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변명

2011.05.16 23:06

이과나 조회 수:2338

눈을 떴다. 고요한 천장이 보인다. 천장의 무늬 벽지가 내 눈에 들어온다. 아직은 밤은 아닌가 보다. 꿈을 꿨지만 생각이 나지 않는다. 무슨 꿈을 꿨는지 가물가물 간질간질 느낌은 없어지지 않는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한 것이 감질맛이 난다. 난 어제 잠을 못잤다. 별 할 일 없이 인터넷의 사이버 공간 속에서 헤엄을 치며 돌아다녔다. 그리고 동틀 무렵이 되면 나의 츠보미와 함께 격렬한 손 운동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활동을 시작할 때 쯤 나는 긴 휴식에 들어간다.

시계를 보니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요함을 깨는 소리. 생선인지 계란인지 아니면 채소 일 수도 있는 트럭 판매상의 선전 소리이다. 멀리서 하지만 결코 작지 않는 소음이 내 잠을 방해한 것이다. 약간의 두통. 기억이 날 듯 말 듯한 꿈이 나와는 마주치지 않고 주변을 맴돌기만 한다. 그래서 두통.

오늘도 하루가 지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벌써 반나절이 지났음으로. 이 시간에 집에는 아무도 없다. 다들 자기 밥벌이를 하러 집을 나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밥벌이가 아니라도 집 밖을 나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나는 집.에.만 머무르고 방.에.만 쳐박혀 있다. 이게 산다고 말할 수 있을까? 숨은 쉬니까... 그게 산사람이겠지.

사람들은 모두 바쁘게 생활한다. 어수선한 아침의 소음. 밥을 먹고 샤워와 양치를 하고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선다. 그런 작고 미세한 소리 하나까지 귀에 들어온다. 당연히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방안에 틀어박혀서 웅크리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소리가 저절로 내 귀 안으로 빨려 들어왔기 때문에. 그래서 그게 싫어서 일부러 늦은 밤 아니 새벽이 다 되어 지쳐 잠을 잔다. 모든게 거꾸로.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것처럼.

잠에서 깨면 보통 저녁 무렵이다. 붉은 색으로 내 방이 물들고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멍하니 쳐다본다. 사람들은 다 집에 들어갔겠지. 나는 이제부터 하루를 시작한다. 그런 패턴이 깨진 것이다. 고요한 주택가를 덮치는 판매 트럭. 세상은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를 벗어나 아래 위로 양 옆으로 요동을 친다. 아~ 머리야.

날 듯 말 듯 한 꿈이 계속 나의 의식을 잡고 있다. 간질 간질. 계속 꿈에 대한 생각이 나를 지배한다. 밖에서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호객행위를 하는 트럭 스피커가 계속 쩌렁쩌렁 울리고 있다.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외쳐댄다. 난 살.아.있.어. 그리고 난 꼬로록. 배가 고프다. 나름대로 난 살.아.있.어. 몰래 방문을 열고 거실을 지나 부엌에서 뭔가 먹을 것을 찾아 먹어야겠다.

누구하고도 마주치기 싫다. 엄마는 집에 없었다. 다행이다. 부엌에서 먹을 만한 것을 찾았다. 과자나 빵부스러기면 좋을텐데.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먹을 수가 있으니까.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냉장고 안에는 김치 밖에 없다. 싱크대 밑에 하다못해 라면 부스러기라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뒤지도 또 뒤졌다. 하지만 라면도 없다. 부엌은 정말 깨끗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배가 고파서일까? 아니면 꿈 때문일까? 밖에는 소음이 계속된다. 싸고 맛있는... 싱싱한... 단돈 5000원에 드립니다. 스피커에서 울려펴지는 소리. 내 머리가 지끈 거린다. 깨끗하게 치워진 싱크대 대야에 물이 담겨져 있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식칼이 담겨져 있다. 인상을 찌푸린다. 순간 기시감이 든다. 아무도 없는 집. 칼. 그리고 호객행위를 하는 스피커. 나는 대야 안에 손을 담가 칼을 꺼낸다. 날이 서 있다. 이것도 기시감? 칼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본다. 꿈이 생각 날 듯 하고 아니 이미 있었던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게 기시감. 불안함이 나를 덮치려고 한다.

하지만 스피커 소리가 자자들고 세상은 다시 고요해진다. 평화로운 주택가로 돌아온 것이다. 기억이 날 것 같은 꿈은 현실로 이뤄지지 않는다. 피식. 나도 모르게 나오는 실소. 칼을 다시 대야 안에 내려 놓았다. 칼은 물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돌아서서 아무도 없는 거실을 본다. 그 때 사라진 줄 알았던 스피커 소리가 다시 등장을 한다. 나는 긴장할 수 밖에 없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 소음. 그리고 삶. 부들부들 내 안의 평화가 일순간에 깨진다. 나는 재빠르게 대야에 담갔던 칼을 꺼내 들었다. 흥분 이백퍼센트. 삶은 유지하는게 아니다. 깎여져 나가고 실망하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이 삶이고 인생이라고 나는 오래전부터 알아왔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바등바등 살려고 한다. 마치 영생을 보장받은 것처럼. 화가 솟구친다. 주체할 수 없다. 왜 나는 남이랑 틀린 걸까?

성큼성큼 거실을 지나 현관문에 다다랐다. 씩씩거리는 소리. 문고리를 잡았다. 이제 돌리고 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얼마 만에 맛보는 바깥공기인가~ 순간 방안에 틀어박혀 지낸 날 수를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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