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설국열차 Snowpiercer (봉준호 감독)

2013.07.25 04:07

Q 조회 수:10284

설국열차 Snowpiercer.


USA-France-South Korea, 2013.     


A Moho Films/Opus Pictures/Stillking Films/CJ Entertainment Production. 2 hour 5 minutes. Aspect ratio 1.85:1.


Director: Bong Joon-Ho. Screenplay: Bong Joon-Ho, Kelly Masterson. Cinematography: Hong Kyung-Pyo. Producers: Park Chan-Wook, Steve Nam, Jeong Tae-Sung. Music: Marco Beltrami. Production Design: Ondrej Nekvasil. Visual Effects: Scanline, Method Studios. Editing: Steve Choe.


CAST: Chris Evans (Curtis), Tilda Swinton (Mason), Ed Harris (Wilford), John Hurt (Gilliam), Octavia Spencer (Tanya), Song Kang-ho (Namgung Minsu), Jamie Bell (Edgar), Ko Ah-sung (Yona), Vlad Ivanov (Franco the Elder), Alison Pill (Teacher), Tomas Lemarquis (The egg dispenser), Luke Pasqualino (Grey), Adnan Haskovic (Franco the You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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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1930년대의 만주—당연한 얘기지만 만주라는 명칭은 중국에서는 안씁니다—는 일본 제국이 지배하던 영토였다. 당시, 만주를 통해 시베리아까지 연결되던 아시아 특급이라는 기차편이 있었다. 현재 남아있는 자료들을 살펴보면 이 특급은 급진적인 근대성의 시대였던 1930년대를 대표하고도 남음이 있는 SF 적인 (증기기관차이니까 이야말로 ‘스팀펑크’ 가 아닐 수 없겠다)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30년대 아시아 특급의 내부는 21세기의 최고급 호텔이 부럽지 않은 화려함과 호사스러움을 자랑했고, 파노라마 관람실에서는 당시의 기술로는 정말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던 구부러뜨린 유리를 일부러 써서 승객들이 입체적인 경관을 바라볼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심지어는 일부 기차편에서는 유창한 일본어를 사용하는 금발머리의 러시아 여성들이 웨이터로 일하였다고 한다. 물론 이 아시아 특급은 일본 제국의 패망과 더불어 역사의 뒤켠으로 사라졌고, 기차 오타쿠들의 꿈속에서나 예전의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면서 눈 덮인 벌판을 질주할 수 있다.


[설국열차] 를 보면서 불현듯 이 아시아 특급 생각이 났다. 일본 제국이 전쟁에 진 것을 아직도 모르는, 또는 일부러 망각한 각 인종과 민족 출신의 엘리트 승객들이 시베리아 벌판을 몇 십년동안 같은 기차간에서 헤메고 다닌다면? 물론 이 경우는 유령열차가 될 터이니 영화의 장르는 달라지겠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설국열차] 는 이 한편을 보고 나서 [오리엔트 특급살인사건] 이나 [Taking of Pelham 1, 2, 3] 같은 기차가 연루된 작품이나, 또는 반대로 [와치맨] 같은 그래필 노블을 원작으로 한 다른 헐리웃 영화들이 연상되는, 그런 종류의 영화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점은 아마도 미리 보신 여러분들의 대다수가 호오에 상관없이 인정하실 것이다.


물론 벤자민 르그랑 이하 프랑스 원작자들의 만화에서 기본 설정을 가져 오긴 했지만, 봉준호 감독은 근대성의 가장 뚜렷하고도 보편적인 표상 중 하나인  “철도” 의 로맨티시즘에 기댄 작품을 만드는 대신, 일부러 김보영 작가와 같은 SF 작가들의 감수를 받으면서까지, 현실 우리 세계와의 연계를 중시한 한편을 만들었다. 난 이 작품을 보는 동안, 영어 관계 작업을 하느라고 읽었던 초기 단계 각본의 내용과 대사가 거의 다 영화에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에 새삼 경악하면서도 (한국 영화판에서도 이런 일은 거의 없지 않은가?), 그와는 별개로 이 작품이 [스타워즈] 나 심지어는 [스타 트렉] 과도 다른, 과거에 내가 자라면서 소설로 주로 읽던 고전SF 의 풍모를 이렇게 철저히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 저으기 놀라왔다.


좀 더 느긋하게 퍼질러진채 한국 관객들의 지역적 감성을 자극하는 [괴물] 과는 달리, [설국열차] 는 바짝 긴장되고 건조한 한편이다. [괴물] 이 독가오리라면 [설국열차] 는 톱상어다. 물론, 봉준호감독의 시계 (視界) 가 제한되고 운신의 폭이 좁은 공간에서 (원래 각본상의 설정보다 훨씬 더 좁아보인다) 빠른 페이스로 서사를 펼쳐나가면서 페이스의 급완을 조절하는 솜씨는 이미 세계영화의 누구와 비교해도 최고급 레벨에 도달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캐스팅과 프로덕션 디자인, 사운드 디자인과 같은 모든 측면에서 “봉테일” 의 안목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연기자들도 자신들이 이때까지 맡았던 이미지들의 단순한 연장선상이 아닌, 다소 전형적이지만 칼러풀한 캐릭터들을 멋지게 요리해준다. 틸다 스윈튼은 지옥에서 기어나온 기숙학교 사감 같은 괴이한 용모와 “질알맞다” 라는 표현을 쓰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밀려올라오는 괴기스러운 영국의 지방 액센트를 종횡무진 구사하고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코믹한 연기다. 스윈튼의 메이슨과 송강호의 남궁민수가 이 영화에서 “몸으로 부딪히는” 남성 주역들의 연기를 반작용을 통해 살려주는 코믹 릴리프이자 사운딩 보드의 역할을 해주고 있는데, 둘 다 각자의 역할과 이런 찰떡궁합이 없다. 송강호연기자는 원래 송강호연기자니 그렇다 치고, 앞으로 모든 봉준호 영화에서는 깜짝출연이던 뭐던 어떤 역할이라도 좋으니 틸다 스윈튼이 반드시 출연해 주었으면 좋겠다.


존 허트와 에드 해리스는 각각 “빈민층” 의 간디를 연상시키는 정신적 리더, 그리고 설국열차의 실질적인 두뇌이자 군주 역할을 맡아서 노련한 연기를 피로해주고 있고, 웬만한 영화 같았으면 이 카리스마 넘치는 대배우들 사이에 끼어서 아예 존재감이 없어졌을 수도 있었을 고아성도 매력이 넘친다. 봉감독이 연기자들이 각자 강한 인상을 남겨서 전체상을 강하게 만드는데 공헌하도록 배려하는 기운이 피부로 느껴지는 영화랄까. 심지어는 각본상에서는 그냥 “시다로 일하는 근육맨” 정도로 묘사된 프랑코 부자 (父子) [수정: 공식설정에 의하면 형제] 도 영화안에서는 그 불사의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다. “사우나실” 칸에서 벌어지는 아버지 프랑코와 커티스, 그레이 그리고 남궁민수의 혈투 시퀜스는 쓸데없이 과격한 무술적 동작등에 의존하지 않고도 굉장한 박력과 서스펜스를 유발하는데, 이 힘의 대부분은 캐릭터들의 존재감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각본을 읽으면서 물리적으로 저게 정말 가능할까 라는 의구심이 들었던 “구부러진 선로를 도는 기차에서 유리창을 뚫고 서로 저격하기” 시퀜스도 막상 영화를 보면 끝내준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사랑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많은 관객들이 아마도 [괴물] 을 선호할 것이다. 봉준호표의 기묘하게 엇박자의 유머감각이 적다는 점은 사실이고 (그러나 아예 없다는 주장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삶은 계란’ 시퀜스같은 걸 좀 보세요. 저렇게 허리 힘이 빠지는 웃기는 아이디어를 날카로운 풍자정신과 비명 소리가 악 나오는 강렬한 폭력과 조화롭게 버무려서 내놓을 수 있는 셰프가 그렇게 동서양에 많은 줄 아나?), 어쩌면 기차간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치고받고 찍고 자르는 액션을 극명하게 묘사하기 위한 봉감독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슬로우 모션을 약간 과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슬로우 모션을 남용한 과거의 선례들이 현대의 관객들의 뇌리에 각인이 되어 있는지라, 의도치 않게 손해를 볼 것 같다는 걱정이 앞선다.


기타 프로덕션 퀄리티는 아주 좋다. 물론 [퍼시픽 림] 이나 [맨 오브 스틸] 수준의 물량공세를 예상해서는 안되겠지만, CGI 나 프로덕션 디자인이 무슨 싼티가 나는 것도 당연히 아니다. 심지어는 나는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던 마르코 벨트라미의 음악도 좋았다. 끊임없이 달리는 기차가 내는 온갖 소음과 충격음을 표현하기 위한 사운드 디자인팀의 수고가 대단했을 것 같은데, 아카데미상 후보 정도로 올라갈 자격이 있다고 본다.


사상적으로도 [설국열차] 는 일반적인 “한국영화” 나 “헐리웃영화” 의 정서나 사고방식보다는 좀 더 보편적인 계급관계와 권력관계에 초점을 맞춘— 프레드릭 폴이나 토머스 디쉬같은 작가들의 한창 때 소설들을 뇌리에 떠오르게 하는-- 고전 SF적인 위치에 서있는데, 유럽과 북미 관객들이 이 한편에서 한국 관객들이 의아해 할지도 모르는 형태의 함의를 많이 읽어내릴 것이라고 난 예상한다. 한 예로 서양관객들은 [설국열차]를 유태인 학살, 그리고 그 이후 서구 사회가 유태인 학살이 던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양극화되버린 역사에 대한 은유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여느 한국 영화들의 경우와는 달리, 그들의 그러한 해석은 “한국 사정을 잘 몰라서” 내린 “과잉” 해석이 전혀 아니고, [설국열차] 가 제기하는 보편적인 인류의 문제에 대한 지역화된 이해의 한 패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2031년이면 인류문명이 멸망하기에는 너무 가까운 미래 아니냐, 결국 이 열차의 동력원은 뭐였냐, 등등 이 한편의 과학적 설정을 가지고 시비를 걸자면 얼마든지 걸 수 있지만, 그런 시비는 하인라인이나 필립 K. 딕에게도, 테드 창에게도, 어떤 과학자출신의 휴고상 노벨상 다 받은 위대한 에스에프 작가님의 글에다가도 다 걸 수 있다. 그런 시비가 중요한 게 아니라, “명박이가 싫고 일본놈들 미쿡놈들이 싫어요! 근데 축구하고 야구하고 프라이드 치킨은 죽어도 좋아요!” 하는 수준의 “한국적 사상” 이 아닌, 진짜로 전인류의 (암울한) 미래를 상상해 볼 수 있는 그런 영화가 한국인 감독과 스탭의 머리와 스킬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고로, 봉준호감독의 [설국열차] 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영화팬으로서 나에게 큰 기쁨이지만, “한국인” SF팬으로서의 기쁨에는 미치지 못한다. [마더] 보다 훌륭한 영화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근래 최고의 영화라고도 여기지 않지만, 금년에 내가 본 여러 영화들 중에서 벅찬 즐거움을 나에게 주었다는 점에서는 탑 3에 거뜬히 드는 한편이다.


사족: 예고편을 보고 우려를 표명하는 이가 내 주위에도 있었는데, [설국열차] 는 예고편에 나온 비주얼로 영화의 거의 모든 전개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그런 성격의 한편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전편을 보면서 한번도 “비주얼이 왜 이리 칙칙해?” 라는 생각이 든 적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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