 라고 실망을 하고 돌아서느냐, 아니면 "허걱 ;;; 이걸 어떻게 레고로 만들었지, 대단하다!" 라고 더욱 만든 사람에 대한 존경심이 생기느냐의 차이가 있게 마련인데, 나는 어느쪽이냐 하면 후자에 속하기 때문에, [크림슨 피크] 도 흥미있게 또 그 "예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면서 관람할 수 있었다.


캐스팅이 매력적인 한편인데, 연기자들의 연기지도도 [패시픽 림] 이나 [판의 미로] 보다 훨씬 제대로 이루어져 있다 (단 이러한 연기지도의 실력도 델 토로보다는 박찬욱감독이 한 수 위인듯. [스토커]와 비교하더라도 그렇다). 단 여성 연기자들의 의상 디자인이 샤프 일가의 성[城]인 알러데일 홀의 그림책에서 고대로 가져온 듯한 과잉스러운 프로덕션 디자인과 마찬가지로 과격하기 이를 데 없어서, 약간 신경에 거슬린다. 미아의 경우는 몇몇 신에서는 거의 옷의 칼러에 목이 졸리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미아는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면 아주 지독한 못된 소녀 얼굴이지만, 19세기 가치관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면서도 로맨틱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젊은 미국 여성을 꽤 잘 묘사해내고 있는데, 제시카 체스테인은 그에 비하면 액센트부터 표정 연기나 제스처까지 완벽한 "고딕 소설에 나오는 정신 불안정한 여자" 의 체현인데 왠지 잘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연기자의 눈빛에서 배어나오는 느낌이 지나치게 현대적이고 이지적이다. 진 티어니 같은 고전 여배우들이 지녔던 일면 고풍스러운 고혹적인 감각이 부족한 듯 하다. 한국시장의 경우, 이 한편의 성공을 혼자 책임질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토마스 샤프 역의 탐 히들스턴인데, 엔딩 시점에서의 묘하게 박력이 부족한 연기(별 이유 없이 그 미끈한 계란같은 얼굴을 상하게 만드는 과잉스러운 액션 연출때문인지?)를 제외하면 여성의 모성애적 욕망을 자극하는 (이런 표현 써도 되나?) 불쌍함과, 젠틀한 미소 뒤에 숨겨진 교활함을 적절히 배합해 표현해주고 있다.


덴마크 출신의 단 라우스첸 ([윈드 칠] 이라는 내가 좋아하는 에밀리 블런트 주연의 호러영화도 담당했고, 델 토로 감독과는 [의태 Mimic] 에서 호흡을 맞춘 적이 있다) 의 촬영과 토머스 샌더스 ([아포칼립토]) 의 프로덕션 디자인의 화려함과 웅장함은 다시 말하면 군소리겠고, 특필하고 싶은 것은 스페인 작곡가 페르난도 벨라스케스 ([더 임파서블]) 가 담당한 음악이다. 쓸데없는 "효과음" 중심의 "호러영화" 음악을 완전히 배제하고 현악과 피아노로 기본적으로 로맨틱한, 그러나 이야기의 어둡고 퇴폐적인 부분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는 훌륭한 스코어를 제공해주고 있다.


사실 나는 샤프가 이디스를 꼬셔서 쿠싱가의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기까지의 전반부가, 드라이하고도 유려한 대사와 딱딱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와도 같은 아날로그적 연기와 전개가 가져다주는 즐거움이라는 관점에서 정말 재미있었고, 몰입해서 볼 수 있었다. 새빨간 선홍색의 진흙 위에 세워진 성이라는 설정부터 시작해서 온갖 종류의 날카로운 부엌칼들이 등장하는 후반부의 과잉스러운 살 떨리는 흥겨움도 좋긴 했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무엇인가 새로운 발상이 부족하고, 클라이맥스에서는 종착역에 점차 가까워지는 기차 같은 관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심지어는 이디스에게 아버지가 선물로 준 만년필이 소도구로 등장하는 순간, 허허 저걸 저런 식으로 써먹겠구먼, 하는 단발적인 예상까지도 빗나가지 않았으니까. (이 소도구에 관한 한 [감시자들] 에서 정우성이 썼을 경우가 훨씬 참신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이 영화의 기본 스토리가 되는 "돈 많은 미국 집안에서 자유스럽게 자란 귀한 따님을 알고 보니까 찢어지게 가난한 영국 귀족의 아드님이 모셔가서 온갖 생고생시키는" 멜로드라마는 남북 전쟁 이후의 미국에서 벌어졌던 "실제 역사" 에 기초를 두고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윈스턴 처칠이 아버지 말보로 공(公) 이 이미 그 시대에 "월 스트리트의 제왕" 이라고 알려졌던 미국의 갑부 제니 제롬과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다 (제니는그때 당시 사진 기술로 보존된 모습만 봐도, 현금의 모델이나 그런 이들에 비해서 하나도 꿀리는 데가 없는 미인이다. 어떻게 저런 엄마 밑에서 불독 같은 처칠이 나왔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 10대에 잡지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는데 처칠이 성인이 된 이후에 "내 어머니는 나의 후원자인 동시에 정치적 동지였다" 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영국 귀족들의 차별대우 가운데서도 기가 죽어서 지내지는 않았던 것만은 확실하다. [크림슨 피크] 의 이디스 캐릭터도 이런 새시대의 젊은 미국 여성상과 어딘가 접합점이 있을 것이다). 물론 말보로 스펜서-처칠 집안은 가난뱅이는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영화 안에서 이디스의 아버지 카터가 토마스에게 "당신들 영국 귀족들처럼 일도 안하고 돈을 벌려는 사람들…" 뭐라고 하면서 싫은 소리를 하는 시퀜스는 그런 의미에서, 문학작가들의 상상에 기원을 둔 게 아니고, 역사적인 진실성이 담겨 있는 장면이다. 아마도 상당수의 따님을 애지중지 데리고 살던 미국의 재산가 아버지들이 유럽에서 "떠내려온" 귀족들에게 영화에서처럼 회의의 눈길을 보냈으리라. 이 사실을 고려하면 히들스턴은 정말 적절한 캐스팅이라는 생각이 드실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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