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에는 듀게의 모든 분들 소원 성취하시고 좋은 일이 있으시기를 빕니다. 우선 저부터도 이 건강상의 위기를 극복해야 할 터인데 말씀이죠. 연구서도 완성해야 하고 바깥분에게 언제까지 신세지고 있을 수도 없고 한국도 이탈리아도 가야 하고… 그러나 이렇게 몸이 안좋아져도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을 멈출 수는 없군요. 무슨 의무감이나 돈 때문에 하는 거라면 이런 글을 지금 쓰고 있지는 못할 겁니다.

 

하여간 현재 제 건강상태와는 관계없이 2011년도에는 디븨디매체의 퇴락이라는 자연의 법칙 (?) 을 완전히 개무시하고 작년보다 20% 정도 늘어난 수의 디븨디와 블루 레이를 구입했습니다. 단순한 개수로 따지자면 2011년이 제가 이때까지 구입한 디스크의 숫자가 가장 많았던 해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스트리밍이나 합법다운로드라는 “미래지향적인” 트렌드에 제가 전혀 영향을 안 받은 것은 아닙니다. 작년에는 영상자료원, 아이튠스와 더불어 미국에서 인터넷 티브이로 성공한 바 있는 훌루닷컴을 통해 상당한 수의 영화를 보았습니다. 훌루닷컴의 경우는 훌루플러스로 업데이트하면서 크라이테리언 컬렉션이 소유한 수백편의 타이틀을 풀어놓았습니다. 크라이테리언에서 디븨디로 출시되었던 작품들만 모아놓은 것이 전부였다면 그것만 가지고는 끌리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요번의 업데이트를 통해서 디븨디로 출시되지 않은 수많은 작품들도 스트리밍으로 볼 수 있게 된것이죠 ([제 3의 카게무샤], 시노다 마사히로 감독의 [암살] 등. 이런 예술적 야심이 넘치는 작품들 말고도 [우주대괴수 기라라] 같은 괴작 몽작들도 눈에 띕니다). 물론 480i의 “고화질” 로 컴퓨터에서 틀어볼 수 있다 이런 정도의 인센티브 가지고는 디븨디와 블루 레이를 버리고 스트리밍으로 전환할 계기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겁니다. 항상 얘기하는 것이지만 한 영상매체에서 다른 매체로 갈아타기를 결심하게 되는 계기는 저같은 불평쟁이 소비자의 경우는 백퍼센트 그 소프트웨어 즉 “상품” 의 질과 희소성을 포함한 가치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기때문에, 다운로드와 스트리밍이 그러한 탐나는 타이틀을 그냥 “고화질” 이 아닌 원본에 가장 충실한 형태로 재생해준다면 그리고 디븨디와 블루 레이가 더이상 저같은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면 말로야 뭐라고 투덜거리던 간에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되겠지요. 그러나 최소한 미국시장에서는 광학디스크 매체의 죽음이 그렇게 간단하게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스트리밍 서비스 제공자들이 좀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훌루플러스처럼 크라이테리언 컬렉션에게 큰 자리를 할애해준다던지 그런 특화된 소비자의 구미를 돋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냥 공짜로 틀어주면 와서 볼거라고 안이하게 생각하진 마시길 바래요.

 

2011년도에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에서 괴이하고 낯설고 경이스러운 작품들을 출시하는 새로운 디븨디와 블루 레이 레벨을 하나 이상 발견하였습니다만 개중에서 가장 놀라왔던 하나를 고른다면 British Film Institute 에서 주관하는 “영국영화의 이면 (裏面) Flipside” 시리즈겠지요. 이 시리즈에는 정말 영국영화사를 깊이 연구한 사람이 아니면, 아니 그런 분들이라 할지라도 “엥 이런 영화가 있었나?” 하고 입이 딱 벌어질 것 같은, 검열에 난도질 당하고 소비자에게 버림받고 평론가들의 악평에 시달렸던 “이면” 에 숨겨진 여러 영화들이 블루 레이와 디븨디로 복원되어서 출시되고 있습니다. 만일 영상자료원에서 유현목이나 김기영 감독의 대표작 말고도 임권택감독의 [원한의 두꼽추] 나 [어느날 밤 갑자기] 나 [돌아이 2] 같은 제작들을 디븨디 뿐만 아니라 블루 레이로 내놓는다면 어떨까요? 과연 대한민국 시장에서는 몇사람이나 쌩돈을 내고 이런 작품들의 블루 레이를 구입할런지. 아마존 영국과 다른 특별전문점에서 웃돈을 내고 플립사이드 타이틀들을 하나씩 꾸준하게 구입하고 있지만 여지껏 돈 손해를 봤다는 생각은 들지 않네요. 다른 사람들은 들어본 일도 없는 훌륭하고 기막히고 괴이한 영화들을 무더기로 고화질로 소유하고 맨날 틀어볼 수 있다는 즐거움은 상당한 겁니다.  

 

몸이 빨리 피로해지니 서론은 너무 길게 늘어놓지 않겠습니다. 2012년에도—건강이 지독히 악화되지 않는 이상은—많은 양의 디븨디와 블루 레이를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좋은 영화들을— 특히 여러분들 나이보다 더 늙은 영화들 그리고 여러분들이 가본 적도 없고 살아본 적도 없는 곳에서 만든 영화들— 많이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디븨디 열한편을 먼저 고른 후에 블루 레이 열한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려두지만 이 리스트는 영화의 우수성이나 명성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기준도 참고의 대상이 되었긴 합니다만 어떤 타이틀은 리스트에 들어가고 어떤 타이틀은 빠지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저의 주관적인 감상에 의한 선택이올습니다. 만일 막연하게라도 수많은 선고 척도들의 최대공약수를 고르라고 한다면 “놀라움” 이 되겠죠. 작년 한해를 통털어서 저에게 가장 놀라움을 안겨다준 디븨디와 블루 레이들을 중점적으로 골랐습니다. 단 제가 돈을 내거나 공짜로 받은 일편들에 한해서 선정했습니다. 기가 막히게 훌륭한 영화더라 할지라도 렌탈로 보거나 극장에서 본 작품은 대상외로 했습니다. 내년이나 그 이후 어느 시점에 스트리밍이나 다운로드로 본 영화들도 고려의 대상에 넣게 된다면 이 내용적으로는 거의 무의미한 제외 이유도 바꾸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그러면 2011년중 손에 넣은 디븨디 중 가장 놀라왔던 그리고 가장 소중한 열한편 먼저 갑니다.

 

11. 황야의 떠돌이들 The Wild Rovers- Warner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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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베스트 리스트를 만들고 있노라니 일본영화 시대극과 미국영화 서부극이 반드시 한편씩은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만 이 [황야의 떠돌이들] 은 시놉시스나 설명을 들어서는 왠지 모르게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여지껏 놓쳐왔던 일편입니다. 워너 아카이브에서 2시간 20분에 달하는 복원판으로 내놓았다는 말을 듣고 사실은 제리 골드스미스의 음악을 듣고 싶은 생각이 50%이상의 구매욕을 발동시키는 상황에서 손에 넣게 된 타이틀입니다. 결과는… 다시금 경악을 금치 못하는 감상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황량하고 매서운 웨스턴이 [티파니에서 아침을] 와 [핑크 팬더] 시리즈의 블레이크 에드워즈의 각본-감독이라니! 서부극의 밑도 끝도 없는 다양성을 다시금 되새기게 만드는 일편임과 동시에 ([서부의 사나이] 의 게리 쿠퍼와 마찬가지로) 윌리엄 홀든이 얼마나 위대한 연기자였는지 새삼 깨닫게 해주는 한편입니다.

 

2.35:1 의 파나비젼 스코프로 찍은 소떼와 금빛의 마른풀, 보석처럼 번쩍이는 눈으로 뒤덮인 황야의 풍광도 대단합니다만, 유일하게 70년대적으로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면 총에 맞아서 흐르는 피가 주홍색 페인트처럼 보인다는 점 정도입니다.

 

10. 한밤중에 무덤을 파는 자 The Night Digger- Warner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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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 이 영화도 버나드 허먼이 음악을 맡았다는 단순한 이유로 보기 시작했습니다만 우리가 흔히 지닌 장르적 편견을 완전히 짱돌로 찍어 죽이는 그런 한편이었습니다. 무어라고 표현을 해야 좋을지? 고딕 멜로드라마에 이상 심리극에 [싸이코] 를 방불케 하는 호러 서스펜스이기도 하고, 엄청나게 진지한 비극 로맨스이면서 동시에 현실세계에서 미묘하게 벗어난 어른들을 위한 우화와 같은 측면도 있습니다. 알리스테어 레이드 감독보다도 각본을 쓴 로알드 달의 취향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한편입니다. 촬영당시 40대 중반이었지만 솔직히 실제보다 더 나이가 들어보이는 패트리시아 닐 ([지구가 멈춘 날]) 여사가 연기적으로 주도하는 한편인데, 거침없이 누드를 피로하면서 스무살의 청년과 섹스신을 연기하고 하시지만 전혀 “망가지는” 연기로 보이지 않고 지극히 자연스럽고 논리적으로 보입니다.

 

이런 아무리 이상하게 장르적 전형에서 벗어나더라도 결코 캐릭터들에 대한 존중심을 잃지 않는 “상업적” 작품을 소위 말하는 “비주류적 B 급 정서를 추구하는” 한국의 감독님들께서 많이 좀 만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맨날 브라이언 데 팔마, 샘 페킨파나 마이클 치미노가 위대하다 타령만 하시지 마시고 이런 “마이너” 영화도 좀 보시고 사세요.

 

9. 아가사 Agatha- Warner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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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는 애간장 타면서 출시를 고대하던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주연작들이 디븨디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레드그레이브 여사의 팬으로서는 기절할 만큼 행복한 상황이었죠. [아가사] 는 아가사 크리스티 여사가 1926년에 11일동안 의문의 실종을 했던 사건의 진상을 나름대로 추정한 미스테리입니다만 미스테리영화로서의 재미보다도 레드그레이브여사, 티모시 달턴, 미국인 저널리스트를 연기하는 더스틴 호프만의 유려한 연기와 탐미적이고 화려한 마이클 압테드 감독의 연출을 부글부글 거품이 이는 뜨듯한 자쿠지에 몸을 담그듯이 정신을 내맡기고 보는 즐거움이 몇배는 더합니다.

 

VHS 로 보고 나서 25년이 넘게 영미권의 디븨디가게를 뒤지고 찾았지만 결국 워너 아카이브로 구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노년에 들어가셨지만 여전히 정력적인 활동을 보여주시는 두 분, 레드그레이브 여사와 달턴 선생, 늦기 전에 다시 공연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8. 풀 한포기도 없는 No Blade of Glass- Warner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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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것은 정말 심각하게 비뚤어진 한편입니다. 여성에 대한 묘사는 말할것도 없고… 박력 넘치는 걸작 [벌거벗은 사냥감] 을 만든 코넬 와일드 감독이 공해와 환경오염으로 거의 모든 식량자원이 피폐된 영국에서 지방의 농장으로 대피하는 한 가족의 “모험” (이라기보다는 지옥순례기) 을 그린 이 활동사진은 이미 공개 당시부터 “맛이 간 미친 영화” 로 악명이 높았습니다만 이건 진짜 말 그대로 “익스트림 시네마” 입니다.

 

뭔 [저수지의 개] 니 [올드보이] 가 익스트림 시네마라고 그러셔? 환경친화적인 메시지 따위는 브론토사우르스에 밢힌 파리처럼 납작하게 만들어버리고 오로지 “느그들이 돈 많고 교양있고 뭐 니체와 사회주의를 논하는 지식인이라고? 먹을것만 없어져 봐라 니네들은 짐승이다 짐승, 암캐와 숫캐의 무리들이다, 이 셰키들아” 라는 “작가적 시점” 이 말라리아 환자의 발작처럼 모든 고상한 취향이니 균형감각이니 정치적 공정성이니를 다 때려부시면서 관객들을 압도합니다. 헐리웃 영화나 요즘 웰메이드 한국영화에서 볼 수 있는 “관객의 감성에 대한 배려” 따위는 홍어의 성기만큼도 찾기 어렵습니다. (저런 죽일 놈의 캐릭터는 영화가 끝나기 전에 반드시 관객들에게 만족을 주는 방식으로 맞아 죽을 것이다 라는 따위의 일반 관객에 합당한 예상을 하고 보시다가는 이 영화에게 뺨따구를 몇 대 맞는 경험을 하시게 될 겁니다)

 

퀜틴 타란티노처럼 영화라는 매체의 역사에 의존해서만 자기 표현을 할 수 있는 영화작가는 [풀 한포기도 없는] 같은 익스트림 시네마는 (아무리 기술적으로 발달한 처참한 성폭행 장면과 신체 훼손 폭력 장면을 보란 듯이 찍고 늘어놓아도) 결코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로지 이런 막가는 활동사진의 “세련된 패러디” 만 만들 수 있을 뿐이지요. 아무에게나 추천할 수 있는 영화는 결코 아닙니다만 통상적인 “재미” 나 “정치적 함의” 를 까마득히 벗어난 곳에서 교미 후에 수컷의 머리를 뜯어먹는 암사마귀처럼 관객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는 독기를 품은 일편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7. 스펜서 트레이시-캐서린 헵번 컬렉션 Tracy & Hepburn Definitive Collection- Warner Brothers.

 

 

이제는 더이상 워너 브라더스처럼 고전 영화 애호자들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스튜디오에서라 할지라도 여러 장의 디븨디로 구성된 박스세트를 기대하기 어렵게 된 세상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펜서 트레이시-캐서린 헵번 컬렉션] 같은 고전 걸작선들이 여전히 출시되고 있으니 아주 희망을 버릴 일은 아니겠습니다. [불길의 수호자] 처럼 전혀 모르고 살던 영화부터 요즘에는 너무나 뻔한 내용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명작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저녁 손님이 누군지 맞춰 보세요] 까지 여섯편의 트레이시-헵번 컴비가 출연한 온갖 장르의 작품들이 영화의 주제나 시대상을 반영하는 단편 만화영화를 포함한 각종 서플멘트와 더불어 수록되어 있습니다.

 

6. 아메리카 아메리카 America, America- Warner Brothers.

 

 

몸이 아파서 그런지 삐딱하게 글이 써지는군요. 듀게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겠지만 제목을 한번 보세요. “나는 미국에 배신당했다!” 가 아닙니다. 천신만고 끝에 미국땅에 도착한 주인공이 눈물을 쏟으면서 땅에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추는 장면이 나오는 “미국 찬양영화” 입니다. 못된 프로파간다 아닙니까?

 

엘리아 카잔 감독의 블랙리스트와 빨갱이 사냥과 관계된 경력과 그에 대한 영화학계의 꾸준하고 강도높은 비판에 대해 잘 아시는 분들이 한국에 얼마나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자신도 저의 정치적 성향으로 볼때는 결코 카잔 감독의 정치적 선택을 우야무야 넘어가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로만 폴란스키를 아동 성폭행범으로 단죄하더라도 60-70년대 유럽-미국의 스릴러/필름 느와르/호러 장르를 논할 때 그의 이름을 누락시킬 수 없듯이 미국영화의 전후 융성기를 논할 때 [에덴의 동쪽], [워터프론트]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후의 대걸작 [초원의 빛] 의 감독인 엘리아 카잔을 빼놓고 뭔가 썰을 푼다는 것은 자신의 무지와 오만함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 밖에 안됩니다. [이유없는 반항] 을 만들고 요즘 학계와 평론계에서는 헐리웃에 대적해 싸운 독립군 장군으로 명성이 자자한 니콜라스 레이도 파란눈에 금발머리 예수님이 나오는 [왕중왕] 이라는 “기독” 영화도 찍었드랬죠. 인터넷이든 어디든 실제로 아는것은 개뿔도 없으면서 아는 척 하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하는 행위는 좋은놈 나쁜분 (아차 실례, 좋은분 나쁜놈 ^ ^) 으로 일단 모든 논의의 대상을 갈라놓고 보는 겁니다. 영화라고 예외없죠.  

 

그러나 먹물들의 신문칼럼 나부랑이라면 몰라도 영화란 거는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실제로 보시면 [아메리카 아메리카] 는 그런 이민자 입신출세기의 이미지와는 달리 오히려 어떤 “좌파 민중영화” 보다도 더 지독한 리얼리즘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적 진실이 넘쳐나는 일편이올습니다. 현대 한국의 현실을 더 적확하게 집어내는 영화들이 필요하다구요? 더도말고 탈북자들이나 다른 핍박받는 소수자들 주인공으로 [아메리카 아메리카] 의 3분의 1 정도의 리얼리티와 스킬만 가지고 활동사진 찍어보시죠. 관객들이 얼굴이 잿빛이 되고 눈이 퉁퉁 부어서 극장을 나가게 될테니까.

 

5. 보복 仇討ち Adauchi- AnimEigo.

 

 

2010 년에 베스트일레븐 후보작이었던 [무사도 잔혹모노가타리] 의 연장선상에서 이마이 타다시 감독과 나카무라 킨노스케 주연이 다시 만나서 찍은 강렬한 사회 비판 시대극입니다. 60년대 초반에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던 위계질서- 집단주의 이념에 지배되는 현대 일본 사회의 병리를 중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아무 의미와 논리도 없이 껍질만의 이념을 위해 자신과 가족들, 사랑하는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무사도” 에서 찾아내고 있지만, 화술이라는 측면에서는 다소 설명적이고 에피소딕한 [무사도] 와는 달리 [절복] 과 [라쇼오몽] 의 명 각본가 하시모토 시노부가 집필한 각본에 의해 한층 날카롭게 벼려진 칼과 같은 정갈한 매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복] 이나 [삼가 처를 영주로부터 받잡다] 의 정제된 정형미와는 다른 방식으로 주인공 나카무라 킨노스케가 미리 각본에 다 짜여진 “보복” (아다우치) 의 형식적 절차를 폭발적으로 뒤집어 엎고 그야말로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풀어 헤치고 칼을 휘두르는 클라이맥스의 대살진은 섬뜩한 박력이 넘쳐납니다. CGI 로 튀기는 핏방울을 그려넣는 요즘 일본 시대극은 도무지 흉내낼 수 없는 진심이 아우러진 한편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명탐정 등장 Seven Per-cent Solution- Universal Vault Se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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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마침내 깨끗한 화질로 출시되었습니다! 코카인 중독에 걸린 셜록 홈즈를 와트슨 박사가 비엔나에 데리고 가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치료를 받게 한다는 기막힌 설정의 니콜라스 메이어 소설을 화사하고 로맨틱한 대시대적 뮤지컬의 센스로 허버트 로스 감독이 영화화한 이 작품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나 KBS 에서 굉장히 훌륭한 더빙으로 보고 그 이후 잊혀지지 않는 저의 개인적 컬트영화의 한편이 되었죠. 2000년인가 언제 진짜 한국 티븨에서 VHS 로 카피 뜬 것만도 못한 조잡한 화질의 디븨디가 출시된 이후 제대로 된 디븨디의 학수고대하던 소중한 한편입니다. 이런 작품들을 좀 보고 나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주드 로가 예쁘고 귀엽긴 해도 과거의 홈즈와 와트슨캐릭터들의 고단수 해석들에 비하면 너무나 딸린 다는 것이 실감이 나실 겁니다. 알란 아킨의 프로이트, 니콜 윌리엄슨의 홈즈, 로버트 듀볼 (!) 의 와트슨 거기다 더해서 찰스 그레이의 마이크로프트, 로렌스 올리비에 경의 모리아티까지, 셜록의 팬이라면 안 볼 수 있습니까?

 

아 그리고 물론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여사도 출연하십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말문이 잘 안 열리는 홈즈에게 자애로운 미소를 보내는 붉은 머리칼의 관음보살님…

 

3. 맨발의 이사도라 Isadora- 2 Disc Special Edition DVD. Odeon (Region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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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이사도라] 도 [명탐정 등장] 처럼 제가 어렸을 적에 아마도 KBS 인가에서 굉장히 수준이 높은 더빙으로 (모리스 자르의 음악을 고대로 살린) 방송되었던 것을 본 이후로 잊을 수 없게 된 추억의 영화중의 하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초반부에 그리스 유적을 이사도라 던컨이 답사하는 장면에서 느닷없이 (당시의 한국 TV 기준으로는) 거의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하늘하늘한 그리스 여인의 복장을 한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여사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슬로우 모션으로 달려오는 신을 보고 허걱 하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칼라티븨 방송도 안되던 시절이었죠). 아마도 그 시절에 방영되었던 판본은 원래 영국 극장 공개판에서 거의 30분 이상이 잘려나가고 그 잘려나간 데 또 더해서 누드 신과 후반부의 소련에 가서 국민 영웅 대접을 받고 하는 “빨갱이 찬양” 시퀜스를 삭제한 “초 축약본” 이었을 텐데도 저한테 준 임팩트는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어린 시절부터 전 이미 레드그레이브 여사의 팬이었는지도. 오 아름답고도 지혜에 넘치는 여신이시여.

 

영화에 대한 비평은 다른 기회로 돌리기로 합니다. 여기서는 오데온의 2 장 특별판 디븨디가 레드그레이브 여사가 아니고 이사도라 던컨에 대한 서플멘트로 충만하다는 사실을 언급해두고 싶습니다. 특히 두번째 디븨디에는 브리티쉬 로열 발레가 공연하는 1시간 47분짜리 무용극 [이사도라] 가 전편 수록되어 있습니다. 발레 팬 여러분들과 현대 무용에 다소라도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놓칠 수 없는 타이틀이라고 여겨집니다.

 

2. 퀘이터매스의 실험 The Quatermass Xperiment- MGM On Dem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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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머 스튜디오가 드라큘라,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그리고 이집트의 미이라를 내세워서 호러 영화 시장을 석권하기 좀 전에 처음으로 장르영화사에 비중있게 등장할 수 있게 해준 SF호러의 고전 명작입니다. 특수효과나 그런 기술적인 측면의 성취를 기대하시고 보시면 대단히 실망하시게 될 것이지만 당시의 미국 SF영화와 비교해보면 그 시니시즘과 영국적인 드라이한 감성이 가져다주는 독자적인 분위기의 감칠맛을 음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닥터 후] 부터 [존 카펜터의 괴물] 에 이르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후대 SF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20세기 후반 SF호러영화의 원점 중의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입니다만, 한 반 정도는 완전히 꽝 화질이고 나머지 반 정도는 그런대로 봐줄만한 화질이라는 별로 기대할 수 없는 전과를 지닌 MGM MOD 디븨디 시리즈 중에서는 거의 최고 화질 열편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비까번쩍한 트랜스퍼입니다. 

 

1. 베이질 디어든의 런던 암흑가 컬렉션 Basil Dearden’s London Underground- Criterion Collection.

 

 

고급 영화 평론집이나 연구서의 선정 기준에서는 누락되기 일쑤인 장르적이고 상업적인 작품들도 크라이테리언에서는 놓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이클립스 시리즈에 수록된 작품들은 베이질 디어든 감독의 스킬 뿐만 아니고 마이클 렐프 제작자의 기획력에 의해 크게 주도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흑인과 백인간의 인종 차별 문제,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핍박, 전쟁 이후의 영국 사회안의 계급 문제 등의 결코 단순하지 않은 사항들을 전혀 장르적 요소나 상업적인 서비스 정신을 희생함이 없이 그럼에도 요즘 한국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꼼수” 적 계산성을 찾아 볼 수 없는 단도직입적인 태도로 요리하는 네 편의 역작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평론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더크 보가드가 “옷장” 속에서 나오기를 주저하는 게이 검사역을 맡아서 열연하는 [희생자] 가 가장 우수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더 프리즈너] 와 [스캐너] 의 패트릭 맥구헌 선생이 재즈 드러머로 출연해서 눈이 삐용하고 나오지 않을 수 없는 프로 수준의 연주 솜씨를 선보이는 [밤새도록] 이 정말 놀랄만한 발견이었습니다.

 

제가 선출한 2011년도 최고의 디븨디는 작년에 이어 크라이테리언 컬렉션의 [베이질 디어든의 런던 암흑가] 입니다. 그러면 블루레이로 넘어갑니다.

 

11. 칼라하리의 모래 Sands of The Kalahari- Olive Films.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기의 승객들이 생존을 위해 서로 협동을 하다가 점차 사이가 벌어지고 급기야는 서로 죽고 죽이는 아수라장을 연출하게 된다는 스토리는 너무나 뻔한 것입니다만 이 스탠리 베이커-사이 엔드필드 프로덕션 (이 컴비는 직접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영국 제국주의 찬양영화” 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 쉬운 [줄루] 라는 위대한 전쟁영화를 아프리카 로케이션으로 제작한 바 있습니다) 은 그러한 우리의 상상의 영역을 가볍게 넘어서서 소위 말하는 머리통만 커다란 작가영화들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서 인간과 자연의 본성에 관한 거대한 주제를 건드립니다.

 

마이너 고전 영화 전문 레벨 올리브 필름스에서 주관한 블루 레이는 정말 경악스러운 화질이고 과장 전혀 안하고 크라이테리언의 루키노 비스콘티 복원판 블루 레이보다 훨씬 감탄스러운 영상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디븨디 카버만 보면 무슨 개코원숭이들이 사람들을 습격하는 재난영화라는 인상을 줍니다만 그런 영화 아닙니다! 주의하시길.

 

10. 밀양 Secret Sunshine- Criterion Collection.

 

 

크라이테리언에서 마침내 최초로 출시된 한국영화입니만 아 역시 이창동 감독님은 훌륭하십니다. 서플이나 학문적 분석이라는 측면에서는 다른 고전 걸작들의 출시판에 좀 딸릴 지 몰라도 영화를 보는 눈이라는 측면에서는 탁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크라이테리언 입니다.

 

9. 무기여 잘있거라 A Farewell to Arms- Kino International.

 

 

제니퍼 존스 나오는 전후판 말고 1932년이라는 프로덕션 코드 즉 검열시스템이 완성되기 이전의 시대에 말도 안되게 젊은 게리 쿠퍼와 헬렌 헤이즈 주연에다가 프랭크 보르재기 감독이라는 조합으로 헤밍웨이의 소설을 영화화했습니다. 원작자 헤밍웨이는 이 버젼을 아주 싫어했다고 합니다만 (영화의 내용보다도 원작의 이탈리아군의 거의 모욕적인 묘사가 완화된 것에 대해 특히 불만이 많았던 모양입니다만) 보르재기 감독의 표현주의적인 감성과 프리코드 시절 연기자들의 자유분방한 연기가 어울러지면서 헤밍웨이 소설의 느끼한 마초적 분위기가 쏙 빠지고 몽환적인 로맨티시즘이 대신 대두되었습니다. 보르재기-F.W. 무르나우 감독의 꿈속에서 연애하는 것 같은 유럽적이지만 또한 미국적인 분위기의 무성영화들에서 보여지는 미학적 세계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그건 그런데… 아니 게리 쿠퍼 선생님이 왜 이리 섹시하신지. 쿠퍼선생과 헤이즈 여사가 서로 포옹하면서 입을 맞추는 장면은 거목에 딱다구리가 앉아서 벌레 잡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 ^

 

버스터 키튼의 작품들을 블루 레이로 출시하면서 고전영화 팬들의 칭찬을 받고 있는 키노에서 예상치 못하게 작년이 거의 끝나갈 시점에서 내놓은 타이틀인데 이렇게 재미있고 귀엽고 궁극적으로는 감동적인 영화일 줄은 몰랐습니다. 앞으로는 국적을 불문하고 20-30년대 영화들을 좀 많이 볼 필요를 느낍니다.

 

8. 퀘이터매스와 동굴 Quatermass and The Pit- Optimum Classics [Region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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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토 영국에서는 퀘이터매스 시리즈의 마지막 극장판 공개작인 [퀘이터매스와 동굴] 이 예기치 않게 블루레이로 출시되었습니다. 이 영화도 한국의 TV 에서 30년도 더 전에 방영되었었죠. 그 다음날 학교의 점심시간에 그 독특한 외계인의 묘사와 클라이맥스의 이색적인 괴물 퇴치법이 화제가 되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퀘이터매스의 실험] 과 마찬가지로 특수 효과의 세련됨을 보고 평가할 작품은 아닙니다만 본격 SF 영화로서의 품위와 박력은 지금 보더라도 하나도 쇠퇴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이런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싸구려 CGI 로 도배를 하고 군복을 입은 근육맨들과 샴푸 선전에 나오는 생머리채를 보란 듯이 내걸은 여자 과학자들이 엉덩이를 흔들면서 쏘다니는 그런 물건이 나왔겠죠. 블루 레이의 뚜렷한 색감과 질감이 리바이벌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것 같은 착각을 가져다 줍니다.

 

7.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West Side Story- Warner Brothers.

 

 

맨 처음 시작할때 나오는 솔 배스의 기똥찬 (처음 10초 동안에는 무엇을 표현하는 지 알수도 없는) 타이틀 디자인과 뉴욕시의 부감 샷의 트랜스퍼에 놓치지 않을 수 없는 흠이 있다고 해서 연말 베스트 리스트에서는 거의 다 누락 당할 운명에 처한 블루 레이 입니다만 저는 곧 죽어도 넣어야 되겠습니다. 왜 새삼스럽게 또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얘기를 하냐고요? 여러분들은 과연 영화학교 나오고 좀 재능있다 하는 요즘 뜨는 “영화작가” 들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만큼 진실되고 전위적이고 사람의 몸사위의 표현력을 극한까지 쥐어짜는 뮤지컬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뮤지컬이라는 것이 노래부르면서 춤추고 노는 엔터테인멘트라는 안이한 인식에 사로잡혀 계신 여러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 블루 레이 정도 수준의 화질로 함 보시고 정신적 빧다 좀 당하십시오. 어디 뮤지컬을 그리 만만히 보십니까.

 

여러분 중 한 분께서 브라이언 데 팔마, 마틴 스코세시 그리고 우디 앨런의 대표작과 맞먹는 수준의 영화를 세편을 찍었다면 저는 그분께 축하의 메세지와 함께 300점을 드리죠. 그러나 여러분 중 한 분께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의 후반부에 나오는 제롬 로빈스가 안무를 맡고 로버트 와이즈 감독이 찍은 [쿨] 이라는 댄스 넘버 시퀜스와 맞먹는 수준의 댄스 넘버를 찍으셨다면… 저는 큰절과 함께 당신께 800점을 드리겠습니다.

 

6. 산타 상그레/성스러운 피 Santa Sangre- Severin.

 

 

와우 와우. 칠레 출신의 초현실주의 영화 작가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가 자기 아들들을 총동원해서 온갖 괴이한 정신이상자, 펨푸, 서커스 마술사 역할을 시켜먹은 캄백작품 [산타 상그레] 를 괴이한 영화 전문 레벨 세버린에서 턱뼈가 빠질 정도의 아름다운 화질의 블루 레이로 내놓았습니다. 서플도 굉장합니다. 조도로프스키는 (아마도 스페인어 엑센트가 심한) 프랑스어, 아들 중 한명은 스페인어, 다른 한명은 영어로, 또 여주인공은 수화로 인터뷰를 하는 장척의 도큐멘터리부터 사이먼 보스웰의 음악에 대한 한토막까지 다 망라되어 있습니다.

 

진짜 농담이 아니라 이 지구상에서 이런 영화는 다시금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 짧은 문단내에서 이 괴작중의 괴작— 두 팔이 잘린 소녀 성인, 나이프를 휘두르는 연속살인범, 코끼리의 장례식과 그 코끼리 시체에 개미같이 달려들어 순식간에 분해하는 멕시코 빈민촌의 주민들, 분홍색 손톱이 달린 두 손으로 연기하는 창세기의 우화, 비키니를 입고 등장하는데도 남자인지 여자인지 확실치 않은 멕시칸 레슬러 등이 출몰하는— 을 설명한다는 것은 바보짓이니 전 시도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산타 상그레] 같은 작품을 여러편 보시면 아마도 여러분의 대뇌 피질이 변질되면서 웬만한 “컬투”영화의 정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면역력이 생기실 가능성에 대해서는 언급해두겠습니다.

 

5. 시민 케인 70주년 특별판 블루레이 Citizen Kane: Amazon Exclusive 70th Anniversary Edition- Warner Brothers.

 

 

정말 정직하게 이 리스트를 만들자면 6장 디스크 특별판 [벤 허] 도 이 리스트에 넣어야 하겠지만— 그리고 나는 [벤 허] 같은 구시대 헐리웃 대작의 우수성을 얼마든지 옹호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결국은 [시민 케인] 에 밀려나는 형태로 빠지게 되었군요. 아마존에서만 한정판매한 이 “70주년 기념판” 에는 물론 보통 같으면 따로 쌩돈을 내고 구입해야 할 [시민 케인을 둘러싼 전투] 도큐멘터리와 HBO영화 [RKO 281] 을 비롯한 수많은 서플 뿐만아니라 (유감스럽게도 블루 레이가 아니고 보통 디븨디로 출시된) [화려한 앰버슨가] 까지도 엑스트라로 딸려 나오고 있습니다만, 그런 서플들이 아무리 충실해도 본편의 트랜스퍼가 우수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요. [시민 케인] 은 초기 당시의 디븨디 출시때 디지털 복원 도구를 남용해서 프린트에 보이는 창문에 떨어지는 빗방울까지 깨끗이 지워지고 말았다는 일화를 남겼던 작품입니다. 이 블루 레이에는 물론 빗방울 뿐 아니라 거대한 광에 가득찬 케인의 유품들에서 떠오르는 먼지까지 확실하게 손에 잡힐 듯이 보입니다.

 

누차 하는 얘기지만 칼러 영화보다도 흑백영화와 고전 TV 의 복원에 있어서 블루 레이의 고화질이 진짜 실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여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장미꽃 봉오리…

 

4. 레옹 모랭, 신부 Leon Morin, Priest- Criterion Collection.

 

 

장 피에르 멜빌을 알랭 들롱이 무표정하게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는 네오 느와르 전문 작가라고 알고 계시는 분들께서는 필히 [레옹 모랭] 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이나 마르크스나 죽은 지 오래되었다” 라고 공언을 한 멜빌의 입장에서 무슨 카톨릭 교리에 충실한 “기독” 영화를 만들었을 리는 만무하지만 저같은 구식 카톨릭 입장에서 봐도 여전히 감동스러운 걸 어쩝니까.

 

비시 정권-파시스트 지배하의 프랑스에서 가난해 빠진 교구를 주관하는 젊은 신부 장 폴 벨몽도와 [나의 사랑 히로시마] 에 출연했던 엠마뉴엘 리바의 우정 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이야기에는 예술가적인 자의식이나 똥폼재기라고는 코빼기도 없고 그 대신에 관객들의 지성과 캐릭터들의 감정을 극도로 존중하는 멜빌 감독의 치밀한 연출만이 돋보입니다. 클로드 샤브롤의 초기작 [아름다운 세르쥬] 및 [사촌들] 과 더불어 누벨 바그의 주류에서 살짝 벗어나 장르적 상업영화로 경도되었다고 여겨졌던 프랑스인 대감독들의 작품세계를 재고할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하는 걸작입니다. 이 영화를 본 이상 저에게 장 피에르 멜빌은 [붉은 원] 이나 [르 사무라이] 의 감독이 아니고 [레옹 모랭] (과 [바다의 고요함]) 의 감독으로 영원히 남게 될 것입니다.

 

3. 성공의 달콤한 냄새 Sweet Smell of Success- Criterion Collection.

 

 

제가 한국영화인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주문이 많은데 그건 다 한국영화를 사랑하는 충심에서 우러나오는 잡언들이니 너그러이 봐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정말 왜 그렇게들 사회의 부조리와 부실함에 대해 의분에 불타는 분들께서 저널리즘이면 저널리즘이고 학계면 학계고 정계면 정계고 그 속내를 해부해서 그 위선적인 면모를 만천하에 드러내보이는 [성공의 달콤한 냄새] 같은 독하고도 독한, 마시다가 잘못해서 흘리면 마루바닥을 치치치하고 녹이고 구멍을 뚫을 것 같은 독주를 방불케 하는 영화는 못 만드시는 겁니까? 명박 씹고 조썬일보 씹으면 누가 눈깔이나 깜짝한대요? “성공” 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치사하고 더러운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제대로 묘사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대신할 “대안” 을 구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제가 볼때는 알렉산더 맥켄드릭처럼 재능이 뛰어난 감독 (솔직히 재능 있는 감독분들 한국에 상당수 있습니다) 이라기 보다는 우파 좌파 먹물들 그리고 인터넷의 개떼들이 몰려와서 아무리 씹어대도 전혀 흔들림이 없이 사회의 통념에 강렬하게 도전하는 영화나 다른 매체의 기획을 밀어붙이고 동시에 자기 분야에서 초인적인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버트 랑카스터 같은 “연예인” 이라고 생각합니다.

 

연예인들이여 좀 더 소비자와 먹물들과 미디어한테 엿먹이고 삽시다! 뭐가 그렇게 두렵습니까? 도덕적으로 지탄받는거? 대한민국 일반 대중들이 그렇게 도덕적으로 잘난 족속들이랍니까? 웃기고 자빠졌네… 미디어에 붙어사는 기생충들은 항상 몇백만이니 하는 숫자가지고 겁을 주려고 하는데, 제이 제이 헌세커가 [성공의 달콤한 냄새] 에서 자랑스럽게 말해요. “나를 모욕하는 것은 내 칼럼을 읽는 6백만 독자들을 모욕하는 것이다” 라고요. 머리속에 쓰레기가 꽉 찬 바보녀석이 더러운 선동글을 써도 운만 좋으면 수백만의 “독자” 들에게서 찬사를 받을 수 있고 쓰레기같은 영화라도 스핀만 잘 돌리면 8백만이라는 관객이 드는 세상에 살면서, 무슨놈의 얼어죽을 “도덕적 지탄” 을 두려워합니까?

 

그리고 이왕 여러분들에게 짜증나고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는 언사를 늘어놓는 김에 한마디만 더 합니다. 몇년을 배웠는데도 [성공의 달콤한 냄새] 의 대사의 파워를 헐리웃의 삼류각본가들이 마누라하고 애인하고 말싸움하면서 갈겨낸 미국영화의 대사에 비해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영어공부는 진짜 추천드리고 싶지 않네요. 이건 “독해력” 의 문제가 아닙니다. 심미안 아니 심미이 (審美耳) 의 문제지요.

 

2. 잃어버린 영혼들의 섬 The Island of Lost Souls- Criterion Collection.

 

 

[잃어버린 영혼들의 섬] 에 대해서는 뭐 진짜 잡소리 쓰고 싶지 않습니다.  보시면 될 일이죠.  화면에 나타난 짐승 인간들의 메이크업도 간을 확 빼놓을 만큼 뜨시지만 화면에 직접 묘사되지 않은 내용은 더 무섭고 끔직합니다. 정말 점잖빼는 “예술영화” 의 개념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메스로 생체 해부하는 세기의 위대한 호러 영화인데도 몇십년동안 VHS 로도 디븨디로도 심지어는 TV 방송으로도 볼 수 없었던 작품입니다. 크라이테리언이 아니라면 과연 이러한 감상의 기회가 가능할수 있었을 지도 의문이죠.

 

1. 디프 엔드 Deep End- British Film Institute (BFI Flips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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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년이라면 [잃어버린 영혼들의 섬] 이 1위를 차지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을 것입니다만 작년은 예년이 아니었습니다. BFI 플립사이드가 혜성과 같이 제 시야에 들어온 해였거든요. 그리고 기절할 만큼 저를 놀라게 한 것은 플립사이드에서 [조춘] 이라는 무슨 핑크영화같은 타이틀이 걸린 일본 티븨 방송판을 복사하고 또 복사한 VHS 로 본 이후로 30년을 찾아 헤멘 [디프 엔드] 가 블루 레이로 출시된다는 뉴스였습니다. 이제 말도 할 수 없는 깨끗한 화질과 50대 중년이 된 존 몰더 브라운과 60대의 제인 애셔 연기자들이 유려한 회고담을 펼치는 서플멘트로 꽉 들어찬 블루 레이를 소유하게 되었으니 이 포만감을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디프 엔드] 가 어떤 영화냐고 물으셔도 이자리에서는 도저히 설명을 해드릴 수 없고요. 발톱에 독을 품은 샴고양이? 가시가 돋힌 수선화? 그런 영화입니다. 씨니컬한 유머가 넘치면서도 싸늘하게 비극적이고, 섹시하면서도 범용한 욕구에 찬물을 끼엊는 냉정함을 구비한, 열 여섯살 소녀의 아름다운 자태를 뒤집어쓴 천년 묵은 구렁이 같은 그런 영화입니다.

 

이 새로운 HD 디지털 프린트가 존재하게 된 이상 가까운 장래에 한국의 시네마테크에서도 걸리게 될 겁니다. 그 때에는 놓치지 마십시오. 마음같아서는 그 때 기회만 되면 제가 나서서 빨간 엉덩이의 원숭이처럼 온갖 추태를 부리면서라도 부채들고 메가폰들고 영화의 선전 및 소개를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2011년에 제가 구입한 최고 최상의 블루레이는 [디프 엔드] 입니다.

 

아깝게 리스트에서 탈락된 타이틀들도 한줄 설명이라도 붙이고 싶지만 너무나 금방 지치고 마는지라 그냥 목록으로 작성해서 나열하는 데 그치겠습니다. 레벨에 관해서는 크라이테리언과 워너 브라더스가 여전히 압도적인 우세를 과시하고 있고 가까운 장래에 이 판도가 바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기타 후보작들: [올란도] 특별판 블루레이 (소니), [늑대와 춤을] 블루레이 (MGM- 20세기 폭스), [몬스터스] 블루레이 (마그놀리아), [어둡기 전에 집으로] (워너 아카이브), [엑스칼리버] 블루 레이 (워너 브라더스), 버스터 키튼의 [장군] 블루레이 (키노 인터내셔널), [엘 시드] 블루 레이 (Region B- 앙커 베이 UK), [부당거래] 블루레이 (CJ), [토라 토라 토라] 블루레이 (20세기 폭스), [베라 크루스] 블루레이 (MGM- 20세기 폭스), [세설/마키오카 자매들] 블루레이 (크라이테리언), [전후의 풍경] (Region 3- 블루 키노/영상자료원), [솔라리스] 블루레이 (크라이테리언), [검은 달] 블루레이 (크라이테리언), [운명은 사냥꾼이다] (트와일라이트), [천국과 지옥] 블루레이 (크라이테리언), [왕이 되려고 한 사나이] 블루레이 (워너 브라더스), [마녀 수색관] 블루레이 (Region Free- 오데온 클래식스), [벤 허] 6 디스크 한정판 블루레이 (워너 브라더스), [바스켓 케이스] 블루레이 (시냅스), [프랑켄후커] 블루레이 (시냅스), [마른 꽃] 블루 레이 (크라이테리언), [막다른 길] 블루레이 (크라이테리언), [보이스오버] 블루 레이 (Region B- BFI 플립사이드), [시베리아 횡단특급의 공포] 블루 레이 (세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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