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그랬는데 싶게 앗 하는 사이에 2013년으로 넘어왔군요.

 

유난히 짧게 느껴진 한 해였습니다만 개인적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건강을 크게 해쳐서 아마도 1년 이상의 요양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 문제는 거의 전화위복 수준으로 잘 해결이 되었고, 학문적인 프로젝트의 진전에 다소 장애가 있긴 했지만 (현재 마감을 저작 [咀嚼] 해버린 글을 두개 짊어지고 있습니다 ^ ^;;;) 그것도 불편한 정도에 그쳤습니다. 20대부터 저를 계속 괴롭혀오고 큰 고통을 주었던 지병의 하나가 수술의 결과로 완전히 없어진 것을 고려하면 불평을 늘어놓을 계제는 아니겠지요. 2012년에는 오히려 제 주위 분들이 여러가지 문제로 인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좌절을 겪는 모습을 많이 보았는데요. 2013년은 지구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평화스러운 한 해가 되기를, 그리고 제 주위의 어린 분들, 젊은 분들께 심리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뭔가 도움을 줄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해 마지 않습니다.

 

2012년에는 외출을 전혀 못하고 책상머리에 앉을 수도 없는 불구의 상태가 몇 개월 계속되었다는 변수로 말미암아 저의 영화 보는 습관에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디븨디와 블루 레이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큰 그림에서는 그다지 벗어나지 않았지만, 애플 TV 를 비롯한 스트리밍/유료 다운로드 서비스에 대한 의존도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기존에 제가 스트리밍/다운로드 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이유는 1) 소비자 입장에서 화질 기타 퀄리티 콘트롤이 제대로 이루어진 상품을 선호하고 그에 따른 평가를 내릴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넷플릭스같은데서는 HD 화질 영화를 선보이게 된 지금에도 여전히 “판본” 개념을 소비자리뷰에 도입하기를 거부하고 있지요. 마치 팬 앤 스캔 VHS 로 [아라비아의 로렌스] 를 보는 것이 1080p 블루 레이로 보는 것과 질적으로 동일한 체험이기라도 한 것 처럼 말씀이죠) , 2) 우리 집같은 환경에서는 고화질 다운로드가 불가능하다, 3) 특화된 디븨디와 블루레이 레벨들이 내놓는 종류의 영화들-- 고전 클래식들, 유럽과 아시아영화들, 컬트영화들, 장르영화들, 이색작들등-- 을 오히려 스트리밍과 다운로드로 구하기가 어렵다, 라는 세가지로 대충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빗토렌트 등의 어둠의 경로로 보시는 분들께는 이런 차이점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이겠지만, 저처럼 고리타분한 (?) 영화팬들에게는 아무래도 “따운” 체계로 전환하는 데에 많은 저항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 년동안 저와 바깥분이 여러모로 노력을 기울인 결과 (왜 노력을 기울였나고요? 돈 절약하려고요 ^ ^ 그리고 디븨디로 점거된 집의 공간을 어떻게 하느냐라는 이슈가 장난 아닙니다... 그냥 케이스를 새로 사서 박아놓으면 되는 그런 시점은 4, 5년전에 이미 지났고요. 블루 레이는 그나마 케이스가 작아서 좀 나아요. 그런데 블루 레이 케이스는 한 40장 이상을 방바닥에 포개서 쌓아올리면 반드시 한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어지더군요. 디븨디는 비교적 덜 그런데... 볼썽 사납다고 바깥분이 뭐라고 하십니다) 광학디스크로 보는 것과의 차이를 많이 좁히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제는 vudu 처럼 아예 HD 트랜스퍼로 영화를 다운받을 수 있는 것을 차별화전략으로 사용하는 서비스도 생겨났고, 저도 봐 봤는데, 여전히 블루 레이만큼은 못합니다. 그래도 [헬 하우스의 전설] 같은 고전명작들을 무슨 독일제 블루레이로 아마존.더에 우송료 합쳐서 50불 넘게 지불하고 구입하는 것 보다는 부두에서 10불 조금 넘게 주고 그런대로 볼만한 HD 파일로 사두는 게 더 합리적으로 느껴지긴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특화된 영화들도 스트리밍과 다운로드 서비스에서 많이 구해다 놓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넷플릭스에서는 이제 [광해], [피에타]나 홍상수감독의 신작처럼 직수입이 결정된 유명작들을 제외하면 웬만한 한국영화들은 극장개봉하는 시기에 상관없이 공개후 3, 4개월이 지나면 미국에서 틀어볼수 있고요. 물론 한국어대사에 영어자막입니다 (소니에서 주관하는 크랙클같은 개념없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보면 [고지라] 시리즈 같은 걸 줄기차게 영어더빙으로 틀어주고 있더군요. 공짜로 틀어주는 것이니 닥치고 봐라 이건가? 한 영화에 자그마치 10개 넘는 CF를 박아넣는 주제에... 요즘은 일반 TV 도 이렇게 CF 를 영화 도중에 열나게 틀어주지는 않는데). [작은 연못] 같은 미국에 상영하기 힘들 것이라고 한국의 여러분들이 지레짐작하기 쉬울 영화들도 다 넷플릭스에 올라가 있습니다. 단, 화질 컨트롤은 여전히 안됩니다. HD 로 빠작하게 나오는 한편도 있고 아닌 한편도 있고요.

 

Vudu 에서는 [어린이를 어떻게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제가 쓴 회원리뷰 참조)] 의 감독인 나르시소 이바녜스 세라도르가 제작총지휘를 한 철저하게 로컬한 시각에서 만든 스페인제 호러영화 시리즈 (제가 아는 한에서는 리젼 1 디븨디로 출시된 적이 없는) 를 볼 수 있고, 스칸디나비아 여러나라에서 만든 장르영화들을 한데 모아놓고 틀어주기도 합니다.

 

훌루플러스에서는 지난번에 소개한 바와 같이 크라이테리언과 제이너스 필름에서 북미 배급권을 소유한, 디븨디로 전혀 출시되지 않은 몇 백편의 유럽과 일본 고전영화들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밖에도 Fandor 처럼 아예 컬트나 마이너취향의 영화를 골라서 틀어주는 스트리밍 서비스도 이제 존재합니다. 아이튠스도 빼놓을 수 없겠죠. 여전히 화질과 오디오 퀄리티는 넷플릭스등과는 비교가 안되는 고품질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극장상영작을 웃돈을 얹어주고 스트리밍으로 볼 수 있는 (그래봤자 극장표값보다 싸지만) 서비스를 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애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일단 보려고 마음 먹은 영화라면 극장에서 보는 게 낫지요. 애플 TV 를 통해서 아이패드를 미러링할 수 있는 기능도 사실 영화 제대로 보기에는 그렇게 도움은 안 됩니다만, 쿨하기는 해요.

 

그런고로 2013년 베스트 리스트를 만들게 될 즈음해서는 어떤 형태로든지 스트리밍/다운로드로 본 작품들이 진입을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단, 2012년도 리스트에는, 작년의 디븨디-블루 레이 구매량이 그 전년에 비해서 30% 가량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반영이 되지 않았습니다. 스트리밍/다운로드로는 위에서 말한 희소가치가 높은 영화들을 보는데에도 역시 심리적 저항감이 있고, 그다지 편하지가 않은 것 같아요. 결론적으로 리스트에 올라갈 만한 작품들은 많이 보지를 못했어요. 그리고 지금부터 열심히 섭렵한다 하더라도 2013년에 새로 “출시” 된 작품들을 따로 구별할 필요가 있는지 생각을 해봐야 되겠지요.

 

진실을 말하자면, 너무나 많은 (미국영화가 대다수지만, 미국영화 안보겠다고 반미문화선언을 하고 “비” 미국영화만 계산하더라도, 턱도 없이 많은) 수의 작품들이 북미 광학디스크 시장에 나와 있습니다. 워너 아카이브만 해도 작년에만 4백편에 육박하는 (;;;;) 디븨디들을 내놓았다고 하더군요. 매달 출시되는 디븨디와 블루 레이 따라잡기만 해도 벅찹니다. 결국 스트리밍이나 다운로드 서비스는 갑작스럽게 특정 영화를 봐야 되는데 디스크가 손에 잡히는데 없거나, 돈 주고 블루레이 사기는 아까운 신작영화를 보는데 쓰거나, 별 생각없이 킬링타임용으로 볼 한편을 물색하거나 그런 식으로 동네 VHS 렌털 가게에서 비데오 빌려다 보던 시절의 감각으로 이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oldies 님처럼 어떤 매체를 통해서 보았는가라는 이슈를 일단 접어두고 무조건 그 해에 본 새로운 작품중에서 골라서 리스트를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편일 수 있겠습니다만, 많은 의미에서 더 합리적인 이 방식을 취하기에는 나의 콜렉터로서의 강박이 넘어설 수 없는 벽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광학디스크가 이제나 저제나 쫄딱 망한다는 얘기를 거의 3년 넘게 들어왔는데, 한국의 사정은 그런지 몰라도, 북미에 국한해서 보자면 “내가 어린 시절 보고 재미있었던 영화를 좋은 화질의 디븨디로 소장하고 싶다” 라는 소비자의 희망을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2010년대 들어와서의 상황은 고전 영화팬들의 입장에서는 더이상 좋아지기 힘들 것 같은 정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08년 불황을 맞이한 디븨디 시장의 타개책으로 개발되었다는 측면이 있는 온 디맨드 서비스가 이렇게 성공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물론 지금부터 한 7년쯤 지나면 현재 존재하는 것들에 더해서 여러가지 종류의 온라인 영화보기의 방법들이 등장할 것이고 (극장에 개봉하는 대신에 넷플릭스같은 온라인 유통회사를 거치지 않고 제작자측에서 자기네 영화를 직접 “홈씨어터” 에 떨어뜨려준다는 방식이 우선 생각나는군요) 시장의 판도는 그로 말미암아 여러번 바뀌겠지요. 

 

예년과 마찬가지로 렌탈로 보거나 극장에서 본 작품들은 제외하고, 쌩돈을 주고 구입하거나 누가 공짜로 주거나 해서 현재 소유하고 있는 2012년에 출시된 디븨디와 블루레이에 한해서 선출했습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영화의 훌륭함이라던가, 희소가치라던가 아니면 디스크의 프로덕션 퀄리티가 가장 높다거나 그런 종류의 “객관적” 인 기준은 무시하고, 저의 예상을 호쾌하게 짓밟아버리는 “놀라움” 을 선사하거나, 영화의 “질” 과는 그다지 상관없이 손에서 절대로 놓고 싶지 않도록 만드는 “소중함” 을 보유한 제품들을 골랐습니다. 때로는 제가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거나, 이런 영화를 좋아한다라고 공식석상에서 말할 수 있는지 눈치가 보이거나, 또는 다시 보기에 강한 저항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도 “놀라움” 의 강도가 강력한 경우는 철저하게 고려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이 리스트에 첨부한 저의 촌평들도 물론 철저하게 주관적인 내용을 담고 있고, 제가 거품을 물고 어떤 작품을 찬양한다고 해서 그걸 반드시 이 영화를 보시라는 추천사로 여기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오직 드리고 싶은 말씀은 작년과 마찬가지로 2013년에도 많은 영화를 보시고, 그 중에서도 꼭 본인이 태어난 해보다 전에 만들어진 “옛날” 영화들을 찾아서 보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옛날” 영화에 대한 친숙함과 호기심의 비중을 늘리는데 1 밀리그램의 무게라도 이 리스트가 공헌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겠습니다.

 

2012년에는 디븨디는 열편, 블루레이는 열한편을 골랐습니다. 언제나처럼 영어로 쓴 리스트와는 선출된 작품들이 약간 다릅니다. 궁금하신 분들께서는 1월 5일 이후에 제 블로그페이지  로 가시면 읽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디븨디부터 먼저:

 

10. 울트라 세븐 전집 Ultra Seven: Complete Series (1967-1968) -- Shout! Factory

 

 

 

츠부라야 스튜디오의 어처구니 없는 실책때문에 타일랜드의 모 프로듀서가 일본국내외 세계시장에서의 판권을 쥐고 있고, 그 때문에 블루 레이 등의 고화질로 감상할 수 없게 되었다는 난점이 있습니다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일본 특수촬영 히어로물계의 금자탑이라고 일컬어지는 [울트라 세븐] 이 적정가격에 (일본판의 경우, 이런 시리즈 전집 몇개를 쌩돈내고 사려면, 농담이 아니라 멀쩡한 데스크탑 한 개 살 만한 돈을 깡그리 투자해야 한다는 경제사정을 고려하자면) 마침내 리젼 1 디븨디로 출시되었다는 것은 희소식입니다.

 

이 [울트라 세븐] 을 함부로 무시하면 안됩니다. 아마도 이런 종류의 “스턴트맨이 봉제탈 뒤집어쓰고 괴물과 레슬링하는” 시리즈 중에서는 가장 SF 적, 사상적으로 세련되었을 뿐 아니라, 미적이나 드라마상으로도 이러한 “어린애들 보는 실사 만화영화” 의 기대수준을 여지없이 여러 토막으로 썰어버리는 내실을 보여줍니다. 그중에서도 특기할만한 것은 짓소오지 아키오 (実相寺昭雄) 선생이 감독한 에피소드들인데, 그가 주도하는 과격하리만치 탐미적이고 급진적인 영상미학이 등에 지퍼가 달린 외계인 코스튬까지도 하나의 전위적 영상예술의 소도구로 바꿔버리는 효과를 과시합니다.

 

일례로, 외계인이 담배개비에 우주 마약 (뭐?!) 을 삼입해서, 그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다른 인간에 대한 편집증적 불신감이 극도로 강화된 나머지 무작위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는 (뭐뭐?!) 내용의 [저주받은 동네] 같은 에피소드를 보면, 전편을 통해 주인공인 모로보시 단의 얼굴이 똑바로 나오는 장면이 하나 정도 이고 (나머지는 다 실루엣 처리, 뒷모습만 보여주기 내지는 얼굴의 일부만 클로스업) 나중에 메트론 성인 (星人) 의 우주선이 집을 둘로 쩍 가르고 하늘로 비상하는 시퀜스의 개천가 마을의 묘사는 그 과격한 오렌지색 조명과 더불어 이게 화성인지 지구인지 모를 정도로 슈르레알합니다. 짓소오지 감독 작품처럼 막 나가지 않더라도, 많은 에피소드들이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당장 극장판으로 리메이크해도 통할 만큼의 뛰어난 지적 수준과 드라마투르기의 우수함을 과시하고 있어요.

 

9. 콜럼비아 픽쳐즈 필름 누아르 콜렉션 제 3집 TCM Presents Columbia Pictures Film Noir Collection vol. 3. (1947-1953) -- Turner Classic Movies/Sony Pictures Entertainment

 

 

모든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온디맨드 시스템으로 바뀌면서 아이쿠 이제는 필름 느와르 콜렉션 같은 주옥같은 수작들을 헐값으로 구할 수 있는 기회는 영영 사라지겠구나 하고 비관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일본식으로 말하자면 버리는 신이 있으면 줍는 신도 있다고, 콜럼비아 필름 느와르 박스세트는 터너 클래식 무비 채널의 웹사이트에서 계속해서 출시해주었습니다.

 

제 3 집 박스세트에는 [나의 이름은 줄리아 로스], [갱단 The Mob], [구부러진 길을 몰아라], [위기의 상황 Tight Spot] 그리고 [도둑놈 The Burglar] 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제 1 집과 2 집에 비하면 좀 전반적인 수준이 떨어질 수는 있겠지만, 갱 멤버로 위장해서 조직에 잠입한 경찰을 집요하게 따라가는 [갱단], 운전 실력때문에 은행강도 프로젝트에 차출되었지만 점차 정신적으로 금이 가기 시작하는 자동차 수리공을 압도적인 박진감과 더불어 그려내는 믹키 루니 주연의 [구부러진 길을 몰아라], 진저 로저스 (!) 가 담배를 뻑뻑 태우고 막말을 툭툭 던지면서 자기 경호역을 맡은 형사의 애를 태우는 갱스터의 정부 (!!) 로 출연하는 [위기의 상황], 제인 맨스필드 ([로앤오더: SVU] 의 마리스카 하기타이의 어머니이자 당대의 섹스심벌) 가 나온다는 것이 명성의 거의 전부이지만 지금 다시보면 그 “현대적” 인 심리묘사가 무척 흥미있는 [도둑놈] 등, 여전히 모두 다 한가락씩 하는 영화들입니다.

 

8. 릴리 Lili (1953) -- Warner Archive Collection

 

 

[파리의 미국인] 과 [지지] 를 통해 MGM의 대스타가 된 프랑스소녀 레슬리 카론이 두 대작 막간, 1953년에 출연한 [릴리] 는 작은 영화입니다.

 

1시간 21분이라는 런닝타임에, [뽀로로] 의 에피소드 한토막의 등뼈로 쓰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단순하고 천진난만한 스토리에, 노래도 기본적으로 하나밖에 나오지 않고 댄스 시퀜스도 두개밖에 없으니 뮤지컬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죠. 대감독 빈센트 미넬리한테 원래 보내졌던 프로젝트인데 그는 차버렸습니다. 무리도 아닙니다. 이 각본 가지고는 무슨 찬란한 테크니칼러의 볼거리를 만들 여지가 없으니까요.

 

그런 자그마한 소품인데 이 한편이 마음에 울리는 소리는 큽니다. 빵집에서 일하러 왔다가 졸지에 서커스에서 인형들 말상대를 하게 된 주인공 릴리처럼 작지만 착하고 아름다워요.

 

보고 있노라면 영혼이 맑아지면서 천당이 가까워지는 느낌이 드는 영화들이 세상에는 존재합니다. [릴리] 는 그 중 하나에요. 화려한 댄스 코레오그래피가 없으면 어떻습니까. 스케일이 작으면 어때요. 어른들 세상에 실망하고 좌절한 열여섯살짜리 소녀 릴리가 여우, 발레리나, 곤봉을 든 거인 인형들과 회화를 주고 받으면서 그 인형을 통해서밖에 “말” 을 할수없는 인형사와의 진정한 사랑에 눈뜬다는 설정이 “유치” 하면 더욱 어떻단 말인가요.

 

전 이 영화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엔드 크레딧이 올라갈때즈음 행복한 웃음이 입에 가득차 있거나, 눈에 물기가 살짝 도는 분들을 골라내고 싶어요. 천국에는 그 분들만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왜 사랑의 노래는 그렇게 슬플까... 하이릴리 하이로- 하이로...

 

7. 화려한 앰버슨 집안 사람들 The Magnificent Ambersons (1942) -- Warner Brothers

 

 

이건 꼼수를 부린 선출입니다. 사실은 제가 소장하고 있는 [앰버슨] 의 디븨디는 2011년 최고의 디븨디 리스트에 포함된 [시민 케인] 70주년 기념 특별판 블루 레이에 따라 온 서플이거든요. 그러나 어차피 2012년에 워너 브라더스에서 낱개로 출시되었기 때문에 조금 억지지만 2012 년 리스트에 넣습니다.

 

혹자가 얘기하는 것처럼 [앰버슨] 이 [시민 케인] 보다 더 뛰어난 영화냐 하면 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앰버슨] 의 오리지널 오슨 웰즈의 디렉터스 컷이 어딘가에서 발견된다 하더라도 갑자기 이 영화가 그로 말미암아 지금보다 몇 단계 더 뛰어난 새로운 걸작으로 재평가 받기도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앰버슨] 의 내용 자체가 [시민 케인] 만큼 “현대” 라는 시대와 그 시대를 일구어낸 욕망과 야심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1시간 28분짜리 판본이 “위대한 영상작가가 저버린 쓰레기” 대접을 받아도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관객들의 부정적 반응을 우려한 스튜디오에 의해 40분이 넘는 양의 필름을 삭제당하고 웰즈 자신에게서도 버림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스튜디오 편집본” [화려한 앰버슨 집안 사람들] 은 여전히 영화사에 길이 남을 수작이고, “영화예술가” 라는 위상을 제대로 역사상에 정립한 인물중 하나인 웰즈의 마술사의 손길은 그 속에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6. 대살진 [大殺陳] The Great Killing (1964) -- AnimEigo

 

 

[대살진] 은 끔직한 영화입니다. 끔직하고, 과격하고, 미친 영화입니다.

 

그것도 곱게 미친 “예술” 영화가 아니고, “복수” 나 “정의를 위한 투쟁” 그것도 아니면 “마초적 쿨함” 같은 명분의 간판을 걸어놓고 속내로는 적당한 폭력을 적당히 즐기면서 위안을 삼는, 정제된 쾌락의 순환을 바라는 일반 관객의 기대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서 순대를 만들어 관객의 입에 다시 쑤셔넣는 한편입니다.

 

서부극을 많이 보면 볼수록 “수정주의 서부극” 이라는 규정이 점점 쓰레기가 되가는 것처럼, 1964년에 나온 이 “참바라” 영화를 보고 나니 도대체 이제까지 일본 사극을 뭘 봤는가? 하는 기초적인 회의가 두뇌를 엄습합니다.

 

아 참고삼아 말씀드린다면 [대살진] 은 그 “질” 과 관계없이 여러분께 차마 추천드리기 어려운 한편입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 끔직하고 제정신이 아닙니다. (체제측의) “악당” 들보다 (반체제 “운동권” 의) “주인공” 들이 더 철저하게 편집적이고, 추악하고, 미쳐있습니다 (영화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건 은유가 아닙니다) 만 그렇다고 해서 체제측 편을 드는 것도 아닙니다. 아마 전형적인 한국산 “진보” 지식인의 입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아니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이건 도대체?!” 라는 불편한 고함이 터져나오지 않을까요?

 

이 광기어린 전개와 내용에도 불구하고, 검극 (劍戟) 영화이면서 칼과 칼이 맞부딛는 소리는 영화 전체를 통해 한번 날까말까하는 한편,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죽을 각오를 하고 찍은 것 같은 박력의 핸드헬드 카메라로 잡아낸 클라이맥스의 암살극 등의 입이 딱 벌어지는 묘사들은 소름이 끼칠 정도의 냉혹함과 더불어 쿠도오 에이이치 감독에 의해 통제되어 있습니다.

 

이보셔 퀜틴 타란티노선생! 괜히 아시아영화 아는체 좀 그만하시고, 서부극도 좋고 깽영화도 좋으니 이런정도로 싹막하게 미친 작품을 한번 오리지널로 만들어보세요.

 

5. 마법사들 The Sorcerers (1967) -- Warner Archive Collection

 

이것도 [화려한 앰버슨 집안 사람들] 처럼 좀 꼼수를 써서 선발했습니다. 이미 리젼 코드 2 번으로 영국에서 출시된 디븨디를 소유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나 워너 아카이브에서 2012년에 새로 나온 디븨디 R 이 화질이 더 좋을 뿐 아니라 새삼스럽게 구입해서 다시한번 보니 역시 여러번 봐도 여러번 머리통을 후려갈기는 체험을 당하는 굉장한 활동사진이라는 것을 새삼 알겠습니다.

 

스물 다섯살이라는 나이에 약물과다복용으로 세상을 뜬 마이클 리브스 감독은 불과 세 편의 장편영화를 완성하고 요절했습니다만 그 최후의 작품이 빈센트 프라이스가 전혀 캠피하지 않은 최고의 고전적 악당 연기를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한 수작 [마녀사냥꾼] 입니다. 그러나 제게는 리브스의 호러영화사에 길이 남겨져야 마땅할 괴기-공포영화는 냉혹한 사극드라마라는 규정이 더 어울릴 [마녀사냥꾼] 이 아니고 그의 두번째 감독작[마법사들] 입니다. 시놉시스만 읽으면 60년대적 사이키델릭 취향에 매몰된 헬렐레스러운 영화를 연상하시기 쉬울 것입니다만 결단코 그런 작품이 아닙니다.

 

젊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대로, 나이가 든 사람들은 나이가 든 사람들대로, 서로 서로의 시점에서 원망과 적개심이 약간씩 가미된, 뼈에 사무치는 공포스러움을 느끼게 해주면서, 보고 난 다음에 흙빛의 얼굴로 흘끔 다른 관객들의 얼굴을 저도 모르게 쳐다보게 되는 그런 영화... 이게 뭐지? 하고 있는 동안에 관객 여러분들의 오른쪽 배에 깊숙히 박혀 들어오는 날이 선 단도 같은 한편입니다. [The Lady Vanishes (네이버에서 검색해 보니까 이 고전명작의 한국어제목이... “반드리카 초특급” 이던데... 정말 이런 제목으로 개봉된 적이 있단 말입니까?!)] 로 데뷔한 이래 마이클 파웰과 에메릭 프레스버거의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다니까!] 를 비롯한 수많은 영국영화의 수작명작들에 출연했던 캐서린 레이시와 이미 촬영 당시에 건강이 악화되었던 핼쑥한 안색의 보리스 칼로프 두 분께서 돈도 명예도 다 소용없고 오로지 육체적인 감각, 오관 (五官) 으로 느낄 수 있는 순수한 쾌락에 집착하는 노년의 “마법사” 커플을 소름이 끼치는 박진감과 더불어 연기해 보여주십니다.

 

4. 군인 깡패 兵隊やくざ (1965) -- Kadokawa Pictures/Daiei

 

 

아이고 이거는 또 어떡하다 손에 넣었는지. 고백하자면 아마존.제이피에서 저한테 “고객님께선 이런 영화를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라는 식으로 보내주는 CF 뉴스레터에서 우연히 발견한 한편입니다. 감독이 마스무라 야스조오라는 정보와, 50% 할인이었던가 하는 특전세일이 아니었더라면 무시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던 디븨디입니다. 그리고 전 디븨디를 틀기 전까지만 해도 [자토이치] 의 카츠 신타로오가 연기하는 깡패 출신 초년병이 기합도 받고 그러면서 유쾌한 소동을 일으키는 “군대 코메디” 를 예상하고 있었어요!

 

으아악~ 아닙니다, 아니에요.

 

즐겁게 웃는 게 아니라 뇌수가 TKO 당한 상태에서 으헐헐하고 입가로 새어나오는, 어이가 쑥 나간 벙찐 웃음을 웃게 만드는 그런 한편입니다. 블랙 코메디로 보시자면 보실 수 있겠군요. 그리고 이런 류의 “블랙 코메디” 는 한국 영화인들이 가장 만들기 힘들어하는 스타일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마스무라 감독의 시치미떼는 악마같은 책술에 대한 면역이 어느정도 생겼지만, 그렇더라도 쿠로사와 아키라 영화의 각본을 많이 집필한 키쿠시마 류우조오 각본가의 폐부를 찌르는 너레이션과 니힐리스틱한 대사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부조리와 폭력과 위선이 죽음의 재처럼 만주의 벌판을 뒤덮는 [군인 깡패] 의 세계는 모든 마스무라 감독 작품이 그렇듯이 단순한 정치적 해석 (“반전” 영화다 아니다, 일본군의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 이 있다 없다 등등) 을 머리부터 물어뜯어 죽여버리고, 캐릭터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공감과 혐오 사이에서 핀볼 튕기듯이 날리면서, 장르적 카테고리를 포고 스틱 타듯이 가볍게 추월하여 관객인 저의 뇌수를 마음대로 강타합니다. 주인공 오오미야가 “기합” 이라는 (일본군에서 쓰는 정식 호칭은 “제재[制裁]” 입니다) 명목하에 위액까지 다 게워낼 정도로 구타를 당하듯이...

 

경고: 영어자막도 붙어있지 않은 일본산 디븨디이고 보니 시네마테크에서 어쩌다가 틀어주지 않으면 한국의 관객여러분들은 보시기 힘들 한편이겠습니다만, 혹시나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군대경험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특히 여친 등의 동행과 함께) 이 한편을 보러 가시는 것은 극구 만류합니다.

 

3. 태어날때부터 나쁜 그녀 Born to be Bad (1950) -- Warner Archive Collection

 

 

이 한편은 “필름 느와르” 로 분류되어 있는데 아닙니다. 아니... 필름 느와르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닌데... 아... 뭐라고 얘기를 해야 좋을지...

 

내용부터가 완전히 70년대 일본 번역판 순정만화입니다. 겉으로는 요조숙녀지만 속은 여우같은 기집애가 자기 베친의 약혼남을 빼앗아가는 등 온갖 못된 짓을 벌인다는 얘기... 이게 필름 느와르? 근데 영화를 보다 보면 이 뻔뻔스러운 기집애를 자기도 모르게 응원하게 되기도 하고 (엥?), 또 니콜라스 레이 감독의 유려하면서도 항상 캐릭터의 풍요함을 위해 동원되는 미장센에 정신이 쑥 빠지기도 하고, 억울하게 당한 베친이 치고 올라올때는 또 눈물이 글썽일 정도로 감격하기도 하고... 이렇게 짧은 글로는 도저히 뭐가 그렇게 좋은지 설명 못하겠습니다.

 

레이 감독작품들이 다 그런 것 같습니다. [태어날때부터 나쁜 그녀] 는 [이유없는 반항] 이나 [실제보다 거창한] 에 비하면 잘 알려지지 않은 소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래사장에 묻혀있는 다이아몬드를 발견” 하는 경험을 여지없이 하게 해 주시는군요.

 

워너 아카이브에서 출시된 디븨디에는 극장공개판에서 삭제되었던 오리지널 엔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와우! 워너아자씨들, 앞으로도 이런 서플 더 달아주세요!

 

2. 악마들 특별판 The Devils: Special Edition (1971) -- British Film Institute

 

 

뭣땜시 블루레이로 안 나오고 그냥 디븨디로 출시되었는지, BFI 의 전적으로 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는 초이스고, 내년에 블루레이로 내놓아서 또 다시 사야 되는 거 아냐? 하는 걱정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렇다고 이 작품을 연말 리스트에서 내쳐낼 수는 없었습니당.

 

제가 만드는 리스트에는 원체 맛이 가버린 영화들이 포진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악마들] 은 세계 영화상 맛이 간 유명컬트작 공모전을 하더라도 누군가의 십순위에 반드시 올라갈 수 있을 그런 한편입니다. 작년에 세상을 뜨신 이단아 켄 럿셀 감독의 작품중에서도 그 묘사 수위의 과격함과 건전한 사회적 상식과 먹물적 양식에 엿을 먹이는 사상성이라는 점에서 가장 지독한 두 서너편에 꼽힐 정도니까요.

 

영화 자체에 대한 얘기는 다음 기회로 돌리고 줄입니다만, 한마디만 하자면 전 이 판본을 보고야 [악마들] 이 이렇게 넋을 빼놓는 방식으로 극도로 모순적인 인체와 군중과 인간이 도안한 미술의 “추악한 아름다움” 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판타스틱한 비주얼의 향연이라는 것을, 그리고 피터 그린너웨이 등의 더 “예술적” 으로 명성이 높은 후세대의 감독들에 비교해서도 럿셀이 얼마나 영화라는 매체의 기본기를 잘 파악하고 있었던가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카톨릭으로 자란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하느님 그런거 안믿는다 하고 무신론자 코스플레이 하고 살더라도 ^ ^) 아무리 여러번 보고 다시 보더라도 쇠꼬챙이로 맹장을 건드리는 것 같은 살떨림을 억누르기 힘든 한편이기도 한데,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반종교 이념을 천박하게 부르짖는 영화도 당연히 아닙니다) 다른 문화배경에서 오신 분들께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합니다.

 

BFI 에서 출시된 디븨디는 두 장에 나뉘어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녹음한 것 같은 켄 럿셀의 코멘터리와 그가 1958년에 만든 이것은 또 본편과는 달라도 이리 다를 수 없는 “착하고 아름다운” 단편인 [아멜리아와 천사] 등 귀중한 서플멘트로 꽉 차있습니다. 보물단지입니다.

 

1. 장 그레미용의 나찌점령기 프랑스영화 콜렉션 Jean Gremillon During the Occupation (1941-1944) -- Criterion Collection

 

 

나찌가 프랑스를 점령하고 1차대전 전쟁영웅이었던 페탱 장군을 “대통령” 으로 내세운 비시 “괴뢰” 정권을 수립했을 때 상당수의 프랑스 영화인들이 본국을 떠났습니다. 장 르누와르처럼 지금은 불후의 명작이라는 렛떼루에 아무도 토를 달지 못하는 [게임의 규칙] 의 상업적인 실패로 인해 거의 영화 만들기를 포기한 실의의 상태에서 프랑스를 떠난 분들도 있었지만, [공포의 보수] 로 유명한 앙리 조르주 클루조를 위시한 많은 영화인들이 국내에 그대로 남아서 영화를 계속 만들었습니다. 말하자면 한국 역사의 “친일영화인” 과 흡사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인데, 이 크라이테리언 이클립스 콜렉션은 그 국내잔류파 영화인 중 하나였던 장 그레미용이 만든 세 편-- [견인선 Remorques], [여름의 햇살 Lumiere d'ete] 그리고 [하늘은 그대의 것이니 La ciel est a vous]-- 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듣기 싫으실, “반민족주의적” 인, 양놈들 칭찬하는 소리 좀 하겠습니다. 프랑스 문학과 영화가 자신들 역사의 치부인 나찌 점령기를 다루는 방식에 비하면 “우리” 가 일제 강점기를 다루는 시각은 65년이 지난 현시점에서도 아직도 획일적이고 천박합니다. “우리” 는 더 반성하고, 더 공부하고, 더 이념의 강박에서 자유로와져야 합니다.

 

학자들도 먹물들도 영화 만드는 분들도 다 통털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특히 [하늘은 그대의 것이니]. 클라이맥스에 가면 감동에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휴먼드라마인데 이게 무엇에 관한 영화게요? 유럽에서 비행 기록을 세운 여자 비행사에 관한 영화입니다. 네. 여자 비행사에 관한 영화를, 그것도 나찌 점령기가 한참 지난 후대에 만든 것도 아니고, 나찌가 점령하고 있던 시절에 버젓이 만들어서, 그것도 수많은 비시정권하의 프랑스인들이 보고 감동을 받았었답니다. 그런데 우리는 [청연] 을...

 

아, 말을 말죠. 저 자신도 일제강점기를 연구한다고 개폼을 재고 사는 먹물인 이상, 나 자신의 시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고요. 지금은 그저 이런 훌륭한 자료를 구비해준 크라이테리언에게 감사하다고 머리를 꼬나박고 조아릴 따름입니다.

 

2012년 최고의 디븨디는 [장 그레미용의 나찌 점령기 프랑스영화 콜렉션] 입니다. 3년 연속 크라이테리언 이클립스 시리즈의 승리입니다. 블루레이의 수석자리는 내주어도 디븨디의 챔피언자리는 내주지 않는군요.

 

2012년에도 그 전해와 마찬가지로 구입한 블루레이중에서 열한편만 고르기가 황당하게 어려웠습니다. 내년에는 더 어려울 거라는 것을 용이하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바야흐로 블루레이로도 온갖 레벨에서 “듣보굉”(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굉장한 영화) 들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이니까요. 워너 아카이브까지도 블루레이를 낸다는데 말씀이죠. [집시] 나 [죽음의 함정] 같은 비교적 잘 알려진 작품들로 시작하긴 했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기대가 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디븨디 밖에 없을 때 사 모으기도 이리 힘들었는데 블루레이, 디븨디 따불로 대치해야 한다면 우짜란 말이여?

 

11. 좀비 역병 (疫病) Plague of the Zombies (1966) -- Hammer/Studio Canal

 

 

저도 참 엥간히 해머영화를 좋아하는가 봅니다. 새로 뭔가가 출시될때마다 족족 연말리스트에 집어넣고 사는데, 유감스럽게도 판본 중에서 화질이 정말 좋은 것이 소수라서 많이 고르고 싶어도 내키지를 않습니다.

 

[좀비 역병] 은 후기 해머작 중에서도 이색적인 한편입니다. 같은 존 길링 감독의 [파충류] 와 마찬가지로 영국의 제국주의적인 행태에 대한 은유가 슬그머니 고개를 디밀고 있지만, 이 한편의 유명세는 눈이 계란 흰자같이 하얗게 변하고 점을 찍은 것 같은 마이크로 사이즈 눈동자를 달고 다니는, 마치 종교적 수련을 겪다가 정신이 와해된 중세기의 수도승을 연상시키는 좀비들의 묘사와 그들과 연계된 일련의 환상적인 시퀜스에 있습니다. (특히 주인공이 기절한 다음에 꾸는 악몽!)

 

과거의 칙칙하고 거칠은 색감의 디븨디를 연상하고 블루 레이를 보면 그 칼라의-- 좀비들의 살결의 색깔이 VHS 시절 익숙했던 흙빛이 아니라 전혀 리얼하지 않은 청회색으로 보입니다. 이게 더 무서워요!-- 명료함과 괴이함에 놀라게 되지요. [파충류] 는 이미 디븨디로 가지고 있으면서 닳도록 봤는데 블루 레이로도 결국 사야 할 건가봐요 아아...

 

10. 추적당하는 자 Pursued (1947) -- Olive Films

 

 

[태어날때부터 나쁜 그녀] 가 필름 느와르렛떼루가 붙여져 있지만 그게 아닌 (걸로 저한테는 보이는) 것처럼 [추적당하는 자] 는 말타고 따그닥 따그닥 달리는 서부극처럼 생겼지만 그 내실은 여지없는 필름 느와르 입니다.

 

집요하게 캐릭터들의 내면을 파헤치고 그 안의 어두컴컴한 내용을 끄집어내며, 그 어두움이 화면 전체를 뒤덮으면서, 땡볕이 내리쬐고 녹색 수풀이 우거졌어야 할 서부의 풍경까지도 음울한 심리적 갈등의 그늘에 가려집니다. 라울 월쉬의 타이트한 감독밑에서 “느와르 조명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설파하다시피 하는 제임스 웡 호우 촬영감독의 솜씨를 음미할 수 있습니다.

 

[추적당하는 자] 의 남녀 주인공인 로버트 미첨과 테레사 라이트도 좋지만, 이 한편의 강렬한 포스는 역시 한 세대 전의 원한을 젊은 세대까지 질질 끌고 내려오면서, 미첨이 연기하는 웨이드를 서서히 파멸시키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것처럼 행동하는 딘 재거의 무서운 악역에서 나옵니다. 자기만 억울한 줄 아는 자, 용서할 줄 모르는자의 사악함이 뼈속 깊이 사무치는 무시무시한 (그렇기 때문에 뜬금없을 수도 있는 엔딩이 겨우 관객들의 숨통을 틀어준다는 측면에서 필요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한편이고, 그런 면에서 이 “그림자가 드리운 느와르적 서부극” 의 계보는 끊어짐이 없이 동림옹의 [용서받지 못할 자] 까지 연속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마카로니 웨스턴, 결국 니네들이 한게 뭐냐.

 

9. 늪지의 물 Swamp Water (1941) -- Twilight Time

 

 

위대한 프랑스 감독 장 르누아르가 헐리웃으로 피신한 다음에 만든 작품입니다. 블루 레이 카버를 보면 무슨 고전 호러 영화인 것 처럼 착각하기 쉬운데 전혀 아닙니다 (트와일라이트 타임은 카버 디자인에 쬐금만 공을 들여 주셨으면 ;;;). 프랑스와는 아무런 연계점이 없는 미국 남부의 늪지대에서 빈한한 삶을 사는 “깡촌 사람들” 에 관한 얘기입니다.

 

거기다 존 휴스턴 감독의 아버지 월터 휴스턴, 월터 브레난, 워드 본드 등 존 포드 영화로 익숙한 캐스트가 대거 출연하기 때문에 모두에 조금만 보면 존 포드 영화인가? 라는 착각을 좀 할 수도 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조감하면 르누와르의 확연히 차별되는 작풍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인공인 남부 청년역을 맡은 데나 앤드류스 (필름 느와르에서는 주로 차갑고 약간 신경질적인 주인공으로 많이 나오셨던 분) 의 연기가 여느 고전 헐리웃 남자 주인공 같지 않고 감정적으로 풍요하면서도 절실합니다. 지독한 남부 사투리를 구사하는 연기자들의 대사를 자막 없이 알아들으려면 좀 고생해야 된다는 것이 난점입니다. 트와일라이트 타임의 여러분요, 독립된 스코어 트랙을 넣어주시는 것은 감사한데, 자막도 좀 넣어주심 안되겠습니껴?

 

8. 옐로우 서브머린 Yellow Submarine (1968) -- Capitol Records

 

 

비틀즈의 음악 싫어하시는 분들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골드핑거] 에 나오는 제임스 본드처럼 “귀마개를 하고 들어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음악” 이라고까지 하실 분이 현재시각 대한민국에 계실런지는 의심스럽지만. 비틀즈 음악 싫어하시는 분들, 그리고 아니메이션이라면 [르로우니 켄신] 같은 거 아니면 다 골아떨어지시는 분들, 그 분들을 제외하면 모두 “노란 잠수함” 을 타고 페퍼랜드로 여행을 떠납시다!

 

위에서 [마법사] 는 60년대 풍 싸이케델릭 헬렐레스러운 영화가 아니라고 다짐을 드렸는데 거꾸로 [옐로우 서브머린] 은 순도 백 이십퍼센트 60년대풍 헬렐레스러운 영화의 최고봉 중 하납니다. 팝 아트와 “모드” 패션 그리고 시대를 황망히 앞서간 뮤직 비데오 컨셉이 아무런 사상적 통일성이나 메시지 없이 한데 어우러져서 방종스럽게 댄스를 추는 멋들어진 한편이지요.

 

이 영화도 [릴리] 와 마찬가지로 세파에 시달리고 다른 인간들이 꼴보기 싫을 때 틀면 영혼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귀중한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존 레논이 부르는 [다이아몬드를 달고 하늘에 떠있는 앨리스] 를 그의 고음의 목청과 “윤곽이 색깔을 제어하지 못하는” 아니메이션의 비주얼과 함께 보는 것은 과장 조금만 보태서 초월적인 체험이었습니다.

 

아마도 극장에서는 다시금 이렇게 상영될 일이 없을 것 같은, 프레임 하나 하나를 깨끗하게 닦은 복원판 블루 레이입니다. 미치게 예뻐요. 

 

 7. 진홍색의 거리 Scarlet Street (1945) -- Kino Lorber

 

 

프리츠 랑 감독의 희석됨이 없는 순도높은 인간관이랄까, 필름 느와르의 철학적 정수를 맛보게 해주는 걸작입니다. 에드워드 G. 로빈슨연기자가 아마도 [푸른 천사] 에 나오는 에밀 야닝스가 연기한 대학교수까지 그 계보가 닿아있는 “나쁜 여자에 빠져서 패가망신하는” 중년 남자 캐릭터를 그 답답함, 악랄함 그리고 불쌍함을 조금도 물러섬이 없이 눈을 돌리고 싶을 정도의 적나라함과 더불어 보여주십니다.

 

키노 로버는 블루 레이 시장으로 옮아오고 나서 갑자기 흥행성 따지지 않고 고전 걸작들을 비까번쩍한 화질로 내놓고 있는데 앞으로도 제발 계속해 주시길.

 

6. 로즈마리의 아기 Rosemary's Baby (1968) -- Criterion Collection

 

이왕이면 [차이나타운] 하고 [무서움을 모르는 흡혈귀킬러들] 도 내주시지, 라고 말하고 싶지만 아닙니다, 예, 출시해주신 것만 해도 감지덕지입니다. 물론이굽쇼.

 

[로즈마리의 아기] 에는 좁디좁은 현대식 아파트같은 공간에서 어떻게 초강력한 호러와 불안을 생성해 내는가라는 수많은 한국 호러 영화작가들이 부딛치는 난문에 대한 대답이 거의 다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크라이테리언의 서플을 보면 이 한편이 어떤 형태로 폴란스키의 유럽산 60년대 제 작품의 연장선상에 완벽하게 위치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고, 다행스럽게도 원작자 아이라 레빈에게도 말할 기회가 주어져 있네요. 전 여전히 원작의 엔딩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블루 레이는 화질도 화질이지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폴란드 출신 작곡가 크리스토퍼 코메다의 음악을 위시한 사운드가 아주 죽여줍니다. 치밀한 음향의 계산과 음악의 적절한 배치가 심리적인 호러의 확산에 얼마나 중요한지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어요. 얼마나 많은 영화제작자들이 이 부분에서 자기들의 호러/스릴러들을 말아먹는지.

 

5. 바다의 고요함 Le silence de la mer (1949) -- Masters of Cinema/Eureka

 

 

“레지스탕스” 문학과 영화를 논할때 반드시 거론되는 장 피에르 멜빌 감독의 데뷔작 [바다의 고요함] 은 레지스탕스의 영웅들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아니, [바다의 고요함] 의 주인공은 문화적으로 세련되었고, 프랑스어에 능통하며, 프랑스의 시와 문학을 깊이 사랑하고, 어떤 면에서는 영화에 나오는 그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지식인 독일군 장교입니다. 그는 프랑스인 노교수와 그 딸이 사는 가정집에서 민박을 하지만, 노교수와 딸은 철저하게 그의 존재를 무시하고, 모든 대화와 소통의 노력을 거부합니다. 독일군 장교의 유려한 대사는 다이알로그가 아닌 모놀로그로 끝나고, 그의 질문과 도발은 오로지 “바다의 고요함” 을 만나게 될 뿐입니다.

 

영화는 이들의 “정숙” 이야말로 대다수의 프랑스 시민들이 보여주었던 “수동적인 저항 (résistance passive) “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아니면 (실제로 일부 평론가들이 해석했듯이) 이러한 정숙은 그냥 세태를 따라가는 “순응” 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요? 실제로 레지스탕스 무장운동에 참여했고 유태계 프랑스인이었던 멜빌 감독은 결코 우리에게 그 답을 떠먹여주지 않습니다. 로베르 브레송의 걸작들이 그러하듯이 (멜빌은 브레송이 내 영화를 베꼈다라고 주장하셨던 모양입니다만 ^ ^), “액션” 을 일체 배제하고 오로지 정적으로 변화하는 화면을 응시하면서 그 진실을 캐내는 것은 관객들의 몫이지요.

 

아름답지만, 마음이 무거워지는 한편입니다. 외적으로 드러난 행위보다도 내면의 진실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괴로운 일인가를 담담히 보여줍니다. 그리고 결코 독일군 (심지어는 나찌스 정부) 에 대한 민족주의적 증오가 불타오르는 일도 없습니다.

 

전 끈기있게 기다리려고 합니다. 언젠가 대한민국의 영화인이 [바다의 고요함] 과 같은 영화를 일제강점기에 대해 만들게 되기를.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4. 황혼의 마지막 번쩍임 Twilight's Last Gleaming (1977) -- Olive Films

 

 

“황혼의 마지막 번쩍임” 은 미국의 애국가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로버트 올드리치 감독이 독일에 가서 제작한 반미영화입니다.

 

예 미국 감독이 만든 반미영화에요. 제가 얘기하지 않았나요? 세상에서 제일 독한 반미영화들은 다 미국인들이 만든 (이미 만들었) 다고?

 

헐리웃의 파워풀한 “진보” 스타였던 버트 랑카스터를 위시해서 2012년에 돌아가신 찰스 더닝이 연기하는 대통령, 리처드 위드마크가 연기하는 매파 장군 등 압도적인 캐스팅을 과시하는 정치 스릴러입니다. 연기력의 향연은 말할 필요도 없고, 손에 땀을 쥐게 한다는 것은 이걸 두고 하는 얘기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미사일 사일로를 두고 벌어지는 공방, 그리고 분할 스크린의 극도로 효율적이면서도 아방가르드한 (넷으로 쪼개진 화면 안에서 또 각자 등장인물들이 TV 스크린을 응시한다는 등의 중층적 효과 등) 사용 등 올드리치 감독의 비범한 마력 (horsepower) 과 재능을 충분히 맛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영화인 여러분들, 대한민국과 북조선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을 (아니면 그 이후에 나타날 “통일코리아” 를) 이런 수준으로 알리바이 안대고 집요하게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재미” 가 과잉으로 넘쳐나고, 관객들의 머리채를 붙잡고 끌고 다니는 박력을 지닌 스릴러를 만들 자신이 있으십니까?  

 

 

3. 몸과 영혼 Body and Soul (1947) -- Olive Films

 

 

올리브 필름스에서 역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좌파 연기자 존 가필드가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주인공으로 나오는 40년대 필름 느와르/반자본주의적 사회파 드라마를 연달아 내놓았고 (“필름 그리 film gris”-- 회색영화-- 라는 명칭으로 규정되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는 [악의 세력 Force of Evil] 이 가장 유명한 것 같습니다만 (이 작품의 블루레이에는 마틴 스코세시 감독의, 이 영화를 안보았다면 나는 [비열한 거리] 를 만들지 못했을 거라는 경배를 포함하는 소개영상이 실려있습니다), 저한테는 좀 더 통속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권투영화 [몸과 영혼] 이 압도적으로 와 닿았습니다.

 

그리고 물론, 스코세시 감독이 [몸과 영혼] 을 보지 않았더라면 로버트 드 니로가 체중을 늘였다 줄였다 했던 모 영화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것 이라고 확신합니다. ^ ^

 

제임스 웡 호우 촬영감독이 롤러 스케이트를 타고 핸드헬드 카메라를 짊어지고 찍었다는 권투 장면들의 묘사도 기똥차지만, 찰지고 섬뜩하리만치 매서운 대사와 하드보일드한 연기를 통해서 캐릭터들을 부패한 금권이 지배하는 세상의 좌표에 자리매김하는 에이브러험 폴런스키의 각본과 로버트 로젠의 감독이 너무나 훌륭합니다. 혹자는 이 영화의 엔딩이 “비현실적” 이다, 너무 상투적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건 이 엔딩을 끝맺는 대사의 진정한 힘을 잘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의견 아닐까요?

 

영화적으로는 [성난 황소] 가 더 훌륭한 작품이겠지만 저보고 좋아하는 권투영화, 아니 스포츠영화를 고르라고 한다면 앞으로는 [몸과 영혼] 이 (올드리치의 여자레슬링영화 [올 더 마블스] 와 더불어) 우선순위에 오를 것 같습니다.

 

2. 서부전선 이상없음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1930) -- Universal

 

 

애국. 애족. 조국을 위해서 죽는 것은 영광이다!

 

퍼레이드. 열광하는 군중들. 꿈꾸는 소년들.

 

기운차게 울려퍼지는 행진곡.

 

끝이 뾰족하게 튀어나온 철모와 어색한 군복.

 

행진. 진흙탕.

 

칠흙같은 어두움.

 

고막을 찢는 것 같은 포탄이 날아오는 휘파람 소리.

 

신경을 갈갈이 찢어놓는 휘파람 소리.

 

삐이이~~~ 익.

 

삐이이~~~ 익. 쿵.

 

하늘로 솟아올랐다가 흩어지는 흙과 먼지. 쿵.

 

총검을 버리고 철조망에 매달리는 병사. 쿵.

 

철조망에 외롭게 달려있는 손목.

 

학교에서 “총검을 배때기가 아니고 가슴에 찍으면 갈비뼈에 걸려서 안 빠질 수도 있다는 거” 는 왜 안가르쳐 주었냐고 푸념하는 소년병.

 

참호속에서 피로 물든 부위를 나이프로 잘라내고 게걸스럽게 베어무는 빵조각.

 

마개를 딸 겨를도 없이 깨뜨린 병에서 목으로 흘러들어가는 술.

 

다리를 절단하고 망연자실하게 누워있는 친구의 침대 밑의 깨끗한 군화.

 

“너는 어차피 안 쓸거잖아? 나한테 주면 안되냐?” 라고 다가서는 다른 “친구.”

 

반가움의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 여동생. “오빠가 뺏어간거잖아 기억나?” 라고 가리키는 표본상자 속의 호랑나비.

 

그러나 즐거움은 없다. 기쁨도 없다. 있는것은 오로지 죽음의 그림자.

 

내가 죽인 프랑스 병사의 주검. 그가 띄고 있는 이유를 알 수없는 미소.

 

죽음.

 

죽음.

 

“이 영화는 모든 국가의 모든 국민이 반드시 한번씩은 봐야 하는 그런 작품이다”-- 서플의 영화평 중에서.

 

스탠리 큐브릭, 마틴 스코세시, 마이클 치미노, 프란시스 코폴라, 이런 분들의 작품론을 벌이기 전에 [서부전선 이상없음] 을 반드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유니버설의 블루 레이는 이 83년 묵은 영화를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쳥결하고 명료한 복원판 화질로 보여줄 뿐 아니라, 대사와 음향이 없는 무성영화 버젼 전편을 포함한 서플들로 꽉 차 있습니다.

 

제가 만든 이 리스트 중에서 디븨디나 블루레이 중 단 한편만 구입하실 생각이시라면 [서부전선 이상없음] 을 필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1.  쟈니 기타 Johnny Guitar (1954) -- Olive Films 

 

 

회원리뷰 꼭 쓸테니, 자세한 설명과 해석은 다음날을 기약하고, 지금은 한마디만.

 

[쟈니 기타] 같은 영화는 세상 어디에도 없고,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것이며, 한마디로 기가 막힌 활동사진입니다.

 

그러나 오해 마세요. [쟈니 기타] 는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는 그런 영화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위대한 영화,” “뛰어난 예술작품” 의 기준을 근저부터 고꾸라뜨리는 그런 한편이에요.

 

여러분이 무한도전의 “감동적” 인 에피소드나 타카라즈카 극단이 번안한 [베르사이유의 장미] 뮤지컬을 한 극에 놓고, F. W. 무르나우나 존 포드의 고전 명작을 다른 극에 놓고, 1954년에 제작된 이 서부극 한편을 그 사이 어딘가에 떨어뜨려 보면, [쟈니 기타] 가 양 극을 다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또는 완전히 미쳐버린-- 존재라는 것을 보게 되실 겁니다.

 

“그런 말도 안되는 게 어디있느냐” 라고 하신다면 제가 무어라고 답변을 하겠어요. 정말로 그렇다는 말씀밖에는...

 

2012년 최고의 블루레이는 [쟈니 기타 ]입니다.

 

2012년의 영화인: 니콜라스 레이 감독입니다. 이것도 필름 느와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보면 빠작하니 가슴이 아려서 쓰러질 것 같은 청춘영화 (!) 인 [그들은 밤에 살았다 They Lived by Night] 도 포함해서, 레이 감독의 영화 중 “대충 이런 영화 아닐까” 라고 예상해서 본 작품중 하나도 그 예상이 들어맞은 한편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장 뤽 고다르가 “니콜라스 레이가 바로 영화다!” 라고 했다는데, [쟈니 기타] 를 본 저에게는 이제 과찬이나 은유로 들리지 않네요.

 

차점은 [몸과 영혼] 과 [추적당하는 자] 의 촬영감독인 중국계 미국인 영상예술가 제임스 웡 호우 선생님입니다.

 

2012년의 디븨디/블루 레이 레벨: 올리브 필름스 입니다. 마침내 크라이테리언을 꺾었군요. 오리지널 [육체약탈자의 침략], [스페이스 칠드런], [뉴욕의 거상] 등 고전 SF 출시작으로 봐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카탈로그를 내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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