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셉션 Inception

2010.07.25 23:26

곽재식 조회 수:9846

이 영화 "인셉션"은 시작하자마자 환상적인 분위기의 배경에 갑자기 주인공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떨어져서 상당히 이상해 보이는 의문의 인물을 만나면서 출발합니다. 이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이상한 용어를 사용하면서 금방 알아먹기 힘든 기괴한 모험을 벌입니다. 이게 뭡니까? 극장 앞에 놓여 있는 전단지를 떠올리면서 본다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남의 꿈 속 세계에 들어가서, 꿈꾸는 사람의 잠재의식을 뒤져서 산업스파이질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째서 이런 이상한 곳에 왜 나타난 것이며, 주인공이 주절주절하는 수수께끼 같은 용어들은 대체 뭡니까?


("아키텍트"로서 "림보"에 빠지기 전에 "토템"없이 "킥"만으로 나오는 방법을 말해봐)

이 영화는 일단 이런 것들에 궁금증이 느끼게 하면서, 영화를 따라가면서 하나하나 "아, 그게 그런거 였구나" 하고 익히는 맛이 있는 영화입니다. 그러니까 극장 영화판으로 나온 "공각기동대"랑 초장은 비슷한 맛이 있습니다. 영화 속 사람들은 당연하게 여기지만 관객들은 알 수 없는 용어와 이상한 상황을 잔뜩 보여줍니다. 그래서 영화 보는 관객들은 뭐가뭔지 모르겠고,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초반에는 살짝 헷갈리게 됩니다. 그러는 대신에 대체 뭐가뭔지 좀 알고 싶다는 궁금증도 생기고, 다시 한 번 차근차근 짚어보고 뭐라는 건지 좀 알고 싶다는 호기심도 생기게 합니다.

그리고 다서 이야기를 펼쳐가면서, 슬금슬금 해설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을 관객들에게 던져줍니다. 일일히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일단 바로 본론으로 가서 뭐가뭔지 모르게 하면서 출발합니다. 그러면 관객들은 하나 둘 알아먹어가면서, 영화 속 기술이나, 영화 속 세상에 대해 "스스로" 익히게 됩니다. 그러면 관객들은 스스로 자기 나름대로 보고 살피고 연구해서 직접 영화 속 세상에 대해 깨달았기 때문에, 영화 속에 나오는 기술과 배경이 다소간 황당하고 어림없는 억지가 있더라도 나름대로 진지하게 믿게 되기 쉬울 겁니다.

말하자 면, "토탈리콜" 같은 영화에서는 처음부터 차근차근 배경의 기초부터, 점점 이해하기 어려운 순서대로 차례차례 알려주면서 차분하게 영화를 밀고 갑니다. 그런데, 태양계를 우주여행하는 배경을 따라가는 같은 SF물이지만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원시 종족이 싸움질 하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대뜸 갑자기 우주정거장에서 요란한 용어를 읊어대며 교신하는 장면으로 건너 뜁니다. 이게 뭡니까? 무슨 뜻입니까? 인류 이전의 고릴라 닮은 놈들이 헤메는 것을 보여주다가, 지금은 뜬금 없이 인류가 우주를 헤메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게 무슨 소립니까?

보고 있자니, 고민스럽습니다. 궁금합니다. 관객이 직접 고민하면서 따라가다보면, 자연히 "이게 다 외계인 때문이다" 류의 좀 황당한 결론으로 밀고 나가고 있는 이야기로 치닫는다고 해도, 보는 입장에서는 스스로 고심을 많이 하고 받아들이고 있기에, 보다 진지하고, 보다 중후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딱히 뭐 경계가 무너지고 별로 그렇진 않습니다만)

이 영화 "인셉션"도 이러한 술수를 많이 썼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남의 꿈속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 결정적인 소재입니다. 그런데, 어떤 기술로, 무슨 수로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어떤 재주가 있어야 그렇게 할 수 있는지 구구하게 안가르쳐주고 그냥 어물쩡 넘어 갑니다. 한편으로 그 꿈 속에서 사기를 치고 일을 꾸미려면, 건축-토목-도시개발-도시공학(civil engineering)에 대한 지식과 창의성이 필요하다는 점이 제시 됩니다. 그런데, 왜 꼭 그런건지, 도시개발에 대한 창의성이 엄청나게 뛰어난 사람은 어떻게 해서 그걸 꿈 속에서 사기치는 데 반영할 수 있다는 건지 별로 안가르쳐 줍니다.

심시티 게임 같은 것으로 도시를 열심히 설계에 놓으면, 맥시스에서 만든 심시티에서 만든 도시를 배경으로 심즈 게임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의 변형판 같은 걸 돌리면 심즈 게임 대신에 꿈의 배경이 도시가 된다는 것입니까? 안 보여줍니다. 뭐 어떻게 그렇게 연결이 되는지도 영화에서 나오는 것만 봐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모르겠으면 모르겠는데로 그냥 확 밀어붙이면서, 관객 스스로 고심하고 고민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제대로 차분히 안가르쳐주고 넘어가는 덕택에, 도리어 더 진지하고 중후하게 보이게 되는 수법이 잘 쓰였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심시티를 잘못하면 인구 0짜리 도시가 되므로, 정치인들은 너무 대통령 과거 모습만 따라하면 안됩니다)

그리하여 이 영화에서는 그렇게 잔뜩 진지하고 중후해진 분위기에서 보여주는 내용들이 중심 소재, 그 정석 그대로 "꿈"에 대한 여러가지 재미난 이야기 거리들입니다.

꿈 - 중후한 분위기, 이렇게 연결 짓는다면 언뜻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데카르트의 회의론에 대한 철학적인 이야기로 치달아 가기 쉬울 겁니다. 당연히 그 길로 나간 많은 멋진 영화들이 이미 있습니다. "토탈리콜"도 있고, "매트릭스"도 있습니다. 그러니, 비슷한 길로 빠지면 조잡한 아류작으로 크게 망할 위험성도 높습니다. "13층"이나 "다크 시티" 같은 영화는 대강 그럴듯한 수준은 이루어낸 장점이 있는 영화입니다만, 뱐대로 괜히 심각하고 대단한 영화를 만든다는 착각에 빠져 허우적 대다가 진부해 빠진 트래쉬 무비로 확 망해버리기도 쉽습니다. 한국영화 중에서도 예시를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는 꿈속? 아니면 와타나베 켄의 독특한 취향?)

이 영화 "인셉션"이 찍은 가장 훌륭한 점은, 쉽고 흔하게 생각할 수 있는 데카르트의 회의론에 대한 철학 우화를 지나치게 강조하지지 않았다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생시인지 꿈이 너무 생생하여 헷갈릴 지경이니, 우리가 사는 이 인생도 사실은 꿈이 아닐까? 라는 말로 요약되는 그 주제에 인셉션은 너무 메이지 않았습니다. 이 주제는 지금 바로 한 문장으로 요약해서 몇십 바이트 이내의 용량으로 쓸 수 있는 내용입니다. 90년대 이후 태생의 청소년들은 요즘 그게 뭔지 실제 눈으로 잘 보지도 못한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에다가 집어 넣어도 텅텅 빌 정도로 용량이 남아 돌 겁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자고, 몇 테라 바이트의 영상을 컴퓨터 그래픽 처리를 해 가면서 난리를 치는 것은 좀 아깝지 않겠습니까?

이 영화에서는 많이들 해먹는 데카르트의 회의론 우화에 몽땅 거는 대신에, "꿈"이라는 것 자체에서 떠올릴 수 있는 꿈 자체에 대한 독특한 이야기 거리를 여러가지 모아서 다양하게 펼쳐 보여 주고 있습니다. "꿈"이라는 재미난 소재가 있는데, 그걸 써먹는 방법이 "구운몽"이후로 조선시대에만도 끝도 없이 나온 "몽"자류 소설과 똑같이 간다면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이 영화는 그대신에, 자각몽, 몽중몽, 자다가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니까 꿈 속에서는 높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느낌이 나는 것, 짧은 하룻밤의 꿈이지만 꿈 속에서는 아주 길게 느껴지는 것, 반복되는 꿈 속에서 자꾸만 나오는 악몽 같은 옛 기억 등등, 꿈에 대해서 느낄 수 있는 재미난 것들을 이것저것 다양하게 모아 놓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영화는 이런 재미난 소재들을 차곡차곡 모아서 멋진 장면, 화려한 연출, 특색있는 갈등을 집어 넣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덕분에 재미난 것들이 더 많아 졌습니다. 하다못해,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으로 대표되는 꿈속에 나오는 물체를 다짜고짜 무의식에 대한 고도의 상징이라고 해설하는 용감무쌍한 해설도 듬뿍듬뿍 나옵니다. 왜 안나오겠습니까?

20세기는 벌써 지난 세기이니, 꿈 하면 프로이트, 프로이트 하면 꿈 아니겠습니까? 이런 류의 소재도 안쓰면 아까울 것입니다. 프로이트의 이론이란 것이, 꿈 속에서 뭔가 길쭉한 것만 나오기만 하면, 어쨌거나 저쨌거나 무조건 "오스틴 파워즈" 절정 장면에 해당하는 이야기로 끌고가서 마구 심오한 의미로 해설을 해버리는데, 이 영화에서도 그런 아이디어가 나옵니다. 영화 속에 나오는 자물쇠나 금고가 나오기만 하면 그 사람이 꼭꼭 숨기고 있는 비밀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이러다가 보니, 나중에는 영화 속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빛 하나, 화면에 펼쳐진 소도구 하나하나에 관객은 무슨 그럴싸한 의미가 있지 않나 흥미를 자꾸 더 갖게 될 수 있었습니다.


(자물쇠 따는 속임수에는 자네가 꼭 필요하네)

이 렇게 이 영화는, 철학 이야기에 괜히 모든 무게를 집중하기 보다는, 꿈에서 생각할 수 있는 다양한 재미거리들을 조직적으로 잘 엮어 나갈 수 있게 판을 벌리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수법은 확실히 좀 더 다양한 이야기 거리, 재미난 소재를 모아 놓는 데는 괜찮았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소재가 재밌다고는 해도, 초장에는 과연 이게 잘 하는 짓인가 싶기도 했습니다. 무슨 무의식이 어쩌니, 자아가 잠재의식에 기억을 숨기니 어쩌니 하면서, 이런저런 용어만 풀어 놓을 때는 좀 못미더워 보이기도 했습니다. 사이비 심리전문가나 돌팔이 정신과의사들이 학교에서 말썽 피우는 초등학생 때문에 걱정하는 부모들에게 어린이 정신상담 해준답시고 괜히 돈 뜯어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반부는 이래서 뭐 좋은 이야기로 잘 풀어나갈 수 있겠나 의심스러울 때도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차분하게 하나 둘 쌓아가면서, 재미난 연출, 신기한 이야기 거리들은 점점 늘어가고, 이야기는 나름대로 깊어져 갔다고 느꼈습니다. 결국 막판까지 가다보면 이렇습니다. 이 영화는 꿈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내가 생각하고 고로 존재하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많이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수은으로 만든 알약 먹이면서 불로장생 한다고 떠들어대던 옛날 중국 사기꾼들이 이름 팔아먹던 철학자의 이야기를 많이 하지도 않습니다. 대신에 "꿈"이란 한 사람의 극히 개인적인 심성, 감상, 정념을 반영한다는 아주 자연스럽고 와닿는 점을 조금씩 조금씩 더 많이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절정 무렵에 이르면, 바로, 한 사람의 감정, 한 사람이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깊은 후회와 죄책감을 끌어내서 다루는 것을 가장 장중한 전환점으로 다룹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사실은 가상현실이었다니 이럴수가- 하면서, 우주와 존재에 대해 깨달았다고 떠들어대는 대신에, 한 사람의 감정과 비애에 대해서만 솔직하게 다룬다는 것입니다. 그 진부한 이야기는 벌써 1500년전 신라시대 때 조신이 불상 앞에서 예쁜 아가씨랑 바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다가 이야기 했던 것을 비롯해서 지겹도록 많이 나온 이야기지 않습니까? 그 대신에 옛사랑을 잊지 못하는 서글픈 심정 같은 개인의 감정을 꿈을 빌어서 깊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랫만에 지난 옛 사랑의 꿈을 꾸었습니다. 문득 옛 사랑의 꿈을 꾸게 되니, 꿈속에서 꿈을 꾸면서 황홀해 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아침에 이게 다 꿈이었구나 하면서 깨어나서 아쉬워합니다. 그렇게 아쉬워 하다가, 이내 이부자리에서 일어날 즈음이 되어서는, 내가 아직도 그 사랑을 잊지 못해서 이렇게 허우적대고 있나, 하면서 스스로 부끄러움마저 느끼게 되는 그런 심정. 이 영화는 그런 시점을 보여주는데 가까운 이야기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인공의 개인의 애잔한 감상과, 가장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주인공의 어두운 과거를 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영화는 줄거리의 재미와 감정을 다루는 묘미는 "이터널 선샤인"이나 "존 말코비치 되기"와 가까운 구석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상상의 세계를 묘사하면서 자아내는 연출의 박진감과 꿈의 여러가지 상황을 빌어서 기묘한 장면을 화려하게 보여주는 것은 과감한 "매트릭스"와 "토탈리콜"류에 가깝지 싶습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담아내는 감성은 그런 부류의 영화 보다는 오히려, "굿 윌 헌팅" 류의 영화 쪽에 조금 더 다가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주인공)

이 렇게 상상의 세계를 나타내는 화려한 장면들과 개인적인 감정에 초점을 맞춘 줄거리가 잘 엮인 것은 이 영화의 갈등 구도가 "사기꾼 이야기"로 되어 있다는 아이디어와 엮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꿈이니 가상현실이니 하는 이야기를 다룬다면, 진실을 알아내려는 주인공이 거대한 권력자나 통제된 사회에 맞서 도망다니면서 싸우는 이야기로 하는 것이 가장 흔한 방법입니다. 앞서 언급한 여러 영화들(어설프게 따라하다가 망한 한국영화를 비롯해서)도 그렇고, 약간 관점은 다르지만 "트루먼 쇼"나 "12몽키스" 같은 영화도 그런 구도로 이야기가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렇게 가상현실을 지배하는 거대한 권력에 주인공 혼자서 맞서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인공이 팀을 짜서 사기치는 이야기로 꾸민 것입니다. "스팅", "이탈리안 잡", "오션스 일레븐", "범죄의 재구성" 같은 이야기로 짜 놓은 것입니다. 이게 이야기 구도를 좀 다르게 끌고 나가기 좋게 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출발할 무렵에는, 이야기 중심 소재와 좀 안맞아 떨어지는 듯 하기도하고, 약간 어색한데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느낌도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칫 잘못하면 별로 안어울리는 소재를 억지로 같이 다루다가 조각조각나서 망할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면 갈 수록, 이 가상현실 소재에 별로 잘 쉽게 안 끼어들만한 팀 사기단 이야기를 나름대로 열심히 활용했습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좋은 점이 부각되도록 이어 붙였습니다. 그래서, 이야기의 장중하고 웅장한 분위기를 잃지 않으면서도, 주인공 개인의 감정과 애틋한 사연을 중요하게 활용하는 줄거리의 맥도 잘 잡아내는 독특한 연결 다리 역할을 해낼 수 있게, 이 사기단 이야기 구조를 활용했다고 할 만했습니다.


(이 게 말입니다. 이제 다음달이나 다다음달에 개발 호재만 뜨면 지금 이자 한 두푼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장님, 제가 그거 원금 돈이 아까워서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까. 우리 여기서 이러지말고 저기 맥도날드에 가서 커피라도 한잔 하면서 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화 면 연출이 재미나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꿈 속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를 다루는 것 치고는, 환상적인 광경이 많은 편은 아닙니다. 물론 쏠쏠한 재미거리는 충분하고, 몽중몽과 꿈과 현실의 시간차이를 이용하여 만들어낸 교차편집 장면은 진기한 재미와 싸움의 박진감을 전해주는 데 서로서로 쌍으로 좋은 효과를 주는 썩 멋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말그대로 꿈의 세계이지 않습니까. 그래도 기대 속에는 60년 전에 알프레드 히치콕이 감독한 영화에서 잠깐 나왔던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과도 같은 세계가 최고 수준의 컴퓨터 그래픽 기술로 펼쳐진다는 식의 좀 더 환상적이고, 좀 더 화끈하게 몽환적인 것을 기대하게 되기도 할만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맛은 좀 부족했습니다. 에셔의 유명한 그림 몇 가지를 보여주는 장면 정도가 짚어볼만한 데, 이미 "라비린스" 같은 영화들에서 더 신기하게 보여준 바가 있었기에 확 잡아 끄는 맛이 그렇게 강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막판에, 주인공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오래된 낡은 꿈 속에서 펼쳐지는 먼 미래의 외계 행성 같은 장면 정도를 빼면, 그저 좀 공상적인 맛이 강한 요즘 보통 블록버스터 수준이라서, 시각적 "공상"은 강한편은 아니었습니다.

꼭 "공상"적인 대목만 그런 것은 아닌 것이, 이 영화는 꿈 속 세계를 꾸미기 위해서, 건축, 도시공학에 대한 전문지식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래서 영화 초장에는 세계 여러 곳 도시의 독특한 구조를 화면 속에 담아내는 점이 인상적인 면이 분명히 좀 있었습니다. 도쿄의 빌딩 숲이나, 몽마르트 언덕 쪽을 볼 때 파리의 정경 같은 부분은 확실히 비교, 대조 되게 화면에 잡혔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면 진행될 수록, 이런 소재는 점차 잊혀지고 별로 많이 활용되지 못했다고 느꼈습니다. 차라리, 별 영화 속에 큰 비중이 없어도, 줄기차게 계속 도시별 항공사진을 보여준 "인 디 에어"가 도시 구조를 드러낸다는 연출은 더 강하고 볼만했지 싶었습니다.


("에어"의 상태가 좋지는 않구나)

그 렇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열심히 연출한 몇몇 요점에 해당하는 장면들은 꾸밈이 말끔합니다. 특히, 싸움과 격투가 극치에 달할 때, 교차 편집을 멋드러지게 활용하면서, 장엄한 느낌을 오묘하게 이끌어내는 멋진 음악과 딱 떨어지게 맞추는 솜씨는 최고 수준 입니다. 또한 이런류의 가상 현실 이야기들이 소위 말하는 "사이버 펑크" 분위기를 낸다고 칙칙한 실내나, 폐쇄된 공간, 어두운 밤을 배경으로하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서, 도시의 열린 공간, 넓은 거리, 탁트인 벌판, 드넓은 설원 등등을 주로 배경으로 많이 사용하는 것도 이 영화 연출의 개성이 두터운 시원시원한 느낌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거물 사기단의 큰 건을 다루는 이야기에다가, 가상현실까지 활용하는 만큼, 제임스 본드 영화 못지 않게, 세계 이곳저곳을 빠르게 옮겨다닌 것도 썩 괜찮았다고 생각합니다. 다채로운 풍광의 구경거리를 빠르게 이어붙이는 점은 제임스 본드 영화의 훌륭한 성취들을 적절하게 잘 뽑아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은, 이 영화 연출의 단점을 잘 막아주는 방패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는 이야기의 절절한 사연들, 감춰진 비밀들을 자연스러운 사건 속에서 관객들이 직접 지켜 볼 수 있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관객과 비슷한 관찰자 역할을 하는 왓슨 박사 같은 사람을 한 사람 등장시켜서, 주절주절 대화를 하면서 설명하고 해설해서 들려 줍니다. 그러다보니, 한참 눈코뜰새 없이 싸우다 말고, 문득 분위기 잡고 시간 내어서 갑자기 길게 이야기 정리하는 강의를 해주는 시간을 갖는 좀 어색한 대목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아주 과해지지 않게 다른 괜찮은 장면들이 잘 막아주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도시 정경)

그 외에 언급해 볼만한 것들로는, 이 영화의 사이키델릭 분위기가 있습니다. 얼마전에 백제의 유물에 대해 조사하던 학자들이 백제 사람들이 오석산이라는 마약을 다량으로 복용했다는 추정결과를 발표한 바 있는데, 중국, 인도, 페르시아, 터키 등등 아시아권 이곳저곳에서는 마약을 이용해서 정신 상태를 해괴하게 해야만, 정신이 새로운 경지로 뚫리기 때문에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류의 생각이 유행한 적이 때때로 많은 것으로 압니다. 1960년대 미국에서는 히피 문화가 유행하면서, 대마초로 마음을 가라앉혀서 사람들 사이에 낙천적인 기운과 평화를 이룩하자 라든가, 약물을 이용해서 제 정신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초월적인 세계를 느끼면서 속세를 벗어난 깨달음을 얻어보자라는지 따위의, "깨닮음을 위한" 마약 문화가 크게 유행했고, 인도 문화와 이게 엮이는 경우도 아주 보편적이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꿈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 팔에 약물 같은 것을 맞게 되어 있고, 더군다나 여러 사람이 한 군데 모여서 같이 도란도란 같은 약물이 든 관을 팔에 붙이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모양은 60년대 미국 마약 중독자들이 인도-터키식 시샤, 물담배에 마약을 섞어서 같이 피우는 모습과 아주 비슷해 보입니다. 꿈의 세계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의 광경 중에 하나는 아예 19세기 아편굴의 모습과 아주 똑같이 보이게 꾸며져 있는 대목도 있습니다.

이 런 연출은 꿈 속에 들어간다는 행동이 어딘가 위험해 보인다는 점을 보여주기에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영화가 절정으로 흘러갈 수록, 주인공의 과거와 거기에 얽힌 인물의 감정의 폭주, 우울증, 정서적 불안이 주요하게 강조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정신적으로 불안한 인물의 상태를 묘사하기에 이런 약물 복용 분위기가 은은하게 배경에 깔려 있는 것은 아주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과 주인공의 아내는 "기차가 어디로 떠나가는 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 어쩌고 하는 대사를 읊조리는데, 이 대사는 굉장히 운치 있습니다. 이런 운치있고 시적인 대사가 애잔한 감상 속에서 펼쳐지는 것은 보들레르 류의 19세기 파리의 알콜 중독자 예술가 분위기 같은 비극에 맞아드는 느낌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서글픈 좌절이자 자기파괴적인 약물 중독 배경 속에서 나타나면 그 감흥은 충분히 살아날만 하다고 봅니다.


(1968년작 "바바렐라"에 나오는 물담배 피우는 장면)


(인셉션 속의 약물을 이용해서 꿈 속에 단체로 같이 들어가는 장면)

" 인셉션"은 좀 불안하게 잘 안맞을 것 같은 요소들, 옛날에 다른 걸작들이 밑천 많이 팔던 요소들을 모아 놓은 면이 있기에 약간씩 어긋나는 듯한 대목들이 있기는 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개성을 살리면서 연출이 멋질 수 있는 몇몇 대목들을 아주 잘 살렸고, 주인공의 슬픈 사연은 관객에게 뚜렷하면서도 묵직하게 전달되기에, 관객들은 진심으로 주인공이 이제 좀 다 극복하고 잘 되기를 자연스럽게 바라게 하는데도 성공적인 편입니다. 그래서, 왠만하면 관객들은 마지막 장면에서 돌아가는 팽이가 제발 좀 확 쓰러져 주기를 저마다 기원하게 합니다. 그런 영화 속에 빠져드는 맛이 분명히 살아나는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주인공을 맡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몇몇 과장된 감정 표현이 필요한 장면에서 좀 어색하고 가짜 같아 보일 때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성실하게 충분히 영화를 끌어나갈 수 있는 연기를 해 나가고 있고, 극중에서 뛰어난 실력자이고 관객이 "우리편"이라고 생각하게 해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딘지 부실한 부분, 자칫 망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부분도 비치는 그런 인상에 배우가 잘 들어맞았다고 생각합니다. 와타나베 켄은 할 일을 충분히 잘 해냈지 싶습니다만, 맨날 해먹던 것만 심심하게 반복해서 연기한다 싶은 좀 진부한 느낌이 없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 영화에서는 사기를 치기 위해서는 비행기 승무원을 매수해야 하는 데, 그걸 어떻게 해결하는지 와타나베 켄이 설명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지금도 재미있는 장면이기는 한데, 훨씬 더 재미나게 할 수 있는 다른 연기, 다른 배우도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남녀주인공들 - 자막 올라갈 때 보면 엘렌 페이지가 꼭 여자주인공 처럼 되어 있는데, 비중은 더 작습니다.)

그 에 비해, 억만장자의 상속자 역할을 맡은 실리안 머피는 결벽증적인 느낌이 비치는 "이질적"인 돈 많은 사람의 모습을 한눈에 드러내면서도, 다채로운 감정, 다양한 대사들을 모두 완벽에 가깝게 소화해 냈습니다. 실질적으로 여자 주인공 역할에 해당하는 마리온 코티아르는 기술적으로는 영화에 필요한 모든 대사와 감상을 명확하게 잘 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꿈속의 여인인 만큼, 좀 더 화려한 미모를 과시할 수 있는 배우였으면 또 어땠을까 싶기도 합니다. 다른 여자 배우인 엘렌 페이지와 비교, 대조 되면 될 수록 더 멋있는 배역인 만큼, 전성기의 제니퍼 코넬리나, 잉그릿드 버그만 같은 분위기의 배우가 맡았다면 또 괜찮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 밖에...

영국의 명배우, 마이클 케인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아버지로 나옵니다. 할아버지 뻘 아닌가 싶은데 말입니다. 짧은 비중으로 나오는 역할인데, 믿음직스럽니다. 별 상관 없는 이야기입니다만, 마이클 케인은 세계 영화사상, 사기꾼 영화, 도둑질 영화의 대표작이라할 수 있는 "이탈리안 잡"의 60년대 원판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나온 바 있습니다. 물론 이 영화의 감독을 맡은 크리스토퍼 놀란이 감독을 맡았던 두 편의 배트맨 영화에서도 나왔고 말입니다.

꿈 속 세계에 대한 소재를 활용하는 수법으로는 SF판타지 도서관에서 예전에 찍어냈던 "미래경"에 실렸던 "낙하산" http://mirror.pe.kr/zboard/zboard.php?id=kwak&no=5 이라는 소설과 잠깐 소재가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남의 생각 속에 들어가 몰래 조작을 한다는 면에서는 "태평양횡단특급"에 실려 있는 듀나의 걸작 중 하나인 "꼭두각시들"과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둘다 이 영화의 슬픈 분위기와는 거리가 좀 먼 풍자물이긴 합니다만, 후자의 경우에는 적절히 살을 붙여서 영화로 꾸민다면 대단히 독특한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예로부터 생각해 왔습니다. 물론, 지금 상태 그대로라도, "기묘한 이야기"나 "환상특급"류의 단편 에피소드 하나를 꾸미는 데는 아무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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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회원 리뷰엔 사진이 필요합니다. [32] DJUNA 2010.06.28 82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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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9 [영화] 컬러 아웃 오브 스페이스 Color Out of Space (2020) Q 2020.03.01 47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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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6 [영화] 어스 Us (2019) [1] Q 2019.03.27 38948
775 [영화] 인비저블맨 The Invisible Man (2020) Q 2020.04.09 33523
774 [영화] 원더우먼 1984 Wonder Woman 1984 (2020) [1] Q 2021.01.19 28803
773 [영화] 바운티호의 반란 The Bounty (1984) (멜 깁슨, 안소니 홉킨스, 대니얼 데이 루이스, 리엄 니슨, 기타 등등 출연) Q 2019.05.04 24153
772 [영화] 신체강탈자들의 침입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 (1978) Q 2016.12.19 20560
771 [영화] 2011년 최고의 디븨디와 블루레이 열한편씩 스물두편 (15금 사진 있습니다) [5] [10] Q 2012.01.14 20549
770 [영화]여곡성(女哭聲, Woman's Wail 1986) [6] [31] 원한의 거리 2011.01.17 20438
769 [영화] 블랙 스완 Black Swan (나탈리 포트만, 마일라 쿠니스 주연- 스포일러 없음) [12] [33] Q 2010.12.05 14494
768 [만화] 셀프 - 사쿠 유키조 [5] [18] 보쿠리코 2010.11.05 14273
767 [영화] 새로운 딸 The New Daughter (케빈 코스트너, 이바나 바케로 주연) [34] Q 2010.06.22 14092
766 [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 Dangerous Method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 [6] [26] Q 2012.05.12 13460
765 [만화] Peanuts, 짝사랑 대백과 [9] [26] lonegunman 2010.07.22 13437
764 [영화] 마루 밑 아리에티 [8] [20] milk & Honey 2010.09.10 12591
763 [TV] KBS 미스터리 멜로 금요일의 여인 (정리판) [4] [1] 곽재식 2011.02.14 12060
762 [영화]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 백설공주와 사냥꾼 (스포일러 없음) [6] [215] Q 2012.06.12 11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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