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분소설) 거품

2011.04.28 03:14

비밀의 청춘 조회 수:1845

 

 

  오, 고백하건대, 저에게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처럼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저는 깊은 절벽에 서있었습니다. 그곳은 그림처럼 선명한 초록색 풀이 뒤덮인 곳이었습니다. 멍하니 서있는 제게 파란 하늘과, 황토빛의 땅만이 보였습니다. 시커먼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이 머리에는 잡념조차 없었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이 제 옷 안으로 들어가, 제 옷이 풀럭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옷자락을 잡고 있었습니다. 피부에 닿는 차가움이 시렸습니다. 그 느낌은 현실의 것이었고, 저는 제가 달리는 말 위에 서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낙마해야만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검은 심연은 두렵지 않았습니다. 저는 주저없이 발을 내디뎠습니다. 허공에 내딛는 순간 두려움 없이 제 존재는 떨어졌습니다. 중력이라는 것은 그 어떤 힘보다 더 강력했습니다.  몸이 땅바닥에 닿는 순간 저는 부서졌습니다. 물거품이 되어, 흰 비누거품이 되어, 하늘에 날아오르는 비눗방울이 되었습니다. 고통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꿈이었습니다. 제가 꾸었던 모든 꿈들 중 가장 두렵고 처절한 꿈이었습니다. 일어나보니 등에 땀이 흥건했습니다. 그렇게 무서운 적은 제 평생에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불투명한 유리창으로 새하얀 달빛이 들어왔습니다. 저는 그 아래에 몸을 웅크리고 앉았습니다. 그 자세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두려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 자신의 본연적인 무엇인가를 누군가가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끔찍했습니다. 스스로가 거품이 되는 꿈을 상상하며 밤을 지새웠습니다.

 

 

  비가 새카맣게 내리는 어느 오전이었습니다. 햇빛이 없었습니다. 하수구의 냄새가 올라오는 한강이었습니다. 어두컴컴하게 흐르는 그 탁한 물들 사이에 빨간 무언가들이 아주 가끔 보이는, 그 진흙의 길을, 공사가 진행되는 그 길을 저는 걷고 있었습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것이 저를 매혹시켰습니다. 회색 트레이닝복은 헤졌습니다. 착용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로 매력적인 복장이었습니다.

 

 

  몇 시간을 걷다 지쳤습니다. 한 벤치에 앉으려 했지만 비 때문에 젖어있었기에 저는 그 옆에만 살짝 서있었습니다. 좌우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안개는 없었지만, 하늘은 다갈색이었습니다. 저 멀리 완전무장하신 한 중년남성이 매우 건강한 속도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경계했습니다. 저는 남자도 여자도 아닙니다. 그것이 중요한 존재는 단 한 번도 아니었기에, 그렇기에 그가 어떤 정체성으로 걸어오고 있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사람이 많은 대도시에서 인간은 사람을 경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없는 골목에서 인간은 사람을 경계합니다. 그것과 같은 맥락으로 저는 그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혐오스럽게도 끝이 매우 뾰족한, 큰 우산을 들고 오고 있었습니다. 그 우산은 정갈하게 묶여져 있었습니다. 저는 꽉 조여진 우산을 싫어합니다. 꼭 무슨 무기처럼, 칼처럼 보입니다. 그 중년남성은 칼을 앞뒤로 세차게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두려움에 그를 막연하게만 보고 있었습니다. 도망을 칠 수가 없었습니다. 순간 어떤 환상이 현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가 나를 그 우산의 뾰족한 부분으로 찌르라는 느낌이 저를 노렸습니다. 창자를 뚫린 제가 겁먹은 초식동물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비명을 질러봤자 거센 빗속에서 그 누가 제 소리나 듣기나 할까요?

 

 

  한강의 얕은 물가에 빠진 제 몸뚱아리는 그 물바닥에 자리잡을 것입니다. 아니, 그 전에 물방울이 될 겁니다. 그렇게 뽀글뽀글거릴 겁니다. 물고기들은 제가 남긴 방울 안의 산소를 뻐금뻐금 입에 머금겠죠. 다 살을 발라버릴 것들입니다.

 

 

  중년남성이 제 곁을 바람소리를 내며 지나갔습니다. 저는 몸을 바들바들 떨었습니다. 그는 저를 보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보이지 않았나 봅니다. 그건 새파랗게 익숙한 일입니다.

 

 

  어느새부터인가 저는 저란 존재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제 존재는 사라졌습니다.

 

 

  하찮게, 하얗게만 살아왔습니다. 남들이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노력할 때 저는 그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뒤에서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그게 제 죄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요새는 아무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노란 바보가 된 기분입니다. 돈을 벌어야만 뭘 입에 처넣을 수 있기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합니다. 저는 제 이름 석자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제 이름은 아주 중요한 물건입니다. 이름을 통해 제 존재를 다른 이들에게 알립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제 존재가 그렇게 재미있지 않다는 겁니다. 가진 것이 없습니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빛나지 못하는 인생입니다. 곧 그들은 저를 편하게 기억해버립니다. 3월의 알바생. 4월의 알바생. 일은 그냥저냥 하고 돈은 제때 받으며, 땜빵할 때도 잘 나옵니다. 그리고 기능적으로 잘 굴러가기 때문에 저는 쓸모있는 부품입니다.

 

 

  하지만 저는 부품으로서도 행복했습니다. 부품이지만 제 기능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름은 아니지만 다른 대체물로 여겨지기라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요새 손목에 무언가 문제가 생겼기에 저는 아무 일도 못하고 있습니다. 검은 빛의 방 안에서 틀어박혀 있습니다. 제 이름은 어디에서도 호명되지 않습니다. 저는 사회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은 저를 찾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는 긴 사정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들은 저를 이 세상에 음란의 결과로 던져놓고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형제자매들의 이야기 역시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은 나와 유전자만 비슷한 타인에 불과합니다. 다시 보면 살해하고 싶을 뿐입니다.

 

 

  다행히 모아둔 돈이 있어, 아직까지는 버틸 수 있습니다. 친구들, 친구들이란 건 나와 똑같은 패배자들일 뿐입니다. 아니, 그건 사회에 통용되는 언어로 거짓말입니다. 그들은 애인도 있고 삶도 있죠. 대학도 다니고, 취직도 하고. 알아서 잘 살고 번식도 잘 하고 사회에 잘 적응할 겁니다. 그들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남색의 양복을 입고 기능하고 있습니다. 다만 저만이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 삶의 고민은 외로움이 기저에 있지 않습니다. 애초에 실존의 문제입니다. 저는 이미 죽음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 저는 이런 고민을 공유하고자 인터넷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래도 조심스러운 성격이고, 인터넷을 보고 있노라면 저는 더 두렵습니다. 여기의 인간들이 나와 같은 인간인지도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다 나름의 삶을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열정적인 사람들도 제법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붉은 사람들을 보면 제 마음은 더 싸늘하게 굳어버립니다. 그 차가운 고체의 상태는 제 죽음을 더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무엇인가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제게는 그런 열의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회의 비극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비애조차 공감대 형성이 될 수 있는 무엇입니다. 저는 비극조차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제 부재만 경험합니다.

 

 

  만약 이 글마저 사라진다면 저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요. 아마 저는 제 존재를 증명하게 될 수단마저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한 부재자가 되겠지요. 제가 당장 사라진다 해도 모든 사람들은 저를 잊게 될 겁니다. 이곳에 있는 저야 애초에 인간이 아닌 하얀 바탕에 검은 글뭉치에 불과하니까요.

 

 

 

  오, 고백하건대, 저에게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제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저를 감옥처럼 구속하고 있습니다...허나 그 모든 것이 투명하여 그 누구도 확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 존재도, 감옥의 존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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