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년의 최고의 블루레이 리스트 스물한편을 올린다. 2020년은 모두들 무사히 지내셨겠죠? 내가 태어난 이후로 이렇게 세계 종말 혹은 인류 문명 붕괴에 근접했었던 한 해는 기억에 없는데 (나는 큐바 미사일 위기때는 아직 세상에 없었으니까 해당이 안된다), 내 어린 시절과 청년기에는 줄곶 핵전쟁과 칼 사강이 말하는 이른바 “핵겨울” 의 공포에 떨면서 결국은 그것으로 인류는 멸망할것이라는 미래의 구상이 대중문화를 지배하고 있었다 (원자폭탄을 피폭한 경험이 있는 일본의 대중문화가 한국에서 헤게모니를 행사하던 시절에서 자랐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느낌이 강했을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자면 독감 바이러스 비슷한 역병으로 인하여 인류 문명이 괴멸하는 그런 종말론적인 구상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예는 스티븐 킹의 [더 스탠드] 일것 같은데, 그 외에도 꽤 코로나사태의 실상에 살 떨리고 기분 나쁘게 근접했던 SF-판타지-호러 작품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사태 발발 이후에 새삼스럽게 그 선견지명을 인정받은 스티브 소더버그의 [컨테이전 Contagion] (2011) 에 등장했던 여러 “예언적인” 퀄리티들도 사실 소더버그 정도의 명석한 영화인이라면 SARS 사태와 2009년의 독감 판데믹등의 근접한 역사적 사례에 바탕을 두고 충분히 예측 가능했던 것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물론, 말이 쉽지 이런 식으로 판데믹에 의해 거만하게 세계에 군림했던 선진국 경제들이 맥도 못추고 와해되는 혼란상, 그리고 각 분야의 프로페셔날들이 시간에 쫒기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모습들을 그렇게 정밀하고 신빙성있게 그려낸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악수” 라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행위의 중요함을 새삼스럽게 되새기면서 끝나는 엔딩을 한번 봐보시라. 이게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묘사한 도큐멘타리가 아니면 뭐겠나?).


아무튼, 나는 별 탈없이 2020년을 지냈고 천만다행으로 가족이나 지인들을 코로나바이러스에 잃지도 않았다. 그러나 많은 예술인들과 영화인들이 코로나로 큰 타격을 입었고, 또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떠났다. 중소 규모의 사업일수록 큰 타격을 받게 되고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된 지난해였지만, 광학 디스크 레벨들은 굴하지 않고 계속 명작-수작-컬트 괴작들을 쏟아내었다. 아니, 어쩌면 코로나사태때문에 집에 붙박히게 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동안 모아놓기만 하도 포장도 제대로 뜯지 못했던 블루 레이들을 감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는지 모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역시 건강 문제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가을부터 시작된 온라인 수업이 평소에 세시간 넘게 차를 몰고 출근해서 가르치는 수업보다도 훨씬 더 스트레스가 쌓이고 시간이 빼앗기는 경험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결국 1월초에 정산을 해보니, 블루 레이 구입의 양은 2019년과 거의 같은 숫자에 도달했고, 덧셈 뺄셈 하고 나서 보니 결국 예년과 별 차이가 없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어떤 딱히 지적하고 싶은 특징이라도 있었나? 2020년은 (이것이 코로나 때문인지 그 상관관계는 확실치 않지만) 박스세트가 전례없는 호황을 누린 한해였는데,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어마무시한 규모의 컬트 작품 박스세트들이 특히 많이 등장했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돈도 돈이지만 먹고 살기 바쁘느라고 그 중 상당수를 구입하는데 실패했다. 가장 아쉬운 물품은 애로우에서 출시된 쇼오와-헤이세이 가메라 블루 레이 박스세트였는데, 그야말로 출시되자마자 번개불에 콩 볶아먹듯이 동이 났다. Mondo Digital 의 나타니엘 톰슨 평론가가 아무래도 나처럼 가메라 전작들을 여러 판본으로 소유하고 있을 것이 확실함에도 굳이 2020년 최고의 박스세트로 선정했을 정도이니까, 영화팬이라기보다는 콜렉터로서의 심금을 가장 울려주는 출시가 아니었는가 싶다. 그리고 32편의 영화를 찡겨넣은 세버린의 알 아담슨 “걸작” 컬렉션도 돈이 아까와서가 아니라 어물어물 어… 이거 사야 되는건가 하고 주저하는 사이에 금방 재고가 바닥을 쳐버렸다. 사실 알 아담슨같은 “작가” 의 영화는 이렇게 뭉텅 사서 쟁여놓고 있어야 돈 생각이라도 나서 보게 되기라도 하지, 새삼스럽게 낱개로 구입하기는 또 그런 물건들이니… 이 컬렉션을 놓치고 나면 앞으로 또 아담슨의 영화들을 내가 죽기 전에 한 영화작가의 작품들을 진지하게 분석하는 태도를 지니고 정좌해서 관람할 기회가 오기는 할 지 모르겠다. 


두번째 특징이라면 이것도 내 안일한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4K UHD 블루 레이 작품이 다섯개나 리스트에 진출했다는 것이겠다. 지난해에 65인치 LG 4K Ultra HD OLED TV 를 구입했다는 보고는 했었는데, 띄엄띄엄 그것도 가장 최근의 히트작 중심으로 출시되는 4K UHD 작품들을 가지고 어느 세월에 고전영화 컬렉션이 끌어모아지겠는가 라고 생각했던 내가 멍청했다. 무엇보다도 같은 “4K 스캔으로 복원” 된 한편이라 할지라도 블루 레이와 4K UHD 의 차이는 단순한 해상도의 차이를 넘어서서, 후자의 경우 정말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무엇이랄까 “깊이” 와 “울림” 이 있는 체험을 선사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단순히 내 심리적인 착각인지, 시각과 청각 효과에 정말 의미있는 차이가 있는 것인지 (물리적으로 검사하면야 당연히 차이가 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영화별로 케바케인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단순히 해상도가 몇 배 라는 데이타만 가지고서 “엄청 화질 차이가 나더라” 라는 단순무식한 결론으로 치닫는 것은 금물이다) 잘 모르겠지만, 어쨌던 이러한 추세가 내년까지 계속된다면 4K UHD 블루 레이 출시작들이 연말/내년초 리스트의 반수를 육박하는 데까지 세력을 과시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어렵지않게 상상이 가능하다. 최소한 리스트에 포함된 [조스], [현기증] 이나 리스트에 올라가지는 못했지만 [비틀주스] 같은 고전 명작들의 경우, 4K UHD 를 보고 난 이후에 디븨디 수준의 화질 및 오디오 수준에 만족하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 명백하다. 


매년 다시금 되풀이하는 선정 기준: "최고" 라는 표현은 영어에서 말하는 My Favorite 의 번역으로 받아들여주셨으면 감사하겠다. 영화사적, 미적, 예술적 가치, 유명세, 심지어는 나의 개인적인 영화적 가치의 평가의 높고 낮음과도 관계없이, 나에게 "놀람" 과 "발견 (또는 재발견)"의 경험, 다시 말하면 충격과 경외감을 안겨준 타이틀들이 우선적으로 선정되었다. 이 리스트를 처음으로 접근하시는 독자분들께 당부드립니다만 이 리스트는 “걸작” “명작” “위대한 영화”를 골라놓은 명부가 전혀 아닙니다. 그런 것을 기대하시고 이 리스트를 여러분을 겨낭한 추천작 리스트로 받아들이시면 많은 경우에 있어서 대실망은 필지일 것이며, 여기에 선정된 영화의 일부는 "영화사에 남는 명작" 은커녕 일반 평론가나 관객들에게 "좋은 영화" 취급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기를 부탁드려요.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블루 레이와 4K UHD 블루 레이의 구입양은 예년에 비해서나 2019년에 비해서 전혀 줄어들지 않았고, 따라서 선정도 인구에 회자되는 “1위감” 박스세트를 여러개 놓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너무나 힘들었다. 25편으로 늘이는 방안도 여전히 검토했지만 그랬다가는 아마도 리스트의 작성이 2월달로 넘어가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한지라, 이를 악물고 21편으로 타결지었다. 내년의 경우는 한때 디븨디와 블루 레이 사이에서 그런 고민을 했던 것처럼, 4K UHD 타이틀을 따로 카테고리를 만들어서 선정할 것인지 한차례 숙고를 거쳐야 할 것이 예상된다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중에서 의견이 있으시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레벨에 따라서는 아직 4K UHD 포맷을 의식적으로 택하지 않는— 대표적인 예가 크라이테리언— 곳도 있고, 이 포맷이 블루 레이를 대체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최소한 나는 더 적극적으로 사 모으기로 방침을 굳혔다). 지구가 멸망할 것같은 코로나사태에다가 마침내 파시즘의 공략을 받고 휘청거리는 미국의 민주주의의 참상을 목도하고 사는 이 상황에서도, 아직도 집에서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라고 자부하는 광학디스크의 출시가 이렇게 (최소한 유럽과 북미에서) 융성하고 있다는 것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일이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렇다. 


영화의 타이틀은 한국에서 뭐라고 불리던 개무시하고 대부분 원제의 직역을 기입했다. 만의 하나 검색에 불편을 끼쳐드려게 되었다면 죄송하네요. 


21. 레들 대령 Colonel Redl (1985, Region A- Kino Lorber Class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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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감독 사보 이슈트반 (헝가리에서는 동양처럼 성을 이름보다 먼저 표기한다)은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메피스토] (1981)로 명성을 떨쳤고, 그가 연이어 감독한 [레들 대령] (1985) 과 [하누센] (1988) 에 주연했던 오스트리아 연기자 클라우스 마리아 브란다우어가 범지구적인 스타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 기억에 새롭다. [메피스토] 와 [레들 대령] 둘 다 당시에 극장 공개때에는 놓치고 VHS 로 감상했던 타이틀인데, 특히 연극인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미국 영화 아카데미 등의) 동업자들에게 막강한 어필을 지닌 [메피스토] 보다도,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서 파멸하는, 일면 가해자 및 “역사의 죄인” 이기도 하면서 희생자이고 공감의 대상이기도 한 아우스트로-헝가리 제국의 보안책임자 한 명의 인생을 극명하게 묘사해낸 [레들 대령]이 무척 인상이 깊었다. [메피스토]는 몰라도 [레들 대령]의 경우 블루 레이는 결국 스튀디오까날이나 이런 곳에서 내주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겠지라고 은연중 생각하고 있었는데, 믿고 보는 키노 로버에서 사보 감독이 전면적으로 협력한 특전 영상과 (특히 프로덕션 디자이너 요세프 롬바리의 회상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더불어 1.66:1 비율로 재구성된 깨끗한 판본으로 출시되었다. 


사극이라면 그저 “민족의 비극,” 이딴 컨벤션으로 금방 거꾸러져 넘어가는 한국 영화가 제발 좀 참조했으면 하는, 영화작가의 복합적이고도 타협을 거부하는 역사적 시각의 씁쓸하면서도 여운이 길게 남는 묘미를 체험할 수 있는 한편이다. 아르민 뮬러 슈탈이 연기하는 페르디낭공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함으로써 1차세계대전을 촉발하게 되는 바로 그 인물) 이 “어떤 소수민족을 희생양으로 삼아서 도륙할 것인가” 를 마치 양고기요리에 어떤 와인을 곁들이면 제일 풍미가 살아나는가를 얘기하는 것처럼 태연자약하게 논파하는 소름끼치는 장면처럼, 북미나 서유럽 계통의 영화에서는 별로 볼 수 없는 직설적이고도 아이러니가 담긴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 그사람은 늪속에서 출현했다: 윌리엄 그르페 컬렉션 He Came from The Swamp: The William Grefé Collection (1966-1977, Region Free- Arrow V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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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도 말했듯이 세버린의 알 아담슨 컬렉션이 아마도 2020년의 컬트 영화 및 광학디스크 콜렉터들 중에서 회자되었던 가장 탐이나는 출시작이었겠지만, 세상에 없이 후진 컬트 망작들을 지극 정성으로 한데 모으고, 빡빡 광나게 닦고, 영화 만든 분들과의 인터뷰 및 정치한 작품 해설을 첨부해서 명품 박스세트로 만들어낸 노력에 있어서는 애로우 비데오가 세버린이나 크라이테리언에 비해 결코 밀리지 않았다. 알 아담슨과 윌리엄 그르페 둘 다 어렸을적에 AFKN의 흑백화면에서 대사의 의미도 제대로 파악이 안된채 “이게 뭣임?!” 이라는 경악과 충격감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영화 자체가 “훌륭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음) 을 동반하는 관람 경험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는 “영화작가” 들이긴 한데, 그래도 플로리다에서 꾸준하게 로컬시네마를 양산했던 그르페 (이분의 특질은 끝없이 펼쳐지는 고고 댄싱 삼입장면과 블루 레이로 보면 “엥?” 하고 놀랄 정도로 고퀄의 수중촬영으로 일단 규정지을 수 있겠다) 의 작품들은 내 머리속의 기억에서도 상당히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투명 비닐 쓰레기자루 (…;;;) 를 뒤집어쓰고 전기코드처럼 생긴 촉수를 지저분하게 늘어뜨린 잠수복 입은 사내가 “해파리 괴인” 으로 등장하는 [쏘이면 죽는다] 부터, [조스] 의 C급 빠꾸리면서도 괴이하게도 인간이 아닌 상어를 희생자로 묘사해서 시대를 앞서간 한편을 본 것같은 착각 (?) 을 선사하는 [마코: 죽음의 아가리] 까지, 열심히 최상급 퀄리티로 스캔을 했어도 소스가 너덜너덜해진16밀리미터 프린트 (네거티브도 아님) 밖에 없고 해서 보통 우리가 이런 명품 컬렉션에서 기대할 만한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타이틀도 있지만, 오래간만에 어린 시절의 추억에 젖어서 솔직히 말하자면 한심한 퀄리티의, 그러나 나름대로 착취적인 재미를 선사하기 위해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일련의 “플로리다산” 영화들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게 어디냐. 


19. 렌찌-베이커 지알로 전작품 컬렉션 The Complete Lenzi-Baker Giallo Collection (1969-1972, Region Free- Seve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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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알로 장르도 이정도 나왔으면 다 파먹었겠지, 이제 뭐가 또 남았을까, 이렇게 생각하실 분들도 계실지 모르지만 지알로 장르를 출시하는 레벨들의 기백은 그렇게 함부로 가볍게 생각할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 최소한 이분들은 판본이 어떤 형태로라도 남아있는 김기영감독의 전작을 다 발굴해서 블루레이로 내놓겠다는 정도는 되어야 마주보고 상대라도 할 수 있을, 그런 수준의 철저함과 헌신을 이제까지 보여준바 있다. 오히려 놀라운 일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많이, 까놓고 얘기하자면 졸속으로 붕어빵 찍듯이 찍어내었어야 할 지알로 장르의 이탈랴 영화들이 거의 전부 폭망한 타작이 아니고, 그 중 많은 타이틀들이 최소한 비주얼의 탐닉이라는 면에서는 40-50년이 지난 지금에와서 다시 감상하더라도 충분히 버텨내는 퀄리티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인종차별주의를 그냥 달고 다니는 식인종 호러영화로 명성을 떨친 움베르토 렌찌 감독은 내가 전혀 존경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영화인이지만, 그가 미국의 대스타 캐롤 베이커와 함께 만든 네 편의 지알로 연작들 ([얼음의 칼] 이나 [그리 달콤하면서 또 그리 변태적이고]의 경우는 지알로라기보다는 유명 예술작품들을 빠꾸리한 미스테리 범죄영화들에 가깝긴 하지만) 이 아마도 이런 가설을 증명하는데 적합한 예시들로 간주될 수 있을 듯하다. 캐롤 베이커도 매력적이지만 마치 한 시대전의 한국 성우분들이 구사하시던 “뾰족하고 드라이한 악당 목소리” 로 영어 대사를 읊으면서 포커페이스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프랑스인 대배우 장 루이 트랑티냥이 강하게 인상이 남는다. 특전영상도 풍성하지만, 렌찌 감독의 인터뷰 등보다도 캣 엘린저, 알렉산드라 헬러-니콜라스 등의 여성 평론가들의 유려하면서도 시시덕거리지 않는 코멘터리 트랙이 어떤 면에서는 영화보다 더 재미있고, 자칫하면 싸구려 에로스릴러로 무시당하고 넘어갈 수 있을 타이틀들을 제대로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18. 해머 컬렉션 제 5집: 죽음과 기만 Hammer Volume Five: Death and Deceit (1960-1965, Powerhouse Indicator- Region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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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케이터의 이번 해머 필름 컬렉션에서는 평소에 잘 알려진 해머 호러작품들과는 완연히 다른 마이너한 명성밖에 지니지 못한 사극들을 모았는데, 이전에도 언급한 바 있듯이 인디케이터 판본의 압도적인 서플들은 이러한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영화들을 다룰 때에 그 진가를 발휘한다고 할 수 있겠다. [광동에의 사증 (査證)], [블러드 강의 해적단], [칸다하르의 비적 (匪賊)] 그리고 [진홍의 칼날] 등 그런대로 준수하게 빠져나온 액션 사극 드라마들인데, 그 시대적인 한계성과 더불어 조금씩 정석에서 비껴나오고 뻔한 공식을 비틀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해머 제작진의 마이너 감성이랄까 장르적 결기와 같은 것이 은연중 배어나오는 것이 재미있다. 이 컬렉션에서는 아마도 안대를 한 크리스토퍼 리의 해적 연기때문에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은 [블러드 강의 해적단] 보다도, 오히려 영화 자체로는 그다지 특출나다고 볼 수 없는 [칸다하르] 와 [진홍의 칼날]에서 일면 비극적이기까지 한 마초남 악역으로 등장하는 젊은 시절의 올리버 리드가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17. 정신의 왜곡자들 The Mind Benders (1962, Network/StudioCanal- Region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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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더크 보가드 작품집에서 약간 건성으로 지나치면서 관람했던 베이질 디어든 감독의 SF 적 심리 스릴러인데, 요번에 네트워크에서 출시된 블루 레이로 다시금 감상해보니, 디어든 감독의 사회파 미스터리/범죄극과는 굉장히 거리가 있는, 오히려 조셉 로지나 잭 클레이튼같은 작가들의 영국 엘리트 계급 캐릭터들의 뒤틀리고 억압된 심리를 정교하게 묘사하는 싸이코드라마에 가까운 한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본 설정은 켄 러셀 감독의 황당하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이색작 [변화된 상태 Altered States] 와 비슷하지만, 그 내실은 보가드, 메리 유어, 존 클레멘트, 에드워드 폭스 등의 최고급 연기진이 마음속에서 분출되는 감정을 마치 펜싱할때의 칼처럼 종횡무진 휘두르면서 살진 (殺陳) 을 짜고 대결하는 모양의 장관에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물론 시대에 뒤떨어진 측면도 있지만, SF스릴러적 외연에 얽매여서 오히려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해왔고, 더 많은 분들이 보아주었으면 하는 보호심리를 불러 일으키는 그런 숨겨진 수작이다. 딱히 특전영상은 없으나, 블루 레이의 트랜스퍼는 4K 리마스터에다가, 그동안 밤에 벌어지는 일인데도 너무 명도가 강하게 나오는 바람에 제대로 살려지지 못했던 Day-for-Night 장면들에도 세심하게 수정이 가해졌다고 한다. 내가 누차 말했듯이 (특히 흑백영화의 경우) 블루 레이로 넘어갔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개선점 중 하나가 연기자들의 정교한 테크닉과 상세한 전략을 관객 입장에서 더 잘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인데, [정신의 왜곡자들] 도 그러한 예 중 하나로 들 수 있을 것이다. 


16. 아녜스 바르다 전작품집 The Complete Films of Agnes Varda (1955-2019, Criterion Collection- Region 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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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편은 이 리스트에 추가해야 좋을 것인지 여부를 놓고 꽤 고민을 했다. 일단 구입을 하기는 했지만, 사실 영화학도로서의 학문적인 이유가 훨씬 더 컸고, 아녜스 바르다가 20세기의 중요한 영화작가라는 것은 부정할 도리가 없지만, 내가 새삼스럽게 찾아보고 싶은 종류의 영화를 만드신 분도 아니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이 전작품집에도 수록된 [작은 사랑 Kung Fu Master!] 등은 이전에 보기는 했지만 별 감흥이 없었다 (물론 [배거본드 Vagabond] 나 [낭뜨의 자꼬 Jacquot de Nantes] 처럼 명성이 헛되지 않다고 느껴지는 작품들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구입을 하고 보니, 60년을 훌쩍 넘는 엄청난 세월에 걸쳐서 단편부터 장편, 도큐멘타리에서 상업영화, 말도 못하게 개인적인 수상을 담은 퍼스널 시네마의 연작부터 사회적인 고발의식에 의해 발동되는 공론적인 작품들까지, 그야말로 각양각종의 “시네마” 를 제작해온 한 위대한 영화인의 궤적을 이렇게 하나의 박스에 담아낸다는, 어찌 보면 무모할 수도 있는 기획을 거뜬히 실행에 옮긴 크라이테리언의 세심함과 지구력, 그리고 퀄리티 컨트롤의 대단함에 새삼스럽게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작업을 하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를 진정한 예술로 여길 수 있는 물리적 토대를 가지게 되는 것이고, 이것저것 뒤섞인 인상밖에는 지닐 수 없었던 한 영화인의 생애를 여유를 지니고 조감하면서 그이의 영상세계를 차분하게 방문할 수 있는것이 아니겠는가? 



15. 브루스 리: 그의 최고의 히트작들 Bruce Lee: His Greatest Hits (1971-78, Criterion Collection- Region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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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하게 말하겠다. 크라이테리언에서 처음 이 기획을 발표했을때 약간 의외라는 생각이 어쩔수 없이 들었다. 이소룡의 작품들이 크라이테리언의 “예술영화” 중심의 지향성과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애로우 비데오나 (리젼 B 시장의 경우) 유레카/마스터즈 오브 시네마 등에 동아시아 고전영화의 출시에 있어서 최근들어 눈에 띄게 밀리고 있는 크라이테리언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기획 치고는 너무나 시장성을 고려 (?) 한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고, 사실 내가 개인적으로 디븨디 시절부터 소장하고 있는 이소룡 영화 컬렉션의 숫자만 하더라도 일곱 종류가 넘는다 (한국에서 구입한 것만 자석으로 열고 닫는 두꺼운 플라스틱 박스에 담겨진 애장판 컬렉션을 포함해서 두 종류다). 거의 포맷이 바뀔때마다, 내지는 한 레벨에서 새로운 트랜스퍼를 시도했을 때마다 하나씩 구입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제 아무리 크라이테리언에서 새롭게 리마스터를 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더 포괄적이고 수준높은 특전을 끼워넣는다 하더라도, 비교적 비싼 돈을 주고 새삼스럽게 *또* 이소룡 영화를 구입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쩌랴. 결국은 또 다시 구입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는 단연 2020년 수집한 블루 레이 컬렉션의 1위! 라는 데에까지는 가지 못하였지만, 크라이테리언의 명성에 부합하는 출시라는 것은 흔쾌히 인정할 수 있겠다. 과거에 낱개로 출시되거나 스페셜 에디션에 부록으로 수록되었던 브루스 리에 관한 도큐멘터리들을 망라한 것도 좋고, 새로이 녹음된 브랜던 벤틀리, 마이크 리더, 그래디 헨드릭스 등의 코멘터리도 쓸데없이 브루스 리 컬트에 봉사하는 일 없이 주로 영미권에서 “쿵후영화” 라는 트렌드를 폭발적으로 유행시킨 카리스마 넘치는 스타로서의 이소룡에 대한 문화사적 접근을 시도하는 점이 돋보인다. 개중에는 [용쟁호투], [맹룡과강], [사망유희] 에 악역으로 등장했던 로버트 월의 인터뷰처럼 보통 점잖은 학문적이나 회고성 기록에서는 보기 힘든 종류의, 쌍욕으로 점철된, 적나라한 (그리고 현 시점에서 보자면 적지 않이 코미컬한 ^ ^) 비판과 불평의 토로가 담겨있는 서플도 있고, 빼어난 [당산대형] 과 [정무문] 의 트랜스퍼를 위시해서, 그래도 역시 크라이테리언이구나 하는 감개는 어디 가지 않았다. 



14. 쌍생아 双生児 (1999, Mondo Macabro- Region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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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에 마치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주요 컬트 전문 레벨에서 작품들을 쏟아낸 작가 중 한분이 츠카모토 신야 감독이다. 있다가 언급할 애로우 비데오의 입이 딱 벌어지는 특별판 컬렉션에 최신작 [참斬]까지도 포함이 되어있음에도 [요괴 헌터 히루코] 와 [쌍생아] 가 누락되어 있다는 것이 아까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Third Window Films 와 Mondo Macabro 에서 거의 동시에 [쌍생아] 를 블루 레이로 출시하였다. [쌍생아] 는 워너브라더스에서 내놓은 일본발 디븨디가 당시 기준으로는 드물게 영어자막을 지원하고, 또 말도 못하는 고화질-오디오 퀄리티의 명품이었었다. 몬도 마카브로의 트랜스퍼는 복원판은 아닌 것 같고, 디븨디에 견주면 통상적인 90년대 미국영화의 색조와 명도에 맞추어진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는데, 물론 뛰어난 해상도로 인해 메이크업의 디테일이나 표정연기의 애매한 표현등의 새로운 측면을 발견하게 되기도 하긴 하지만, 무엇보다 이쪽이 극장 공개 당시의 경험을 재현하는 데 더 적합하다는 데에 방점이 찍혔다고 볼 수 있겠다. 한 때 대유행했던 에도가와 란포 원작작품의 영화화라는 시점에서 봐도 원작의 뛰어난 해석이고, 1인 2역의 모토키 마사히로의 최고 연기중의 하나를 감상할 수 있는 한편이기도 하다. 



13. 악마의 노예 Pengadi Seitan (1980, Severin- Region 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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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영화제에서도 소개된 바 있는 조코 안와르의 인도네시아 호러영화 [악마의 노예들]은 1980년에 만들어졌던 악명높은 라피 필름스 고전작의 리메이크라는 사실은 잘 알려진 바 있지만, 그 원작의 전모는 좌우가 다 잘려나가고 거지같은 화질의 VHS 에서 다시금 떠온 열화된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판본으로밖에는 파악이 안된다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데 다른 회사도 아니고 세버린에서 느닷없이 출시를 해주니, 약간 어안이 벙벙하다는 것이 정직한 반응이다. 70-80년대의 인도네시아 호러영화는 그 호탕한 기백과 병맛적 재미에 있어서는 다른 어떤 영화의 착취성 엔터테인먼트에도 꿀리지 않는 실력을 과시했었고, 그 대표작중 그것도 일부를 ([흑마술의 여왕], [전사 자카 셈붕] 등) 몬도 마카브로가 주도한 디븨디 출시를 통해 감상할 수 있었을 따름인데, 세버린이 오리지널 네거티브에서 새롭게 스캔했다고 하는 이 판본의 화질은 그야말로 작년에 80년대 풍으로 찍은 최신작의 그것에 다름 아니다! 


특전도 원본의 제작자 고페 삼타니, 각본가 이맘 탄토위 등 오리지널 스탭에 더해서 조코 안와르의 소개 영상 및 그가 이 한편에 뿅가서 리메이크를 만들기 이전에 제작한 단편집까지 충실하기 이를데 없다. 앞으로도 제발 세버린이 동남아시아 고전호러의 재발굴이라는 위대한 사업을 맡아서 계속 밀어붙여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아 그리고 몬도 마카브로~ [Snake Sisters] 출시한다는 거 어떻게 된거여! 벌써 몇 년을 로쿠로꾸비처럼 목 빠진채 기다리고 있능겨… 



12. 조스 Jaws (1975, Universal- 4K Ultra 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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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뭐 고전 스릴러-호러-재난영화라고 새삼스럽게 소개하기도 뭣한, 너무나 유명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출세작인데, 솔직히 4K UHD 로 내주지 않았으면 이 시점에서 다시 돌아보기는 했을런지 의심스럽기는 하다. 아, 영화는 당연히 걸작이고 지금 봐도 히치코크의 [싸이코] 처럼 파워도 기도 죽지 않았다. 문제는 4K UHD 로 감상했을때의 경험인데, 아니 이것이 ㅠㅜ 글쎄…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단순히 해상도가 4배 더 높아졌다는 말로는 도무지 쓸어담을 수 없는 현격한 차이를 노정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미국에 살게 된 이후, 딱 한번 극장에서 리바이벌 프린트로 잔뜩 달아오른 관객들과 함께 감상했던, 그 “극장감상” 의 경험에 가장 접근한 관람형태를 제공해 준다. 마사즈 빈야드 모래사장의 자잘한 모래가 발바닥에 밢이는 감촉이며, 어깨에 내리쬐는 태양광을 느끼는 것 같은 착각을 가져다 주는 화면에다가, 존 윌리엄스가 작곡한 스코어도 다른 효과음들을 비껴내고 어찌나 웅장하면서도 교활한 울림과 함께 전달되는 것인지! “아, 이건 모지?” 라는 의문부호가 머리 내내 떠나지 않았다. 그동안 네거티브에서 4K 스캔 새로이 했다는 영화들은 다 이런 수준의 프레젠테이션이 가능했다는 말인가?! 물론 이 [조스] 의 경우는 개중 특출난 케이스인것 같기는 하지만, 금년 스물 한 편의 리스트에 포함된 모든 4K UHD 판본들처럼, 1)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체험을 다시금 (또는 새로이) 할 수 있게 만들어줬고, 2) 영화를 완전히 새로 다시 보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과거의 리스트에 디븨디나 블루 레이를 올렸건 말건 절대로 리스트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1. 생존자의 발라드: 이마무라 쇼오헤이의 세 작품 Survivor Ballads: Three Films by Shohei Imamura (1983-1989, Arrow Academy- Region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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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무라 쇼오헤이는 1960년 초반부터 2000년대까지 줄기차게 활동을 계속해온 긴 호흡의 명장이고, 그 작품들 중 허투루 다룰 수 있는 것들은 하나도 없다. 성 정치적이나 역사적 사상에 있어서 반드시 찬성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마무라 선생님의 영화는 그러한 불만이나 의심스러운 요소들을 거뜬히 뒤집고 관객들의 뺨따구를 때리고 정수리를 가격하는 파워를 지녔다. 애로우 비데오에서 그동안 제대로 된 블루 레이 판본에 대한 영화팬들의 요구가 높았던 이마무라 선생님의 80년대 수작들의 복원판을 혈맥이 막힌데에 침을 찔러박듯이 한데 묶어서 출시하였다. [나라야마 부시코] 와 [검은 비] 는 물론이려니와, 동남아에서 “위안소” 를 운영했던 포주를 주인공으로 삼은, 자칫하다가는 비 일본 관객들의 분노를 자극할 수 있었던 위험하기 짝이없는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 [제겐女衒] 까지도, 이제까지 맞닥뜨려 본 적이 없는, “아름답다” 라는 표현으로밖에 묘사가 불가능한 화질-음질과 함께 관람할 수 있다. 특전도 재스퍼 샤프와 토니 레인즈라는 두 평론가 (일본 장르영화 전문가 대 예술영화 전문가)의 코멘터리를 따로 녹음하는 등, 크라이테리언이 머쓱해질 수준의 철저성을 과시하고 있다. 



10. 패티 허스트 Patty Hearst (1988, Vinegar Syndrome- Region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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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편은 슬프게도 이제는 유명을 달리한 아름다운 나타샤 리처드슨의 출세작으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인데, VHS 로 보았을 때에는 “좋은 영화” 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무언가 껄끄러운 뒷맛도 남겼었고, 그렇게 전반적으로 호감이 가는 한편은 아니었다. 이번에 비네가 신드롬에서 35밀리미터 인터포지티브에서 새로이 스캔된 리마스터 버젼으로 다시 감상하고 나니, 그 동안에 세상이 변하고 나도 변한 탓도 있어서 그럴까, 80년대 말에 보았을 때보다 오히려 더 강력하게 공감을 느끼는 (특히 리처드슨이 온몸을 던져서 연기하는 패티 허스트 캐릭터에) 한편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캐스트가 제대로 미쳤네?! 심바이오니즈 해방군 (SLA) 의 사령관 역에 젊디 젊은 빙 레임스, 그 멤버들에 프란세스 피셔, 윌리엄 포사이스 등) 폴 슈레이더감독은 자기가 각본까지 집필해서 통솔한 작품보다 전혀 다른 성향의 각본가가 가져온 내용을 연출할 때 항상 흥미있는 화학작용을 보이는 분인데 (자신의 각본을 다른 감독이 감독할 경우— 마틴 스코세시의 [택시 드라이버], 존 플린의 [롤링 썬더] 등— 도 마찬가지), 니콜라스 카잔 각본가의 시나리오가 던지는 흥미있는 이슈들을 하나도 피해가지 않고 정면돌파를 하는 그 작가적 결기가 관객들에게 고대로 전해져 온다. 예고편과 스틸 사진을 제외한 유일한 특전으로 별로 건강이 좋아보이지 않는 (금년으로 75세. 젊은 시절에 마약중독으로 개고생을 하셨고 아마 그 후유증이 알게모르게 심각하지 않을지) 슈레이더 감독의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는데, SLA의 흑인 리더를 주인공으로 한 “반백인 주제의 전복적영화” 를 만들고 싶으셨다고 대놓고 인정하는 것을 위시해서, 노익장이라고 하기에는 잘 벼려진 칼 같은 “뭇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적 지성이 아직 살아있음을 익히 관찰할 수 있다. 



9. 검은 무지개 Black Rainbow (1989, Arrow Video- Region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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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로우 비데오의 승승장구는 계속된다. 요번에는 내가 극장에서는 물론이고 VHS 나 케이블로도 본 적이 없는 독특한 풍미의 필름느와르-초자연적 호러-판타지 혼종작인데, 무려 [카터를 죽여라] 의 마이크 호지스 감독작이고 [아마데우스] 로 대박난 직후의 톰 헐스가 제이슨 로바즈, 로잔나 아케트 등의 명연기자들과 공연하는 한편이다. 어찌 이때까지 모르고 넘어갈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영화 자체는 “외국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미국 남부 고딕” 이라는, 나름대로 여러 흥미있는 사례가 존재하는 서브장르에 속하는데, 호지스 감독이 직접 감수한 복원판 트랜스퍼의 색조와 질감에서 (VHS 화면비에 비교적 근접한 1.66:1 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홈 비데오 시절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강렬함— 특히 제목에서 보여주는 대로 주로 자연 조명으로 잡아낸 “어두움” 의 요염한 광채— 을 전시한다. 금년의 리스트에서 “순수하게 블루 레이로 내놓기 전에는 전혀 몰랐던 한편의 발견” 이라는 카테고리에 합당한 타이틀이라고 하겠다. 



8. 알프레드 히치코크 4K UHD 클래식 컬렉션 The Alfred Hitchcock Classics Collection: Rear Window, Vertigo, Psycho, The Birds (1954-1963, Universal, 4K UHD Blu 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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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컬렉션도 [조스] 와 마찬가지로 거의 의무방어적으로 구입했다. 다들 그렇게 4K UHD 버전이 굉장하다고들 그래쌓는데, 아니… OLED TV 도 있고 한데… 한 번 직접 체크해보고 싶은 호기심이 동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 되겠지. 결과는 [조스] 항목을 참조하시면 되겠다. 


특히 [현기증] 과 [싸이코] 의 경우, 이게 뭥미?! [현기증] 은 진짜 복원판 극장상영을 관람했을 때의 경외스러운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는 상황에서, 뭐가 그리 대단하겠수라는 일말의 회의가 머리통 한 구석에서 버티고 있었지만, 솔 배스가 디자인한 메인 타이틀이 버나드 허먼의 고막에 적꼬치를 내지려 꿰뚫는 음악이 깔리는 순간 그런 회의는 단숨에 가루가 되어 날려가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요번에 4K로 출시된 [싸이코] 판본에는 최근에 발견된 (그리고 프랑스와 트뤼포와 히치코크의 대담집에 스틸사진으로 실려있지만 막상 영화에서는 확인이 불가능했던!) “유실된” 필름 (그야말로 몇 프레임이 더해진 정도의 “차이” 가 있는 부분도 있다) 이 복원되었다고 하긴 하던데, 뭐 그런것가지고 또 새로 돈 들여서 새 판본을 사?! 라고 짐짓 쓴웃음을 속으로 지었던 나라는 바보자식! 샤워신의 직후에 노먼 베이츠의 등장 장면에서 “허걱 저 1초도 안되는 샷은 분명히 내가 이제까지 본 [싸이코] 에는 없었어!!” 라고 두 눈으로 확인을 했다는 것이 아니겠나. 잘,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다시는 돈 아깝다는 타령은 안하겠습니다… 라고 히치선생님께 머리를 조아리고 용서를 빌어야 마땅하다. 



7. 크래쉬 (1996, Arrow Video- 4K Ultra 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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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래쉬] 는 극장 공개 당시에도 평단을 극에서 극으로 갈라놓는 과격한 한편이었고, 이제까지의 다른 어떤 영화에서도 도무지 감상할 수 없었던 특이한 미적 감각— 하워드 쇼어의 공포스러울 정도로 아방가르드한 스코어를 포함해서— 과, 그토록 멋지고 실력있는 헐리웃의 최고 연기자들을 고용해서는, 그들이 맺어지고 흩어지는 모습을 마치 곤충들의 교미하는 습성을 도큐멘터리 촬영하는 것 같은 냉랭하고 거의 외계인적이기까지 한 시각으로 그려내는, 어떤 면에서는 정말 크로넨버그 선생님이 아니면 만들 수 없었을 그런 한편이다. 크선생님의 광팬임에도 불구하고 과연 이 한편을 “훌륭한 영화” 내지는 “좋아하는 영화” 라고 부를 수 있을것인지에 대한 확답을 거의 25년이 되도록 아직 못 내리고 있지만, -- “기계 (기술) 과 육체의 융화”라는 주제를 천착한 SF 라는 측면에서 고찰하자면, VHS 라는 이제는 폐기물이 다 된 매체를 소재로 도입한 [비데오드롬] 보다 자동차와 에로티시즘을 다룬 [크래쉬] 가 더 “낡아보인” 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롭다— 이 문제작에 애로우가 올인하는 태도가 과다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물론 [스파이더] 나 [데드 존] 도 이렇게 특별판 4K UHD 로 내주었으면 얼마나 좋겠을까 라는 생각은 들긴 하지만 ^ ^) 


애로우에서 야심차게 출시한 4K UHD 버전은 촬영감독 피터 수시츠키가 직접 색채 보정을 감수한 35밀리 네거티브에서 스캔한 복원판으로, 극장공개 당시에 내가 관람했던 기억을 훨씬 능가하는 유려함과 디테일을 자랑한다. 특전영상과 텍스트 서플은 크선생님과 거의 같은 비중으로 원작자 J. G. 발라드에 대한 내용이 그야말로 한우충동으로 담겨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SF 작가 발라드의 팬들도 결코 놓쳐서는 안될 만한 출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6. 검은색의 시주차/검은색의 보고서 黒の試走車・黒の報告書 (1962-1963, Arrow Video- Region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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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토마-이미지 비데오에서 내놓던 마스무라 야스조오 감독의 디븨디 시리즈의 속행이 불투명해진 이후로 (내가 볼때는 영화인으로서 하수 [下手] 인 스즈키 세이준 등에 올인한 채로 도무지 진전이 없는) 크라이테리언이나 그런 명품 레벨에서도 내놓지 않을 것이 점점 확실시되는 가운데, 마스무라 블루 레이 컬렉션은 이제 북미시장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인가 라는 비관적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20년 들어와서 “걱정 마시라, 애로우가 있다!” 라는 플래카드를 휘날리며 애로우 비데오가, 그것도 다이에이의 범죄수사물-필름느와르 “검은색” 시리즈의 테이프를 끊은 [검은색의 시주차] 와 [검은색의 보고서] 를 동시에 출시했으니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비교적 소규모의, 대사 중심의 흑백영화가 아니고서는 마스무라 감독의 치고 빠지는 연출의 리듬의 기막힘과, 어떠한 비좁은 다다미바닥 여관방에서 이리저리 불편하게 앉은 캐릭터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더라도 생동감과 박력이 넘치지 않는 단 하나의 씬도 발견하기가 힘든 비주얼의 재간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내는 고백한다], [세이사쿠의 아내], [문신], [붉은 천사] 등, 그 장르적 착취적 재미를 포기함이 없이 작가적이고 예술적인 그만의 시점을 결코 타협하지 않는 천재 마스무라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필르모그래피를 제발 애로우에서 연속적으로 출시해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5. 우주인 토오쿄오에 나타나다 宇宙人東京に現る (1956, Arrow Video- Region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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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위의 [우주인 토오쿄오에 나타나다] 와 2위의 [히로시마] 는 아마도 내가 정말 본업 (일본 역사-문화 연구자) 에 충실한 영화학도였다면 다른 모든 타이틀들을 제치고 2위와 1위를 차지했어야 마땅할 것이다. 애로우 비데오의 고전 일본영화에 대한 관심도는 이제 단순히 양덕들의 눈에 맞춘 컬트작품들을 복원해서 노스탈지아 장사를 (물론 그것도 미치게 잘 하고 있지만) 하는 수준을 까마득하게 벗어나서, 정말 나처럼 전문적으로 일본사를 가르치는 사람이 거꾸러지고 엎드러지면서 그 출시 타이틀을 낚아채지 않으면 안될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 내가 진정한 대한민국의 애국자였다면 “대체 한국영화에는 이런 노력을 기울여주는 사람들이 왜 없단 말인가?!” 라고 애간장을 태울지도 모르겠다 (물론 “주류 민족주의자” 라면 이런 이슈에는 애초에 개뿔도 관심이 없을것이니 말을 섞을 여지조차 없을 것이지만). 


[우주인 토오쿄오에 나타나다] 는 그 “거대한 눈이 달린 불가사리 모양의 자루를 뒤집어쓴 사람” 처럼 생긴 외계인 디자인을 개떡같은 화질로밖에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본의 아니게 “한심하고 머절한 괴물영화” 에 분류되는 오명을 겪어왔으나, 애로우의 복원판으로 확인한 그 정체는 쿠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주요작의 각본가였던 오구니 히데오작가가 집필한 진지하게 이를데 없는 각본에 바탕을 둔, 2년전에 제작된 [괴수왕 고지라] 와 마찬가지로 당대의 냉전적 사고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2차대전의 파괴적인 체험에 대한 반성적 고찰을 시도하는 어른스럽고도 낙관적인 본격 SF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지금 전 세계에서 이런 종류의 영화를 이렇게 멋지고 근사하게 복원할 수 있는 회사는 애로우가 유일하지 않을런지. 



4. 제 4 단계 Phase IV (1974, 101 Films- Region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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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광선의 영향으로 갑자기 집단지성의 돌연변이를 일으키게 된 개미떼가 아리조나의 사막지대를 정복하고, 생물학자 나이젤 데이븐포트와 통계분석가 마이클 머피가 월면세계의 기지를 연상시키는 돔에 들어앉아서 이 개미들과 소통을 시도하거나 전쟁을 벌이는 준비를 위해 데이타를 모으려고 한다는, H. G. 웰즈의 [개미의 제국] 의 60년대 사이케델릭적 각색이라고 할 수 있는 한편인데, [현기증] 이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등의 메인 타이틀 디자인으로 명성을 떨친 솔 배스 디자이너가 감독을 맡은 유일한 한편이다. 내용으로 따지면 [환상특급] 의 한 에피소드 정도의 분량이지만, 켄 미들햄이라는 전문가가 담당한 일면 소름끼치게 기분 나쁘고 일면 아름답고 신비스럽기까지한 개미들의 움직임과 행태를 찍어낸 마이크로영상들과 배스가 전면적으로 총괄감독한 개미집과 각종 기계들의 매혹적이면서도 모더니즘적인 디자인등이 시종 관람자를 압도하면서 “스토리” 나 “주제” 에 얽매이지 않는 순수한 영화적인 매력을 분출한다. 이 한편은 디븨디로 출시되었을 당시에 베스트 리스트에 올렸던 기억이 나는데, 듀나게시판의 리스트에는 없는 걸로 보아서 2009년 이전에 작성했던 리스트였던가보다. 뭐 그것들이 지금은 다 어디가 박혀 있을 것인지 ^ ^ 알 수도 없고 관심도 없긴 하다만. 여느 사람들은 이런 한편이 있다는 것도 잘 모르는 반면, 나의 경우 컬트SF 를 어떤 형태로든지 언급할 때 반드시 끼워서 팔아먹는 타이틀 중 하나인데, 그래도 블루 레이로 새삼스럽게 내주었다는 것만으로는 이렇게 높은 위치에 등장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101 필름스의 이번 특별판에서는 유수한 텍스트 에세이와 코멘터리, 그리고 2012년에 새로이 발견된 (!) 완전히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솔 배스가 의도했던 오리지널 엔딩 (이것만 봐도 뿅간다. 테즈카 오사무나 모로보시 다이지로 작품같음) 이 복원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이 블루 레이 디스크를 하나 장만해서 그곳에 배스가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제작한 단편들— 아카데미 단편 도큐멘터리상을 수상한 [인간은 왜 창조하는가], 태양열 에너지를 선전하기 위해서 로버트 레드포드가 제작한 [The Solar Film], 레이 브래드베리의 단편을 각색한 몽환적이고도 강렬한 [Quest] 등 그야말로 주옥같은 작품들— 에 더해서 배스가 만든 유명 영화의 메인 타이틀 디자인들을 본인이 직접 섭렵하고 분석하는 [Bass on Titles] 까지도 전부 수록한다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이러니 어찌 침이 마르도록 상찬하지 않을 수 있겠소이까! 



3. 엘레펀트 맨 The Elephant Man (1981, StudioCanal- 4K Ultra 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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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편도 많이 봐서 이제는 재감상이 그다지 효력이 없을 것이라고 내심 얕잡아 보고 4K UHD 판본으로 감상했는데 완전히 준마에게 정수리를 다리로 호되게 채인 것 같은 쇼크를 가누지 못하였다. 모두에 아직 존 메릭의 뒤틀린 육체가 관객한데 보이기 전에 안소니 홉킨스 경이 연기하는 프레데릭 트리브스 (실제인물. 맹장수술의 권위자였다고 한다) 가 그 모습을 보고 경악하여 얼굴이 굳어진 채로, 가엾음에 타격을 받고 눈물을 주루룩 흘리는 장면부터 배때기에 식칼을 박았으며, 결국 관람하는 동안 나도 눈물을 한 바께쓰 쏟고야 말았다. 영화의 일면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아름다움과, 이것이 두번째 장편 작품이었던 데이빗 린치의 연기자들을 다루는 수완이 백퍼센트 발휘된 드라마적 파워는 나중에 또 얘기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고, 이 유럽판 스튀디오까날 4K UHD 판본은 아마도 크라이테리언에서 출시된 블루 레이와 같은 기초 트랜스퍼를 원용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데, 크라이테리언 버전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내 OLED TV 로 감상했을 때 린치 영화의 어쩌면 가장 중요한 특색이라고 할 수 있을 공포를 자아내는 저음의 인더스트리얼 노이즈를 비롯한 사운드 디자인이 이토록 뚜렷하게 느껴지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이 판본을 보고 나서야 [엘레판트 맨] 의 관객들을 맷돌로 갈아버린 파김치로 만드는 압도적인 정서적 파워는 데이빗 린치의 감각적 연출의 선택지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것을 똑똑히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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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본편에 챕터 스톱을 빼버리고 하는 따위의 데이빗 린치 “예술작가” 의 의도를 “정확히” 반영한 판본에 고집하고 싶으시면, 크라이테리언 블루 레이를 구입하실 것을 권장한다. 이 한편에서는 킴 뉴먼의 에세이, 특수 메이크업에 관한 고찰 등의 서플에서 볼 수 있듯, [엘레판트 맨] 을 “해머가 만든 적이 없는 최고의 해머영화” 라는 식의 장르중심적 접근방식도 배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스튀디오까날의 자세를 지지하는 바이다. 



2. 히로시마 ヒロシマ (1953, Arrow Video- Region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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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인 토오쿄오에 나타나다] 가 전혀 부합하지 않았던 B급 컬트 태작의 악명을 뒤집어 썼다가 이제 애로우에 의해 그 존엄을 되찾은 한편이라면, 일본교직원조합이 자금을 대고 연합군점령의 끝물기에 실제 원폭 피해자들이 다수 출연하여 도큐멘터리적 리얼리즘을 표방하고 1953년에 제작된 [히로시마] 는, 어쩌면 그 피폭 당사자의 입장에 서서 미국과 일본 당국의 위선을 응시하는 비판적인 시각보다도, 후대 세상 사람들의 겉으로만 비분강개하는 정치적태도와 파멸적인 체험을 미적으로 “승화” 시키려는 “고상” 한 예술적 태도를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잊혀지게” 된 한편이 아닐까 싶다. 여전히 주류 사회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영화작가 중심의 전시효과나 정치적-문화권력지향적 접근을 버리고, 인류가 아직껏 경험한 적도 없었고 그 이후로도 경험한 적이 없었던 핵폭의 체험을 오로지 역사과학적인 맥락에서 그려낸 이 수작을 발굴하여 피폭자 시네마의 연구자 믹 브로데릭의 에세이 등 준수한 서플과 더불어 출시한 애로우 비데오의 현안과 “양심” 에— 나는 죽을때까지 “양심적 학자” 라는 말을 “우리나라” 학계의 일부에서 듣고 싶지 않다. 그들에게 “양심적 학자” 라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 듣기좋은 정치적 언설을 침발라서 해주는 외국인 학자라는 의미이니까— 충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1. 비스트마스터 애장판 The Beastmaster 4K UHD Special Edition (1982, Vinegar Syndrome- 4K Ultra HD) / 솔리드 메탈 악몽: 츠카모토 신야 감독작품집 (1989-2018, Arrow Video- Region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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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번 리스트를 작성하면서 의외로 오랜 시간을 고민할 필요없이 결정한 것은 이 두 편을 1위로 공동선정하는 것이었다. 둘 다 [엘레판트 맨] 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리뷰 공수표를 쓰지 않았어도 언젠가 보따리를 풀을 가능성을 생각하면 말을 아끼지 않을 수 없는 케이스인데, [비스트마스터] 의 경우는 진짜 뻑하면 TV에서 상영하는 것이 눈에 들어오곤 했던 한편인데, 이렇게 주옥같은 모습의 애장판으로 무슨 스탠리 큐브릭의 [스파르타쿠스] 라도 되는 것 처럼 일종의 비장미까지 느껴지는, 거의 모든 프로덕션에 관한 깨알같은 정보와 수많은 장르 종사자들의 “[비스트마스터] 가 내 인생을 바꿨어요!” 식 “간증” 으로 빽빽히 들어찬 사양으로 출시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리고 애로우의 츠카모토 신야 컬렉션의 경우, 이미 비싼 돈을 주고 구입한 일본제 블루 레이와 반 이상이 겹치는 타이틀 모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이트 엘린저, 마크 실링, 재스퍼 샤프가 초기작, 중기작, 가장 최근작들과 맞붙어 씨름하는 비평 에세이들의 향연부터 무엇보다도 츠카모토 감독의 인터뷰 영상을 망라하고 거기다가 [전주꼬마의 모험], [혼미 Haze] 등의 단편도 새로이 HD로 트랜스퍼하여 수록된 이 박스세트를 “결정판” 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가 없으며, 애로우가 지난 10년동안 보여준 고전 아시아영화에 대한 애정과 헌신의 결정체라고 일컫지 않을 수 없을 듯 하다. 정말 대단하다. 


이로써, 아휴… 2월로 넘어가기 직전에 가까스로, 어떻게 죽지 않고 2020년의 최고 디스크 리스트도 완성이 되긴 되었구나. 요번에는 진짜 코로나와 온라인 교수행위의 양 바위덩어리에 치어서 납작하게 짜부가 될 것이니 절대로 완성시키지 못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그리고 씨네사방을 비롯하여 온라인 평론가분들도 이제는 이런 리스트 안 만드시는데 내가 뭐라고. 진짜 내 머리속의 수퍼에고가 “야 넌 정말… 교수질보다 블루레이 사재기가 더 중요하냐? 짜슥아 이런 짓한다고 블루레이가 밥 벌여멕여주냐?” 라고 질타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만, 어쩌란 말이냐. 난 이렇게 생겨먹은 것을. 박진영피디보고 레트로 케이팝송 쓰는 거 그만두라고 말해서 그만두시면, 대통령자리 쫓겨난 오렌지 구더기색기더러 “내가 국민들께 거짓말을 수만번 해서 잘못했습니다” 라고 사과하라고 해서 사과하면, 나도 블루레이 리스트 그만 올릴께. 


금년도 최고의 블루레이 카버는 여전히 못 선정했음을 사과드리지만, 최고의 레벨은 픽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하고 쓰러지겠다: ARROW VIDEO! You did an amazing job! More Uchida Tomu and great Japanese/Asian classical films please! 


읽어주신 분들께는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언제나처럼 물리매체의 융성과 발전을 기원하며, 애로우 비데오, 비네가 신드롬, 크라이테리언 콜렉션, 파워하우스 인디케이터, 스튀디오까날, 몬도 마카브로, 영상 자료원, 키노 로버, 세버린, BFI, AGFA, 플레인 아카이브 등 고전 영화를 보다 많은 관객들에게 가장 완정하고 원래 의도되었던 모습으로 접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모든 레벨들에게 언제나처럼 머리를 조아려서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영화의 보존과 복원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 “옛날” 영화를 잊어버리고 더 이상 찾지 않게 되는 그 순간이 바로 “우리 영화” 가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고 역사의 뒤켠으로 스러지게 되는 시발점이라는 사실을 제발, 제발 잊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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