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모란등롱 牡丹燈籠 1968

2012.02.25 22:52

Le Rhig 조회 수:1787


하기와라와 오츠유

무신가문 출신이나 봉건주의적인 가문의 초점 없는 삶에 진력이 난 하기와라는 친척으로부터 정략혼인을 강요당합니다. 그 강요에서 벗어나려 어느 작은 마을로 내려온 하기와라는 그곳에서 가난한 아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며 살아갑니다. 죽은 사람의 영을 제사지내는 불교행사에서 등불을 강으로 흘려보내던 하기와라는 오츠유를 만나게 되고, 오츠유의 기구한 사연에 대해 알게 되어 오츠유와 혼인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츠유는 이승에 미련을 둔 귀신으로 하기와라를 저승으로 데려가려하지요.

내러티브는 호러를 바탕으로 크게 두 개의 줄기로 이루어져있습니다. 하나는 중심 이야기인 하기와라와 오츠유의 멜로드라마이고, 하나는 곁가지 이야기인 하기와라의 하인, 반조와 그의 아내의 코미디이죠. 이 둘의 결합은 내러티브를 이상적인 상업영화에 맞추는데 있어 정확하고 효과적입니다. 중심 이야기인 멜로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심각해진 이야기를 곁가지 이야기인 코미디가 풀어주며 쉴 틈을 주는 것이지요. 멜로드라마로만 써졌더라면 숨쉬기 힘든 영화였을 텐데, 사이사이 코미디가 들어가면서 보다 영화 감상이 편해졌고 보다 내러티브를 재미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드라지는 플롯은 아니지만, 플롯이 잘 짜였어야 가능했던 일이기에, 플롯이 잘 짜였다는 생가을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러한 결합은 내러티브의 한계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내러티브가 상업적으로 편해지는 순기능 이면으로 그 깊이가 얕아지는 역기능이 있던 것이지요. 각본가는 이를 상쇄하기 위해 두어 가지 노력을 했습니다. 코미디로 기능하던 곁가지 이야기를 멜로드라마 안으로 끌어넣은 것이 그 노력 중 하나입니다. 그 역할을 하는 건 반조의 아내 캐릭터입니다. 사리사욕에 밝은 그녀는 귀신을 쫓기 위해 붙여진 부적을 떼어 달라는 귀신의 요청에 반조로 하여금 돈을 흥정하게 합니다. 곁가지 이야기에 있어서는 지극히 현실적인 국면전환으로, 각본가는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내러티브의 얕은 깊이를 감추는데 성공합니다. 더욱이 이 곁가지 이야기의 운명론적인 결말은 주제에 주제 의식 비슷해 보이는 것을 심기도 하고요. 얕은 깊이를 감추는데 각본가가 한 다른 노력은 윤회라는 관념을 다루는 불교행사라는 소재와 실존적 고민에 빠진 하기와라의 드라마입니다. 작위적으로 보일 여지가 충분한 소재와 드라마인데, 이를 내러티브 깊숙이에 박아 넣었기 때문에 그리 보이진 않습니다. 참 편리하지요.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내러티브의 깊이를 얕아 보이지 않게 하는 방어로서 기능하는 것이지, 이야기의 깊이를 만들어내는 공격으로서 기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눈가림이에요. 제작자에게 영화의 깊이보다 중요한 것은 좋은 상업영화라는 영화의 정체성이었나 봅니다. 각본가는 내러티브의 한계를 극복하지는 않았습니다.

멜로드라마와 호러, 코미디를 오가는 내러티브이기에 기술적인 촬영이 중요한 영화입니다. 영화는 기술적으로 거의 완벽합니다. 일단, 은근한 조명으로 은밀한 멜로드라마와 호러의 무드를 잡아주고 있죠. 오츠유 치맛자락에 조명을 비춰 공중에 뜬 것처럼 연출한 것은 재미있기도 합니다. 코미디와 멜로드라마, 호러의 결합의 난점을 극복해내는 것엔 플롯만큼이나 특수 분장의 역할이 큽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인 ‘칼 들고 발광하는 하기와라 장면’이 멜로드라마와 호러, 코미디가 만나는 액션 장면이라는 것은 영화가 기술적인 촬영에 있어 결코 모자라지 않다는 걸 반증합니다.

상업영화로 기획된 영화인만큼 카메라는 쉬지 않고 움직이며 일종의 경이를 만들어냅니다. 카메라 구도 또한 쉬지 않고 풀 샷에서 바스트 샷, 클로즈업 샷을 오갑니다. 풀 샷으로는 종교행사나 군중과 같은 스펙터클을 잡아내고, 바스트 샷으로는 이야기의 긴장을, 클로즈업 샷에서는 이야기의 절정을 잡아냅니다. 심심할 틈을 안 주는 영화에요. 구도와 움직임이 함께 사용된 오프닝은 관객의 시선을 끌어두는 오프닝 본연의 역할을 해내는데 무리가 없을 만큼 강렬합니다. 풀 샷으로 찍힌 클로징은 조명의 사용과 함께 결합되어 아름다워 보이는 동시에 안정적인 결말을 만들어냅니다.

배우나 연기가 도드라지는 영화는 아닙니다. 물론, 배우들의 이미지를 활용해 극적인 장면을 만들어내는 경우-오츠유 역의 아카자 미요코-나 반조 역의 니시무라 코우의 관객을 자지러지게 하는 희극 연기에 대해서는 언급할 만합니다.

모란등롱은 상반된 재미를 가진 영화입니다. 멜로드라마와 코미디는 좀처럼 섞이기 어려운 장르인데 이것을 플롯을 통해 기술적으로 잘 엮어냈죠. 그것의 바탕에 호러가 있다는 점은 놀랍기도 합니다. 곁가지 이야기인 코미디 때문에 얕아진 내러티브의 깊이를 경박하게 보이지 않게 하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한계가 있는 내러티브지만, 애초에 상업영화로 기획된 것이니 오히려 자신의 역할 모두를 해냈다고 볼 수 있겠죠. 상업영화로 기획된 영화인만큼 기술적인 촬영을 꼼꼼히 하여 좀처럼 심심할 틈이 없게 하기도 했습니다. 야심이 큰 영화는 아니지만, 좋은 상업영화임에는 틀림없습니다.

2012.2.25
르 뤼그


가지가지.

오늘 시네마테크KOFA에서는 올드 랭 사인의 상영과 REC의 상영, 상영에 이어지는 소준문 감독님과의 GV가 있었는데, 그냥 포기하고 모란등롱을 봤습니다. 잘한 일까지는 아니지만, 확실히 영화는 재미있게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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