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배트맨 The Batman (2022)

2022.06.17 17:39

Q 조회 수:845

배트맨 The Batman 


미국, 2022.        ☆☆☆☆ 


A Warner Brothers/6th & Idaho/Dylan Clark Productions/DC Entertainment Co-Production. Distributed by Warner Brothers. 화면비 2.39:1, 2시간 56분. 


Director: Matt Reaves. 

Screenplay: Matt Reaves, Peter Craig. 

Cinematography: Greig Fraser. 

Music: Michael Giacchino. 

Production Design: James Chinlund. 

Batsuit Costume Design: David Crossman, Glyn Dillon. 

Special Visual Effects: Weta Digital, Industrial Light & Magic, Scanline VFX, Atomic Arts, Lidar Lounge, Crafty Apes. Costume Designer: Jacqueline Durran. 


CAST: Robert Pattinson (브루스 웨인), Jeffrey Wright (고든 경감), Paul Dano (리들러), Zoe Kravitz (셀리나 카일), Colin Farrell (펭귄), John Turturro (카마인 팔코니), Andy Serkis (알프레드 페니워스), Rupert Penry-Jones (미첼 시장), Barry Keoghan (조커), Peter Sarsgaard (콜슨 검사장), Gil Perez-Abraham (마티네스), Jayme Lawson (벨라 레알), Peter McDonald (켄지 형사), Hana Hrzic (가니카), Luke Roberts (토마스 웨인), Oscar Novak (어린 시절의 브루스 웨인), Archie Barnes (미첼 시장의 아들). 


독자분의 리퀘스트에 부응하여 [더 배트맨] 의 리뷰를 올립니다. 


THE_BATMAN_2022_POSTER_1(2) 


4월초에 엘 서리토의 거리두기가 잘 되어 있는 꽤 좋은 극장에서 2시간 반이 훨씬 넘는 시간을 마스크 꼬박 쓴 채, 도중에 화장실도 안가고 내리 관람했다. 이 사실만 적어도, 최소한 기본 실력 정도는 인정을 하는 호평의 리뷰가 되리라고 짐작하실 수 있을 듯 하다. 물론 실제로는 위의 별점이 보여주듯, 2022년 상반기에 본 영화들 중에서 가장 만족스럽고 감동을 주는 한편으로 귀결되었다. 공동각본과 감독을 맡은 매트 리브스는 내가 선호하는 감독은 아니다. 리부트 시리즈 [혹성탈출] 도 잘 만들긴 했지만 그렇게 감동을 주거나 계속해서 찾아보게 되는 작품군은 아니었고, 나에게는 원작도 그저 그랬던 [렛미인] 같은 경우는 의의를 별로 찾아 볼 수 없는 그런 형태의 리메이크였었다. 리브스는 나름대로 진지하고 사려도 깊은 영상작가이고, 제대로 꼴을 갖춘 영화를 뽑아내는 능력은 있다고 여겨졌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이나 박찬욱처럼 딱히 무언가 우리가 여지껏 보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보여준다던가, 아니면 범인의 구현 능력을 까마득히 초월하는 미적 센스나 사상적 공력을 통해서, 장르적이거나 펄프적인 요소를 예술작품의 영역으로 승화시키는 경지를 보여주지는 못할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리브스의 [더 배트맨] 에도 사실상 별다른 기대를 하지는 않았었다. 


이 한편의 장르적 출자를 논하기로 마음을 먹자면, 꽤 여러 각도에서 상당히 충실한 내용의 분석을 가할 수 있을 터이다. 내가 처음 20분을 관람하면서 [더 배트맨] 의 장르 정체성에 대해 깨달은 점은, 마블영화로 대표되는 종류의, SF 와 판타지모험물의 튀김옷을 가볍게 입힌 “힙” 하고 라이트한 (한국어로 주는 “가볍다” 라는 어감보다는 “경쾌하다” 라는 말이 주는 인상과 함의에 가까운 의미로) 액션 장르와는 확연하게 대극적인 위치에 존재하는 “필름 느와르-범죄 스릴러-(그리고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가장 예상을 뒤엎고 신선한 초이스였는데) 추리-수사물” 장르에 쭈빗거림이 없이 말뚝을 박고 있다는 것이었다. 놀란의 다크 나이트 삼부작도 이러한 현대적이고 리얼한 범죄 스릴러와 네오 느와르의 미적 감각을 (사상적으로는 반드시 이러한 장르들의 컨벤션을 따라가고 있지는 않다) 원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리브스의 배트맨은 거의 대체역사 SF 라고 주장하면 받아들일 수도 있을 정도의 공을 들여서, 고전 필름느와르가 반영했던 2차세계대전 이전의 “미국,” 즉 배트맨이라는 캐릭터가 처음 탄생한, 경제공황의 타격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하고 전쟁과 파시즘의 먹구름이 드리워진, 불투명하고 어두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사회를 뒤덮고 있던 1939년의 “고담 시티 (뉴욕 시티)” 를 “뉴트로” 한 방식으로 재구현해 보이고 있다. 마치 좀도둑처럼 눈가에 검은 칠을 하고 코스튬을 백팩에 넣고 어정거리는 브루스 웨인이 바라보는 고담 시티는, LED 나 스마트폰따위의 “쓸데없는” 테크놀로지만 발달했을 뿐, 지저분하고 을씨년스럽게 폐퇴되어 가는 콘크리트의 숲인 빌딩들 사이에서 햇볕도 제대로 못 쬐면서 시궁쥐처럼 근근히 살아가는 도시 민중들의 꼬라지는 세계 경제가 폭망한1930년대의 그것에서 나아진 바가 없어 보인다 . 


그리고 리브스는, 이것도 놀란과 차별화되는 시점인데, 이러한 전전 (前戰) 미국사회의 고딕적인 어두움과 황폐함을 포스트-트럼프 시대의 2020년대 미국사회의 정치적, 윤리적 위선과 직접적으로 연계시키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떼거리” 를 뜻하는 몹 (mob) 이라는 말이 선동에 의해 폭력을 저지르는 폭도들이라는 의미로, 그리고 더 나아가서 범죄집단 (갱스터들) 을 직접 가리키는 의미로 진화하게 된 미국의 어두운 역사를, 리브스는 인터넷상의 인셀들, 찌질이들, 싸이코들의 집약-결정체인 리들러를 통해서 21세기의 암울한 포스트모던 도시의 환경에 걸맞은 방식으로 재현해 보인다. 그와 벤 아플렉 감독의 [타운] 의 각본가, 그리고 멜 깁슨이 주연한 작지만 단단한 조막돌 같은 효율적인 스릴러 [Blood Father] 의 원작자이기도 한 피터 크레이그가 집필한 각본은, 배트맨을 닌자풍의 슈리켄 같은 온갖 수퍼웨폰으로 무장하고 개인용 비행기를 몰고 다니는 백금수저 수퍼히어로로 그려내는 대신, 펄프 만화잡지인 [Detective Comics] 에서 처음 그 모습을 선보인 배트맨의 기원에 합당하게 “사설 탐정 (private detective)” 의 모습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이 배트맨은 물론 (굉장히 위태로운 모습으로) 날다람쥐 방식으로 마천루에서 뛰어내려 활공을 하기도 하고, 방탄 수트를 입고 기관총을 난사하는 갱스터들을 주먹과 발길질로 줘 패주는 액션을 과시하기도 하지만, 그의 서사속의 기능은 기본적으로 리들러의 범죄의 동기로 기능하는 고담 시티의 타락과 위선의 본모습을 밝혀내는 “탐정” 의 역할이라는 것을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이 한편의 배트맨은 1년이 넘게 도시에서 자경단적 안티히어로로 활동하면서, 민중들과 범죄자들 사이에서 악명을 드높인 존재이지만, “배트맨” 이라는 고유한 명칭조차도 붙여지지 않은채 경찰들의 의심과 경계를 한 몸에 받고 있으며, 필립 말로우나 샘 스페이드같은 필름 느와르-펄프 탐정소설의 주인공처럼, 고담 시티의 저변을 용암처럼 흐르면서 사실상 그 도시의 체제를 유지하는 원동력을 제공하는 “구조적 위선” 의 본 모습을 리들러라는 연속살인마의 범죄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밝혀내는 것이 그의 실질적인 임무이다. 붕붕 날라다니고 온갖 SF 적인 완구들을 동원해서 수퍼빌런과 치고 받는 그런 코믹북 히어로의 용자는 이 한편에서는 상당한 수준으로 절제되어 있다. 이러한 필름 느와르적인 캐릭터 구상에 공을 들인 결과, “좋은 경찰” 역을 맡은 제프 라이트의 고든 경감이 상대적으로 재미가 없어졌다는 난점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러한 캐릭터성은 피터 로레와 알 카포네를 연기하는 로버트 드 니로를 섞어놓은 것 같은 펭귄, 팀 버튼의 [배트맨 리턴스] 의 미셸 파이퍼가 발산했던 특이하게 변이된 페미니즘적 아우라를 배제하고, 터프한 환경에서 생존해 남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면서도, 내면적인 인간미를 잃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캣우먼, 무엇보다도 브루스 웨인의 조력자이자 대체 아버지로서의 존재인 알프레드 집사 등의 캐릭터들에 좋은 의미로 “구식” 이고 “고전적” 인 방향성을 부여해주고 있다. 21세기적인 아젠다나 스타일을 받아들여서 겉으로 멋있고 쿨하게 꾸며놓는 것 보다는 (잭 스나이더의 DC 히어로들이 그러한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내면의 트라우마와 르상티망에 의해 히어로나 빌런이나 또는 그 두 극 사이의 진폭을 때로는 폭발적으로 때로는 점차적으로 이동하는 모습들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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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때문에, DC 수퍼히어로임에도 불구하고 [더 배트맨] 의 캐릭터들은 (그런 예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코믹북 캐릭터들에서 볼 수 있는 촌철살인의 폼나는 대사들보다는, 말로 심정을 잘 표현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듯한 응시 (gaze) 를 통해 자신들을 드러내는 경우가 두드러진다. (캣우먼 셀리나 카일이 배트맨의 종용으로, 카메라가 장착된 콘택트 렌즈를 끼고 펭귄이 운영하는 나이트클럽— 이 “빙산 라운지” 설정도 2차대전 전의 코믹스에서 고대로 가져온 것이다— 에서 탐사를 하는 시퀜스가 이러한 캐릭터성을 자기반영적으로 잘 써먹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한편의 빌런들이 [다크 나이트]의 히스 레저와 아론 엑커트의 그것들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훌륭한 연기들을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캐릭터구상도 한 몫했다고 여겨진다. 콜린 패럴의 펭귄과 폴 다노의 리들러 둘 다 흔히 전형적인 “빌런” 이미지에서 볼 수 있는 캐주얼하고 가볍게 악행을 저지르는 “쿨” 한 모습 대신에, 자신들의 아젠다에 굉장히 몰입해서 열일을 하면서 악당질을 하는 행태를 보여준다. 나는 리들러보다 (리들러 자체도 시의적절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불쾌감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라는 점에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지만) 펭귄의 캐릭터구상이 더 흥미있었는데, 이 한편에서는 코믹 릴리프로의 기능도 하고 있기는 하지만, 패럴은 의외로 정교한 연기를 통해, 항상 최고 권력을 지닌 자들에게 총알받이로 사용당하고 있는 자신의 위상에 대한 르상티망과 위계질서를 뒤집고 싶은 욕망을 멋지게 묘사해주고 있다. 


그리고 당초에 캐스팅 소식을 들었을때는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을 수 없었던 로버트 패틴슨의 브루스 웨인도 좋다. 이 한편의 웨인/배트맨은 이제까지 미국 실사판 영상물에서 등장한 모습들 중에서도 손을 꼽을 정도로 과묵하고, 진중하고, 과거의 트라우마에 짓눌려 이그러진 눈매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캐릭터설정이 그냥 폼잡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수퍼히어로 영화에는 걸맞지 않다고도 볼 수 있는 스타일의 내면적 연기를 중요시하는 연기자를 캐스팅할 필요가 있었고, 패틴슨은 이러한 요구에 적절히 부응해주고 있다고 여겨진다. [다크 나이트] 의 크리스천 베일의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을 (목소리와 몸 쓰는 방식도 전혀 다른) 별개의 인격체로 구현하는 방식도 나름대로 효과적이었고, 잭 스나이더 시리즈의 벤 아플렉은 전형적인 백금수저 도련님으로부터 별반 자기 성찰을 거치지 않고 배트맨이 된 조금 “재수 없는” 브루스 웨인의 캐릭터성에 지극히 잘 부합되었다면, 패틴슨의 배트맨은 그들보다 훨씬 더 육체적인 한계와 솔직히 말해서 정서불안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심리적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면서도, 이런 판타지 서사에서 그렇게 해야되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하는 시늉을 보여주는 자뻑적 “고민” 이 아닌 진지하고 고통을 수반하는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믿음을 준다. 액션 히어로로서의 임팩트는 별로 강하지 않지만,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더 배트맨] 은 그런 식의 수퍼히어로물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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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나이트] 와 마찬가지로 [더 배트맨] 도 액션이나 특수효과가 아닌 뛰어난 연기자들사이의 불꽃 튀기는 충돌이 서사를 견인하고 관객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한편이지만, 그 중에서 연기적으로 또 각본상으로 최고의 시퀜스를 고르라고 한다면 앤디 서키스가 연기하는 (최고의 캐스팅임) 알프레드가 브루스의 아버지에 대한 힐문에 대해서 토머스 웨인을 변호하면서도 “나는 브루스 도련님의 아버지 노릇을 하는 것에 실패했다, 아니, 그런 일을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다” 라는 자책감과 회한이 가득한 고백을 하게 되는 장면을 선택하겠다. 이 시퀜스의 중후하면서도 섬세함을 놓치지 않는 연기들로부터 비롯되는 감정적인 파워에 비교하자면, 여느 수퍼히어로 서사의 “애비 (또는 에미) 서사” 들로부터 끌어내려고자 하는 “감동” 따위는 까마득하게 미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리브스와 크레이그는 브루스 웨인, 셀리나 카일, 알프레드 집사, 그리고 수퍼빌런인 리들러들이 다 개인사에 관련된 트라우마를 짊어지고 있지만 (잭 스나이더 작품군에서 얄팍한 형태로 써먹는 “애비/에미 이슈” 와는 달리), 그것을 뼈아픈 자기 성찰을 통해 넘어설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히어로와 빌런의 규정이 갈라진다는 것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 한편의 진정한 흑막이자 최고 빌런은 만화에 등장하는 수퍼빌런이 아닌 갱스터 카마인 팔코니이고, 팔코니가 제시하는 철학은 “세상일이란 그렇고 그런 것” 이라는, 시스템은 결국은 변화할 수 없고, 변화시키려는 인간들도 궁극적으로는 다 위선자들일뿐이라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브루스 웨인은 자신이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유지를 계승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아버지 토마스 웨인도 스스로의 윤리적인 기준과 별 상관없이 타락한 시스템의 일부였고 그 구조적 모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깨달음을 얻게 된 연후에, 배트맨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단순히 악당들을 깜장색 박쥐 코스튬 입고 패주는 준 (準) 싸이코로부터 공포와 불안에 떠는 소년이 이 사람은 옳은 선택을 할 것이야, 라고 믿으면서 손을 내밀 수 있도록 하게끔, 스스로 어두컴컴한 물웅덩이속으로 들어가는 진정한 히어로— 자신의 불완전함과 자신의 출자에 배태된 죄악과 타협의 유산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있으며 결코 회피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로 거듭나는 모습을 리브스와 크레이그는, 관객들이 지루해하건 말건 이게 절라 폼나고 간지나는 배트맨이라고 여기건 말건, 시간을 충분히 들여서 묘사해내고 있다. 


영화적인 만듦새와 스타일적인 특질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제로 다크 서티], [로그 원] 의 촬영감독이었던 그렉 프레이저는 고전적인 어번 필름 느와르의 수작들에게서 볼 수 있는 어두컴컴하면서도 독기 있는 아름다움이 배태된 영상처리를, 상징적인 표현주의에만 경도되지 않는 현대적인 형태로 맵시있게 재해석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워렌 비티 감독의 [딕 트레이시] 실사판을 보신 분들께선, 그 자체로도 최고급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작품의 비토리오 스토라로 촬영감독의 접근방식이 프레이저의 그것과 완전히 대극점에 있다는 것을 관찰하실 수 있을 듯하다). 특히 흥미있었던 것은 영화의 중간 부분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액션 셋 피스가 배트모빌과 펭귄이 탄 승용차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국도에서 벌이는 “카체이스” 라는 점인데, 이 카체이스는 거의 대부분의 액션이 차를 모는 캐릭터들 (특히나 배트맨보다는 펭귄) 의 시점에서 촬영되어 있고, 캐릭터들의 심리묘사가 운전자 높이에서 차 옆에 부착된 카메라로 찍은 혼란스럽고도 파괴적인 영상들이 주는 정서적 효과에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혹자는 이런 카체이스가 70년대적 (뉴 아메리칸 시네마적) 이라고 분석하는 분도 계시던데, 나에게는 반드시 그렇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내가 개인적으로 본 카체이스 중에서 가장 정서적으로 파워풀한 것 중 하나는 해리슨 포드가 CIA 분석가 잭 라이언으로 출연한 [패트리엇 게임] 에서 아일랜드 과격파에 의해 라이언의 가족이 고속도로에서 테러를 당하는 시퀜스가 있는데, [더 배트맨] 의 카체이스는 (미적인 설계는 완전히 다르지만) 그 시퀜스를 연상시켰다는 점만 언급해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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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반드시 언급하고 싶은 것이 마이클 기아키노의 음악이다. [다크 나이트] 시리즈의 한스 짐머의 음악과는 또 다른 형태의 우수한 스코어인데, 화음이나 악기의 조성 등으로 참신함과 쿨한 효과를 노리기 보다는, 진중하고 서두르지 않고 연기자들의 상황적 대사 굴림에 쓸데없이 끼어들지 않으면서도, 캐릭터들이 미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상태를 여유있으면서도 이해심과 배려심을 동반한 멜로디로 표현해내고 있다. 역시 전혀 스타일이 다르지만 존 배리의 후기 (70년대 말 이후) 영화음악을 연상시키는 바 있었다. 짐머의 조커의 테마를 비롯한 액션 스코어의 경지를 넘볼 수는 없었지만, [더 배트맨] 의 테마와 엔딩에 흐르는 음악에서 배트맨의 (악인들에 대한) 협위와 집념을 천천히 고양되는 “뚜벅뚜벅 걸어오는 듯한” 곡조로 그려냄과 동시에, 브루스 웨인의 인간적이고 정신적인 성장과 트라우마의 극복을 묘사하는 장중하고도 슬픔이 서려 있는 어렌지먼트는 일면 단순하면서도 특출나고, 무엇보다 이 한편의 캐릭터설정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 기아키노의 지금까지의 스코어 중 최고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리하자면, [더 배트맨] 은 고전적인 필름느와르-갱스터 범죄영화의 멋들어진 업데이트일 뿐 아니라, 거기에 더해서 수퍼히어로물의 정도를 올곧게, 관객들의 “지루함” 을 마다하지 않고 나아가는 수작이다. 이하는 내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매트 리브스는 [혹성탈출] 시리즈때에서보다도 더 집요하고 철저하게, 대부분의 관객들은 찾아보지도 않을 뿐더러, 그 존재조차도 잘 모를 지도 모르는 고전 미국영화들을, 단순히 벤치마킹한 정도가 아니라 그 장르적 특질을 총체적으로 파악해서 그 자신의 작품에 반영하려고 노력했던 듯 하다. 결과적으로는 크리스 놀란의 [다크 나이트] 를 수퍼히어로 영화상 최고봉의 위치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할 만한 레벨의 “위대한 걸작”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반면에 [다크 나이트] 도 지니지 못했던 강점을 지닌 한편이라는 평가도 가능하다고 본다. 전자가 수퍼히어로 영화의 경계선을 의도적으로 허무러뜨리면서 모든 장르의 미국영화의 역사 자체와 맞장을 뜨는 그런 압도적인 한편이었다면, [더 배트맨] 은 내가 “수퍼히어로 영화의 귀감이란 모름지기 이것입니다” 라고 뭇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올바른 길을 걷는 실력자만이 얻을 수 있는 성찰의 흔적과 배려심이 배어있는 “훌륭한” 영화라고 규정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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