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2014.01.25 12:36

menaceT 조회 수:1720

Le-Passe-Poster.jpg

 

http://blog.naver.com/cerclerouge/40203575406

 

Le Passé (2013)

 

12월 29일, 씨네큐브 광화문. 

 

  나 같은 경우, 아쉬가르 파르하디의 영화 중 가장 유명한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보지 못하고 '어바웃 엘리'만 본 상태였다. 그 영화에서도 아주 평범하게 시작한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서면서 급격히 꼬여가는 과정을 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은 오버하지 않으면서도 탁월하게 그려낸 바 있다. 이번 작품 역시 중반에 이르기까지는 그저 통속적인 이혼과 재혼을 앞둔 가족 구성원들 간의 드라마인 체 하지만, 후반부에서 그간 숨겨두었던 발톱이 드러나는 구성이다.

 

(스포일러)

 

  루시의 말이 신호탄이 되어 인물들이 본격적으로 셀린의 자살 시도의 원인을 파헤치기 시작하자, 숨겨왔던 과거의 비밀들이 하나둘 밖으로 끄집어 내어진다. 그 결과, 우리는 각각의 인물들이 모두 제한된 정보 하에서 추측을 하곤 그 추측에 의해 상대방에 대해 판단을 내렸고, 그 판단에 따른 인물들 각각의 행동들이 총체적으로 모여 그 파국(이 과정에서 영화는 불륜, 자살 시도, 죽음, 인종 차별 등을 부러 직접적으로 건드린다.)에 이르게 된 것임을 알게 된다. 그 진실의 핵심 키를 쥐고 있는 자는 수 개월째 식물인간 상태이기에 무엇이 사건의 진상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진실이 무엇이든 이 파국은 누구 하나의 탓으로 돌릴 수도 없고 누구 하나 책임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영화는 이를 통해 인간이 내리는 판단이 큰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어떤 대단한 악의 없이도 엄청난 파국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는 이 메시지를 확장시키기 위해 관객을 이 파국의 한복판에 끌어들인다.

 

  영화의 첫 장면,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아마드와 마리가 재회한다. 그 둘은 계속해서 무어라 말을 하지만 영화는 그들의 말을 관객에게 들려주지 않는다. 이후로도 영화는 관객을 대변하는 카메라와 인물들 사이에 유리를 두어 인물들의 대화가 관객에게까지 닿지 않도록 하는 장면을 종종 등장시킨다. 그때마다 관객은 그 비어 있는 음성적 정보를 상상으로 채워야 한다. 비슷한 예로, 인물들의 시선을 따라가는 시선 숏에서 나뭇잎, 문, 벽 등으로 인해 시선이 일부 차단되어 관객에게까지 시각적 정보가 제한되는 장면들 역시 더러 존재한다. 이 경우에도 관객은 비어 있는 시각적 정보를 상상으로 보충해야 한다.

 

  위의 연출 상 특징은 몇몇 장면에 국한되어 드러나는 듯하지만, 이는 곧 관객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 상에서 주어지는 제한된 정보에 따라 임의적으로 판단을 내렸다가 철회하는 과정을 반복하게 될 것임을 상징하고 있다. 일례로, 아마드가 마리의 집으로 들어와 레아를 만나고 이후 루시까지 만날 즈음에, 아마드가 레아와 루시의 생부임을 의심할 관객은 아마 거의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후에 아마드와 마리 사이에 아이가 없었음을, 레아와 루시의 생부는 아마드가 아닌 브뤼셀에 있는 또다른 누군가임을 알려준다. 이처럼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극중 인물들이 그랬듯 제한된 정보에 따른 섣부른 추측을 반복하게 된다. 영화가 그려낸 파국은 단지 영화 안에 국한된 성격의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들 자신이 일상을 살아가는 순간순간마다 그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 것임을, 관객들 자신이 그 예비 용의자나 다름없음을 영화는 이렇게 보여주고 있다.

 

  한 편, 영화는 유리창이나 유리창이 달린 벽과 문을 관객에게 정보를 차단하는 용도와 유사하게, 극중 인물들이 서로에게 정보를 차단하는 용도로 등장시키기도 한다. 극중 인물들은 비밀스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제3의 인물(들)을 벽 뒤로, 문 뒤로, 한 층 위나 아래의 공간으로 몰아내며 공간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영화는 일상을 위협하는 과거라는 망령과 그 앞에 무력한 집, 가정이라는 공간의 허구성을 보여주고자 한다.

 

  집이라는 공간은 수많은 유리창, 문, 벽으로 집의 안팎을 분리시키는 공간이다. 때문에 얼핏 그 집이라는 공간은 외적 위험으로부터 가족 구성원들을 지키는 안온한 공간처럼 보인다. 끊임없이 따라붙는 과거란 망령도 집이 그 내부 구성원들을 보호해야 할 외부의 위험일지 모른다. 그러나 차 안의 인물들이 앞을 볼 수 있도록 와이퍼가 아무리 빗물을 닦아내더라도(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은 '과거'라는 뜻의 원제 'le passé'를 와이퍼가 서서히 지워내는 방식으로 등장한다.) 결국 마리가 사고를 낼 뻔한 것처럼, 과거를 비롯해 위험은 늘 그곳에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그 벽은 너무나 쉽게 허물어진다.

 

  내적 스트레스를 일시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인물들이 담배를 물 때마다 그들은 집의 외부와 내부를 구분하던 유리창을 열어야 한다. 과거의 흔적 그 자체인 인물 아마드를 집 내부로 데려와 푸아드와 동침시키고 사미르와 만나게 하는 등 현재와 직접적으로 부딪치게 한 것은 바로 집의 주인 마리이다. 엇나가는 딸의 문제를 바로잡고 아직 질척거리는 과거에 복수하고 그를 확실히 청산하기 위해 그를 집에 들인 순간, 과거는 조금 더 분명한 형태로 그들을 괴롭힌다.

 

  아니, 오히려 과거는, 위험은 집 내부에서 솟아난다. 집은 다시 그 안에 수많은 벽과 문을 두어 사람들 사이를 분리시키는 방식으로, 이미 그 내부의 불안을 증명해 보이고 있지 않은가? 인물들은 집 내부의 벽과 문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가며 불완전한 판단들을, 설익은 감정들을 비밀처럼 공유하며 (그리고 이를 엿들으며) 그 안에서 위기를 키워 간 셈이다. 또한 셀린이 진작부터 앓고 있던 우울증, 아마드가 앓은 바 있던 우울증 등을 보면, 그보다 훨씬 이전에 가정은, 집은 그 수많은 벽과 문이 상징하듯 그 자체로 이미 분열의 씨앗을 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남성을 갈아치워가며 마리는 외견상 멀쩡해 보이는 가정의 형태를 회복하려 집착해 왔다. 그 연장선 상에서 전 남편과의 이혼, 새 남편과의 재혼과 임신을 그녀는 새로운 인생의 시작 신호처럼 여기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가정은, 집은 그 자체로 이미 불안을 안고 있는 공간이다. 그런 외형에 대한 집착은 어떤 것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그녀의 남성 편력이 아버지가 다르고 어머니가 다르고 국적이 다른 이들이 느슨하게 묶인 형태를 하고 있는 혼란스런 가족 구성만을 낳은 것이 그 반증이 아닐까? 새로운 가족을 꾸릴 기대에 부풀어 사미르는 새로 페인트를 칠하는 등 과거의 흔적을 몽땅 지워내려 하지만, 그가 겪는 페인트 알러지나, 아마드의 옷에 묻은 페인트 흔적이 셀린의 자살에 영향을 끼친 바로 그 얼룩과 유사하다는 점으로 보아 그 시도가 과거를 지워내진 못할 것이다.

 

  사미르가 나이마를 다시 불러세우려 하다 금방 포기할 때, 마리가 루시를 다시 가정 안으로 불러들일 때, 이들은 가정 외부의 사람인 나이마에게 모든 책임을 덧씌우는 식으로 과거를 외면하곤 가정이라는 허상을 유지하기로 결정한 듯 보인다. 마리는 아마드가 떠난 이유를 말하려는 것도 듣지 않고 그를 가정 밖으로 몰아낸다. 깨져 내용물이 들여다 보이던 (마치 언제라도 현재로 스며들 것 같은 과거의 망령과 같다.) 그의 가방까지도 함께 몰아낸다. 루시가 창 너머로 아마드를 바라보지만 그는 이내 나뭇잎들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된다. 전 남편이 과거를 모두 안고 사라지자, 이제 이 가정은 언뜻 그 외형을 온전하게 갖춘 듯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 롱테이크 씬에서 잔인하게도 과거의 마지막 끈을 잡고 있던 셀린이 강렬한 소생의 기미를 보인다. 과거는 이렇게 또 다시 가정이란 허상을 찢고 등장한다.

 

  '어바웃 엘리'에서 그랬듯 이번 작품에서도 아쉬가르 파르하디는 음악도 거의 쓰지 않은 채 잔잔하게 이야기를 끌어간다. 그러나 영화는 그 잔잔한 수면 아래서, 인간의 불완전한 이성이 지닌 위험성을 관객까지 직접적으로 파국으로 향하는 과정에 동참케 함으로써 영화 밖 현실로까지 확장시켜 제시하는가 하면, 과거 앞에 무력한 가정의 허구성을 헤집어 보여주며 무지막지한 에너지로 들끓는다. 안온한 가정의 허구성, 인간 이성의 한계 등은 '어바웃 엘리'에서도 다룬 바 있는 주제들이지만, 이를 다루는 아쉬가르 파르하디의 수완은 훨씬 능숙해졌고 주제 의식은 더욱 원숙해진 느낌이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보다는 못하다는 말은 있지만, 적어도 그 작품을 보지 못한 내겐 이 작품은 지금 이대로도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회원 리뷰엔 사진이 필요합니다. [32] DJUNA 2010.06.28 82388
701 [영화] Fast Color 패스트 컬러 (2018) Q 2019.09.02 1293
700 [영화] The Wind 악마의 바람소리 (2018) <부천영화제> [1] Q 2019.06.28 1323
699 [영화] 스티븐 킹 메들리- 공포의 묘지 Pet Sematary (2019), 1922년 1922 (2017) <약도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Q 2019.04.19 1351
698 [영화] 금환식 金環蝕 1975 [2] Le Rhig 2012.02.25 1359
697 [영화] 매드 갓 Mad God (2021) <부천영화제> [1] Q 2022.07.30 1385
696 [드라마] 필립 K.딕의 엘렉트릭 드림스 시즌 1, 에피소드 4-6 Q 2018.05.13 1397
695 [영화] 스푸트니크 Sputnik (2020) Q 2020.09.28 1398
694 [영화] 블라드 파더 Blood Father (멜 깁슨 주연) Q 2016.10.10 1434
693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 A Quiet Place (2018) Q 2018.05.22 1435
692 [영화] 누명 A martfüi rém (2016) <부천영화제> Q 2017.07.21 1445
691 [영화] 그대의 몸에서 흐르는 눈물의 이상한 색깔 L'etrange couleur de larmes des ton corps <유로호러- 지알로 콜렉션> [2] Q 2016.01.28 1477
690 [영화] 맘 앤 대드 Mom and Dad (2017) <부천영화제> [1] Q 2018.07.20 1481
689 [드라마] 역도요정 김복주 [2] 감동 2017.01.16 1492
688 [영화] 2022년 최고의 블루 레이/4K UHD 블루레이 스무편 [2] Q 2023.03.05 1496
687 [영화] 명탐정등장 The Seven Per-cent Solution (1976) Q 2021.02.27 1517
686 [영화] 놉 NOPE (2022) (약도의 스포일러 포함합니다) [4] Q 2022.09.11 1541
685 [영화] SF 소녀 성장기 두 편: 프로스펙트 Prospect (2018), 나의 마더 I am Mother (2019) [1] Q 2019.06.18 1561
684 [영화 & 책] 셰임, 중독의 심리학 [1] underground 2015.09.21 1573
683 [영화] 판타스틱 4 Fant4stic (2015) Q 2017.01.28 1583
682 [영화] 군달라 Gundala (2019), 흑마술: 보육원의 비밀 The Queen of Black Magic (2019) <부천영화제> Q 2020.07.12 1592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