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의 저주 Relic  


미국-오스트레일리아, 2020.     ☆☆☆★★


A Gozie Agbo/Carver Films/Nine Stories/Screen Australia/Film Victoria Co-Production, distributed by IFC Midnight. 화면비 2.35:1, 1시간 29분. 


Director: Natalie Erika James 

Screenplay: Natalie Erika James, Christian White 

Cinematography: Charlie Sanoff 

Costume Design: Louise McCarthy 

Music: Brian Reitzell 

Production Design: Steven Jones-Evans 

Producers: Jake Gyllenhaal, Riva Marker 


CAST: Robyn Nevin (에드나), Emily Mortimer (케이), Bella Heathcote (샘), Cyrus Banton (제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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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호러영화의 장르에서 지난 6-7년간에 눈에 확실히 띄는 경향 중 하나가 여성 감독들의 진출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예는 2014년의 [바바둑]으로 명성을 얻은 뉴질랜드의 제니퍼 켄트 감독이 아닐까 싶은데, 그 외에도 [어메리칸 메리] 와 [래비드] 리메이크판을 내놓은 소스카 자매, [캐리] 리메이크의 킴벌리 피어스, [제니퍼의 몸] 의 카린 쿠사마, [Love Witch] 의 안나 빌러 등이 원래부터 괴기공포를 선호했거나 여부에 상관없이 각양각색의 호러장르로 분류 가능한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또한 [A Girl Walks Home Alone at Night] 의 아나 릴리 아미르푸르 (이란 출신) 나 [Raw] 의 쥘리 뒤쿠르노 (벨기에), [Shackled] 의 우피 아비안토 (인도네시아)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 경향성이 영미권을 중심으로만 관찰되는 것도 아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한국에서는 꽤 오래 전부터 [4인용 식탁], [해빙] 의 이수연 감독, [여고괴담 3] 과 [요가학원] 의 윤재연감독 (요즘은 뭐 하시고 계시는지 궁금하긴 한데) 같은 예들이 있어왔고, 세계적으로 볼때 여성 연출가가 만드는 호러영화의 전통에 있어서 꿀리는 나라는 아니라고 본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나탈리 에리카 제임스는 이 한편이 장편 데뷔작인가 본데, (단편 연출작 중 [버로우] 라는 한편은 베이징의 상류 계급 중국인 소년 소녀들이 등장인물로 나오는 가본데, 한 번 보고 싶다) 최소한 다른 리뷰에서 회자되고 있는 제니퍼 켄트와의 비교는 적절하지 않을 듯 하다. 물론 둘 다 가족간의 관계를 주요 주제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바바둑] 은 어머니와 아들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져 있다면, [유물의 저주] (그렇게 중요한 포인트는 아니지만, 한국어 제목은 영화의 내용과 잘 맞지 않는다. 영제의 relic 이란 구체적인 유물을 지칭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라져갈 운명인 노쇠한 존재들, “퇴물” 이라는 번역이 적합하다고 여겨진다) 는 3대에 걸친 어머니와 딸, 손녀딸의 관계를 천착한다— 공통항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작품의 플레이버는 둘 다 해산물을 주 재료로 썼지만 마라탕 훠궈와 스파게티 봉골레만큼 다르다.

     

제임스 감독은 벌거벗은 노인인 에드나가 목욕을 하려다 말고 욕탕에 물을 틀어놓은 채로 망연자실하게 서있는 도입부부터, 바닥에 저음으로 깔리는 불안과 초조감을 불러일으키는 전자음악과, 크리스마스 트리를 비롯한 장식용 전구들로부터 발산되는 명랑하기는 커녕 음산하기 이를 데 없는 붉은색의 조명이 어우러지면서 공포스러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일상적인 분위기의 장면을 연출해 내는데, 내가 특기할만하다고 여긴 것은 욕조에서 넘친 수도물이 계단을 타고 내려오면서 다시 벽의 모서리를 돌아서 마치 살아있는 점액질의 생물처럼 꿈틀거리면서 전진하는 묘사였다. 


주된 캐릭터는 할머니 에드나, 어머니 케이, 그리고 딸 샘 이렇게 세명밖에 등장하지 않는 이 한편은, 그러나 이러한 한정된 공간에서의 가족 드라마가 흔히 보여줄 법한 “연극적” 인 요소가 거의 없다. 대사의 양도 이러한 상황에서 직계가족들이 할 수 있는 일상생활적인 대화를 제외하면, 영어로 expository dialogue 라고 부르는, 영화의 플롯과 캐릭터들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한 언설도 극소수로 제한되어 있다. 보통 이렇게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설명하기를 거부하는 각본으로 호러영화를 만드면 그 전략 자체가 진부한 클리세가 되거나 (비근한 예로는 [더 터닝] 을 들 수 있을듯), 자의식 넘치고 온갖 상징으로 도배된 “예술 영화” 가 되거나 둘 중의 하나인데, 이 한편은 그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시각-음향언어의 용의주도한 배치와 활용 방식이 뛰어나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들을 간단히 해소하고 있다. 


케이가 오두막의 침대 옆에 굴러 떨어진 썩은 시체인지 검은 곰팡이가 슬은 인체 모양의 자죽인지 알 수 없는 모습을 “기억” 하는 플래쉬백이라던가, 에드나의 가슴에 난 시커먼 멍을 본인이 마치 가려운 듯 멍하니 긁는 모습, 에드나가 밀랍을 깎아서 만드는 “조각” 의 딱 집어서 말할 수 없이 불편한 형상, 그리고 별 의미도 없이 쿵쿵거리면서 벽이 무너질 것 같은 소음을 내는 집 등, 시각과 음향이 어우러지면서 교활하게 관객들을 불안과 초조의 상태로 몰아간다. 누차 말하는 것이지만, 무슨 긴머리 귀신이 커튼 뒤에 징~ 하고 버티고 서있는 따위의 대놓고 상상력의 도약이 필요한 괴기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충분히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여전히 괴상하고 불편한 요소들을 평범해 보이는 일상의 묘사에 적절하게 삼입해서 호러영화적인 효과를 생성하는 것은 보통 “예술영화” 찍는 것보다 훨씬 더 고도의 기술과 통제력을 필요로 하며, 제임스 감독은 확실히 그러한 종류의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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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으뜸의 주제는 사랑하는 가족이 노쇠를 통해 그 자아를 잃어버리고 다른 가족들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우리도 그 분을 알아볼 수 없는 타자로 변화하는 과정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아야 되는 과정이다. 제임스 감독은 에드나가 애정 넘치는 언사와 함께 손녀 샘에게 물려준 가락지를 며칠 있다가 언제 줬냐는 듯이 도둑놈 취급하면서 다시 뺏어가는 행태, 혼잣말을 하는 것인지 누구인지 어둠속의 존재와 대화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도록 계속 중얼거리는 모습 등, 점진적으로 상궤를 벗어난 상태로 진전하는 과정을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를 상정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우리 관객들에게 (나이 먹은 분들께는 나도 잘못하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그리고 젊은 분들께는 우리 부모나 다른 사랑하는 분들이 저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를 안겨줄 수 있는 모습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내가 정말 제임스 감독의 공력을 실감할 수 있었던 부분은 샘이 에드나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정리” 해놓은 “짐짝” 들을 발견하는 시퀜스부터 시작되는 [유물] 의 마지막 3분의 1 에 해당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부터는 그냥 풀하게 가동되는 호러 시퀜스의 연속이고, 아마도 대부분의 관객들께서 그야말로 오장육부가 바짝 쫄아드는 것 같은 긴박감과 공포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좁디 좁은 통로와 벽과 벽 사이의 공간, 그리고 당장이라도 주인공들을 깔아뭉개버릴 것 같은 위협적인 소음을 내고 체액 (體液) 을 연상시키는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에드나의 저택 자체가 하나의 “괴물” 로서 주인공들을 잡아먹어 버릴 것 같은 협위를 발휘한다 (이 저택은 기억의 쇠퇴와 함께 계속해서 의미있는 “공간” 들이 사라지면서 소멸해가는 에드나의 “정신” 의 완벽한 은유로서도 기능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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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 더 스킨] 을 일면 연상시키는, 대놓고 초현실적인 엔딩은 아무런 “논리적이고 개연성있는 확답” 이 주어지지 않는 다는 점에서 보시는 분들의 의견이 갈릴 수 있겠지만, 나는 여기에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논리” 는 결여되어 있을지 몰라도, 제임스 감독이 이 한편의 주제를 풀어놓는 방식을 고려했을 때, 결코 꼼수를 써서 도피하는 것도 아니요 그냥 힘이 부쳐서 적당히 마무리하는 것도 아닌, 영화 내적인 “논리” 에 충실한, 어떻게 보자면 감동적이기까지 한 결말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결국 에드나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혹은 결국 그녀의 “정체” 는 “무엇” 이었냐고)? 거기에 대한 대답은 영화 내에서 주어진 단서만 따져보아도 여러 가지로 추리할 수 있겠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영화 초반부의 샘의 대사에서 나오듯이 “어려서 내 기저귀를 갈아주었던 엄마의 기저귀를 내가 이제 나이가 들어서 갈아주는 것이 왜 당연하지 않아요?” 라는 명제에 바탕을 두고, 사랑하는 가족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으로 “변신” 하는 것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완전히 이겨낼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그 과정을 정면으로 대면할 수 있을 만한 용기와 인내력과 긍휼함을 가질 수 있도록 사는 것이 아닐까? [유물의 저주] 는 [바바둑] 만큼 우수한지는 좀 따져봐야 하겠지만 최근에 본 호러영화중에서는 가장 훌륭한 한 편에 속한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어떤 나라, 어떤 계층에 살던지 그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보편적인 공포와 슬픔을 주제로 삼으면서, 매서운 칼끝의 솜씨를 보여주면서도 결코 젠체하거나 서두르지 않는 일류 세프의 솜씨를 발휘하는 나탈리 에리카 제임스 감독의 괄목한만한 장편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느린” 호러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최소한의 참을성을 갖춘 호러 팬분들께 강력하게 추천하는 바이다.   


사족: 위의 크레딧을 주의깊게 보신 분들은 아셨겠지만 헐리웃 스타 제이크 질렌할이 리바 마커와 함께 설립한 회사 나인스토리스에서 제작한 한편이다. 연기자와 스탭은 거의 오스트레일리아사람들이지만. 이런 헐리웃 유명배우들이— 스펙터비전의 일라이저 우드나 Plan B 의 브래드 피트 등도 꼽을 수 있겠다— 점차 자신들의 독립 프로덕션이라는 수단을 통해 미국이라는 국가적 테두리를 넘어서 고급 장르영화의 경지를 개척하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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